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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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상실로부터 시작된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 상큼한 느낌의 제목과 표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다루는 중점적인 사건과 내용은 한없이 무겁고 어둡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대한민국이 한창 뜨거울 때, 한 여고생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사인은 두부손상. 수사과정에서 가해자로 지목되었지만 알리바이가 완벽한 사람 신정준과 무언가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목격자 한만우, 그리고 평소 피해자의 외모를 질투했었던 다른 여고생 윤태림이 의심을 받게 되지만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고, 피해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가해자로 확정되는 사람은 없는 막막한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사건은 세상에서 잊힌다. 당시 그 일을 겪고 들은 당사자들만 제외하고서.

 

딸 해언이 죽고 나서 딸의 이름에 집착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 곁에서 자신의 존재마저 상실해버린 딸 다언. 죽은 자는 개명신청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엄마는 딸 해언이 생전 소지했던 모든 물품의 이름을 혜은으로 바꾸고, 심지어 가계부에 적힌 이름 하나에도 집착하며 남아있는 딸의 이름을 모두 바꿔버린다. 그리고 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던 다언은 이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니의 얼굴을 따라 계속해서 성형을 시도하며 자신의 고통을 이어나간다.

 

무언가 끊어진 사람들, 생각지 못한 상실에 자신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허전한 공백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며 비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마음을 다친 이들을 향한 먹먹한 슬픔이 함께 다가온다.

 

처음 레몬서평단을 신청했을 때 나는 신청이유에 이 책의 제목이 왜 레몬인지 이 책에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썼었다. 레모네이드, 레몬 과자, 베티번 씨, 상희가 직접 쓴 시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 씨’. 이 얇은 가제본에서 나오는 레몬들은 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하나의 사건, 그리고 여러 화자들이 자신의 시선에서 말하는 이야기 레몬, 그 전체 이야기가 궁금하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 P63

내가 다언에 대해 아는 건 오직 한 가지, 한일 월드컵이 있던 그 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결코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뿐이다. 끝없이 계속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 무엇이 끝없이 진행된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P64

엄마가 엄마 스스로를 바꾸지 못해 언니의 이름을 바꾸려 했다면 나는 언니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해 나 스스로를 바꾸기로 했다. 엄마가 말렸더라도 나는 감행했을 것이지만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커녕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토록 돈에 무서운 엄마가 선뜻 수술비를 대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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