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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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를 드디어 만났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체스터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탐정 포와르의 생김이 브라운 신부와 닮았다. 작달막하고 못생긴 얼굴. 그러고 보니 이 시기 영국은 세계적 탐정들이 여럿 활약했다. 홈즈, 브라운 신부, 포와르와 마플. 아서 코난 도일이 1859년생, 체스터튼 1874년생, 아가사 크리스티 1890년생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영국은 탐정소설의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 지금도 이 불후의 탐정들은 케이블 화면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쉽게도 브라운 신부를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명성에서 살짝 뒤처지는 모양이다.

 

북하우스의 <브라운신부 전집> 1권 후기에는 추리소설 장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있다. 이 장르는 에드가 엘런 포에 의해 확립되었다. 포는 1809년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브라운 신부의 많은 이야기가 포의 『도둑맞은 편지』의 테마를 천재적으로 변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포와 체스터턴 사이에는 코난 도일이 있다. 그리고 코난도일의 뒤에는 디킨스가 있다. 디킨스는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대가’라 한다. 체스터튼은 디킨스에 관한 유명한 비평집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 복잡한 이름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19세기에 태어난 이 대가들, 1809년 포를 필두로, 1812년 디킨스, 1859년 코난 도일, 1874년 체스터튼, 1890년 아가사 크리스티에 의해 추리소설이란 장르가 탄생·발전했으며,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의 명성은 견고하다.

 

 

         

 

그런데 내가 체스터튼을 알게 된 것은 철학책을 통해서다. 지젝이 가끔씩 언급하는 체스터튼은 매우 흥미로웠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1부 3장은 체스터튼의 <부러진 검의 의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어디에 숨길까? 숲속에 숨기겠지. 그렇지만,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결백 p422)

 

시체를 숨기려면 어떻게 할까? 나뭇잎을 숨기기 위해 숲을 만들듯이, 시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시체의 산을 만들면 된다. <부러진 검의 의미>의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한 짓이 바로 그것이다.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악마적 행위에 대해 체스터튼은 이렇게 말한다.

 

  “아서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내가 이미 말했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이었네. 모든 이들의 성서를 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해하게 될지 답답하구먼. 출판업자는 오자를 찾기 위해 성서를 읽고, 모르몬교도들은 성서에서 일부다처제의 근거를 찾아낸다네. 또 그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 역시 그들만의 성서를 읽고는 사람에게 손도 발도 없다는 부분을 찾아내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인도에서 자란 영국인으로 개신교 신자였네.... 물론, 그는 신약보다 구약 성서를 더 자주 읽었지.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육욕, 전제, 그리고 반역을 바로 구약 성서에서 찾아낸 거라네. 나는 그가 정직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건 아니네.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것을 찬양하는 정직한 사람을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는 뜨겁고 비밀스러운 열대의 나라에 정부情婦를 두고 증인을 고문하며,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할 거네. 내가 알고 있는 신학대로라면, 그에게 그것이 어떤 신이냐고 물어봐야 할 거네.” (결백 p435)

 

아서 클레어 장군의 악행은 신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전국사찰을 돌아다니며 악마를 쫒는 우리나라의 기독 광신교도를 본다면, 체스터튼은 그들이 성경에서 무엇을 찾아냈다고 했을까.

 

“우리는 20세기의 윤리-정치적 파국에 대한 책임을, 도구적 이성에 의해 ‘플라톤부터 나토(? 게토가 아닐까..)’까지 직선적으로 이어져 온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전체에 묻는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49~50)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악마가 된 것처럼, 서구 형이상학의 도구적 이성이 세상을 읽는 방식이 20세기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체스터튼과 하이데거가 동일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인데, 지젝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튼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일한 논리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파시즘의 선구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나치 사례들을 서구 형이상학이라는 시체들의 산속에 감추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50)

 

클레어가 시체를 감추기 위해 시체의 산을 만든 것과 같이,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나치 참여를 면죄받기 위해 서구 이성 전체를 나치의 복무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지젝은 여기서 체스터튼의 또 다른 책을 가지고 온다. 『목요일이었던 사나이』에서 체스터튼은 철학경찰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한다.

