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배경의 SF 영화 [Children of Men]을 보았던 이유는 순전히 배우 때문이었다.

크리스찬 베일

매즈 미켈슨

클리브 오웬

애정하는 배우들의 영화는 놓치지 않으려 하니까.

몇 년 전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불임이 표준이 된 세계, 마지막 남은 임산부와 태어난 아기라는 설정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줄거리를 슬렁슬렁 넘겼다.(그래서 지금도 줄거리 기억은 잘 안 난다. 오로지 주인공 클리브 오웬의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만 훔쳐 보았으니까.....) 특히, 영화 후반부의 이 장면.


아가를 본 어른 사람들이 경이롭고 감격에 찬 표정으로 길을 터주는 이 장면은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오늘 어린이병원에서 딱 저런 표정으로 아가들을 보고 있었다. 그 대형 병원은 어린이 전문 병원인지라 대기실 복도에 아가들이 바글거렸다. 말이 좋아 아가이지, 엄마 몸 속에서 하루 종일 잠자던 태아의 모습과 크게 차이 안나는 쬐그만 신생아들도 있었다. 그 복도에서 1시간 이상 머물렀는데, 나는 챙겨갔던 책을 아예 꺼내보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책 꺼낼 생각조차 안났다. 병원 복도에 들고 나는 아기들의 물결에 마음을 빼앗기고, 아기들에 자꾸 머무는 시선을 애써 감추느라. 특별한 지인 찬스가 아니라면 일상에서 아가 보기 힘들어진 저출산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어린 생명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자꾸 눈이 아가들에게 머물러서, 그 아가들의 부모님들이 싫어할까 조심해야 했다. 원체 아가를 너무도 좋아하지만, 내 시선은 틀림없이 끈적거렸으리라.

나도 모르게 '아! 미래를 위한 희망! 너희 작은 생명들....'이런 프로파겐다적 생각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가는 그냥 생명으로서 소중할 뿐인데, 나도 모르게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희망이라는 거국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딱, 영화 속 저 장면처럼......


이 영화는 2027년을 배경 삼는다. 근미래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가까운 내일이다. 과연 2027년 대한민국의 거리 풍경은 어떠할까? 우리는 아가들의 옹알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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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6 1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 영화를 90년대 나왔다면 리얼리~? 하며 봤을지도.ㅋ 27년이래 봤자 얼마 안 남았네요. 2000년이 됐을 때도 세상이 되게 많이 바뀌어 있을 줄 알았는데 밥 먹고 화장실 가고, 태어나고 죽고. 세상은 돌고 도는 것 뿐이죠. 저는 애들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좋더군요. 저도 나이 들었나 봅니다. ㅠ

얄라알라 2024-02-18 17:32   좋아요 3 | URL
2027년..
노스트라다무스 예언...때문에 21세기가 없는 줄 알았는데^^;;;

stella. K님 비오는 일요일 행복한 오후 보내시어요

레삭매냐 2024-02-16 1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지만 별무소용
이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들이 말한 막대한 예산이라는
말도 예산 전용으로 거짓말이라
는 걸 잘 알게 되었지만...

의료 교육 모두에서 소아과 기피,
한 때 최고의 직업이라고 불리던
교사가 불과 몇 년 사이에 기피
직이 되었다는 역설 등등 -

노키즈존이 점점 늘어나는 어느
나라의 서글픈 현실이네요.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미래의 단순 노동자로 보는 시선
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인구 절벽
은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현실
이 된 느낌입니다.

