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하와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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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며 부러울 정도로 멋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아픔을 겪는다. 이 가족 또한 겉은 화려하고 편안해 보여도 구성원 각자에게 아픔이 있다.

 

시선의 삶은 고통스럽게 시작했지만, 끝은 아름다웠다. 시선 같은 어른이 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살아있을 때도 이 생을 떠났을 때도 남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 시선에게 애방이 그러했듯, 우리에겐 시선의 존재가 그렇다. ‘시선이라는 강인하고도 단단한 사람으로부터 뿌리내린 이 가족 또한 앞으로의 역경을 잘 이겨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시작하는 장마다 실려 있던 시선의 인터뷰와 책의 인용문들이 아주 인상 깊었다. 실제로 이 분의 책이 남아있다면 한 권씩 한 권씩 아껴가며 읽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해선 책을 다 덮은 지금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 P9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 P21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 P23

고되고 고되면서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게 인간이란 생각을 했다. - P46

20세기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따라나섰던 수많은 길들은 정말 교육에 닿기도 했고, 위험한 나락에 닿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육과 기회를 원했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 P47

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어. - P61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 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72

그 모든 것은 전생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서 분절이 생기는 것일까? - P99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P111

탄력을 받아야 할 시기에 계속해서 꺾이면 안쪽의 무언가가 소멸할 수도 있다. - P117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 P126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 P178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182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 P208

한끗이란 것은 의외로 분실하기 쉽거나 유효기간이 있는 무엇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그 한끗이 자신의 안쪽에 있었으면 했다. 힘을 잃지 않았으면 했다. - P247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 P256

어떤 인과는 명확히 기억되어야 한다. - P303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 P304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 P305

언젠가부터 나는 애방처럼 말하고, 애방처럼 웃고, 애방처럼 싸웠다. 무엇보다 애방처럼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끝없이 불러모으고 연결시키고 판을 벌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내 친구의 유령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기 시작한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고 추운 겨울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나는 유령들을 입고 있었다. 유령들은 고운 목도리가 되어주었다. 때때로 투명한 격벽이 되어 눈물과 웃음이 섞이지 않게도 해주었다. 눈물은 눈물 따로, 웃음은 웃음 따로였다. 그리하여 어떤 것도 흐려지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남들이 나를 발가벗은 뻔뻔한 여자라 할 때에도 내가 개의치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 P307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모조리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 - P322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331

한국전쟁중에 국군의 손에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계시다. 그 죽음이 만약 적군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토록 오래 곱씹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제 그 작은할아버지보다 열다섯 살쯤 많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비극을 소설 속에서 민간인 학살로 바꾼 것은 현재 많은 민간인 학살지들이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발굴되지 않고 개발지역에 포함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 P333

소설을 쓰면 쓸수록 나는 열심히 숨기고, 독자분들은 가끔 내가 숨기지 않은 것도 발견해가시는 것 같다. 변함없이 즐거운 보물찾기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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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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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흩날리는 제주를 생각한다. 그 눈이 쌓이고 쌓여 세상이 적막에 잠기는 것을 바라본다. 책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애틋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느껴지기도 하고 쌓인 눈밭에 온몸이 묻힌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눈이 묻은 얼굴을 털어내던 소녀와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채 그들의 얼어있는 얼굴을 살피던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던 이들을 떠올린다. 감히 그들의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떠나간 이들과 뒤에 남겨진 이들의 아픔이 글을 읽는 내내 절절하게 느껴져 계속해서 아프고 서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른 악행, 그 잔인함과 비정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눈 내리는 제주를 보면 생각날 것이다.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얼어있던 얼굴들 위로 쌓이던 눈송이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때면 아미와 아마가 떠오를 것이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 인선이 말해준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잊지 않겠다.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기 때문에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택했지만, 어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이었다. - P12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 P15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악몽은 물론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인선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어머니만큼이나 인선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 P114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어떻게 악몽들이 나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눈꺼풀 안쪽으로 눈이 내렸을 뿐이다. 흩뿌리고 쌓이고 얼어붙었을 뿐이다. - P177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 P237

