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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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본인의 힘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설사 그것이 공감이나 위로를 받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내 고통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전쟁이나 수용소 생활처럼 극한의 상황에 놓였던 사람들은 온 감각을 살려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전하려 한다. 『숨그네』를 쓴 헤르타 뮐러는 수용소 생활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5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린 어머니와 무고하게 희생된 고향 사람들의 삶을 통해 간접적인 고통을 받았다. 그들의 숨소리에 공감하면서, 배고픔이나 슬래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이해를 바라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단어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레오의 시선으로 전해지는 수용소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 일반적인 단어로는 그 비참함을 표현하기 벅차다는 것을 안 작가는 '심장삽', '숨그네', '양철키스' 등의 합성어를 통해 살에 와 닿는 아픔을 묘사한다. 끝없는 노동의 굴레, 코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잔혹함, 그리고 본능적으로 찾아오는 배고픔의 약탈이 도처에 즐비한다.

 배고픔은 항상 있다. 늘 항상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온다. (…) 나는 심장삽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배고픔은 심장삽을 필요로 한다. 나는 심장삽이 내 연장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심장삽은 내 주인이다. 연장은 나다(p.96).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 한다. (…) 배고픔의 단어들, 즉 먹는 단어들이 대화를 지배할 때도 우리는 혼자다. 저마다 자기 단어들을 먹는다. 함께 먹는 다른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를 위해 먹는 것이다. 배고픔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자리는 없다. 타인의 배고픔을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주제의식도 한결같다. 죽음보다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그녀는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갔다. 살아남은 자만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오스카 파스리오르가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면 이런 깊이의 처참함은 잊혀졌으리라.


 소설의 주 무대인 수용소에서의 삶에 비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꽤 살만 해 보인다. 그러나 이 상대적인 낙원에서 정신적 허기를 떨쳐 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불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잠시 채워져도 결국 언제나 굶주린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생이 결국 고통의 연속임을 인정해야 한다. 시련을 이겨낸 자만이 그 속에 숨은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개인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런 비관주의가 맹목적인 낙관보다 낫다. 부정적인 결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잘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무엇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졌다가, 좌절하고 낙담하는 자들보다는 생존할 확률이 높다. 유행하는 예술 작품들은 '아무튼 해피엔딩'을 보여주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다. 레오는 갑작스럽게 수용소로부터 고향으로 '추방'된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하기는커녕 자신을 불청객 취급하는 이들의 말과 편견에 찬 시선들에 시달린다. 참으로 현실적이다. 마음에 든다.

 

 나는 증언하기 위해 산다. 때로는 삶의 밑바닥까지 경험하는 나의 생존 전략이 효과적이었음을 입증하려 한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신기루가 자신을 가장 절망케 했음을 보여준다.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모두 눈이 멀었을 때 비로소 앞을 볼 수 있음을 설명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 가장 희망적이라고 말한다. 내가 만든 또 다른 세계도 이런 식이다. 삶은 뒤틀릴 때 소중해진다. 고통이 나의 삶을 값지게 한다. 땀, 굶주림, 피곤함은 인간을 살아있게 만든다. 불행히도, 나는 살아 있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간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 간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갔다. 사실 내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애초의 용도와는 거리가 멀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입의 행복은 먹을 때 오고 입보다 짧다. 입이라는 단어보다도 짧다. 소리내어 말하면 머리로 갈 새도 없다. 입의 행복은 입밖으로 말해지길 원치 않는다. 입의 행복에 대해 말하려면 모든 문장 앞에 갑자기라는 말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끝맺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두 배가 고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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