 

 

 

“철학 경찰의 임무는 (....) 통상적인 형사의 작업보다 훨씬 대담하면서도 미묘하다. 보통 형사는 도둑놈들을 잡기 위해 선술집에 가고 염세주의자들을 탐문하러 예술가들의 모임을 기웃거린다. 보통 형사는 숙박부나 일기장을 뒤져서 이미 발생한 범죄를 찾아낸다. 우리는 소네트 모음집을 뒤져서 앞으로 발생할 범죄를 찾아낸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성적 광기와 지적 범죄로 이끌 끔찍한 사유의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The Man Who Was Thursday p44~5, 각주 인용)

 

철학책을 뒤져서 앞으로 발생할 범죄를 찾아낸다는 이 기발한 생각은 그러나 별반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지젝은 이 상상적 ‘철학경찰’은 이미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유명한 철학자들 자신이 그들의 철학경찰이다.

 

「칼 포퍼나 아도르노, 그리고 레비나스 같은 사상가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에 의해 정치적인 범죄는 ‘전체주의’로 언명되고, 철학적인 범죄는 ‘총체성’ 이라는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 ’철학경찰‘은 총체성이라는 철학 개념으로부터 정치적 전체주의를 향하는 직접적인 경로를 전제하면서 플라톤의 대화록이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어떻게 정치적 범죄가 발생할 지 밝혀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보통의 정치경찰은 혁명가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비밀결사조직을 들이닥치지만 철학경찰은 총체성의 지지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철학 심포지엄에 간다. 통상적인 반-테러리스트 경찰은 빌딩이나 교량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꾸미는 자들을 발본색원 하지만 철학경찰은 우리 사회의 종교와 도덕적인 토대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한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51~2 」

 

여기 지목된 철학자들에게는 지독한 조롱일 수 있겠지만,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 총체성 따위는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라며 치를 떠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체스터튼의 철학경찰들 못지않게, 총체성의 철학을 뿌리 뽑기 위해 투쟁한다. 내가 보기에 지젝은 자신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쪽이다. ‘모든 이들의 성서’ 란 없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틀 없이 실재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음.....