그 저녁부터 인선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섬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생의 모든 기점들을 함께했다. 잡지사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여의고 내가 텅 빈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에 그녀는 불쑥 문자를 남긴 뒤 찾아오곤 했다. 너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돼. 문을 열어줘. 그녀의 말대로 현관문을 열면, 찬바람과 담배 냄새가 훅 끼쳐오는 팔이 내 어깨를 안았다. - P242

호송차 여러 대에 올라타기 시작하는데 줄 뒤쪽에서 젊은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을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할 고문 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 P266

그 청년이 외삼촌이었을 확률이 0은 아니야.
인선이 속삭여 말한다.
지금 갱도에 있는 유해 삼천 구 중 어떤 것도 외삼촌일 수 있는 것처럼.
동의를 구하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추측할 수 있어, 그 사람이 외삼촌이었다면 어떻게든 이후에 섬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 P291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 P316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4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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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타오르다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미디어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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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의 멤버로 활동 중인 우에노 마사키의 팬이다. 사실 마사키를 향한 나의 사랑은 팬과 스타의 관계로만 한정 짓기엔 부족할지도 모른다.

 

힘들고 우울할 때 존재만으로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생전 처음 본 사람일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 그건 스타 마사키였다. 생애 첫 기억이자 힘들 때 자신을 숨 쉬게 만드는 사람. 그렇기에 마사키를 향한 나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희생적이다. 돈과 시간을 모두 마사키에게 쏟아 부어도 아깝지가 않다. 마사키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매 순간 그와 함께 살아간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방송을 챙겨보고 녹화하고 녹음하고 분석하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단지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마사키를 알아보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를 이해하는 것만이 그에게 가깝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나는 사회에 적응하는 게 어렵다. 남에게는 쉽게 느껴지는 당연한 일들이 내게는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런 나를 선생님도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의 아픔만 크게 느끼는 가족들 곁에서 나는 점점 더 메말라간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나는 인간 마사키에게 더 집착하게 된다. 그의 곁에서만 편히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만이 나를 움직이고 불러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생활에 큰 활력을 준다. 그렇기에 건강한 덕질은 삶에 있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단순한 덕질을 넘어서 자신을 모두 바치고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망가뜨린다. 그리고 그건 더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최애를 아프게 만들 수도 있다. 여기에서의 나는 마사키나 그의 주변에 괴롭힘을 가하는 악질적인 팬은 아니다. 누구보다 인간 마사키를 잘 알기에 그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사키가 연예계를 은퇴하게 되면서 나는 결국 무너진다. 마사키로 메운 삶의 구멍들이 다시 벌어지며 넘어지게 된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게만 느껴진다.

 

더 이상 인간이 된 마사키를 쫓아다닐 수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 바라보고 해석할 수 없다. 그동안 내가 모았던 모든 것들보다 현재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가 마사키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는 사실은 나를 아프게 한다.

 

척추가 사라진 내게 더 이상 이족보행은 어울리지 않는다. 방에 떨어진 면봉을 주우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나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모두 마무리된다.

 

독특한 제목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얇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살아가는 것만이 급급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척추를 잃고 살아간다. 이런 현실에서 척추가 되어줄 무언가를 다시 잃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하루를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여전히 씁쓸하고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카리는 대단해. 가니까 대단해.”

지금 학교 가니까 대단하다고 한 거?”

.”

살아가니까 대단하다고 들렸어, 순간.” (11p)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네버랜드에 가자. 코끝이 찡했다. 나를 위한 말 같았다. 공명한 목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년의 발그스름한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목에서도 같은 말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말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무게를 짊어지고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롭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누군가가 힘주어 말해준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떠안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작은 몸을 매개 삼아 아른거렸다. 나는 그와 연결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18p)

 

짧고 까만 체모 끝에 체액이 달린 꼴이 한심했다. 깎아도 뽑아도 또 자라는 것과 왜 영원히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랬다. (66p)

 

면봉을 주웠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뼈를 줍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내가 바닥에 어지른 면봉을 주웠다. 면봉을 다 주워도 하얗게 곰팡이가 핀 주먹밥을 주워야 하고 다 마신 콜라 페트병을 주워야 했지만, 앞으로의 길고 긴 여정이 보였다.

