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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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나는 나의 생을 허락한 일이 없다. 죽음 또한 나의 허락과 무관할 것이다. 이 명제는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나의 존재와 소멸에 관여할 수 없다. 이토록 두려우면서도 허망한 사실은 우리를 송두리째 붙들고 있다. 그래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자살이다.˝ 라는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낯설지 않다. 

세상은 너무나 두껍게 닫힌 채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리고는 끊임없는 선택과 행동을 강요한다. 강요는 구원을 전제하지 않으며 오로지 짊어져야 하는 책임만 있을 뿐이다. 죄 없이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운명의 노예임을 실감케 한다. 그래서 두꺼운 바위 앞에서 끊임없는 사역을 강요받는 시지프의 운명은 인간을 대변한다. 

이런 잔인한 진실을 벗어나고자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하려 노력했다. 이성의 노력이다. 그러나 이성의 노력은 세상을 그저 관념적으로 변화시킬 뿐이다. 세상을 향한 인간의 정의는 고작 들짐승의 영역 표시와 다르지 않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관념적 노력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희망을 기대한다. 그러나 희망은 미래를 상정할 뿐이다. 희망이 오지 않은 오늘은 희망이 있을 내일을 향한 교두보일 뿐이다. 그렇게 매일은 가진 의미보다 적은 의미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삶을 기만할 뿐이다. 희망에는 구원이 없다. 

마지막으로 자살을 고민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인 자살은 더 이상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겠다는 자기 고백에 불과할 뿐이다. 간절한 고백에도 구원은 없다. 

카뮈는 이런 헛된 노력들이 사실은 잔인한 운명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일 뿐임을 시사한다. 그는 숨막히게 냉정한 삶의 의미를 넘어 자유를 찾기 위해 "순종" 할 것을 이야기한다. 역설적이게도 순종만이 잔인한 진실을 뛰어넘을 힘이다.

카뮈가 말하는 순종은 굴종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고, 모호하고, 휩쓸고, 집어 삼키는 거대한 운명에 순종하는 것은 운명의 잔인한 본질 또한 온전히 나의 것임을 인정하는 주인의 태도를 역설한다.

그때야 비로소 나의 소관이 아닌 운명과 부둥켜안고 대결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은 산정 반대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시지프의 뒷모습이다. 무의미하고 덧없어 보이는 시지프의 걸음은 그렇게 투쟁과 창조의 행위로 거듭나게 된다.

죽음은 정해져 있고 삶은 놀랍도록 의미가 없다. 보통 의미가 있는 것은 가진 의미 이상이 될 수 없기에, 덧없고 의미없는 실존의 본질은 무한한 가능성의 방증이다. 우리는 실존에 순종하며 놀랍도록 많은 가능성을 허락받는다.

무의미한 승리의 가능성 속에서 끊임없는 운명의 도전과 맞서는 인간의 순종적인 반항은 어제와 또 다른 자신을 재창조하는 예술이다. 이것 만으로 인간을 채우기에 충분하다는 카뮈의 확신에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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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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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허용의 테러를 경고하다. - <타자의 추방: 한병철>

억압의 시대는 끝났다. 박탈과 금지에 저항하여 우리는 승리했고, 과거 만연했던 공포와 두려움이 동반하는 모든 부정은 면역항체에 부딪혀 소멸했거나,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긍정과 허용이 시대의 가치가 됐다. 이에 효율과 결과만을 중시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이해가 결합하였다. 부정은 반드시 버려져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부정을 수용하는 행위는 경제적으로도 결코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왜곡된 긍정 사회가 되자 사람들은 타자의 부정성 또한 회피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지지고 볶는 일은 그 자체로 성과가 있는 일도 아니고 되려 피로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린 부정으로 대표 되는 타자의 음성, 타자의 시선을 피해 작은 화면에 자신을 접속한다.

‘좋아요’가 만연한 디지털 네트워크 속 세상은 쉽게 ‘Social’이라고 착각되지만, 그곳에는 타인의 시선도 새로운 목소리도 없다.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는 개개인의 독백만이 가득하다. 그 독백은 명백히 난잡한 소음이다.

