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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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님이다. 차갑고 쓸쓸한 곳에서 성냥에 불을 붙이는 느낌. 작가님의 책들은 항상 그런 마음이 들었다. 백의 그림자에서 은교와 무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아무도 아닌을 처음 읽었을 때도, 책장을 덮고 나서 머릿속으로 책장 밖 이야기를 몇 번이나 상상해보았다. 그들이 그곳에선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길 바라면서.

 

디디의 우산은 유난히 더디게 읽혔던 소설이었다. 몇 번이나 멈추었다 숨을 몰아쉬며 답답하고 화난 감정을 애써 추슬러야 했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슬픔을 한없이 억눌러야 했다. 담담한 문체들이 d의 아픔에 공명하게 했고 dd의 빈자리를 느끼게 했으며 여기 이곳에 오기까지 지나왔던 숱한 시간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묻어둔 수많은 기억들이 그들의 시선을 통해 흘러 들어온다. 그저 그런 식으로 넘기려 했던 상식의 선에 대해, 그 많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불합리한 일상에 익숙해져 있는지에 대해, 그렇게 한때 내가 아팠던 일들과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누군가를 상처 준 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라는 말이 얼마나 밀접하게 혐오와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에 대해서도. 부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무지와 혐오를 숱하게 용인해왔던가.

 

여러 시간과 사건들이 다루어졌음에도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길이 전혀 혼란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담긴 그들의, 우리의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아프게 느껴질 뿐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해야 할 신문기사들이 젠더적 프레임을 가져다 대는 순간 얼마나 크게 무너지는지 는 말하고 있다. 사건의 심각성과 더불어 대의라는 명분 아래 사소한 문제로만 치부되었던 그 많던 균열들. 다들 겪어본 적이 있기에 말하지 않아도 없는 일이 될 수 없는그런 일들을, 그때의 마음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상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농담이 우리에게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에 맞서 제대로 소리내어보지 못한 우리의 망설임에 대해. 이 책의 두 번째 중단편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이런 우리의 사회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두 조금씩 더 건강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처럼 우리 사회가, 우리 자신이 조금씩 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젠 정말 그만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d를 읽고 나니 예전에 읽은 웃는 남자(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가 더 깊이 다가온다. 같은 이의 아픔에 대해 다른 물성으로 느껴보는 시간.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211p)

내가 왜 그랬지? 왜 내가 창피해야 했지? 어른 입장. 그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이 그냥 자라면 어느 순간 어른인가? 내가 어른이야? 누가 내게 그 기회를 줬어? 그런 생각들을 끝없이 하면서 나는 억울했던 것 같아. (238p)

김소리는 수년 동안 자신에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어땠을까? 그도 그렇게 했을까? 그에게도 그 질문이 있었을까? 바르고 옳게 행동했다는 생각에 그런 질문조차 없지는 않았을까? 그는 김소리에게 부끄러움을 가지라고 말했지만 당시에 김소리가 가진 것은 수치심이었고 경멸감이었지.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 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 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240~241p)

너희가 무슨 관계인가.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묻는 우리의 이웃은 그것이 정말 궁금할까? 그 ‘궁금함’의 앞과 뒤에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 그것은 생각일까? 예컨대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수경과 나는 우리의 대답으로 (우리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또는 우리 각자가 대면할 수 있는 위협을 생각하고,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고,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까지를 찰나에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질문한 이웃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까? 아니야 언니. 라고 김소리는 말했지.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262~263p)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赤裸裸.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 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모조리 끄집어내서 거기 뭐가 쌓였는지도 확인을 좀 해보고 먼지도 털어보고 곰팡이 끼거나 망가진 것은 닦거나 내다버리고 하면서 정리도 다시 해보고 새로운 질서로 쌓아보거나…… 하지를 않는 걸까 좀처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2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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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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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함께한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알고 있던 이들의 죽음, 그들의 부재가 가져다준 상실에 대해서도.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이 진짜 그들의 마지막이 아닐 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한 마지막을 나도 모르는 새 잊어버린 것인지도. 아마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그들이 내게 주고자 했던 소중한 순간들을 까마득히 잊은 건지도. 그러자 그동안 기시감으로만 느꼈던 순간들이 어쩌면 미시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이들은 각자의 추가시간 속에서 기억으로 남지 못할 하루하루를 보내왔을 것이다. 자신들의 미련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시간을 보내왔을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지 않을 그 시간 속에서 끝내 풀지 못할 자신들의 미련을 쓸쓸하게 인정해야 했을 때, 끝이 없는 외로움 속을 거닐어야 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 그중엔 아사쓰키처럼 무사히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 이도, 구로사키 씨처럼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여행을 떠난 이도, 히로오카 씨처럼 아들에 대한 믿음을 인생의 의미로 간직한 채 떠난 이도, 시노미야 유처럼 끝까지 추가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다 슬픈 결말을 맞은 이도, 아마노처럼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의 불행을 바라는 이도 그리고 하나모리처럼 이 세상이 누구에게나 행복한 곳이기를 바라며 마지막 소원을 남을 위해 쓰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어떤 식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떠나려 했을까. 마지막 순간 내가 가질 미련에 대해 생각해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함을 아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쿠라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잃기 전에 깨닫는 것. 잃었더라도 행복했음을 기억하는 것.

