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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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전한 코끼리 고아원에서 수많은 코끼리들과 살아온 노든이 훌륭한 코뿔소가 되기 위해 낯선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동물친구들과 여러 모습의 인간들은 그에게 사랑과 행복, 고난과 시련, 인내와 극복을 겪게 만든다.

 

귀여워서 피식 웃으며 책장을 넘길 때도 있었지만 금세 울컥하는 감정에 책장을 멈추고 심호흡을 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노든과 노든의 가족, 앙가부, 치쿠와 윔보, 아기 펭귄은 모두 우리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현재에는 그들 자신의 노력과 그들을 지켜준 주변 이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사랑의 힘이 끈끈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계속해서 이어지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위기에 절망하다가도 다시금 일어나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삶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 우리가 걸어가는 길과 자연에서 그들이 걷는 길은 그렇게 닮아있다.

 

마지막으로 아기 펭귄이 가족인 노든의 곁을 떠나 새로운 펭귄 친구들과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기 펭귄의 말처럼 우리는 언젠가 노든을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며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갈 것이다. 각자의 긴긴밤을 겪으면서.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 P12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 P15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 P16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 P18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었다. 노든이 코끼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들이 있어야만 했다. 다른 코뿔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노든을 코뿔소답게 만들었다. - P22

그날 밤,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 P57

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 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 P94

"다른 펭귄들도 노든처럼 나를 알아봐 줄까요?"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 P99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 P115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P124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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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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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는 히즈라인 안줌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담, 비플랍, 나가, 틸로, 무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님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와 장례식장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는 안줌과 아버지가 죽던 날을 잊지 못하고 복수심으로 살아왔던 사담, 자신의 현실과 사랑하는 상대 틸로 사이에서 계속해서 방황했던 비플랍과 나가, ‘안식처로만 살아오다 비로소 안식을 느끼게 된 틸로, 수많은 상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했던 무사. 이 외에도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잠깐의 등장일지어도 그 존재감이 상당하다. 끔찍한 고문 끝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중화장실에서 죽어갔던 남자, 자신만의 저항 행위로 고통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소년과 굴레즈 대장으로 죽어간 굴카크, 자신의 총으로 살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기의 생모 레바티, 심지어 굴카크의 주머니에서 꺼내져 물속으로 던져졌던 새끼 고양이 한 마리까지. 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이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절망이 동이 나지 않는 세상, 고가도로 위와 밑이 다른 세상, 차별과 폭력이 잔존하는 세상, 아자디(‘자유혹은 독립’)를 위해 싸우는 세상, 그래서 두 번 죽어야 하는 세상, 죽은 자만이 자유로운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이룬 안줌과 사랑으로 마음이 평온해진 사담, 비로소 안식을 느끼게 된 틸로처럼 결국엔 모든 게 다 괜찮아지길 바라고 있다. 미스 우다야 제빈이 왔다는 말로 끝맺는 이 소설은 그런 희망을 계속해서 품고 있다. 



독수리들은 디클로페낙 중독으로 죽었다. 소의 통증 완화와 우유 생산량 증가를 위한 근육이완제로 사용되는 소 아스피린 디클로페낙은 흰등독수리들에게 신경가스처럼 작용한다―작용했다. 화학적으로 근육이 이완된 젖소나 물소가 죽으면 유독한 독수리 미끼가 된다. 소들이 더 성능 좋은 낙농 기계가 되고, 도시가 아이스크림과 버터스카치 크런치와 땅콩 크림 초코바와 초콜릿칩을 더 많이 먹고 망고 밀크셰이크를 더 많이 마시는 동안, 독수리들은 피곤해서 깨어 있을 수가 없다는 듯 모가지를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부리에서 침이 은구슬처럼 뚝뚝 떨어졌고, 독수리들은 한 마리씩 죽어서 나뭇가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정다운 옛 새들의 소멸을 알아챈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고대해야 할 다른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 P11

그녀는 ‘필요’가 상당량의 잔혹함을 수용할 수 있는 창고임을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 P17

우리의 세계에서 정상성은 삶은 달걀과 약간 비슷하다. 그 단조로운 껍질 속 중심부에 지독한 폭력성을 지닌 노른자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계속 공존하기 위한―계속 함께 살면서 서로를 참아내고, 그러다 이따금 서로를 살해하기 위한―규칙들을 정하는 건, 우리가 그 폭력성에 대해 늘 느끼는 불안감, 그것이 과거에 행한 일들에 대한 기억, 그것이 미래에 발현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중심부가 흔들리지 않는 한, 노른자가 흘러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장기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이 좋다. - P201