얄라알라 2024-02-18 17:33   좋아요 1 | URL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근심 그득한 표정으로
레삭매냐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합니다

이렇게 수도권에 건물을 몰아 짓는데 지방 소멸은 어떻할 것이며...암울해요

2024-02-20 0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02-22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가들 너무 이뻐요ㅎ 저도 귀여운 아가들을 보면 자꾸 눈이 가고 기분도 좋아진답니다ㅎㅎ

아기라는 말보다 아가라는 말 너무 정감가고 귀엽고 좋네요ㅎ

아가라는 말 검색해보니 정의 2, 3 번에 감탄사로 분류된 게 너무 웃기네요ㅎ 아기를 부를 때, 시부모가 젊은 며느리를 정답게 부르는 말이래요ㅎ

얄라알라 2024-02-23 14:49   좋아요 1 | URL
그 사전 매우 현실적이네요. 그런데 21세기에도 시어머니와 젊은 며느리 사이에 ˝아가˝라는 말이 쓰이나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ㅎㅎ우리도 이젠 미국처럼 차가운 호칭으로 부르게 될 날도 곧 올것 같아서요

근데 저는 이 글 올릴 때 저 멋진 배우님들 언급하는 댓글이 하나라도 달리지 않으까 했는데 얼굴에 빠지는 건 저만인가봐요 ㅎㅎ

고양이라디오 2024-02-23 16:02   좋아요 1 | URL
아ㅎㅎㅎ 저는 남자라서 이쁜 배우 아니면 관심이 없다는...ㅎ

크리스찬 베일은 저도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밤에 걷는 일이 잦은(카페 자주 순례하는) 나로서는 종종 동네에서 전구장식나무 사이를 지나기도 한다. 이 짧은 길을 지날 때마다 지인이 전해준 가쉽이 생각나는데, 그에 따르면 재작년 아파트 입주민 대표 위원회(?) 에서 겨우내 전구나무가 잡아먹는 전기세가 아깝다고 관행처럼 해오던 나무 장식을 생략했다고 한다. 그러자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입주민들이

"우리가 못 사는 사람들도 아닌데, 우아파트를 우중충하니 없어 보이게 한다(집값 떨어진다)"

"옆 단지 아파트들은 다 화려하게 조명 밝혀 놨는데 여기만 없어 보인다..."

"일 년 쓰는 관리비가 얼마인데 그깟 몇 백만 원 때문에 아파트 이미지 망치고 뭐냐?"


하며 거세게 반발했다고 한다. 2023년도 입주민 대표 위원회(?) 임원들이 대거 물갈이된 이면에 그 '조명나무장식'이 한 몫했다는 Gossip이었다. 사실이건, 부풀려진 이야기건, 나는 이 '전구장식 나무길'을 지날 때마다 왜 도시민은 불나방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지, 거기엔 어떤 상징성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나 역시 아파트에 산다. 밤 산책을 할 때마다 흥미로운 관찰을 하게 된다. 시공사도, 평형도 같은 아파트. 올려다볼 때 "거기에서 거기" 다 똑같아 보이는 네모 구조의 아파트이건만 조명의 화려함이 극적으로 다르다. 어느 집은 고급 백화점 매장 천장처럼 거실 천장을 화려하다 못해 정신 아득하게 밝혀 놓았다. 어느 집은 입주할 때 기본으로 탑재된 (유행 지난) 조명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그 다채로운 조명 전시회를 볼 때마다 '자본주의 사회, 이 아파트 공화국에서 자신을 변별하고픈 욕구가 온통 밤에는 조명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떤 욕망을 품고 있나, 내 집 거실 조명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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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4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4-02-14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님 아파트는 조명장식이 정말 백화점 수준인데요? 저는 이 조명들을 보면 빛공해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걱정이 되더라구요.
정말 어딜가도 돈냄새가 납니다.

꼬마요정 2024-02-14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집값 때문에 밝히는 거였군요... 저는 전기도 아깝다 생각하고 밤에 너무 밝아서 안 좋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군요. 저렇게 밝으면 잠 못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들도, 거기 사는 작은 생명들도 쉬지 못할 것 같구요.... 돈이 최고인 세상이로군요. 씁쓸합니다.

얄라알라 2024-02-18 17:36   좋아요 2 | URL
네,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인데...