기어 다니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족보행은 맞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몸이 무겁다. 면봉을 주웠다. (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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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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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작가 루디안 스테파는 갑작스레 당 위원회의 소환을 받는다. 자신의 작품 때문에 부른 것일까 아니면 연인 미제나가 자신을 고발한 것일까. 하지만 당 위원회가 그를 부른 진짜 이유는 유배상태였던 여자 린다 B에 관한 것이었고, 그제야 그는 이곳에 오지 못한 친구를 대신하여 책에 사인을 받으러 왔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친구가 선생님의 책을 좋아한다며 책에 린다 B라고 써주길 바랐던 여인과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 612.’이라고 적었던 자신을. 군주제 시절의 옛 왕실 측근 집안이었던 린다 B는 며칠 전 자살을 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루디안 스테파의 헌사가 적힌 책과 그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 그녀의 일기만 남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대체 린다 B는 누구이며 왜 자살을 했을까. 그리고 그 자살에 루디안 스테파 자신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알바니아의 문학 대사라고 불리는 이스마일 카다레. 나는 이 책을 시작으로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볼 것 같다. 책의 흐름은 루디안 스테파의 입장에서 주로 서술되는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그의 원고와 신화 오르페우스 이야기, 꿈과 상상의 서술은 무척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이 책이 뛰어났던 건 루디안 스테파와 연인 미제나,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린다 B의 관계에 있다. 군주제 시절의 옛 왕실 측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벽지에 유배되어 있어야만 했던 린다. 그녀에겐 이동할 자유가 없었다. 더 큰 미래를 꿈꿀 자유도 없었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갈 자유도 없었다. 그녀에겐 차라리 암에 걸리는 것이 희망의 길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단 몇 개월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녀가 평생 바라던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친구, 미제나. 린다는 미제나와의 우정을 통해 숨을 쉬었고, 그녀를 통해 TV와 책으로만 접했던 바깥세상을 느껴본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려 한다. 미제나와 린다의 우정, 루디안 스테파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매개 소유, 자유에 대한 열망. 책을 읽는 내내 린다의 삶이 안타깝게 느껴져 마음이 먹먹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당이 정해놓은 현실적 제약에 묶여 자유를 빼앗겨버린 린다. 그녀는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 것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친구를 통해 꿈꿔왔던 사랑을 느끼려 한다.


그녀의 짧은 생에 대해 생각해본다. 죽은 린다의 시신을 꺼내 수도로 데려가던 가족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린다. 생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그곳에서 벗어나 그녀는 이제 자유로울까.



이 세기말에 암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방검사가 갑자기 궁극적인 기회가, 거의 구원의 기회가 되다니. 게다가 그걸로 부족한지 암이 없다는 결과가 거꾸로 죽음의 소식을, 모든 희망의 종말을 의미하다니. 여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며칠을, 단 몇 시간의 정상적인 삶을 사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희생마저 거부당했다. (…) 프롤레타리아독재가 강력할수록 자유는 크리라. 사방에 새겨진 말이었다. 공연장 벽에, 발코니에, 국가의 상징 아래. 이 글이 펄럭이는 붉은 깃발 아래 모두가 조금도 놀라지 않고 행진했다. 이 글귀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데, 거의 쌍둥이처럼 똑같은 문구를 읽고 어찌 아연실색하겠는가? 암이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주리라는 문구 말이다. - P160

고백하자면…… 난 이 일이 일어나길 바랐어…… 숨기지 않겠어. 그걸 상상하면 질투가 났지. 그러면서도, 완전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마음속으로 바랐어. 그 길이 단 한 번의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나의 무언가가…… 건너편에 다다를 기회 말이야. - P177