그건 카슈미르의 함성이었다. 정치적 요구 이상의 것이었다. 찬가이자 성가였고, 기도였다. 아이러니한 건 카슈미르인 네 명을 한방에 넣어놓고 아자디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명시하라고, 그 이념적, 지리적 윤곽을 정확히 그려보라고 하면 결국 그들이 서로의 목을 따는 상황이―그때든 지금이든―연출되리란 점이다. 그러나 그걸 불명료함이라고 결론 내린다면 잘못이 될 터였다. 그들의 문제는 불명료함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건 현대 지정학의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끔찍한 명료함에 가까웠다. 분쟁의 각 진영에 속한 모든 주역들은, 특히 우리는, 이 단층선을 무자비하게 이용했다. 이 단층선은 완벽한 전쟁―결코 승리하거나 패할 수 없는 전쟁, 끝이 없는 전쟁―에 제격이었다. - P241

인도군이 방글라데시를 해방시켰을 때, 선량하신 카슈미르인들은 그걸 ‘다카(방글라데시의 수도)의 함락’이라고 불렀다―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파키스탄 때문에 고통받는 발루치족은 카슈미르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시켜준 방글라데시인들은 힌두교도를 박해한다. 선량하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혁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 P259

그녀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머리칼과 손발톱이 계속 자라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별들이 죽은 후에도 오랜 시간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오는 별빛처럼. 도시들처럼. 도시들은 자신이 약탈한 행성이 주변에서 죽어가는 동안 삶이라는 환상을 가장하며 활기차게 비등한다. - P286

나가는 틸로가 그도, 그녀도 어찌해볼 수 없는 조류를 따라 부유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틸로의 동요가, 그녀가 강박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위험하게 도시를 배회하는 것이 정신에 이상이 생긴 신호인지 아니면 극히 예민하고 위험천만한 제정신의 발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그 둘은 같은 것일까? - P289

그들이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들을 수 없는 곳에, 역사, 편견, 사과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틸로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의 발에 얼굴을 댔고 어머니의 발이 차가워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부서진 의자가 우울한 천사처럼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틸로는 의자가 무엇을 할지 어머니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부서진 의자들은 잊어. 그것들은 늘 얼쩡거리지. - P337

그녀는 해방되지 않은 영혼이,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놓인 영혼 모양의 돌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불가사리를 닮았을지도. 아니면 노래기. 아니면 살아 있는 몸뚱이와 돌로 된 날개를 가진 얼룩무늬 나방―불쌍한 나방―날아가는 데 도움이 되라고 만들어진 부위 때문에 꼼짝을 못하는 배신당한 나방. - P344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어떻게 계속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멈추지 말아야 할 때 멈춘다. 멈춰야 할 때 나아간다. 나는 지쳤다. 하지만 저항심 또한 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요즘의 나를 규정한다. 그 두 가지가 함께 나의 잠을 훔치고, 그 두 가지가 함께 내 영혼을 회복시킨다. 눈에 보이는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많다. 친구들이 적으로 변한다. 목소리 큰 이들은 안 그럴지라도, 조용하고 과묵한 이들은. 하지만 적이 친구로 변하는 건 아직 보지 못했다.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 - P356

"그들이 어떻게 나를 또 죽일 수 있겠어? 넌 이미 내 장례식에 다녀왔어. 이미 내 무덤에 꽃을 갖다놨고. 그들이 나에게 더이상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난 한낮의 그림자야. 난 존재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가볍게, 농담처럼, 하지만 비통한 눈빛으로 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말에 그녀는 피가 얼어붙었다.
"요즘 카슈미르에서는 생존하기 위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
전쟁터에서 사기를 꺾을 수 있는 건 적이 아니라고, 오직 친구만이 그럴 수 있다고 무사는 틸로에게 말했다. - P357

카슈미르에서 아침에 일어나 "굿 모닝Morning"이라고 인사할 때 그 말의 진짜 뜻은 "굿 모닝Mourning(좋은 애도)"이다. - P371

요즘은 황소가 개인지 아닌지, 옥수수가 사실은 돼지 다리인지 비프스테이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그게 진정한 현대성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죠. 하기야 유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산울타리가 에티켓 안내서가 되어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 P396

그리고 그들은 내 말이 진실임을 알기에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 제임스 볼드윈 - P407

우리는 당신들의 내일을 위해 우리의 오늘을 바쳤다. - P410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이었다. 경력. 욕망. 꿈. 시. 사랑. 젊음 그 자체. 죽음은 또다른 방식의 삶이 되었다. 묘지들이 공원과 초원에, 개울가와 강가에, 들판과 숲속 빈터에 생겨났다. 무덤들이 아이 이빨처럼 땅에서 솟아났다. 모든 마을, 모든 지역에 묘지가 만들어졌다. (...) 자루에 담겨 옮겨지는 시체들도 있었고, 신체의 일부, 머리칼과 치아가 작은 비닐봉지에 담겨서 오는 경우도 있었다. 시체 보급원들이 그 봉지들에 이런 메모를 붙였다. 1kg, 2.7kg, 500g. (그렇다, 이 또한 루머에 불과했어야 마땅한 진실 가운데 하나였다.) - P415