해당 아파트에 사는 분께 전해 들었던 에피소드가 잇는데, 짜장면(?) 먹고 배달기사님 힘드실까봐 1층 공동현관 앞에 가져다 놨더니 ˝아파트 격 떨어진다˝고 관리소장님이....^^:;;;;방송을

2024-02-16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란 성인치고 영어 공부에 최소 십수 년 쏟지 않은 이 없으리. 영어 사교육이 망하지 않을 나라, 초등학생이 TOFEL과 GRE 영단어를 외우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에서 나 역시 시험을 위한 영어 공부에 올인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점을 바꾸었다. '보다 더 예의 바른 영어 표현, 보다 더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충실한 영어를 구사하기' 목표를 바꾸니 공부하는 영역도 달라져서 요새는 "사람in" 출판사의 "결정적" 시리즈를 자주 찾아본다. 그중에서도 연휴 기간에 [영어 표현의 결정적 뉘앙스]를 읽으며 'A-ha' 모멘트를 여러 번 경험했다. 예를 들어 대다수 한국인이 'fat'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는 'skinny'가 실은 '피골이 상접한'의 뉘앙스를 띤 단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휘 자체를 암기할 수는 있어도 그 이면의 문화적 상징성이나 복합적 뉘앙스까지 깨닫기는 참으로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책 읽으며 여러 번 했다.


마침 이런 에피소드를 겪었다. 소위 "오징어 & 꼴뚜기" 껀이다.


<a href='https://pngtree.com/freepng/dried-seafood--cuttlefish--seafood_6732742.html'>png image from pngtree.com/</a>

설 명절 만난 꼬마 중, 너스레도 잘 떨고 쾌활한 녀석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는지 졸졸 따라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한다. 다름 아닌

오징어! 오징어!

심지어 "말린 오징어" 실물을 들고 흔들며 내게 "오징어, 오징어!" 하며 따라다닌다. 꼬마가 그러는데도 '허허허!허허.......(야 이 꼬마야.....허허' 너그러운 반응이 나오지 않고 바로 부아가 치민다. 이것이야말로 속 좁은 밴댕이가 아닌가. 돌려 말한다.


꼬마야! 한국에서는 '오징어'가 사람 부를 땐 좋은 말이 아니란다..(허허허허허)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묘용 두상에서처럼 3D 입체 이목구비를 가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오징어"는 욕이 된다....라는 말을 꼬마에게 직접 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이미 눈빛에서 차가운 레이저가 뿜어나가는 것을 감지한 꼬마는 이번에는 다른 단어를 골랐다.

https://www.needpix.com/photo/749093/

꼴뚜기! 꼴뚜기!


아니! 그 많고도 많은 단어 중에도, 그 많고 많은 어류 중에 왜 저 아이는 하필 나를 꼴뚜기라 부르는가. 기분 나쁘게. 저 녀석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라는 옛말을 들어봤을 턱이 없지


꼬마가 장난하는 걸 알면서도, 점점 빈정이 상하는 나는 [영어 표현의 결정적 뉘앙스]를 다시 떠올린다. 꼬마가 내게 포식자 이미지 "상어"나 귀여운 "돌고래"라고 놀렸으면 덜 신경질 났을 것 같다. 뉘앙스는 어느 언어에서나 중요하다. 사회생활이 필요한 어른뿐 아니라, 세뱃돈을 기대해야 하는 꼬마에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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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2-11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이 GRE단어를? 정말요? 세상에나. 어려서부터 영어에 학을 떼게 할 일 있나요.
그 꼬마 맹랑하네요. 친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면 ‘으른‘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겠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4-02-11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걸 안 갚아주시고 그냥 두세요?ㅋㅋㅋ 저라면 오징어야! 하면 왜 해파리야? 왜 삼엽충아? 오징어랑 놀래? 하고 갚아주지요 ㅋㅋㅋ 부모가 듣고 있으면 더더욱 ㅋㅋ엄마 해파리한테 가 임마! 이러고 ㅋㅋ

transient-guest 2024-02-13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가 아는 단어가 별로 없었나요?? 근데 그 애는 왜 다른 사람을 그런 표현으로 부르는 건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아는 단어가 그런 것들만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더더욱.
 