 

한 줌의 호의가 더해지면 분명 세상은 멋있어질 거라던 사쿠라의 믿음처럼, 누군가 행복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을 때 딱 한 송이 피어나는 행복의 꽃이 길가에 가득 피어나 세상이 더 환하고 멋있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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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나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한 365개의 물음
다나카 미치 지음, 배윤지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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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해를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흔하지 않은 질문들, 가볍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은 질문들.

 

책장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생각해본다. 그 중엔 간혹 누군가에게 들은 질문도 있고,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도 있지만, 새롭고 낯선 질문들도 많다. 나무도 잠을 자는지, 마음도 나이를 먹는지. 어떤 질문은 쉽게 답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또 어떤 질문은 오랜 시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동안 익히 봐왔던 세상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특이했던 건 페이지 수가 거꾸로 배치되어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질문에 답을 할 때마다 끝에서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앞에 나온 영어로 된 질문들이 뒷장엔 다시 한글로 적혀있어 그 오묘하고도 절묘한 배치가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평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았더라면 좀 더 천천히 넘겨보고 싶은 책이었다. 이미 모든 질문에 답을 끝낸 상태지만,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날들마다 그 날의 질문들을 다시금 읽어보고 답해볼 생각이다. 시간이 지난 후 나의 대답은 여전히 같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어떤 대답은 처음의 그것과 많이 달라져 있을 테니까.

 

하루를 시작할 때 보거나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똑같은 질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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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말
켄 로런스 지음, 이승열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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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횡단보도를 연달아 건너가는 멤버들의 모습과 함께 자연스레 귓가에 들려오는 노래 <Let It Be>. 으레 음악이 그렇듯 삶에 지친 이들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위안을 받고 힘을 얻는다. <존 레논의 말>은 비틀스와 그들의 음악에 얽힌 일화를 존 레논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수많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에는 그 당시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그의 생각, 음악을 향한 열정, 세계평화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난 연말에 도착한 이 책은 자연스레 이번 2019년 내가 처음으로 읽은 도서가 되었다. 덕분에 연초부터 새로 듣게 된 노래가 많다. 그렇게 존 레논이 미래의 우리에게 보낸 메시지를 하나씩 열어보며 비틀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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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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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의 시선을 따라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기차에서 만난 옆자리에 앉은 사람. 그녀는 누굴까. 이름조차 쉽게 알려주지 않는 그녀는 뭔가 수상해 보인다.

 

나미의 시선을 따라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사이비 교단에서 도망친 이후 누군가 계속 자신을 쫓아오는 것만 같고 스쳐지나가는 모두가 의심스럽다. 자꾸만 이유 없이 불안하고 온몸이 떨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나미는 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까.

 

독특한 구조의 소설이었다. 과거를 회상했다가 현재로 돌아왔다가 이야기 속에 빠져 있다가 상상의 나래에서 허우적댔다. 꿈을 꾸었다가 다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한다. 깨어난 현실 속에서도 꿈에 본 이들이 계속 보이는 것만 같다.

 

의식의 흐름대로 써지는 이야기에 조금은 난해하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앞으로 되돌아가 읽으며 흩어진 조각들을 조금씩 맞춰갔다.

 

주민등록번호도 2로 시작하고, 여권과 입국 확인서에도 F로 기록되는 그녀지만, 가슴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짧은 머리를 한 한솔은 남자처럼 보인다. 실제 한솔이 여권을 받으러 갔을 때 구청 직원들은 한솔이 여성이라 생각지 못하고 군필 여부만 여러 번 물어본다. 수술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녀는 수상한 사람이 되고 의심을 받고 정체를 밝히기를 요구받을 것이었다. 수술을 받은 후 그녀가 살아온 세상은 이런 곳이었다. 끊임없이 질문과 의심이 쏟아지는 곳. 그래서 그녀는 늘 혼란스럽다. 어딘가로 떠날 때, 여행을 계획할 때, 그녀에겐 새로운 곳에서의 설렘보다는 출국과 입국심사에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질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더 앞선다.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물론 매일 밤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는 생각이었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숨을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37p)

 

한솔은 고베에 잘 도착했을까. 친구 영우의 결혼식은 어떨까. 계속해서 모든 것이 좋았을까. 손에 든 수첩엔 또 어떤 말들이 써지게 될까. 그녀는 어떤 질문을 받고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나미는 오사카에 잘 도착했을까.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마주하게 될까.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의 나미는 몸도 마음도 교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곳에 계속 남아있는 아이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만난다면 나미와 그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어른이 되고 뭔가 빼먹은 얼굴이 돼서 만난다. 그건 못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으로 다음 장면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겠지. (26p)

 

책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어떤 함께하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되는데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이미 몸으로 변해버려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헤어짐은 있다.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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