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 - 문화인류학자가 바라본 부모와 아이 사이
하라 히로코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한울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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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 아닌 이들에게 한국 무용을 가르치는 한국인,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던 미국인에게 직접 들었다. 전자는 외국인 학생들이 스승을 섬기는 걸 배움의 일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한탄, 후자는 한국인 사범이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상하관계라는 불쾌감을 토로했다. 공통분모는 '사제관계' 관념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옛 생각과 실천의 잔재가 다른 세계관과 충돌했다. (누군가에게서) 배우고, (누군가를) 가르침으로써 인간 문화가 전승된다고 배웠는데 『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를 쓴 일본인 인류학자 하라 히로코는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가르친다, 배운다'라는 행위가 각 문화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 사회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해어 인디언을 알게 되면서 나의 이런 생각을 바꿨습니다. '배운다'라는 인류 보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르친다, 배운다'라는 행위는 절대보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 서문 중

저자는 그레이트베어 호수 북서쪽에 사는 캐나다 원주민, 해어 인디언(Hare Indians) 공동체에서 현지조사를 했다. '특정 사회에서 문화가 세대를 넘어 전달되는 과정' 탐색을 위해,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배웠습니까? 누구에게 배웠습니까?"를 묻고 다녔다. 그런데, 의외였다. 일본인인 저자에게 지극히 익숙한 '사제관계' 관념, 누군가에게 배워서 안다는 개념 자체가 해어 인디언에게는 없다(고 저자는 판단했다). 대신 이들은 타인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필요한 기술을 터득하고 스스로 가르친다는 생각한다고 했다. 따라서 저자가 아무리 "누구에게 배웠니?" 혹은 "나에게 눈썰매 타는 법 가르쳐줄래?" 해봤자 대답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대에서 수학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동양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의 눈에 해어 인디언의 가족관계, 자아정체감, 인생관, 감정 표현양식, 공동체 생활 등등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방인의 시선으로 해어 인디언 양육법에서 문화적 의미를 읽어냈을 것이다. 이 책이 초판 된 1979년이라면 문화연구가가 양육법의 비교연구에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시기이다. 저자 스스로는 이 연구가 '문화전승'에 관한 것이라고 큰 울타리를 치지만, 콕 집어 말하면 양육법에 관한 문화적 이방인의 시선이 주가 아닌가 싶다.





『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



『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은 어린이, 어른, 선생님, 혹은 동화 작가...... 어떤 국적의 누가 읽어도 각자 입장에서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 하나씩은 만들게 해준다. 사회학이나 인류학이 다 그렇지만 이 책도 '익숙함을 낯설게 보기' 위해 물음표를 던진다. 2019년 한국 사회에 'SKY 캐슬'류 경쟁과, '자녀- 부모' 조합을 운명 공동체로 보는 시선을 비딱하게 되묻게 한다. 저자의 말을 빌어, 해어 인디언 아이들이 자유롭다면 가장 큰 이유는 뭘까?


해어 인디언 아이들이 의무교육에서 자유로워서도 대학수학능력평가같은 제도가 없어서도 아니다. 무엇보다 부모가 자식, 특히 자녀의 입시에서 서바이벌하는 능력을 가족의 미래를 가늠할 부표이자 부모노릇에 대한 성적표로 여겨서 자녀를 조련시키려는 태도가 해어 인디언 부모에게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가 불가에 가도 '네가 불 무서운 걸 직접 겪어서 위험이 뭔지 스스로 알아야지.'의 태도로 방관하고, 먹을 걸 발견하면 챙겼다 자식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제 입으로 바로 쏙쏙 집어 넣는 해어 인디언 성인의 태도는 2019년 한국사회의 잣대에서라면 '무심,' 혹은 '(자식) 방치'라는 죄명으로 힐난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그들 방식으로 아이를, 아니 인간을 존중하는 방법이다.

린이는 어려도 대접받고 존중받는다. 아니, '어려도'를 지우자. 나이로 밀고 나가지 않는다.