어떤 나라들에서 어떤 군인들은 두 번 죽는다.
머리 없는 기념상은 마을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이제 그 기념상은 애초에 기리고자 했던 사람의 모습과 닮은 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대를 더 진실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 P420

일부 카슈미르인들도 두 번 죽는다.
총성은 거리가 텅 비고 나서야 멎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죽거나 다친 몸뚱이들, 그리고 신발들뿐이었다. 수천 개의 신발들. - P427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인도의 망고 음료 상표)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신선하고 진한)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 P428

무사 예스위가 아내와 딸을 묻는 걸 지켜본 사람들은 그날 그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알았다. 그는 슬픔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짜로 그곳에 있지 않은 사람처럼, 정신이 다른 곳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결국 그의 체포로 이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의 심장박동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었다. 무고한 시민이라기엔 심장박동이 너무 빠르거나 아니면 너무 느려서. 가끔 악명 높은 검문소에서는 군인들이 청년들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박동을 듣기도 했다. 어떤 군인들은 청진기를 들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사람 심장은 자유를 위해 뛰는군."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그것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린 심장을 가진 몸을 카슈미르밸리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심문센터인 카르고나 파파 2, 시라즈 영화관으로 보낼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 P428

도시를 빙 둘러싼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에겐 장례 행렬이 여왕개미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일곱 더하기 한 개의 설탕 알갱이를 들고 개미집으로 가고 있는 갈색 개미들의 행렬처럼 보일 터였다. 어쩌면 역사와 인간 갈등을 공부하는 학생에겐, 상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작은 행렬은 정말로 높은 테이블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들고 급히 달아나는 개미들의 행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건 전쟁으로 치면 작은 것이었다.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불안정한 포옹으로 사람들을 그러안으며 수십 년 동안 접혔다 펼쳐졌다 했다. 그러한 잔혹성들은 변화하는 계절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각각 고유의 독특한 향기와 꽃들, 고유의 죽음과 부활의 주기, 혼란과 정상상태, 폭동과 선거를 지니고 찾아오는. - P429

관들은 바닥에 내려졌고, 뚜껑이 열렸고, 얼어붙은 땅 위에 일렬로 정렬되었다. 조문객들이 기자들에게 정중히 자리를 내주었다. 기자들과 사진들이 없으면 대학살은 지워지고 죽은 이들은 진정으로 죽을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희망과 분노를 품고 기자들에게 시신들을 넘겼다. 죽음의 연회. 뒤로 물러섰던 유족들은 사진에 나오도록 관 가까이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의 슬픔도 기록되어야 하니까. 몇 년 후 전쟁이 삶의 한 방식이 되었을 때, 카슈미르의 슬픔과 상실을 주제로 한 책과 영화, 사진전 들이 생겨날 터였다. - P430

넌 진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지만, 난 이제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겠구나. 진짜였던 것이 이젠 유치한 동화처럼 들려―내가 너에게 들려주곤 했고 네가 참을 수 없어하던 그런 이야기들처럼.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이것뿐이야. 우리 카슈미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척하는 죽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 P451

(그날 넌 고양이에게 빵 조각을 줬는데 그 고양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빵을 거부해서 화가 났지. 바바자나, 우리 모두가 조금은 그 고양이처럼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린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빵은 우리를 노예나 아첨하는 종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위험하지. 그렇다면 넌 우리 모두에게 화를 내겠구나.) (...) 겨울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생각해야겠구나. 우리가 눈송이를 세던 거 기억하니? 네가 눈송이를 잡으려고 했던 거 기억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십만 명이란다. 네 장례식 때 사람들이 눈처럼 땅을 덮었지. - P453

전설적인 카슈미르밸리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걷거나, 기도하거나, 목욕하거나, 농담하거나, 호두를 까거나, 섹스를 하거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거나―군인의 총 조준기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인의 총 조준기 안에 있었기에 무엇을 하고 있든―걷거나, 기도하거나, 목욕하거나, 농담하거나, 호두를 까거나, 섹스를 하거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거나―합법적인 표적이었다. - P457

그녀에겐 카슈미르에서 악몽이란 난잡한 것이라고 말해줄 관광 가이드가 없었다. 카슈미르의 악몽은 제 주인에게 불충하고, 제멋대로 옆으로 재주넘기를 하여 다른 사람들 꿈속으로 들어가며, 각자의 구역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매복 예술가였다. 그 어떤 요새나 울타리도 그걸 막을 순 없었다. 카슈미르에서 악몽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친구처럼 껴안고 옛 적처럼 다루는 것이었다. 물론 틸로도 그걸 배우게 될 터였다. 곧. - P462

"카슈미르에서는 거의 모든 모우트들이 죽임을 당했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한 거야.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한지도 몰라. 우리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니까."
"혹은 죽임을 당하는 법이나?"
"여기선 똑같은 의미야. 오직 죽은 자만이 자유로우니까." - P468

