모비 딕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5
허먼 멜빌 지음, 김정우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년을 한결같이 사랑했던 그가 떠났다.
첫사랑이었다.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도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았더니 제대하고 와서 군화를 거꾸로 신고 떠나갔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련이 남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은 서서히 분노로 변해갔다.
최고의 복수를 하기로 했다.
깨끗이 잊고 더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
분노가 이끄는 삶이었지만 나를 파멸로 이끌지는 않았다.
적당한 분노는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여기 또 다른 분노가 있다.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 '모비 딕'에 대한 분노로 자신은 물론 피쿼드 호와 선원들까지 파멸시킨 인물 아하브 선장.
무모한 도전 정신과 불굴의 의지만 비교해 보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과 다를 게 없는데, 노인의 삶은 숭고하고 선장의 삶은 끔찍하다.
둘 다 삶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냈는데 이토록 극명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어도 85일 째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그의 가슴엔 자신의 외로운 현실과 세상과 불운에 대한 원망이 없다.
다섯 살 때부터 노인의 조각배에 같이 탔던 소년 마놀린에 대한 사랑과 바다와 물새와 자신이 잡아야 할 물고기에게까지 애정이 넘친다.

심지어 고통으로 마비된 자신의 신체까지도 불평하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노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경이로움을 넘어 위대하다.


아하브 선장에게 바다는 전쟁터다.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모비 딕은 그 전쟁터에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함께 할 수 없는 적일 뿐이다.

그러나 모비 딕에게 자신의 팔 하나를 잃은 '새뮤얼 앤더비호'의 선장은 다르다.


"팔 하나 잃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잃은 팔을 되찾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남은 팔 하나마저 잃지는 않을 겁니다.  모비 딕과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129쪽)

"복수에는 위안이 없습니다.  더 큰 슬픔만이 기다릴 뿐이죠."(130쪽)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듯이 고래가 포경선에 대항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노인은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이고 선장은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이다.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가 한 인간은 물론 그의 휘하 선원들까지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산티아고 노인과 소년 마놀린처럼, 퀴퀘그와 이스마엘처럼 아하브 선장에게도 마음을 나눌 누군가 있었더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