SKY캐슬폐인이 등장하는데 발맞추어 기자들도 소프트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대한민국 사교육 열풍이 얼마나 일그러졌는가라는 기조가 이미 (고발과 힐난으로) 정해진 기사 중에는, 사교육 입시학원 전문가라는 이가 등장해서 한국 부모들이 노후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자식 성적, 대학 서열화에 목매다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식이 좋은 대학 나와 안정된 직장 다녀야 노후에 자식에게 발목잡혀 빈곤하게 살지 않는다는 계산이 자녀를 조련(네 성적은 내운명, 네 대학 이름은 내 얼굴)하려는 태도 이면에 작용한다는 분석이었다. 이 대목에서 하라 히로코의 분석이 다시 생각났다. '자식-부모'를 공동운명체로 생각하고 자식을 다 참견하려고 들고 무엇을 배울지 어느 수위로 배울지도 부모가 다 결정하고 강요해서는 결코 해어 인디언 아이들처럼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 확장시켜나가는 능력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분석. 얇고 쉬운 책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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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로그인?" 영화 다 보고 나오니, 이제서야 홍보 포스터의 문구가 새롭게 다가오네요. "1월 3일" 개봉했군요. 저는 1월 10일에 보았으니, 개봉 후 일주일 차에 극장 찾은 셈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졸업했거나 기말 시험 끝난 중 고등학교 학생 단체 관람객이 가장 많더군요. 혹은 방학 맞은 유치원 꼬마들과 엄마의 조합도요.

 

관객 입장을 유도하는 "1월 3일 로그인문구야 말로 "주먹왕 랠프2"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는 듯 합니다. 1편에서는 게임 프로그램의 캐릭터들을 주인공 삼아, 게임랜드 안의 모험을 환상적으로 그렸다면 2편에서는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유동하는 무수한 캐릭터들을 살려냈습니다. 정말이지,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누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아니랠까봐, 디즈니의 지적재산들인 캐릭터들이 무료 찬조 출연도 무더기로 합니다. 공주들이 버글버글!

 

 

가상현실, 정보의 바다, 시공간을 초월해 교차하고 흐르고 차단되는 정보의 흐름을 어떻게 이런 멋진 상상력으로 풀어냈는지 감탄하며 보았지요. 성인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대사들도 많고, 만화 속에서 또 게임을 하는 액자형 구조로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게임 플레이어가 된 듯한 스릴도 느낄 수 있어요. 흥행몰이 할 만 하더라고요.

 

알고리즘도 의인화했어요. 스웩 넘치는 여성 캐릭터로.

인터넷 접속 처음 한, 랠프가 GOOGLE 빌딩을 보고, '고글이 엄청 많이 있나보다'하죠. 이 영화에 등장하는 기업 로고와 주요 용어들이 당장 10년 후에는 어떻게 다른 의미로 이해될까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요.

요새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심각하게 읽고 있는지라 『주먹왕 랠프2』를 정말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미래에의 불안이라는 현을 건드려서 진동이 계속 남았어요. 계속 진동하니 불편하네요.

 

 

1. 랠프와 바넬로피의 관계

'우정, 단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랠프가 '바넬로피'에게 보이는 소유욕, 집착이 불편하던 차에 영화 속에서도 이를 콕 집어 괴물로 형상화시켰더라고요. 영화 속에서는 '바넬로피'의 눈물 어린 호소에 괴물로 형상화된 그 비틀어진 의식(개인이건 집단의 것이건 혹은 어떤 흐름이건)의 막힌 매듭히 풀리는 것으로 해결되지만 현실 혹은 미래에 비슷한 상황에서 개인의 눈물어린 호소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겠지요. 일단 인간의 마음구조를 반영한 프로그램 스위치가 작동하면, 개인 차원에서의 바로잡음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괴멸이죠........

 

 

2.과도한 새로운 재미 추구는 현실 도피의 다른 모습

영화 속, 바넬로피는 반복되는 일상을 지긋지긋해하면서 모험하고파 안달입니다. 일상의 평온함에서 안정을 취하는 친구 랠프를 마음 속으로 무시하기도 하지요. 대놓고는 아니지만. 인간 아이라면 분명 미성년일 바넬로피는 인터넷 세계 게임 중에서도 'Slaughter Race'라는 폭력과 광기와 죽음이 범벅된 위험 집합체에 자석에 끌리듯 끌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세계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인양 선언하고 핑크캔디, 핑크 팽크 하던 sugar rush라는 유아기를 스스로 끝냅니다. 랠프는 그런 바넬로피의 결정을 존중해서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주고요. 바넬로피가 새로운 경험을 찾고, 자극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을 어린 아이들이 보면 모험으로 착각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과연 모험일까? 극단의 재미와 스릴만을 찾는, 반복되거나 예측가능한 일들을 '일상'이라 폄하하고 탈출하려는 모습은 '현실도피'와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요?