"우둔화…… 멍청이화…… 만약 그걸 성취할 수 있다면 그때…… 그건 우리에게 구원이 될 거야. 그것이 우리를 패배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것은 일단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그다음에…… 우리가 승리한 후에는…… 우리에게 천벌이 될 거야. 먼저 아자디를 얻고, 그다음엔 전멸. 그게 전형적인 패턴이지." - P487

늘 그렇듯, 역사는 과거에 대한 연구인 것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계시가 될 것이었다. - P526

차들이 20차선을 쌩쌩 달리고 양옆으로 강철과 유리로 된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는, 밀밭만큼 넓고 ‘오줌을 누는 게 불가능한’ 고가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출구로 빠지자 고가도로 밑은 완전히 딴 세상임을 알 수 있었다―도로포장도 안 되어 있고, 차선도 없고, 가로등도 없고, 통제도 안 되는 거칠고 위험한 세상에서 버스, 트럭, 거세한 황소, 릭샤, 사이클, 손수레, 보행자 들이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한 종류의 세상이 굳이 성가시게 멈추어 알은체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세상 위를 날아갔다. - P536

한 눈을 잃은 청년들이 나머지 한 눈마저 잃을 각오로 다시 거리로 나선다. 그런 분노를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 P562

"결국 자네들이 옳을지도 몰라." 내가 부엌에서 그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이길 수는 없을 거야."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근사한 로간 조시 냄새가 올라오는 냄비를 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결국 우리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르지만, 우린 벌써 이겼어."
나는 더 이상 응수하지 않았다. 나는 인도 정부가 그 작은 땅덩어리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가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카슈미르는 1990년대의 상황을 학예회로 보이게 만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피바다로 변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카슈미르인들이 얼마만큼 자멸적으로 변할 각오가 되었는지에 대해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맞든,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어쩌면 우리는 ‘이긴다’는 것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P564

"언젠가는 카슈미르도 그런 식으로 인도를 자폭하게 만들 거야. 그때쯤 너희는 공기총으로 우리 모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눈이 멀게 만들어버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눈이 성한 너희들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볼 수 있을 거야.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 쿠다 하피즈, 가슨 씨." -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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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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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지나온 역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내가 꿈꾸는 나의 삶에 대해서도 정해진 미래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히고 걸치고 입어버리면 어느 순간 겪어버릴지 모를, 그렇게 익숙해진 미래를 손에 만져본 적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그것을 위안으로 삼고 오늘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걷던 수미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던 윤미 언니 그리고 절대로 모욕당한 게 아니라고 믿으며 버텼던 최명환이 내가 힘들 때마다 기억 저 언저리에서 떠올라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빗나갈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정해진 미래라고 우리는 미래에 마주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히고 걸치고 입어버리면 나는 그 순간을 어느 순간 겪어버릴지 모른다. 미래에 익숙해지고 미래를 손에 만져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문을 열고 나가 하던 일을 가던 길을 이어나갈 것이다. - P17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는 여전히 미래로 여겨지고 내가 그리는 미래도 미래에는 다시 되살리고 싶은 미래가 될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P18

이 부분을 읽다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 - P91

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미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연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을 내고 매듭을 지어버리는 일,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왜인지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반복하여왔을 것이라는 짐작은 계속되었다. - P92

그들이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하다가 그것을 묻고 되묻고 답하고 다시 묻는다면 끌어온 미래도 이미 일어난 과거로 혹은 지금 살아가는 현재로 믿을 수 있는가. - P96

나를 둘러싼 어른들이 올바르고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어른들이기를 바랐다. 이제는 스스로 그러한 어른이 되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00

길을 건너면 다가오는 바다는 나를 휘감고 어쩐지 너는 이렇게 걷다가 사라지게 될 거야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잠이 들게 될 거야 말하는 것 같았다. 잠이 들면요? 눈을 뜨면 다음날이 되고 다시 걷고 너는 그 일을 반복하게 된다. 대체 어디서요?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 P111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곧 사라질 사람들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걸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늘 때로는 그것만이 생생했다. - P124

내가 알게 될 뻔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들을 입안에 머금은 채 가끔 침을 모아 삼켰다. 삼켜지지 않으면 괴로운 표정으로 걷다 물을 마셨다. 그러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P124

지금도 나는 누군가 죽어도 좋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나라에서 쓸어버려도 좋다는 이야기/ 부족하고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은 흐름에서 탈락되어 죽어버려도 좋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들은 폐를 끼치지 말고 얼른 죽어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어쩌면 매일 내가 듣는 것은 보는 것은 얼른 그것을 행하라는 사인일지 모르겠고 우리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두 손에 각각 빵 하나씩을 쥐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누구도 빵을 세 개 쥐어서는 안 되고 손이 없는 자는 손을 내밀 수 없으므로 그것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은 낭비이고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동안 실수가 생길지 모르므로 손이 없는 자가 빵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세상 모든 곳에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 P149

