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딸들 2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홍익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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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고통이 느슨해지면 죽은 듯이 잠에 빠지고, 그러다 새로운 통증의 파도가 밀려오면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중략)... 다시 통증이 찾아왔고, 나는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턱턱 막히는 숨을 참으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멀리서 순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얇고 노란 초승달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순록의 달(Reindeer Moon)'이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 2편 332~333쪽.

한국에서는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타이틀로 출판되어, 특히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많이 읽힌 소설의 클라이맥스 대목이다. 원제 『 Riendeer Moon 』에 등장한 초승달 아래, 홀로 아기를 낳는 주인공 야난의 고독과 생존본능은 처절하다 못해 비장하다. 저 독백을 조아리던 한 사람, 여성, 초산 중인 10대 소녀, 야난의 숨은 천천히 멈추었다. 그녀의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야난은 그렇게 죽어갔고, 아기는 태어났다.





벚꽃 만개한 4월의 환한 대낮,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눈물을 어찌 억제할까. 『세상의 모든 딸들』을 읽으며 콧날이 시큰해지다 뜨거운 눈물의 강둑이 몇 번이나 터지려는 걸 어찌 막으랴.

K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다. 그녀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 짧은 혼절과 진통 주기를 반복하면서 내내 "칼라하리 사막의 니사도, 나의 어머니도, 그의 어머니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렇게 생명을 낳았어."를 되뇌며 감격스러워했다고 한다. '진통이 어마어마하다던데 그런 낭만적 생각을? 에라!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꿀꺽 삼켰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야난이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아기를 낳는 그 장면에서 바로 K가 전해준 그 '짧은 잠과 진통의 반복' 대목이 등장했다. '소설이 아니었구나. 경외했던 것이구나. K는 야난, 아니 생명을 낳고 지켜온 이 땅의 그 모든 어머니들에게 감격했기에 진통을 감사해하며 견뎠구나.



『세상의 모든 딸들』은 20,000년전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매머드, 여우, 늑대, 호랑이, 순록, 하이에나가 등장하고 파카(기능성 방한 아웃도어가 아니라, Inuit언어에 등장하는 가죽옷의 이름이다)를 입은 수렵채집 부족들이 등장한다. 원서로는 393쪽, 번역판으로는700쪽에 이르며 무려 2만년 전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이 21세기 넷플리스 SF마냥 빠른 전개와 생동감 있는 묘사로 쓰여진 건 작가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인생이력과 관련 있다. 그녀는 부시맨(San族) 탐사대였던 아버지를 따라 20대에(1950~1956) 칼라하리 사막에서 지내며 그 곳 사람들과 자연물, 동물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인류학자로서 그녀는 이 경험에 기반해 『The Old Way』, 『The Harmless People』 등을 썼다. 부시맨이 따뜻한 지역의 수렵채집민이라면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묘사한 수렵채집민들은 혹독한 시베리아 추위를 견뎌내야하는 지역 사람들인데, 많은 부분 엘리자베스 토마스는 부시맨의 생활양식, 종교의례, 약혼과 결혼, 선물 교환의 규칙 등을 반영해서 상상해냈다.


예를 들어, 이 가계도만 보아도 약혼과 결혼으로서 집단의 연망이 어떻게 맺어지고 유지되는지 이것이 혹독한 환경에서의 생존에 어떤 잇점을 가져오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좁은 사회, 면대면 관계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상상한 20000년전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체면, 윗 어른에 대한 공경, 서열짓기보다는 공동체성, 공동육아, 연대 등의 정서와 가치가 발달했다. 주인공 야난은 이 사회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에 비한다면 더 충동적이고, 자기주장과 고집이 세고, 독립적이다.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때린 남편 티무에게 발끈해서 바로 이혼을 선언하고, 어린 여동생 메리와 함께 집단을 떠나 홀로 이동하는 길을 택한 에피소드가 야난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야난은 어쩌면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생존에의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고난과 마주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고 동생도 살아 남긴다.

엘리자베스 토마스는 페미니즘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1980년, 90년대에 학술서가 아닌 소설로서 여성의 존엄과 특히 어머니로서의 거룩함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나보다.



사람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는 거란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나처럼 이렇게 살았어. 호랑이를 따르는 까마귀처럼 남편을 따르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법이란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야난, 언젠가는 너도 어머니가 되겠지. 세상의 모든 딸들이 결국엔 이 세상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처럼......너는 티무의 아내로, 메리는 화이트 폭스의 아내로...



스마트폰이나 족보가 없던 20000년 전, 사람들은 피부 냄새와 음성으로 서로를 식별하고 이야기의 타래에 엮어 이름을 기억하고, 황홀경에 이르는 춤을 추어 천상의 존재와 소통하고 자신의 육체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마블에서 이야기하는 다중 유니버스가 아니어도, 이들은 원초적 생명력과 상상력의 힘으로 이 불가해한 우주의 거룩함을 만난다.『세상의 모든 딸들 』을 꼭 여성, 어머니의 시각에서만 읽으려하지 말고 인간의 위대함, 그 거룩한 생존력과 상상력의 측면에서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인류학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를 비단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란 육체성으로 살지만 나는, 너는, 우리는(심지어는 늑대와 순록까지도) 연결되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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