 

3. 무력한 인간들, 혹은 connected

"주먹왕 랠프2"에 현실세계의 인간이 몇 명이나 등장하나 복기해봅니다. 우선, 오락실 주인 할아버지, 게임 중독자 10대 2명, 그리고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게임기의 조종간을 망가뜨렸던 소녀와 그 동생 등. 등장하는 모든 인간이 온라인 접속이건 게임 접속이건 연결된 상태입니다.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인간들 외 어떤 인간이 이 만화에 등장했는지 다시 짚어봐도 안 떠오릅니다.

 

이런 저런 무서운 생각들은 요새 읽는 책 때문에 드는 것이겠죠? 뭐, 영화야. 디즈니가 만들었는데요 뭘, 최고로 잘 만들었죠? 디즈니는 10년 후에도, 15년 후에도 계속 있을 로고 아닙니까? 잘 만든 영화에 후추 치는 이야기 여기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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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손가락 풀기가 덜 된 탓이라 핑계를 댈까요? 저도 맞춤법 참 많이 틀리고, 글 쓸 때면 부산대 맞춤법 검사기에 손을 내밀거나 네이버 맞춤법 자동 검사 기능을 켜둡니다. 어느 정도의 오탈자는 되레 친밀함을 주는 실수라 칩시다. 그런데, 간혹 아니 기막힐 정도로 자주, 온라인 기사 읽다 보면 '이 기자님 대체 생각의 속도대로 타이핑해서 바로 기사 송고하셨나? 검토 단 한 번도 안 하고 전송 버튼 눌렀나?' 싶은 글들이 '나 좀 봐주소!'하며 손들고 있지요.

최근의 예로는, 심석희 선수를 '손석희'라 잘못 표기한 기사 이야기를 JTBC 뉴스에서 손석희 앵커가 직접 전한 걸 들 수 있습니다. 심석희 선수만 잘못 표기했냐고요? 가관입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조재범 코치는 어느덧 김기덕 감독과 나란히 추잡한 범죄를 폭로당해 이름이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진 '조재현' 배우와 이름이 바뀌어 기사화됩니다. 안 믿기시면 녹색창에 검색해보세요.

 

 

 

 

 

 

 

그제, 우연히 제목만 보고도 '읽고 싶어진' 책을 발견했습니다. 오호! 2015년에 나온 책을 여태 몰라보고 지나쳤구나 하며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모방 사회』, 교보문고에서 출간했습니다. 서문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물론 사회 분야"여야 하는데, "물론"을 "물로"로 잘못 썼습니다. "물론" 실수는 누구나 합니다. 서문부터 오타라니 편집자님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본문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예 대놓고 '나 편집 엉망이야'의 페이지가 연달아 나오더군요.

 

 

 

 

 

 

 

 

 출판사 작업은 전혀 모르지만, 요새 편집자분들이 개인적으로 책들을 많이 펴내시기에 편집 작업의 노고가 어떠할지 짐작은 합니다. 칼퇴근 개념 없이, 집에까지 일을 들고 와서 오탈자를 잡아내고 편집 일하기 일쑤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얇은 책의 서문, 그리고 첫 페이지, 그리고 본문 구석구석, 이런 식의 편집이면 독자는 배려가 아닌, 무시당한 기분이 듭니다. 다행히 친절하게도 편집자 성함과 연락처가 적혀 있어서 연락도 드렸지요. 혹시 '2쇄' 발행하실 때는 제가 찾아낸 오류들을 수정하고 발간해주셔서 다른 독자들 배려해주십사 하고 말씀드렸는데 이런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더 찍지 않습니다. 말씀 전달하겠습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다음에 **문고에서 발행한 책들은 오탈자 깔끔하게 잡아서 최소한 수준의 편집이 이뤄진 완성본으로 만나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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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1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오탈자가 있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오탈자를 찾아내서 알려줬는데도 출판사 측이 고치지 않으면 화가 나요. 그건 독자의 목소리를 무시한 태도입니다.