티보가의 사람들에게 자크에게 앙투안느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실제로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자크를 보고 있었고 자크도 나를 믿을 것이다.
내가 부산에서 휴일의 며칠을 보내고 있던 사이 자크는 어느새 제네바로 가 있었고 혁명가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기사를 쓰며 돈을 버는 자크는 제네바의 여름 한낮을 걷는다. 나는 20세기 초의 내리쬐는 햇빛은 지금과 다를 것인지 분명히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계절의 묘사는 어느 때고 생생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을 하자 내일 아침 창으로 쏟아져내릴 햇살이 미리 손에 쥐여진 것 같았다. 자크가 걷는 여름의 제네바가 한밤의 내가 있는 곳으로 순간적으로 머물다 가고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나는 제네바의 여름 한낮이 예고 없이 다시 또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그 순간들과 함께 누워 있었고 생생하게 닥쳐오는 책 속 사람들을 생각했고 그러다보면 그 공기 안에서 잠이 들 수 있었다. - P151

내가 보았던 사쿠라이 다이조의 연극 중에는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연극이 있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공연이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 제목을 가끔 떠올렸다. 그러니까 다른 시간을 살 수 있었다. 미래를 살고 와야 할 것을 살아낸다면 미래를 기억이 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미래를 기억이 되도록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그것이 보인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미래로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 P153

책벌레 멘델이 나오는 츠바이크의 단편을 읽었다. 책벌레 멘델은 보통의 독서가의 수준으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책을 읽고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카페 글루크에 앉아 자신의 세계에서 책을 만나고 그 세계는 정말로 견고하여 테이블을 두드리는 정도로는 타인의 존재를 알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예의를 갖추었던가, 전쟁이 그들에게서 그러한 덕목을 앗아가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멘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스포르쉴 부인의 손을 내 두 손으로 잡고 거기에 이마를 대고 잠들고 싶었다. 그러면 그 옆에는 앙투안느가 앉아 모두의 인생을 걱정하고 앞으로 모두들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알려줄 것이다. 어쩐지 그 세계는 나를 사랑하던 개 두 마리가 살던 곳과 멀지 않을 것 같다. - P164

그가 해주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그가 감추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동시에 그것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 P167

80년 5월 27일 이후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하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빗자루를 들고 나서면 피가 거리에 흐를 것이다. 그 냄새와 공기와 광경을 모르고 모르고 모른다. 사람들은 청소를 하고 또 하고 거리는 서서히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많은 사람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회사로 돌아가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80년 6월은 80년 4월과 같은 곳인가 가망 없고 백치 같은 생각을 하고 - P192

81년의 82년의 시간이 광주에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80년 5월 이후에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붙인 이들을 참을 수 없게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동시에 이 역시 착각일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창밖을 보면 열차는 목적지가 없고 열차는 끝없이 달릴 것 같고 끝없이가 과장이라면 열아홉 시간쯤 달릴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달릴 것 같다. - P193

나는 이전에 광주 전남 지역의 미술인들이 80년 겨울, ‘2000년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2000년은 미래이고 무엇보다 뚜렷한 미래여야 하고 80년 겨울, 2000년의 미래를 스스로 익히고 삼켜내지 않으면 살아갈 힘이 없을지 모른다. 2000년은 광주의 진실이 알려진 미래이며 민주적인 미래이다. 서울의 부산의 대구의 대전의 제주도의 사람들은 80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누가 그 일을 지시했는지 알고 있고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2000년은 그러한 미래이며 우리는 파티를 여는 동안 그러한 미래를 살고 있다. - P193

당연히도 지금 옥상에 올라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강렬하고 선명한 주황색의 하늘이 이건 마치 끝이에요 지구는 이걸로 끝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이 어두워지고 모두에게 익숙한 어둠이 찾아오면 우리는 또 이런 식으로 하루를 접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끝을 보게 되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여러 번 연습한 끝을 익숙하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 - P211

괜찮은 사람이 되려면 한번 죽지 않으면 안 돼요, 누가 그런 소리를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것을 듣다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 거야? 아니면? 죽은 사람이어야 하는 거야? 살아 있는 사람은 가망이 없다는 거야? 물으며 계단을 올랐다. - P215

언제나 그렇듯 순간순간 이해했다고 착각한 장면을 무척 좋아하면서 그것을 품은 채 다음 걸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 아마 이 책의 끝에는 사이토 마리코 선생님이 쓴 추천사가 들어갈 텐데 82년 부산을 산책하는 또다른 이야기가 소설을 다 읽은 분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걷다보면 이미 가보았던 길일 수도 있고 걸어도 걸어도 처음 가본 길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산책을 여러 번 그려볼 것이다. 그런 것은 정말로 좋다. - P243

지금이라는 시간이 미래에도 과거에도 통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멋지고 동시에 슬픈 걸까. 그러나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라고 작가는 묻는다. 그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것쯤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란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누군가가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는 연습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박솔뫼의 상상력이 그것을 가시화한다. - P245