이해하겠니? 난 단 하루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할 거야. 린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 가니? 단 하루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말이야…… 어디에도 아무 희망을 걸지 못한다는 것…… 어디에 기대야 할지 몰라서 난 암에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어…… 암이 도와주길 기대했어…… 그런데 암마저도 날 거부했어…… (…) 모든 건 관점의 문제야…… 다시 말해 감옥에 구속된 죄수에게는 나처럼 거주지를 지정당한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일 테지. 다시 말해 별것도 아닌 일로 앓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자기 작품에 가해진 검열에 대해 투덜거리는 루디안에게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 이런 식이지. 그래, 이건 우리가 이미 얘기한 적 있는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문제야. 어쨌든 우리 이해를 벗어나는 무한한 공간과 시간처럼 말이야. - P183

미제나는 나중에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이 순간을 곰곰이 생각했지만 그 행위를 무엇이라 규정해내지 못했다. 그것은 동성애보다 훨씬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었다. 훨씬 덜 알려졌고, 분명히 훨씬 더 금지된 것이었다. 그것엔 이름도 없었다. 그것뿐 아니라 두 여자 사이에서 벌어진 그 어떤 일도 뭐라고 명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은 더더욱. 두 사람은 가까운 만큼 멀었다. 서로…… 어루만지며…… 매개애무를 행하는 두 여자. 두 여자 사이에는 영혼 없고 무심한, 얼어붙은 벌판이 있었다. - P188

당신 있는 곳까지 오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순결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아니, 불가능했어요. 철조망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개들이 엄청나게 많고, 무척이나 추웠어요. 그는 외칠 뻔했다. 당신, 나를 이해 못하는군요. 그건 망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릴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직 그녀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모든 것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옆에선 모든 게 죄인이었다. 이 나라, 이 시대, 그를 포함해서 다른 모든 것이. - P212

지상에 있는 그들보다 땅속의 딸은 이중으로, 국가와 죽음으로부터 이중으로 속박되고 고통받은 터였다. 그들에겐 죽음의 사슬이 없으니 적어도 더 무거운 국가의 족쇄는 벗을 수 있을 것이었다. (…) 모터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 길은 조금씩 오르막으로 변했다. 하지만 극심한 요동과 시커먼 연기를 그러려니 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는 힘겹게 나아갔고, 그들은, 남편과 아내는 다시 양쪽을 살폈는데 이번에는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배구역이 끝나고 그들이 천천히 눈 먼 땅의 뱃속으로 새로 발을 들여놓은 듯한 지점에서 문득 땅이 딸의 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똑같이 받았다고, 나중에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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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경로 -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강희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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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자연스레 스마트폰으로 길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맵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거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교통수단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화면에 띄워진 많은 경로 중 최단경로를 선택하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부분의 인생에서 우리가 익히 해왔던 일이다. 중간에 무엇이 있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았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그대로 뛰어가게 되는 거리, 두 점이 이어지는 직선, 이 점에서 저 점까지 이어지는 가장 빠른 방법. 하지만 강희영 작가의 장편소설 <최단경로>는 이런 우리들의 익숙한 선택에 의문을 던지며 빠른 길만이 정답이 아님을, 오히려 최단경로만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외면해왔을지 모를 책임과 공감의 연대를 묵직하게 느끼게 만든다.

 

전임자 진혁이 혜서에게 남긴 건 그의 자리와 그가 진행하던 프로그램만이 아니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는 로그아웃이 안 된 그의 노트북과 오류인지 모르지만 뭔지 모를 강한 의도성이 느껴지는 트랙 사이에 숨겨진 소리. 그렇게 진혁이 남긴 의문의 소리를 시작으로 혜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애영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혜서가 진혁의 동선을 따라 미행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이 그곳에 가려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던 것처럼 지켜보는 나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진혁과 특별한 사이도 아닌 그녀가 그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파편에 얽매어 그토록 원하던 프로그램도 뒤로한 채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오른다는 설정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끌림에 동행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숨겨진 이야기에 자그마한 호기심이 일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의 행동이 모두 정당화되진 않는다는 것을. 애영과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지 못했던 진혁의 행동이 그러했고, 가브리엘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적 인사가 그러했으며, 애영의 아이와 엄마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가 그러했다. 그로 인한 죄책감과 죄의식은 목소리로 남아 삶의 패턴 속으로 숨어들었고, 의식하지 않으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그곳에서 이들의 마음은 조용히 묻혀간다.

