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이 재밌는 영화를.
공짜표가 두 장 생겨서 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봤다. 정말이지, 대박이다. '대박'이라는 의미는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영화 내적 이야기. 우선 별 기대도 않고 표를 날리지 않으려고 영화괸엘 갔는데, 별르고 별러 본 영화보다 훨씬 더 감동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이 웃었다. 웃으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아니 그냥 눈물이 번졌다. 유쾌하고 짠한 영화. 그 다음은 영화 외적 이야기. 영화 잘 봤다면서 친구가 늦은 점심을 샀는데, '빕스'에서였다. 그것도 문을 연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곳. 꼭꼭 씹어가며 오래도록 요것조것 맛있는 것들을 골라먹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점심을 먹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중학교 동창생들이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여고시절을 그렸지만, 난 중학교 시절 일곱 명이 어울려 놀았었다. 써클의 이름은 '알쏭달쏭클럽'이었고, 우리가 만든 노래의 제목도 '알쏭달쏭'이었다. 우리가 만들었다고 해서 작사작곡을 직접 한 건 아니었다. '서울의 찬가'에 가사만 바꿔서 불렀는데, 개사 작업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개사한 가사는 이렇다.
새들도 지저귀다 의문 남기며 뒤돌아보는 알쏭달쏭 클럽에는 누구누구 있을까요 ...... 정다운 연경귀문윤순경 칠성미녀들의 노래소리에 해님과 달님도 미소 띠며 윙크를 하죠
연 경 귀 문 윤 순 경. 각 이름의 첫 자다.
멤버 대부분의 학업성적이 전교권 내에 드는 우리는 사실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70년대 중반, 동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에 살았던 우리는 고작해야 엄마 몰래 냄비를 들고 오십천에 물놀이를 가는 따위가 다였다. 어떤 친구는 그 귀한 쌀을 엄마 몰래 도시락에 담아 들고 나왔고, 어떤 친구는 고추장과 멸치, 또 어떤 친구는 말린 미역귀를 가져오곤 했다.
우리 동네는 구비구비 먼 길 흘러온 오십천이 마침내 바다의 품에 안겨드는 곳이다. 강물이 바닷물이 되는 곳. 바다와 만나기 조금 전의 동네 이름이 소월천이었다. 그곳에는 물이 야트막해서 보릿짚단을 타고 물놀이를 하기도 좋았고, 발로 모래를 비비면 재첩조개가 제법 많이 나오기도 했다. 물이 깨끗하기도 했거니와 맛이 좋아서 식수를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놀다가 목이 마르면 두 손으로 강물을 떠서 그냥 목구멍으로 흘려넣었다. 두 손으로 강물을 떠올리면 푸른 하늘도 함께 담겨왔고, 때로는 하얀 구름조각도 둥실 떠 있곤 했다. 여름이면 우리 주먹만 한 녹색의 풋사과를 몇 개 가져가서 그것을 저기로 던져 놓고 집으러 헤엄쳐 가곤 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거의 모두가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수영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팬티와 면 난닝구를 입고 놀았다. 다르다면 팬티 색깔이나 꽃무늬 정도였을 뿐.
우리는 해수욕장에도 우루루 몰려다녔고, 시험 공부도 모여서 함께 하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우리는 뿔뿔이 헤어졌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은 대구로 유학을 왔고, 한 명은 서울로 전학을 갔고, 세 명은 중학교에 붙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지금은 모두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죽 혼자 지내온 s. 우리는 모두가 나서서 s를 친구 중에 젤 먼저 결혼을 시켰다. 훈남인 아들 둘과 남편과 지금도 잘 살고 있다. 결혼 초창기에는 남편의 직장 따라 강원도 태백에서 살았는데 아이들 교육 문제로 부산으로 옮겼다. 직장을 그만둔 그녀의 남편은 택시 운전을 하였는데, 지금은 그만두고 둘이서 함께 토스트를 구워 판다고 한다. 대학가에 가게가 있는데 장사가 엄청나게 잘 된다고 어느 동창생이 내게 소식을 전해준 게 얼마 되지 않는다. 돈 많이 많이 벌어서 부자 되길 빈다. s는 우리 중에서 덩치도 젤 크고 마음도 넓어서 큰언니 노릇을 도맡아 했었다. 영화 속의 하춘화 같은 역할.
한 친구는 세 번 결혼에 세 번 이혼을 했다.
또 한 친구는 교육대학교를 나와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는데, 수도권 어느 초등학교에서 아직도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단다. 웃을 때마다 입이 합죽하다고 우리는 더 크게 웃곤 했는데, 그 친구의 반 아이들은 참 좋겠다. 선생님 얼굴만 보면 웃음이 터질 테니까.
나?
난 금융권에서 중간관리자로 이십 년을 근무하고 IMF때 명예퇴직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교를 나왔는데, 직장을 그만둔 뒤, 제대로 대학생활을 하고 싶어서 3학년에 학사편입을 해서 작년에 졸업을 했다. 지금은 공공도서관에서 초등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한다. 글쓰기, 독서캠프, 역사논술.....가르치기도 하고 함께 놀기도 하고 학부모들에게 '내 아이 독서 지도'에 대한 강의도 한다.
그 외의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난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친구들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모습들. 함께 어울려 봄이면 딸기밭엘 가고 여름이면 강가에서 설익은 밥을 먹으면서도 깔깔거리던 얼굴들.
아이를 키운다고 힘들게 오른 은행의 과장 자리를 내던졌던 내 삶. 아직도 직장에 남아 이제 지점장이 된 동기들을 보면서 풀이 죽곤 했던 나. 영화를 보면서 나 또한 다른 이들처럼 새삼스레 내 역사를 되새겨보았다. 그래 그랬다. 내게도 나만의 역사가 있었다.
나미가 벤치에서 여고시절의 자신을 만나 손을 꼭 잡아주던 모습. 자기 안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던 그 시절의 자기를 위로하던 손길.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 또한 중학교 시절과 고교 시절의 내가 아직도 내 안에서 주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꾸었던 꿈을 이루지 못해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그 모습 그대로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거칠어진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 손을, 보드랍고 숫기 없고 자그마한 내 손을 잡아준다. 까만 눈망울을 색 바랜 지금의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본다. 고개도 주억거려준다.
영화가 끝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난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친구의 눈자위에도 얼룩이 번져 있었다. "넌 천상 주인공 얼굴이야!"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을 던진다. "너도 주인공 얼굴이야. 개성 있어!"
' 그래. 난 나 자신만의 역사를 가진 주인공이야! '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 또래 여자들의 얼굴이 유월의 녹음보다 더 환하고 싱그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