요즘 세상에 1500원이면 우유 200cc 사면 끝이다. 컵라면도 1500원 넘는다. 그런데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무인카페가 있다. 커피 맛, 좋다. 게다가 점주분께서 매장 관리를 어찌나 철저하게 하시는지 "무인카페"라 적고 "18시간 유인 카페" 수준이다. 점주님께서 매장에 거의 항상 나와 계신다. 이 카페 단골 지인들의 정보를 종합해서 과장한 말이다.

오늘 딱 24시까지만 책 보다 올 생각에 21시 40여 분에 도착했는데, 음료를 뽑아들고 보니 10분 후 마감이다. 허망함. 차라리 23시까지 운영하는 카페에 갈걸...

동시에, "무無인 카페의 18시간 유有인 카페 화"를 선도하신 점주님께서도 쉬실 시간이 필요하니 22시 마감, 나쁘지 않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음료만 챙겨들고 카페를 나오려는데 웬 남자의 전신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출입문 쪽에도, 게시판 쪽에도, "05:46"라는 타임라인과 함께. 호기심이 동해 읽어보니 사진 속 남성은 무인카페에서 절도를 했고 점주님께서는 원만한 해결을 희망하셨다. 훔쳐 간 물건을 다시 되돌려 놓으면 법적 대응까지는 안 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무인 카페에서 도대체 훔쳐 갈게 뭐가 있지?

놀랍게도 도난당한 물품은 "메모리폼 방석 2개"

검색해 보니 개당 약 1만 원대 제품인 듯하다. 이름 모를 숱한 시민의 엉덩이를 보듬어주었던 그 방석을 몰래 가져가서 쓰면 기분이 찜찜하지 않을까? 남이 신던 양말이나 속옷을 훔쳐 입지 않듯 방석도 절도 품목으로 안 어울리는데? 다 큰 어른이 새벽녘 몰래 무인카페에서 방석을 훔쳐 가는 그 마음은 뭘까?


갑자기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난다. 한 반에 50여 명씩 꽉꽉 들어차 있던 그 시절 교실, 아침에 등교했더니 '수학의 정석' 2권 (기본 + 실력)이 온데 간데 없었다. "수1, 수2...기본 + 실력"을 쌓아놓으면 희대의 벽돌책으로 변신했던 [수학의 정석] 시리즈는 워낙 무거워서 다들 학교에 두고 다녔다. 내 책 뿐 아니라 반 친구들 책 전체가 싸그리 사라졌다. 옆 반, 그 옆 반 '수학의 정석'도 사라졌다. 어떤 도둑인지는 몰라도 아마 꽤 큰 자루(?? 트럭?)를 가져왔어야 백여 권의 책을 제대로 훔쳤을 것이다. 그런 걸 다 훔쳐 가나? 헌책방에 팔면 얼마나 받는다고 고3 수험생 책을 훔치나?

그러고 보니, 내가 봉사하는 도서관에서도 "분실"이라는 이름 하, 꾸준히 책이 사라진다. 아주 간혹이지만 막 나온 따끈따끈한 소설책 세트가 사라질 때도 있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녀.... 허허허..." 하며 넘어가는 분도 있지만, 나로서는 분개만 할 뿐 결코 용서가 안 된다.

별걸 다 훔쳐 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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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02-13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둑은 도둑이죠...액수나 종류에 상관 없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이고 싶다니,

(누가)..... (누구를) 죽이고 싶은 걸까?