2019-01-14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은 생각
멜 트레고닝 지음 / 우리동네책공장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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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평범해 보이지 않아서 도서관 책 더미에서 저도 모르게 집어 왔습니다. "작은 생각," 원제는 "Small Things"라네요. 유난히 좋아하는 '글자 없는' 그림책이었기에, 읽으려 쌓아둔 활자 피라미드를 밀어 놓고 『작은생각』부터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첫 페이지 문구가 마음에 걸립니다. 보통 첫 페이지에는 작가가 사랑하는 이들을 언급하며 "누구누구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써 있는데, 그 반대입니다. 작가의 가족이 작가를 추모하는 듯한 인상의 문구를 새겨 넣었거든요. "이 책을 너에게 바친다. 이젠 네가 편히 쉬기를 바라며 너의 꿈은 이제 우리 모두의 꿈이 되었고,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 그 꿈을 이루었단다. 전보다 너를 더 많이 사랑하고, 네가 자랑스럽다."

 

 

『작은생각』을 끝까지 다 본 후,왠지 느낌이.......왔습니다. 작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메시지는 '널, 괴롭히는 생각들, 외롭고 버려졌고 남들과 다르다는 그 생각, 실은 다른 모든 사람도 한단다. 남들도 너만큼 외롭고 상처 많고 힘든데 감추며 사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듯 했거든요. 글자 없는 그림책이긴 했지만 메시지가 강렬했습니다. 책 덮은 후 Mel Tregonning이란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제 느낌이 맞았습니다. 멜은 오빠와 여동생을 두었어요. 가족들은 쾌활하고 재치 넘치던 멜이 불면증을 호소하며 이상 신호를 보낼 때, 같이 있어주었지만 이런 파국에 치다를지 정녕 꿈도 꾸지 않았지요. 멜의 여동생이 글을 올렸더군요. 누군가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절대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http://thingsmadefromletters.com/blog/2016/09/08/story-behind-small-things/

 

 

  

Mel Tregonning은 1983년에 태어났습니다. 상상하고 그리는 탁월한 재능 덕분에 이미 16세에 전국적 규모로 발행되는 잡지에 자신의 작품(만화)를 장기 연재했고, 관련 분야 수상을 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2014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이 Mel이 그린 초안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작은생각』입니다. 작품에서 과묵하고 표정 잃어가는 듯 보이는 소년은 우등생에서 외로운 왕따 피해자로 변해갑니다. 멜 트레고닝은 정신적 고통이 어떻게 신체화되는지, 서서히 생명 영역에 침범해 들어오는지를 무섭도록 공감되는 화풍으로 시각화했습니다. 몸에 금이 가고, 물질로서의 몸이 증발하여 자아가 상실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이의 마음을 몰라줍니다.

 



 『작은생각』에서, 아이는 그래도 이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해집니다. 내 고통에 침잠해서 타인의 정신세계를 보지 못했는데, 이 외로운 지구에서 외로운 지구인들은 저마다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보고 연민을 보내거든요. 물론 활자화된 것이 아니라, 제가 멜 트레고닝의 생각을 상상해본 데 지나지는 않지만......사실은, 마지막 페이지는 멜 트레고닝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그녀 가족의 의뢰로 Shaun Tan이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마음이 아파옵니다. 고통 속, 작가는 그런 회복의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았으니까요......


Shaun Tan의 블로그

http://thebirdking.blogspot.com/2016/09/mel-tregonnings-small-things.html 


이렇게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천재 작가가 더 이상 좋아하는 그림, 만화를 그릴 수 없다니 안타깝고 슬픕니다. 멜 트레고닝의 가족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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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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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수치 검색하듯, '알라딘'에도 짬 나면 접속합니다. 책 사려는 목적이라기보다, 책 덕후 알라디너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궁금해서 기웃거리는 게죠. 그렇게 알게 된 이름, '이언 매큐언.' 소외감을 느낄 만큼, 이미 많은 책덕후끼리 공유하는 스타 작가였더라고요. '책덕후들이 이토록 극찬하는 작가인데, 나도 입문해볼까?'하며 읽은 『솔라(Solar)』는 2010년대에 읽은 소설 중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언 매큐언'을 더 알고 싶어서, 불과 두세 달 만에 그의 작품 다섯 편을 찾아다녔네요. 『넛셀』의 상상력, 『첫사랑 마지막 의식』의 대담함, 『칠드런 액트』의 독창성, 다 흡족했지만 그중 재미 면에서 한 권을 꼽으라면 『 Solar 』를, '걸작' 소리가 절로 나는 한 권을 꼽으라면 『어톤먼트(Atonement)』를 고르겠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소설을 한자리에서 새벽 4시까지 읽었습니다.