 

수많은 트랙 사이에 아이 목소리를 숨겨놓으면서 진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이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뒤늦은 인사는. 이 주에 한 번씩 찾아와 아이의 애착인형이던 곰 인형을 횡단보도에 묶어둬야 했던 애영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옹알이처럼 다신 낼 수 없는 아득한 소리를 끝없이 그리워해야 했던 그 마음은. 안락사를 계획하면서도 아이에게 제대로 설명해주기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의 일상은 여전히 나를 먹먹하게 하고 아프게 만든다.

 

지난번에 두고 간 곰 인형이 사라져 있었다. 누가 그랬을까. 아이였으면. (113p)

 

아이에게 말해줘야 하거든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완전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설명해줘야 해요, 아이한테는. 그러려면 배우는 수밖에 없어요. 내 아이는 어쩌면 손을 들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자기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됐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이죠. 나한테 미안해할지도 몰라요. 또 우리 엄마는요,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는 배우고 죽어서 아이랑 엄마한테 얘기해줘야 해요. 그런 게 아니라고.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내 아이는 그걸 모른단 말이에요.”

다 배운 뒤에도 모르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요?”

그럼 그렇게 말해야죠. 엄마가 노력했다고. 그런데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요. 우리 엄마한테도.” (123p)

 

애영은 헤드폰을 쓰고 파일을 재생했다. 그 고요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잠든 아이의 맑은 숨소리를 듣던 무수한 밤의 공기가 귓속을 채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159p)

 

혜서의 미행으로 시작된 이 여행은 여러 사람의 시선에서 따라가게 된다. 혜서 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어린 애영과 진혁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가 또 나이든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어느새 마이레의 시선으로, 또 한편으론 한국에 남겨진 민주의 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가선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삶은 왠지 모를 슬픔과 아픔을 담고 있다. 한없이 외로워지고 끝없이 갑갑해지는 순간이다. 최단경로로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최적의 경로로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힘겹게만 느껴진다.

 

진혁의 무책임한 선택과 기계의 치명적인 오류로 상처받은 애영이지만, 그런 애영의 상처를 보듬어준 것은 곁에 있는 마이레와 우연히 만나게 된 혜서였다. 생판 몰랐던 그들이 그녀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어루만져주는 부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상처 주는 것 또한 곁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위로와 치유도 그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그러니 함께 있으라고.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여기에 적힌 이야기보다 바깥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한국에 남겨진 민주의 새로운 일상에 관심이 갔고, 여기 적히지 않은 진혁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아니면 이곳에서는 닿지 않는 어딘가로 이미 멀리 떠나 버렸을까. 그가 한 선택들과 그가 느낀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동안 최단경로만을 택해오면서 우린 실상 많은 것들을 놓치며 지나쳐 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 함께 한다는 것,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상대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한 채 지나쳐 왔는지도, 그렇게 서로를 여러 번 놓쳐왔는지도 모른다. ‘미행동행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의 끝이 외롭지 않은 건 결국 서로가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애영의 마지막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어디 가지 말아요.”

 

피드백에 써놓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실 애영씨의 코드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만약에 한 가지 경로를 택해야 한다면 분명 그 길로 가볼 거예요. 물론 평가기준과는 조금 다른 얘기죠.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달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군요. 조금 돌아가긴 해도 지루하진 않을 것 같아요. , 맵을 보고 길을 찾다보면 오히려 계속 두리번거리게 되잖아요. 어디서 꺾나, 잘 가고 있나, 혹시 지나친 건 아닌가, 그러면서 말이죠. 그런데 애영씨 코드대로 경로를 설정하면 낯선 길이라도 좀 마음 편하게 즐기면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순하잖아요. 가까운 운하를 찾아서 물길을 쭉 따라간다. 재미있었어요.”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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