[죽이고 싶은 아이]



"죽음"은 어린이 동화용으로는 암묵적 금기어이다. 그림책 천 여권을 읽으며 알게된 사실이다. 하물며 "죽이고 싶은"은 어린이책 제목으로 더더욱 어울리지 않다. 비록 주어를 생략했으나 "(자연사를 포괄한) 죽음dying"과 달리 "죽이고 싶은kill"은 주체의 살생의지와 폭력의 표적을 내포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죽이고 싶은 아이]를 피해왔다."재밌다"는 소문이 뜨거운데도 차갑게 외면해왔다.



하지만 어쩌다 읽었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과연 소문대로 재미있었다.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로. 왜? 이꽃님 작가가 "재미 극대화" 장치를다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살펴보자!

일단 첫 페이지부터 사람을 죽인다.




처음엔 다 자살인 줄 알았죠. 지주연이 죽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상상도 못 했지. 하여간 지주연 때문에 우리 학교가 망했다고 다 난리예요. 솔직이 학생이 죽어 나간 학교에 누가 다니고 싶겠어요.

[죽이고 싶은 아이] 8-9.



"살인/ 살해/ 죽음"이 요즘 판매부수 높은 청소년 소설 특징인가?(아! 암울할지어다!) 소설 2~3장 넘기는 사이에 6명(7명이었나?)을 칼부림과 묻지마 폭력으로 죽이는 [아몬드], 피비린내 진동하는 가족 살해 현장 묘사로 시작되는 이희영의 [소금아이]. 그리고 [죽이고 싶은 아이]도 다르지 않다. 첫 장부터 벽돌 가격으로 '죽임 당한' 아이와 '죽이고 싶었던' 아이를 등장시킨다. 첫 장면부터 작가는 노골적으로 용의자를 드러낸다. 죽은 아이의 유일했다는 친구. '정말 친구가 살인자인가? 여고생이 벽돌 산산조각 날 만큼 센 힘으로 친구 머리를 내려칠 수 있던가' 그게 궁금해서라도 독자는 책을 손에서 못 놓게 된다.


둘째, 이꽃님 작가는 중심 캐릭터 외에도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킨다. '죽은 아이'가 알바했던 편의점 사장님, 남자친구. '죽이고 싶어한 아이'의 학원동창, 변호사, 정신과 의사 등등. 덕분에 "Shorts" 빨리 넘겨보기인양 글 호흡이 짧고 진행이 빠르다. 게다가 작가는 실제 고등학생이 쓸만한 저속한 입말을 구사해서 현실감을 더했다. 사망 사건을 목격했다거나 관련 증언하는 다양한 주체가 나와서 저마다의 추측과 편견으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독자는 '누구를 미워해도 되는지,' '누구를 동정해야 하는지' '누가 죗값을 받아야하는지'를 자연스레 정하고 책 읽는 내내 그 도덕률에 따른다.

스포일링을 하자면.....(스포를 원하시지 않는 분은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

강 스 포!

피해자는 가난한데 밝고 선량하다(가난이 죄다).

가해자는 부자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지배성향 강하다. (돈으로 친구를 휘두른다)

이 죽음 혹은 살인사건을 세상은 "학교폭력, 주종관계" 심지어 "치정관계"로 몰고간다.