이제 열심히 늙어갈 수밖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조금밖에 없다. 하지만 "옆으로 뛰는 어린 사람을 응원하고 어딘가로 잘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분명 제대로 도착할 거야 확실하게 말하고"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걸고 싶은 말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힘이 나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준 ‘이야기의 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소설 속의 작가가 『티보가의 사람들』의 자크나 앙투안느를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서 도망갈 거야’라고 생각했던 수미나 ‘많은 것을 배우는 어른이 되게 도와달라’라고 기도했던 윤미 언니, 그리고 절대로 모욕당한 게 아니라고 믿으면서 달렸던 최명환을 아끼고 살아갈 것이다.
(...) 한 시대를 절실하게 살았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기억은 어느 시대의 어디에서든 누군가의 연습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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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리커버)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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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는 건 즐겁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책을 통해 대리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서 한 사람이 여러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아졌다지만, 그게 모든 직업을 다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린 여전히 가보지 못한 길이 궁금하고, 독서는 그 모든 걸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천문학자의 삶은 우리의 삶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같은 세속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때도 있다. 어찌 됐든 오랜만에 과학수업을 듣는 기분도 나고 라디오를 듣는 기분도 나서 즐겁게 읽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어린 왕자 이야기, 달과 지구의 이야기, 유인원사에 갇힌 고릴라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남는다.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목성 스펙트럼을 찍어 왔는데 처리할 사람이 없어. 누가 해볼래?" 대학원생 선배들은 이미 각자 맡은 연구 주제가 있었다. 참석자 중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유일한 학부생인 나뿐이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태양에서 1AU 거리에 있는 지구에서부터 5AU 거리의 목성으로 순간이동하는 주문을. 그때의 나를 오늘날의 나로 만든 바로 그 주문을, 그건 아주 짧고 간단한 문장이었다. "저요!" - P19

의식하지 못하는 새, 빠른 밀물이 나를 이곳에 옮겨놓았다. 해변을 걷다보니 어느새 물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이제 물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분다.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나는 이를 딱딱 부딪으며 오들오들 떨어야 한다. 몸을 쑤욱 내밀기 전에 크게 숨을 들이켠다. 아직 나가지 못했다. 한 번 더 크게 숨을 쉰다. 아직도 나가지 못했다.
해변 저기 멀리에 내가 오래전 떠나왔던 돗자리가 보인다. 떠나올 땐 운동장처럼 느껴졌던 돗자리가 이젠 손바닥만 해 보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는 이제 맨발로 걸어야 한다. 발밑이 고운 모래사장이든 거친 현무암이든 가도 가도 끝없는 개펄이든 간에. - P30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P31

대학이 고등학교의 연장선이나 취업 준비소가 아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학이 학문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공부라는 걸 조금 더 깊이 해보고 싶은 사람, 배움의 기쁨과 앎의 괴로움을 젊음의 한 조각과 기꺼이 맞바꿀 의향이 있는 사람만이 대학에서 그런 시간을 보내며 시간과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러려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 P56

부모 중 누군가가 본인의 일을 잠시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위해 달려가는 것은 양육자로서의 의무다. 아이가 아플 때 엄마가 일을 포기하고 달려가는 건 누군가는 가야 하는데 남편이 안 혹은 못 달려가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런 걸 누가 비난할 수 있겠나. 비난의 대상은 아픈 아이도, 달려가는 엄마도, 못 달려가는 아빠도 아니다. 갈 수 있으면서 안 달려가는 아빠가 있다면 그를 비난할 수 있을 뿐이고, 그런 경우엔 그게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도 비난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남의 가정 일에 비난할 자격과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 P107

부모 중 하나가 가사와 양육을 도맡거나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조부모 등 친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아이 하나 키워내기가 이렇게 어려운 사회. 그래, 현실이 그렇다고 백번 인정한다. 그게 현실이지만, 그게 여자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건 슬프다. 직장에서는 그토록 프로페셔널해야 한다면서, 가정에서의 의무는 가벼이 보는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여성들이 남성 위주의 문화에 적응해나가듯이, ‘직장맘’들이 "애는?"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하듯이, 그들도 여성들, ‘직장맘’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민해보면 좋겠다. - P108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 P156

어린 왕자는 해 지는 광경이 좋다고 했다. 나도 좋아한다. 특히 여름철 지루한 장마 끝의 노을을 사랑한다. 마치 솜사탕을 여기저기 헤쳐놓은 듯 색깔도 높이도 서로 다른 구름층이 여러 갈래로 휘몰아치다 갑자기 멈춘 듯한 하늘. 그 역동적인 하늘에 내려앉는 노을은 어찌나 붉고 또 어찌나 강렬한 황금색인지. 그렇게 황홀한 황혼은 태양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지구에서 태어난 나를 칭찬한다. - P158

누구나 다 알다시피 미국이 정오일 때 프랑스에서는 해가 지지. 단숨에 프랑스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나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놓기만 하면 되었지. 그렇게만 하면 맘 내킬 때마다 해 지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던 거야. - P159