체스터튼의 추리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샛길로 너무 깊이 빠졌다. 여하튼 체스터튼은 단순 추리소설이 아니라, 혹은 단순 추리소설 안에서, 여러 가지 사유를 촉발한다. 사건의 전개나 문제의 해결방식은 코난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와 비슷하지만, 체스터튼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건의 내용이 아니다. 사건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주로 사유의 체계나 세계의 구성방식에 기인한다. <부러진 검의 의미>에서 본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가 뽑은 체스터튼의 가장 뛰어난 5편의 작품에는 이런 경향성이 짙게 드러난다. <벼랑 위의 세 기병> 은 너무나 충성심이 강한 두 명의 부하 때문에 일을 실패하게 된 장군의 이야기다. 무조건적 충성심이 일을 그르친 이유가 된 것이다.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전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할 때 가장 자주 사용했던 무기가 바로 ‘준법투쟁’ 이다. 철도 운행지침에 글자 그대로 딱 맞추어 운행하면, 서울의 지하철은 한순간 마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상으로 느끼는 지하철은 사실 비정상이다. 콩나물시루, 과속, 정차시간 단축 따위의 비정상적 시스템이야말로 서울 시민의 정상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얼마 전의 광역버스 입석 금지가 야기한 출근 대란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에서 입석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하지만, 그 정상적 시스템은 출퇴근을 마비시키는 비정상적 상황을 불러왔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이 보여주는 것은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체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체계에 대한 절대적 추종이라는 역설이다. 체계에 뚫린 틈이야말로 체계를 유지시키는 숨구멍이다. 구멍 한 점 없는 풍선은 터진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은 또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충성스러운 부하는 동료애를 저버린 적도, 자신의 군주를 속이고 그 권위에 도전한 적도,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을 죽인 적도 수없이 많았는데, 단지 자신의 직속상관에게는 언제나 복종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로크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뿐이었다. 아이히만의 머릿속에 의무만이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충성심만이 있었다. 두 악마 모두에게 없었던 것은, 사유이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는 보르헤스가 꼽은 5편 중 가장 재미있다. ‘재미’라는 두루뭉실한 말은 똑 부러진 설명을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어떤 사기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난파된 아들을 15년간 찾고 있는 엄마에게 이 사기꾼은 그 아들과 전혀 닮지 않은 남자를 아들이라고 속이는 데에 성공한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도 완전히 똑같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기꾼은 거꾸로, 누가 봐도 다르다고 할 사람을 선택한다. 이렇게 달라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사기를 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방식은 상식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의 체스터튼도 상식의 편견을 이용한다. 절대로 동일성이 존재할 수 없는 곳에 동일성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신식 금권주의 정치가’,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가 깔려 있다.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가능하면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니, 무엇이 재미있는지 설명하기가 더 힘들다. 그런데 어찌 보면 여기 한, 두 대목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 종업원은 몇 초간 신사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식탁에 앉은 모든 신사들의 얼굴에는 깊은 모욕감이 드러났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시대의 산물이었다. 즉, 그것은 부자와 가난뱅이 사이의 무시무시한 간극과 새로운 시대의 박애주의가 결합된 것이었다. 진정한 정통 귀족이라면 그 종업원에게 뭐라도 집어던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빈병부터 던지다가 마지막엔 돈이라도 집어던졌을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라면 동지애를 드러내며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러나 이곳에 모인 신식 금권주의 정치가들은 가난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자기들 근처에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들이 노예이건 친구이건 간에. 그 하인들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불쾌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한편, 자비를 베풀만한 일이 생기는 것도 꺼려했다. 그들은 그게 무슨 일이든지 간에, 이 일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원했다. p73 」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부유하고, 먹고 살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냉혹하고 천박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하느님이나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마당에, 도둑과 부랑자들만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p80」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추리소설에 이런 표현이 허용될지 모르겠지만, 발랄하다. 베니스의 샤일록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음모도 탐욕도 없지만, 이스라엘 가우는 성공한 샤일록이다. 피한방울 없이 그는 성공한다. 이 단편에서 내가 읽은 체스터튼의 메시지는 이렇다. 살인사건의 현장에 남겨진 몇몇 단서들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코담배와 다이아몬드, 초와 분해된 시계 태업장치.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즉석에서 이 단서들을 조합하여 서너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가짜 이론으로도 우주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글렌가일 성에 들어맞을 거짓 추론들을 열 개도 넘게 만들어낼 수 있듯이. p105” 우리는 각자의 가짜 이론으로 저마다의 우주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있다.

 

 

<허쉬 박사의 결투>가 주는 교훈은 한가지다.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히 틀리게 말하려면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만이 철저하게 모든 것을 틀릴 수 있다. 우연한 거짓말에는 한두가지 사실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반대되는 것을 찾았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네가 찾아갈 집에 대해 적어두었다고 해보세. 녹색 문에 파란색 블라인드가 달려 있고, 앞뜰은 있지만 뒤뜰은 없고, 개는 있지만 고양이는 없는, 커피는 마시지만 차는 마시지 않는 집이라고. 자네가 만약 이런 집을 찾지 못한다면 자네는 그 내용이 모조리 가짜로 꾸며낸 거라고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자네가 만약 파란 색 문에 녹색 블라인드가 달리고, 뒤뜰은 있지만 앞뜰은 없으며, 고양이들은 흔하지만 개는 보이는 즉시 총으로 쏴버리며, 차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커피는 금지된 집을 찾는다면, 자네는 바로 그 집을 찾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 p179"

 

 

이상하게도, 보르헤스가 이 단편집의 제목으로 뽑은 <아폴로의 눈>은 그다지 특징적이지 않았다.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추리소설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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