이러한 전형성과 달리 소설의 결말은 황당하다. 친구를 "죽이고 싶어했기에" "미움받고, 죗값 받아 마땅한" 소녀는 사실 범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아이를 '가해자, 살인자'로 만들고 싶어했고 아이는 세상의 시선에 고개를 수그려 수긍했다. 있지도 않은 죄를 자백했다.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를 '미워해도 되는 대상'으로 상정하고 책 읽던 독자야말로 진짜 가해자 아닌지? [죽이고 싶은 아이]는 결국 독자 자신도 '(상징적) 살해' 공모죄에서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미워해도 될' 이유를 붙여주고 더러운 이름을 주는 순간 그 대상을 정말 사회적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나자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다. "진화evolution"를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리뷰과제로 내주셨던 영화였다. 철없고 까막눈이었던 나는 당시 "라쇼몽"이 도대체 "인류진화사"와 뭔 관계이길래 내가 이 고생을 하나,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라쇼몽"이야말로 "인류진화사"를 얘기할 때 곁들이기 좋은 영화 맞다. 객관성의 신화에 대한 폭로이자 진실 만들기라는 공모의 범죄를 다루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죽이고 싶은 아이]를 통해 작가가 사회에 던지고 싶었던 문제의식과도 같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제목 그대로 음산한 작품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관계성 - "친구 대 친구", "제자 대 선생님", "부모 대 자녀" - 중 어디에서도 서로 보듬고 넉넉히 헤아리는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소위 뒤에서 욕하고 등치고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죽이고 싶은 아이]는 마음 기댈 데 없이 불안한 요즘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주는가? 삭막하고 스산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의식과 별개로 인간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을 느끼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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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8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쇼몽 포스터군요
ㅎㄷㄷ

중학교에서 추천했더니,,, 쌤들이 안된다고,,, 제목이 넘 폭력적이라고 그러시네요
요즘 학교가 넘 험악해져서;;

얄라알라 2024-02-08 23:14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그래도 그레이스님 그 중학교 선생님들께서는 깨여 계시는 거라 생각해요. 저는 [아몬드]가 초등 논술학원에 왜 그렇게 필독서로 올라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칼로 찌르고 발로 차고.. 그런 죽음으로 도입부가 시작되는 소설, 후반부에도 잔혹한 폭력이 등장하잖아요....초등학생들이 많이 읽더라고요. 중고등학생에게도 벅찰 것 같은데.

stella.K 2024-02-08 1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소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더니 정말 그러네요.
옛날엔 사랑이 꽃피는 나무 같은 청소년 드라마도 있었는데 어린이 드라마도 있고. 언제부턴가 그런 드라마에 대한 구분이 없어졌어요.
라쇼몽. 옛날 영화 가끔 보긴하는데 넘 오래된 건 잘 안 보게되더군요.

얄라알라 2024-02-08 23:16   좋아요 1 | URL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저는 그 말씀은 들어본 적 없는데 stella님 말씀 들으니 절로 공감이 됩니다.
몇 해전에 ˝이원수 동화작가˝님 작품 읽고 띵...머리가 띵해졌어요.

그 안에 담긴 세계, 정서가 너무나 요즘의 것과 달라서 띵해졌어요. 무형의 정서가 참으로 격하게 변해가나봅니다^^:;; 이걸 아쉬워하면 꼰대가 되는 걸까요?

반유행열반인 2024-02-08 2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쇼몽 대학 때 과제로 봤는데 다른 강의 ’역사와 영화‘였어요 ㅋㅋㅋ좋은 영화랑 원작 소설 많이 읽은 덕분에 아직 기억에 남는 수업… 남의 과(인문대 서양사학과) 교수님에 교양 과목이었던ㅋㅋㅋ(정작 전공 학점은 개판이고…)
청소년 소설 보면 이렇게 까지 자극적일 일인가 싶다가도 저 어릴 때도 한국문학사 명작이랍시고 보던 소설들 막 불지르고 낫부림하고 야하고… 그랬던 거 보면 아 애들도 그런 거 재밌겠구나 끄덕끄덕 하고 맙니다 ㅋㅋㅋ

얄라알라 2024-02-08 23:18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 서양사학과 과목^^ 저는 전공과목에서 보았어요. 저희 은근 통하는 게 많군요 ㅎㅎㅎ

열반인님 말씀도 맞아요. 저도 [테스] 중학교 때, [쿼바디스] 초딩 때 읽으며 그 야시러운 부분에 초집중해서 ㅎ

근데 제가 언급한 소설의 장면들은 피와 칼과 발길질과 죽음이 등장하니..저로서는 당황스럽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