내가 어린 왕자라면 의자에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소행성이 자전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려 있는 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을 속으로.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 P160

아침 알람을 끈 후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빈사 상태로 이부자리 안에서 괴로워할 때, 해가 두 번째로 뜰 때까지 한숨 더 잘 수 있다면 그 잠은 얼마나 달콤할까? 수성의 시인들은 두 번의 일출과 두 번의 일몰에 대해 노래하겠지. 소설가들은 첫 번째 일몰과 두 번째 일몰 사이의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나쁜 마법사가 첫 번째 일몰을 두 번째 일몰로 착각해 엉뚱한 주문을 거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되살아난 공주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까. - P163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 세 번째인지 마흔 네 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 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 P165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 P187

그 생생한 공포의 끝자락에는 우울이 묻어나왔다. 갈 곳이 있어도 갈 곳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던 고등학생처럼, 폭주하는 고릴라 역시 거기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인원사에 울려퍼지던 기괴한 포효 소리, 그 큰 덩치로 온몸을 유리벽에 던질 때마다 강한 진동으로 전해지는 쿵쿵 쾅쾅 소리. 나는 그 앞에 조금 비켜서서, 동물과 동물원과 세상살이와, 공포와 불안과 분노와 우울과 텅 빔과 쓸쓸함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얻고, 또 많은 생각을 비워냈다. 쓸쓸함과 무시무시함이 교차하던 저물녘의 유인원사는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동물원에 ‘전시된’ 동물을 한껏 가련하게 여기면서도 자꾸만 찾아가서 기꺼이 관람객이 되는 나는 트랄파마도어에서 온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랑꾼이다. - P222

달의 앞면에선 늘 지구가 보인다. 하늘의 어느 한쪽에 거대한 파란 보석 같은 지구가 떠 있다. 지구는 달보다 네 배나 크다. 다시 말하면 달에서 보는 지구는 우리가 지구에서 보는 달보다 네 배나 큰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지구가 떠 있는 하늘을 가질 수 있다니, 숨쉴 공기도 없고 먹을 유기물질도 없는 척박한 그곳으로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 든다. 게다가 달에서 보는 지구는 마치 선반에 올려놓은 오르골 장식품처럼 달 하늘 어딘가에 떠서 제자리에서 천천히 돈다. 낮에도 밤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지구의 위치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달에 집을 짓는다면 지구로 향하는 창을 낼 것이다. 창문이 곧 생동하는 액자가 될 테니. - P230

내가 고요히 머무는 가운데 지구는 휙, 휙, 빠르게 돈다. 한 시간에 15도, 그것은 절대로 멈춰 있지 않는 속도다. 별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눈을 휘둥그레 떴던 밤을 기억한다. 밤도 흐르는데, 계절도 흐르겠지. 나도 이렇게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인생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겠지. 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도 밤은 흐르고 계절은 지나간다. 견디기 힘든 삶의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물 아래 납작 엎드려 버티고 버텼던 내 몸을 달래며, 적도의 해변에 앉아 커피 한잔 놓고 눈멀도록 바다만 바라보고 싶다. 한낮의 열기가 다 사위고 나면, 여름밤의 돌고래가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아주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라고. 잠시 멈췄대도, 다 괜찮다고. - P253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 P265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어떤 책을 쓴다는 거야?’ 원고를 쓰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질문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책장에 꽂힌 김중혁 작가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되겠지.’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 - P270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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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5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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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소설이다. 같은 책을 다른 나이에 다시 읽는다는 건 여러모로 재미가 있다. 그때와 다른 곳을 밑줄 치는 재미도 있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느끼는 재미도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진희가 그저 조숙한 어린이로만 느껴졌었는데, 지금 접하는 진희는 왠지 모르게 어렵게 느껴진다. 그의 생각에는 여전히 공감 가는 부분이 있지만, 그의 행동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는 부분이 있어 실제로 주변에서 진희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마냥 솔직하고 편하게만 대하긴 힘들 것 같다. 그게 진희의 잘못은 아니고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긴 거라는 것도 알지만, 어른이 된 진희를 보면 더 어려운 사람이 됐구나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소설의 후반부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통해 자란 사람들의 앞으로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영옥과 홍기웅도 중간의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의 만남 또한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혹여 그전에 스친 인연이 깊게 이어졌다 하더라도 (이형렬이나 허석이 아닌 홍기웅과 바로 교제했더라도) 그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을 헤쳐 나온 지금의 영옥과 홍기웅이기에 그들이 나눌 앞으로의 사랑 또한 기대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그때는 몰랐던 새의 선물이란 제목의 의미를 이제야 가늠하게 되었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다 새의 선물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쥐를 똑바로 보면서 어금니에 고인 침 사이로 스테이크를 씹어넘기듯이. 그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 P10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 P12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 P23

