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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미즈타니 오사무 지음, 김현희 옮김 / 에이지21 / 2005년 1월
평점 :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여 미루고 또 미루고 쓰지 말까 고민하기를, 30여일. 왜 그리 힘들었지.)
0.
언제라도 나를 울릴 수 있는 한마디,
가슴 깊이 우러나온, 나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다독이는 한마디,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얼마나 잘못을 했더라도,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그 한마디라면, 반성할 수 있어. 버텨낼 수 있어. 살아갈 수 있어.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을 얼마나 받고 살아갈까,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 자체를 짓밟히고 욕 먹고 태어나지 말아야 할 놈이라는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까.
1.
대략 내가 심란하기 시작한 것은 한달 전부터였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얘들아, 너희가 나쁜게 아니야> 첫머리는
그만 나를 울컥하게 했고, 주위 눈치를 보면서 흐를려는 눈물을 꾹꾹 밟느라 용을 써야만 했다.
저, 도둑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원조교제했어요... 괜찮아.
저, 친구 왕따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저, 본드 했어요... 괜찮아.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저, 죽으려고 손목 그은적 있어요.. 괜찮아.
저, 공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어제까지의 일은 전부 괜찮단다.
"죽어버리고 싶어요."
"죽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 프롤로그
나는 이 문구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넘치려 한다. 옮겨적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2.
(다들 그렇겠지만) 학교 폭력과 관련된 모든 뉴스가 나는 심란하다.
피해 학생이 자살했다는 뉴스도 그렇고, 가해 학생이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는 뉴스나 구속되었다는 뉴스, 전문가를 모시고 대책에 대해 논의한다던가 토론한다는 프로그램들, 정부 대책 촉구 뉴스나, 대책 발표 뉴스, 피해자 부모의 인터뷰, 선생님이 직무 유기로 구속되었다는 뉴스.
거기다 더욱 몸서리쳐지는 것은 "피해자 부모는 뭐했냐." "그런 아이들은 평생 세상에 못 나오게 해야 한다" "똑같이 당하도록 해줘야 한다" "가해자 부모와 가해자 아이의 신상을 공개해라" "피해자 어머니가 가해자 아이를 걱정하다니, 그런 위선이 어디있냐." "당할만하니 당했다" "방관자 역할을 한 선생님은 평생 선생 짓 못하게 해야 한다" 등의 의견 개진을 넘어서 자신의 증오를 쏟아붓는 듯이 보이는 네티즌 댓글들.
마치 세상은,
자신의 죄를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고픈 듯이
슬픈 현실의 죄를 몽땅 책임질 희생양를 찾으려고 안달난 듯이 보인다.
3.
현재 우리 사회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가 아닐까 싶어진다.
내 속의 공허감을 소멸시킬 수가 없는데, 자기 탓을 하고 싶지 않으니 외부의 문제로 돌리고 싶다. 솔직해질 자신이 없다. 그러니 서로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본다. 누군가 나를 비난한다면 나 역시 같은 강도로, 또는 더 심한 강도로 비난하고 싶다. 사이버 공간 또는 대중 매체는 숨기 좋은 공간이며, 그로 인해 명확한 대상 없는 분노 표출의 강도는 점점 심해진다.
운이 좋은 몇 퍼센트의 아이만이 태어날 때부터 행복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풍요롭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라나며, 웃음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몇 퍼센트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깨에 불행을 짊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행 때문에 괴로워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기적인 어른들에 의해서 불행을 강요받는다.
그런 아이들에게 '불량' 이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밤거리로 내몰려는 어른들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 103p
가해자는 실은 그 이전에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크고,
가해 학생에게 가해를 가한 사람은 어른이었을 가능성이 엄청나게 크다.
누군가는 말한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도둑질하면 안 되고 거짓말하면 안 되고 폭력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다 안다" 라고. 그럼 이것은 모르는가, 사랑으로 감싸야 하고, 타인에게 폭언을 해서는 안 되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그것은 어릴적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훌륭한 동화책들이 모두 그런 주제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인 가해자가 되지 않던가.
4.
나는 충분히 내가 가해자일 수 있는 현실도 인정한다. 또한 내 경험으로 볼 때,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망가지고 몹쓸 짓을 하며 폐인이 되는가도 함께 인정한다.
가해 학생의 잘못을 인정하지 말자는게 아니다. 죄에 대해서는 사회적 기준으로 판결을 받아야 하나, 시선은 따스하게 간직하고 한번 더 기회를 주자는 이야기이다. 물론 피해 학생이 가장 안타깝다. 슬프고 속상하다. 나 역시 딸아이가 피해자가 된다면 분노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부모는 충분히 그럴 것이다. 그렇다하여 우리 모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면, 이 악순환은 어찌 할 것인가. 나 자신 역시 반드시 어떤 잘못을 하지 않으리라고 또는 과거에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모르고 벌레를 밟아 죽였다 해도, 죄는 죄인것을.