사람들은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대신하는 조회수와 댓글을 위해 글을 쓴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클릭해 줌으로써 자신의 에고를 증명한다. 세상의 가치에 맞는 인간임을 증명하고,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들은 ‘같지만-다른’ 것들을 재창조한다. 인터넷 세상은 실상 같지만 다른 잡다함으로 넘쳐난다.

당위성의 누적은 사람을 가둔다. 더 나아가 나르시시즘으로 인도하고, 깊은 나르시스는 타자의 부정성을 명확히 하는 오목렌즈가 된다. 부정의 수용은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 혹은 취향이라는 명목으로 자신과 같은 사람 그리고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소비하게 한다.

즉 ‘동일’을 추구하고 이런 ‘동일’의 첨예화가 갈등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며 혐오를 조장한다. 현재 낯섦은 그 자체로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것들의 묶음은 또 다른 묶음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클론들의 사회에서는 결코 낯섦의 경이로움은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한병철이 처방하는 해답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쉽지 않다.

그의 첫 번째 해답은 환대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환대는 긍정과 다르다. 긍정은 부정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부정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환대는 부딪힘과 깨짐에 대한 허락이며, 자아 확장의 기대이다. 또한 화해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한 두 번째 해답은 경청이다. 그는 미하엘 멘데의 <모모>라는 책에서 경청의 의미를 빌려 이렇게 인용했다.

“언젠가는 어린 소년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데리고 왔다. 모모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모는 일주일 내내 그 새를 경청해야 했다. 그러자 결국 새는 다시 지저귀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소음만이 가득한 지금, 환호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웃음소리는 최후의 승리를 의미한다. 우린 패션(Passion)을 버리고 철학을 택해야 한다. 우린 데이터베이스의 통계를 버리고 시선을 맞추고 각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클론 사회에서 데이터베이스는 의미가 없다. 즉 사유할 것 또한 없다. 다름을 이유로 추방한 타자가 돌아오길 기도해야 한다. 아니 우리가 그들을 찾아 데려와야 할 일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이 답답하고 획일적인 가면을 벗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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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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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자전적 에세이.

‘자전적인’이라는 단어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인간 하루키 둘 모두를 서술한다.

삶이란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이라는 그는,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육체의 단련과 강고한 영혼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저는 달리기를 합니다.” 처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강고한 영혼 단련법을 자신의 집필 방식을, 특히 등장인물을 창조하는 방법을 통해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그가 만들어 내는 소설 속 인물은 총체적인 자아의 어딘가에 자리한다고 한다.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감정과 사색을 통한 내면 탐색 그리고 타인과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조각조각의 정체성의 편린이 그가 창조하는 등장인물의 메타포라는 것이다.

이런 탐색과 집중은 소설 속의 인물을 만들뿐 아니라, 작가 자신을 확장된 새로운 자아로 재창조 한다. 아마도 그는 이를 두고 영혼의 단련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관찰하는 다양한 내러티브는 그만큼 자신에게 다양한 삶을 허락한다. 즉 그가 창조한 새로운 자아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발현한다.

자신을 위한 긍정적 자아의 취사선택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 삶의 모든 부분을 포용하게 하는 힘이 된다. 고통을 즐거움으로, 무의미를 가능성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러 파트로 나눠진 에세이기에 텍스트 전부를 긍정할 수는 없었지만, 특히 이 부분은 나에게 큰 영감이 됐다. 그의 다른 수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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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교과서 니체 -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플라톤아카데미 인생교과서 시리즈 7
이진우.백승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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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이런 실존적인 물음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는 결코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했다. 단지 보편타당함이라는 이름의 사슬로 변했을 뿐이다.

그 사슬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장되었기에, 자유인이라 불리는 현대인의 목에 가장 무겁게 매달려있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상은 해석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성이야말로 자유 정신의 핵심이다. 지금 너를 지배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헛것에 불과하다.˝

그의 말은 분명 반항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러나 파괴는 창조의 다른 말이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밥상을 받아 놓고 밥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말자.
밥을 먹고자 하는 의지에 충실하면 그 뿐이다.

201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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