진짜의 나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 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아는 어른들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도, 빚진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 P24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 P150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 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 P164

삶의 이면을 많이 알다 보면 매사에 의심이 많아지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이해심이 많아지는 면도 있는 것이다. - P209

사랑은 자의적인 것이다. 작은 친절일 뿐인데도 자기의 환심을 사려는 조바심으로 보이고, 스쳐가는 눈빛일 뿐인데도 자기의 가슴에 운명적 각인을 남기려는 의사표시로 믿게 만드는 어리석은 맹목성이 사랑에는 있다. 허석이 다만 한번 쳐다본 것을 가지고 그것이 ‘이렇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너’라는 의미라도 되는 듯이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진정 나는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 P221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 P229

아이들은 그제야 자기들이 아무리 민주 선거의 원칙을 배워 실천해봤자 ‘하늘이 볼까 무서워’ 고무신 한 켤레 준 후보에게 투표한 할머니가 받아들인 바로 그 현실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시험문제를 풀 때는 정답을 쓰겠지만 현실에서는 정답을 다른 식으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것으로 세상을 아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다. 대의원들은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못하고 직접 선생님을 통해 배운 그 방법을 반 아이들에게 써먹었다. 반장에게 잘 보이지 못한 아이들은 자습시간 내내 잠만 잤어도 가장 떠든 사람 1순위로 적혀서 선생님에게 보고되었다. - P233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것은 짜릿한 맛이 있다. 바로 그 맛을 위해 할머니는 매일 가려운 곳을 일부러 찾는 건 아닐까. 가렵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가려운 곳이 없으면 어떻게 긁는 순간의 쾌감을 느낄 것인가. 할머니가 가려움증을 찾듯이 나도 일부러 그리움을 불러들이는 것인가. - P274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 P275

불안 때문이었을까.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 P296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 P301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타인을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 P373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 P380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굳이 할머니 말씀을 듣지 않아도 나 스스로 체득한 지 오래이다. 나는 선이나 악 모두가 내 마음 깊이에 똑같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중 어느 한쪽만을 나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주장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선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실수라거나 충동이라거나 하는, 자신의 통제로부터 이탈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달아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은 삶을 위대하고 진지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려는 서정적 인간임에 틀림없다. - P381

물론 순간적인 느낌일 뿐일 것이다. 아무리 실연의 상심이 컸다 한들 이모는 이모이고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는 없다. 내가 유의한 것은 이모가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모의 내면에 다른 모습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모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모습들이 함께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들 중에 하나씩을 골라서 꺼내 쓰는 제어장치, 즉 이모의 인생을 편집하는 장치가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면 이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 P395

"이상하게 보이냐? 내가 벌레를 먹는 것이나 내 몸이 벌레들에게 뜯어먹히는 것이나 다 좋은 일이지. 벌레들한테 뜯어먹히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게 바로 죽음이고. 진희야, 그러니 죽는다는 건 얼마나 평화로운 일이냐……" - P421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P445

심장. 그곳은 내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육체였다. 내 몸을 모두 내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건만 심장만은 그럴 수가 없었으며 그 박동은 나 스스로 원치 않는데도 무의미한 열정을 가속시킬 때가 있다. 나는 마치 심장을 쥐어짜듯 작은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나의 심장의 박동이 무의미한 열정을 싣고 가속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목이 비틀어진 뒤에도 여전히 죽음의 공포로 팔딱거리는 닭의 심장처럼, 박동이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한순간 멈춰져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심장의 박동은 생명력이기도 하지만 한편 자기 존재에 대한 무력감이기도 했다. - P446

90년대지만 지금도 세상은 나의 유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베트남전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서 위선과 악의를 배워가며 이형렬들은 군대에서 애인을 구하고 뉴스타일양장점의 계는 깨졌다가 다시 시작되며 신분상승을 위한 미스 리의 교태가 반복되는 한편에서 광진테라 아줌마는 둘째아이를 가짐으로써 뒤웅박 팔자 속에 구덩이를 판다. 정여사 아줌마의 남편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으며 유지공장의 불 같은 뜻밖의 재난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그 사고는 이내 잊혀진 뒤 반복되며 사고가 잊혀진 뒤까지도 그때 대동병원이 번 돈처럼 돈들은 증식을 계속한다.
그때 젊은이였던 이들이 장년이 된 지금도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다르다는 탄식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사랑은 여전히 배신에서부터 시작한다. - P473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이며 누구의 배신이 더 심각한가 따위, 배신의 진앙과 진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을 따지다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 P474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나는 무궁화호를 보고 있다.
90년대가 되었어도 세상은 내가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흘러간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무궁화호를 보고 있다.
나는 아폴로 11호를 보고 있다.
나는 쥐를 보고 있다. 수챗구멍과 변소 구덩이를 오가는 쥐의 태연하고 번들번들한 작은 눈, 긴 꼬리의 유영, 그리고 그 심각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회색의 일과들을.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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