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으되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역사의 역사』는 표지부터가 남달랐다.

대부분의 표지 맨 아랫 부분에는 출판사명이 위치하는데 이 책은 출판사명을 밀어내고 저자 이름 석 자가 책 제목과 같은 크기로 인쇄되어 있다.

유시민 작가의 브랜드 파워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본문 디자인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각 장마다 검정색 바탕의 내지에 소개하고 있는 역사서의 실물 사진을 담고 있다.

마치 유명 배우의 프로필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역사서가 있다.  어떤 책은 한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었지만 지금은 찾는 이가 별로 없고, 더러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독자가 가까이 두기도 한다.  독자가 원래 적었고 지금은 더 드물지만 '역사의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전문 역사 연구자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도 없지 않다.  『역사의 역사』는 그런 역사서와 그 책을 집필한 역사가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서술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가 무엇인지 또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보려는 의도는 없다.  위대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듣고 느껴봄으로써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도움될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을 뿐이다.(중략)

우리가 만날 역사가의 이름과 역사서의 제목을 미리 밝혀 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사마천의 『사기』,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 레오폴트 폰 랑케의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와 『강대 세력들 · 정치 대담 · 자서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에드워드 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오스발트 A.G.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아널드 J.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미 읽어 보았거나 읽지는 않았어도 그 존재는 알고 있을 만한 이 역사서들은 오랜 세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거나 지금 사로잡고 있으며, 다른 역사가들의 역사철학과 역사 서술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서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총 15 명의 역사가와 18 권의 역사서가 소개되어 있다.

나름 학창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 관련 책도 다수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내가 읽은 역사서는 역사서계의 로맨스 소설들이 아니었나 싶다.

많은 것이 그러하듯 역사도 인간 욕망의 표현이며 산물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욕망이 있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어떤 욕망 때문일까?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서일 것이다.(중략)

우리는 또한 현재를 이해하고 싶어서 역사를 읽는다.(중략)

우리는 또한 미래를 전망하고 싶어서 역사를 읽는다.('에필로그 서사의 힘'에서 발췌)

어릴 때는 역사가 재미있어서 읽었다.

지금은 인생을 의미있게 살고, 다음 세대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읽는다.

『역사의 역사』는 『청춘의 독서』의 역사서 버전이다.

두 책 모두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책의 바다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을 유시민 작가의 시각으로 해석해서 들려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자인 나는 단 두 권의 책만 읽고도 읽지도 않은 다양한 책들을 읽은 척 할 수 있는 덤을 얻는다.

그러나 영어 학습법을 다룬 책 100 권을 읽어도 영어 한 마디 하기 어려운 것처럼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을 내가 직접 읽지 않고는 『역사의 역사』와 『청춘의 독서』를 제대로 읽었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의 후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역사의 역사에 대한 르포'라고 말했다.  역사의 역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였던 역사가와 역사서, 그 책들이 다룬 역사의 사건, 그리고 그 역사가들이 살았던 시대에 관한 르포를 쓰는 과정에서 나 자신은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역사의 역사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를 알면, 시간이 지배하는 망각의 왕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온갖 덧없는 것들에 예전보다 덜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자신만의 색깔을 내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해졌기를!('에필로그 서사의 힘'에서 발췌)

『역사의 역사』를 통해 저자는 역사서를 이렇게 읽는구나 싶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은 소시민들에게 좌절감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독자에게 저자가 던진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아 의미있는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