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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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선 소설가의 스테레오타입을 내던진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이를테면 '비주류 작가'의 소설과 삶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비주류이기는 커녕 일본 작가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을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당연히 비판도 많았지만, 그 결과는? 그의 열렬한 독자이든 아니든 그가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무라카미의 소설 쓰기는 제도화된 문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는 대중성에서도 작품성에서도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는 소설을 쓰고 읽는데 있어서 개인의 영감과 꾸준함, 치열함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는 기성의 순수문학에 걸맞지 않는다는 세간의 평에도, 이쿠타가와상을 받지 못한 작가라는 한계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했다. 오히려 일본 순문학계의 외면은 그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하루키를 국제적 작가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런 독자적인 행보는 우리의 문학계 현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기성 문단이 요구하는 적절한 기준에 맞는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역으로 이 책은 우리가 제도 문학 속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검수된 작품만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치열하게 쓰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인데,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들이 많다는 말이 되겠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 소설이 재미있는가? 대부분이 '소설에 따라서'라고 하겠지만,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외국의 장편소설들에 비해 우리 소설은 그저 한국어의 아름다운 문체와 유려한 쓰임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볼 것이 없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다가 멈춘 뒤에 다시 손이 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스토리텔러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너무 없다. 적어도 문학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작품들이나 어떤 이유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소설만 보면 그렇다. 소설이 스토리텔링이 전부가 아니고 일종의 언어 예술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역시 스토리텔링에 있다. 한국 소설에는 이것이 너무 철저하게 빈약하다. 장편소설이라고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대개가 단편의 장면들을 확장해서 장황하게 늘려놓았다는 느낌이 들 뿐, 단편에 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하고 쓸 거리가 한정되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문학을 좌지우지하는 제도 어느 한 구석에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무언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독자의 손에 닿기 전에 그 무언가에 의해 엄중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독자가 볼 수 있는 글은 한정되어 있다. 그 '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작가들은 재미있는 글 같은 것은 애초에 쓸 생각을 않는다. 독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만을 수용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소설은 '재미없는 것' 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독서 인구가 낮다고 한탄하는 말이 많이 들린다. 다른 국가와 독서량을 비교해 놓은 수치에서 우리나라는 항상 꼴찌다. 국민의 문화적 수준을 탓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세상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는 대체로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제도 문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인터넷 공간을 떠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즐거워한다. 이야기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이야기만 있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통로는 무언가로 꽉 막혀버렸다. 독서 인구 수치에 대해서 독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간단히 말해 재미가 없으니 안 읽는 것이다. 독자 이전에 그 생산의 매커니즘에 문제가 없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고 잘 쓴 소설은 평론보다 독자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독자는 재미있는 소설을 향유할 기회를 일정부분 박탈당하고 있으니 읽을 소설을 고르는 안목도 역시 무뎌졌다. 그래서 '수상작'이거나 '베스트셀러' 따위의 문구에 현혹되어 그것이 훌륭한 소설인냥 받아들이게 된다. 훌륭해 보이지 않고 간혹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 교양의 일천함이나 수준 낮음 탓이지 책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준을 제멋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쿠타가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이라는 말에 훌륭한 책이라고 판단하고는 책을 집어든다.


문학이란 창의적인 영역이다. 작가는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등단이라는 예술발전을 저해하는 기형적인 제도가 있어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는 깊숙이 감추어 놓아야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신춘문예나 이런 저런 문학상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틀이 있고 그에 맞지 않으면 비난받고 '정식'으로 작가가 될 기회가 차단된다.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직업에 모범답안이 있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가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 문학은 영원히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기성 제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해 냈다.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답답한 제도 문단을 해외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는 너무나 견고한 기성 체계의 틀을 깨고 자신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없거나, 지나치게 외면당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 지망생들의 서재 서랍 속에는 수많은 놀라운 이야기가 먼지가 소복히 앉은 채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독자의 평가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창작할 자유도 향유할 자유도 제도라는 틀 속에 갇혀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하루키처럼 치열함과 확신으로 가득찬 외골수가 어디선가 튀어 나오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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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에 대한 논평.
    from 별처럼님의 서재 2017-03-18 17:26 
    한 블로거의 서평에서 전재.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의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