잃어버린 애정이 누군가에 의해서 채워질 때까지는 누군가를 괴롭히는 짓도, 자해 행위도, 학교에 안 가고 집에만 박혀 있는 것도 그만두기는 어려운 법이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런 행동들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 133p
나는 가난이라는 둘레말고도 부모가 없다는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 나는 항상 누군가와의 만남을 고대했다. 그리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나는 항상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의 안색을 살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좋은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고독해졌다.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사람들은 나를 피했다. - 104p
바라지도 않은 고독을 강요받고, 그 고독을 견뎌내기 위한 방법을 모르는 것 뿐이다. - 107p
5.
지인 중 학교 상담 교사인 사람들이 있다.
전문 상담자께 상담 관련 지도 감독을 받는 시간에, 학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지도 감독하는 상담자가 갑자기 말하기를,
"학교는 상담 교사를 생활 지도 교사로 착각하는거 같아요.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상담 교사에게 보내죠. 그리고 잘못을 지적하고 생활 지도를 하기 바래요.
하지만 상담 교사가 할 일은 그게 아니예요. 그 아이가 왜 그런 폭력적이거나 부적응적인 행동을 했는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아이가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이해해주고, 다독여주며, 그럼에도 이런 행동을 하면 네 손해일 뿐이라는, 정말 그 아이 편을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주는거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두시간의 짧은 시간 내에 아이의 마음을 열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함께 달래고
그런 부적응적인 행동이 장기적으로 볼 때 얼마나 손해로 돌아올지 깨닫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정작 그 상황에서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해해주며 다독여야 하는 사람은
상담 교사가 아닌, 더욱 아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저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예요" 라고 우기던가, 어떻게든 뒷탈없이 무마하려고 뛰어다니거나, "너 왜 그랬어, 엄마 아빠가 다 해주고 이렇게 공부도 다 시키는데 왜 그랬어" 라고 펑펑 울면서 자기 타당화를 하는게 부모의 역할을 아닐거다. 하지만, 부모 역할을 맡은 사람들 역시 자신의 (현실적, 심리적) 아픔에 버거워 휘청대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러면... 이 모든게 누구 탓일까.
그러니 "학교 폭력" 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저 가슴 답답하고 심란할 수 밖에.
6.
나는 저자인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님의 독백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많은 어른들과 대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더러운 어른들이 너무 많다. 소중한 아이들을 낮의 세계에서 쫓아내는 어른들, 소중한 아이들을 어두운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어른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고 말만 하는 어른들... 나는 그런 어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아이들 편이 되어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멀어져간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듯이 그들 역시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성공보다 실패를 더 자주 경험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실패를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 213p
얼마 전,
초기 암에 걸렸다가 치료 중인 누군가를 보면서 내 자신이 너무 힘들었다.
슈퍼바이저 선생님이 "그것에서 생각나는 지인이 있나요?" 라고 하는데, 문득 재작년 내 친구가 암 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하던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너무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만두려고 마음 먹던 IT 관련 일이고 새로 학교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거절했었다. 그 친구가 초기 암이라고, 금방 완치된다고 말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내 양심을 다독였는데, 초기 암이라도 그 자체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내내 도움을 주지 못 한 친구를 무의식적으로 염두에 두었던거다. 나는 미안함에 그 친구에게 이후로 연락도 하지 못 했다. 슈퍼바이저 선생님이 "그 생각을 하면 어떤 감정이 드는데요." 라고 묻길래, 사정 설명을 하려 했더니 "감정만 이야기해 보세요..." 라고 하신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미안했고, 걱정되었고, 슬펐고, 두려웠고........... 음........ 창피했어요."
"..."
"그래요, 창피했어요. 친구는 암에 걸렸다는데, 도움을 주지 못 하고 도망가는 내가 창피했어요. 하지만 다시 IT 일을 하면 내가 죽을거 같았어요. 그때도 미치도록 괴롭고 내 자신이 창피했는데, 그래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라는데 내 눈에 눈물이 그렁해진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슈퍼바이저의 눈을 통해서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그날 나는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다.
그래,
우리는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서, 자신의 창피한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서,
"괜찮다" 라고 다독여줄 누군가가 필요한게 아닐까. 하지만 그게 안 되니
대신 분노와 증오를 터뜨리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