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읽고 인상 깊은 구절들을 여기에 남겨 본다. p.73~76은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서양의 윤동주라 불릴 만 하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배웠던 지리 수업은 얼마나 특이했던가! 기요메는 스페인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을 내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수로학에 대해서도, 인구나 가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는 귀아디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다만 귀아디스 근처의 어느 밭을 둘러싸고 있는 오렌지 나무 세 그루에 대해서만 말해 주었다.
"그것들을 조심하게. 자네 지도에다 표시해 두고……."
그래서 그후로는 오렌지 나무 세 그루가 시에라네바다 산맥보다도 더 크게 내 지도에 자리잡았다. 그는 로르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로르카 근처에 있는 소박한 농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었다. 살아있는 농가에 대해서, 그곳의 농부에 대해서, 그 안주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우리에게서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농부 내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서 등대지기가 그러하듯 자신들의 별 아래에서 사람들을 구조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p.16~17).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p.55).

하지만 기계는 목적이 아니야. 비행기는 목적이 아니라네. 그것은 연장일뿐이지. 쟁기와 같은 연장 말일세. (…) 우리 주위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해 버렸네. 인간관계, 근로조건, 풍습도 모두. 우리의 정신세계도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뒤흔들렸지. 이별, 부재, 거리, 귀환이라는 개념은 비록 말은 같을지라도 더는 같은 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세. 오늘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위해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야. (…) 모든 진보가 우리가 겨우 체득한 습관 밖으로 우리를 더 멀리 쫓아내 버렸네. 그래서 우리는 말 그대로 아직도 조국을 세우지 못한 이민자 신세일세(p.58).

연장 저 너머로 연장을 통해서 우리가 찾는 것은 오래된 자연이니까. 정원사, 항해사, 시인의 자연과 같은(p.60).

그런데도 우리는 사막을 사랑했다.
사막이 일견 공허와 침묵일 뿐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하루살이 애인에게는 자신을 내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의 아주 소박한 마을조차 제 모습을 은밀히 감추듯이 말이다. 만약 우리가 그 마을을 위해 전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만약 우리가 그 마을의 전통과 관습과 대립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고향일 그곳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p.88).

하지만 그는 환멸 속에 깨달을 것이다. 진정한 풍요로움은 오직 이곳 사막에서만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모래의 위엄, 밤, 침묵, 바람과 별의 나라는 여기서만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만약 어느 날 보나푸가 돌아온다면, 그 소식은 첫날 밤부터 투항하지 않는 종족들의 땅에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사하라사막의 어딘가에서 200명의 부하들의 한가운데서 그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무어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침묵 속에 낙타를 이끌고 우물로 갈 것이다. 보리를 비축하고 총의 노리쇠를 점검할 것이다. 그 증오, 혹은 그 사랑에 이끌려서(p.109).

대낮의 폭염 아래에서는 밤을 향해 걸어가고, 얼음장 같은 별빛 아래에서는 타는 듯한 한낮을 염원한다. 여름이면 눈의 전설을 들려주고 겨울이면 태양의 전설을 들려주면 북쪽 나라들은 그 얼마나 행복한가. 눈에 띄게 바뀌는 것도 그다지 없는 한증막 같은 열대지방은 또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나 이곳 사하라 역시 행복한 곳이다. 이런 낮과 밤 덕에 인간이 한 희망에서 다른 희망으로 그토록 간단하게 오갈 수 있으니 말이다(p.112).

만약 페넥이 첫 번째 나무의 먹이로만 배를 채운다면 두세 번의 식사로 살아 있는 모든 열매가 없어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서 옮겨 가며 그가 관리하는 농장을 싹쓸이해 버리게 될 것이다. (…) 만약 그가 조심하지 않고 먹어치웠다면 달팽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달팽이가 없다면 페넥 역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발자취를 따라 어느 굴에 이른다. 페넥이 그 안에 있다. 내 발소리에 깜짝 놀라 내가 내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건다.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 (p.156)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안다. 어떤 이가 창조적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생계를 보장해 주면, 그는 그저 잠만 잔다. 승리한 정복자는 물렁해지고, 인심 좋은 사람도 부자가 되면 인색해진다. 인간에게 번영을 가져다주겠다고 주장하는 정치 강령도, 어떤 종류의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를 먼저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가 태어나려 하겠는가? 우리는 목장에 있는 가축이 아니다. 가난한 파스칼 같은 이의 탄생 하나가, 익명의 부자들이 다수 출현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지닌다.
본질적인 것은 예견할 수 없다. 우리들 저마다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가장 뜨거운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기쁨으로 인해 우리는 그토록 강렬한 향수를 느낀 것이다(p.187).

영양의 진리가 두려움을 맛보는 데 있는 것이라면, 오직 그 두려움으로 인해 영양이 스스로를 넘어서고 가장 높이 뛰는 묘기를 선보일 수 있는 것이라면, 자칼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영양의 진리가 태양 아래서 맹수의 발톱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이라면, 사자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대들은 영양을 바라보며 생각할 것이다. 녀석들이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고. 향수, 그것은 알지 못할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이다……. 대상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그리움을 알고 표현할 길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무엇이 그리움의 대상인 것일까(p.198)?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동료란 도달해야 할 정상을 향해서 한 줄에 묶여 있을 때에만 동료이다(p.200).

교양을 잘 쌓는다는 건 공식을 잘 암기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에 교양에 대해서도 보잘것없는 견해를 지닌다. 전문학교의 열등생이라도 자연과 법칙에 대해서는 데카르트나 파스칼보다도 더 많이 안다. 하지만 그가 사유 방식에 있어서도 같은 능력을 보일까(p.205)?

하지만 인간을 위한 정원사는 하나도 없다. 어린 모차르트도 다른 아이들처럼 판박이 기계에 찍혀 나올 것이다. 모차르트는 악취 풍기는 싸구려 라이브 카페에서 썩어버린 음악을 연주하며 그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모차르트도 끝장이다(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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