소설책 뒷면에 세 줄로 『속죄』의 내용을 압축해놨던데, 옮겨 보겠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뜨거운 여름 오후,

소녀의 오해가 불러온 젊은 연인들의 비극,

그리고 이를 되돌리려는 한 소설가의 60년에 걸친 지난한 속죄

『속죄』 출판사 홍보 문구 중

얼핏 위 문구만 보면 한 캐릭터의 속죄, 치매로 잊거나 죽음으로써 밖에 면죄부 얻을 길 없는 죄책감이 주된 내용의 소설로 보입니다. 네, 그렇기도 합니다. 감수성이 유난히 예민하고 조숙한 소녀 브리오니가 '거짓말(이었다고 정작 자신은 생각하지 않으나), 거짓 증언'으로 친 언니의 남자친구를 강간범으로 몰아세운 후 평생 속죄하며 소설로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분투하는 줄거리가 소설의 한 축이니까요. 실제 '면죄부'는 자가 발행 수준으로밖에 이뤄질 수 없어요. 브리오니가 사죄해야 할 친언니와 그 연인 로비는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각각 패혈증과, 폭격으로 아주 오래전 사망했거든요. 언니는 20세기 중반에서는 드물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여학생이자 남자친구를 범죄자로 전락시킨 가족(정확히는 브리오니)와 의절하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로비는 가난한 가정부의 아들이었지만 의대 입학을 앞둔 수재였지만 브리오니의 증언으로 인생행로가 암흑 나락으로 곤두박질 칩니다. 소설의 2부에서는 로비가 그 참혹했던 전쟁터에서 연인과의 재회를 꿈꾸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펼쳐지지요. 이언 매큐언이 영국 왕립 전쟁박물관 문서관리소를 드나들며 1940년 당시 활동했던 군인과 간호사들의 서신, 일기, 회고록 등을 자료 삼아 쓴 만큼,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도적입니다. 『속죄』를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던케르트』를 다시 본다면, 사지에 몰려 있는 영국 군인들 속에서 로비를 찾아내게 될 것 같습니다.



"1999년"이라는 마지막 챕터, 즉 소설의 4부에서 독자는 브리오니가 결코 언니와 로비에게 사과하거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속죄하고자 60년간 소설을 써왔다지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까 가명 등 여러 소설적 장치를 쳐 놓은 까닭에 정작 쓴 사람 빼고, 누가 알까요? 사실은 로비가 강간범 아닙니다. 엉뚱한 사람 인생 망친 거예요. 라고 누가 알까요?

게다가 브리오니는 계속 강조합니다. 자신이 살아 생전 그 속죄의 소설을 출간할 수 없는 정치적인 이유들을. 강간 당한 당사자인 사촌 언니 롤라와, 그녀를 강간했지만 '로비'가 대신 누명을 썼기에 승승장구한 진짜 강간범은 놀랍게도 결혼해서 반평생 잘 살고 있거든요. 그것도 엄청난 부호로서. 까딱하면 소설가인 브리오니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수 있으니, 살아 생전 원고가 출간되지 않는답니다. 속죄일까요? 누구의 속죄가 필요한 걸까요?

『속죄』에는 주옥같은 문장과 마치 캐릭터의 머릿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치밀한 심리 묘사가 매 페이지마다 펼쳐지는데, 500페이지 두께라는 걸 잊고 필사하고 싶어지기 까지 했습니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세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가 속죄 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속죄』 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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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4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절판된 <위험한 이방인>
빼고는 국내에 나온 이언 매큐언의 책들
을 모두 섭렵했는데, 역시 대단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솔라>가 제일 재밌었습니다.
진지근엄해 보이는 작가 스타일과 달라서
그런가 봅니다.

2019-01-04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