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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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막(鞏膜)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나는 공막을 보면서 그런 고민에 빠진다. 사전에서 보면 공막은 눈이 둥그런 형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눈을 감싸는 흰색의 질긴 섬유조직이라고 정의한다. 눈을 둥그런 형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눈을 보호해주는 조직이라니. 막상 상상을 해보니 공막의 인생과 닮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염나라의 재상 공막. 미궁의 주인 공막.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없이 많은 자객을 불러들이고 수없이 많은 거짓말과 수없이 많은 음모와 진실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남자. 그의 발 아래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를 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들 그가 죽으면 파리처럼 달라붙을 역겨운 인간들뿐이다. 공막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오직 고독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옆으로 오지 못하도록 살생을 하고 사람을 증오하고 의심하고 미워하며 제 생을 유지해간다.


나는 그의 '고독'에 집중했다. 공막을 죽이려고 한 황보정과 황보명도 아니고, 복수를 꿈꾸려고 책만 읽는 남자도 아니고, 얼굴이 없는 자객도 아니고 구덩이에 쥐에게 파먹힌 자객의 아내도 아니고 공막에게 빌붙어 사는 의붓아들도 아니고, 혀가 잘린 벙어리 이야기꾼 심연도 아닌, 오직 공막에게만 집중했다. 그의 말, 행동, 심리에 집중했다. 때론 어떤 이야기는 한 인물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오직 그 인물 하나를 위해 책을 읽게 된다. 나에게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이 그랬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더라도 나는 오직 공막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을 느꼈고 이미 공막에게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모두가 웃고 있다.  우는 자는 나 하나다. 모두가 한통속이다. 나는 고아야.

_119p


모두가 웃고 있다, 란 말보다 우는 자는 나 하나다, 란 말보다 모두가 한통속이다, 란 말보다 "나는 고아야"라는 말 한 마디에 마음이 휘청댄다. 나는 오직 이 대사 하나를 읽기 위해 공막을 읽어본 게 아닌가 싶었다. 공막이 제 스스로 "나는 고아야"라고 말하기를 기다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꾼이 신명나게 떠드는 와중에도 내가 집중하려고 무수히 애를 쓰는 중에 갑자기 숨겨있던 '고독'이 제 스스로 기지개를 켜면서 존재를 활짝 드러낸 것만 같았다. 어느 날, 갑작스레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공막이 자기 발을 베어무는 귀신에게 말을 걸어도, 자기를 음해하려는 자들을 죽이고, 괴롭히고 그래도 "나는 고아야"라는 말보다는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고독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온 까닭이 이 말 한 마디에 숨겨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책을 뜯어보았다.


왜, 그는, 고독을, 택했을까.

태고적부터 내려온 질문처럼 나는 고민에 빠져 있다. 그는 언제라도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지만 그는 미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미궁 밖에 자객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궁 밖에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미궁 밖은 '고독'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곳이다. 그는 그나마 덜 고독한 곳에서 자신의 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왜 살아가는가. 그건 자신만이 고독을 유일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는 이유, 그것은 희망차거나 낙천적이지 않아도 이유를 부여한다. 그가 피를 숱하게 묻히면서도 살아가는 이유, 오직 고독을 위해서였다. 고독을 위해 바치는 레퀴엠이라고나 해야 할까. 조금 유치한 표현이지만 고독 그 자체가 공막인 것처럼, 공막 그 자체가 고독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고독을 알리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고아야"와 비슷한 맥락이다. 미궁이라는 거대한, 들어올 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는 장소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혼자 숨어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어느 누구도 나갈 수 없어 오직 죽음으로만 바깥으로 나가는 곳. 공막은 오직 죽음으로만 자신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자 슬퍼졌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한없이 슬퍼졌다. "나는 고아야"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폭발하듯, 거대해졌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독을 달래기 위해, 고독을 위로하기 위해, 고독이 고독으로 존재하기 위해. 의붓아들이 심연에게 "이 미궁의 일을 이야기책으로 만들라"라고 한 부탁도 따지고 보면 고독을 위해서였다. 미궁에 제 스스로를 가둬버린 공막을 위한 것. 심연은 유일하게 공막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를 위해서.


사실 읽고 나서 이 글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고독한 자였다. 복수에 사로잡힌 정이나, 정을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명이나, 복수 그 자체를 책에서 찾는 남자나, 이야기를 쓰는 심연이나, 모두 고독한 자였다. 고독을 끊어내려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의붓아들이 심연과 밤이 되면 팥죽을 나눠먹는 것처럼. 공막은 실패했다. 세번째 첩이 사랑한 남자를 변방으로 몰아내면서부터, 관계 맺기를 실패했다. 어쩌면 그 실패가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관계를 나누지 않았을까. 난 오직 의붓아들만이 그를 받아들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공막처럼 되기를 소망한 남자였다. 공막처럼 고독해지길 바랐다. 단순히 의붓아들이라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그 뭔가 뜨거운 것을, 짙은 핏빛을 자아내는 팥죽처럼, 진득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고독이 되길 자처한 남자도 고독하지 않나.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쓰면서 고독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고 하지만 혼자인 것과 고독한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난 공막을 보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란 단어가 계속 생각이 났다. 바람이 고요하게 부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빛살 하나 들지 않는 컴컴한 어둠만이 가득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그는 원한다면 들판을 나갈 수도 있지만 그곳에 있길 자처한다. 고독을 바라는 자만이 오직 고독을 알 수 있으리란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런 고독을 갖고 싶어졌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죽고 나면 다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삶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누구든 자신만의 이야기,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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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3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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