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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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를 다시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았는데, 올해 『투명사회』가 나오면서, 저자 한병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자, 어느 회원이 제안을 했고, 『투명사회』보다는 『피로사회』가 읽기 쉽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2012년,『피로사회』가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던 여름 즈음, 나는 서점 간이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훑어보고 살까 했는데,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워낙 얇은 책이라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면역학에 빗댄 시작이 매혹적이었으나, 2012년 현재 우리사회와는 조금 엇나있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스스로를 닦달하며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자기 탓만을 하던 시기를 지나, 이미 구조의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2011년 9월의 ‘월가를 점령하라’를 통해 명시된 ‘99% : 1%’의 사회구조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1%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척할 수 없게 되었다. 알지 못했던 것, 알고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하필 미국에서, 그 경제 대국 미국에서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미쿡’ 사람들이 보따리를 안고 쫓겨나는 판에, 그깟 토익 만점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1%를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사회는 이미 피로사회를 지나 잉여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었다.

 

오늘 독서회 책은『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다음 주가 『피로사회』인데, 회원들의 반응이 큰일이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단다. 『투명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편인데,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 않는 회원들에게는 너무 압축적이어서 힘든 것 같다. 한병철은 길게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대중에게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발제해야 할 지 고민이다. 처음에는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먼저 책 내용을 쉽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내가, 쉽게 가능할까? ;;

 

  

 

 

 

(이게 더 어려울까? ::)

 

 

 

피로사회란 한마디로 성과사회의 이면이다. 성과사회란 자기가 자기를 달달볶는 사회다. 이거는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일일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시대는 지났다. 9시 출근 6시 퇴근, 눈치 볼 것도 없다. 오후에 느지막이 출근하든, 아예 집에서 뒹굴든 관여하지 않는 회사도 많다. 규율과 통제가 사라져 간다. 다만 성과만 있으면 된다. 이제 호봉제도 옛말이 된지 오래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우리 기업들은 급속도로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회사 오래 다녔다고 월급 많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성과만 좋으면 대리도 팀장이 되고, 연봉이 과장을 능가할 수 있다. 무능하고 연차만 높은 상사들은 눈치가 보여, 쪽팔려서 회사를 떠난다. 성과사회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성과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없다. 자기착취의 시대가 온 것이다.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를 직접 착취하지 않는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닦달하는 부모의 방식도 ‘성과사회’ 적이다.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저자 김두식이 딸에게 한 말이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데 대학을 가지 못하면 평생 열등감에 빠져 살기 쉽다. 네가 그런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공부 안 해도 괜찮다.” 이렇게 세련되게 나오면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이제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열 받아도 욕할 대상이 없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내가 무능하고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 탓할 대상을 잃은 분노는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 속에서 곪아터진다. 우울하다. 하나의 일에 느긋하게 집중할 시간도 없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이 기본이다. 성과사회의 우리는 모두 집중력결핍과잉운동장애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할 수 없다. 특별한 목표 없는, 그래서 성과도 없는 어떤 활동도 낭비다. 여가활동마저 전투적이 되어버린다. 등산을 좋아하면 100대 명산을 모두 정복해야 하고, 여행을 다니면 20대에, 30대에 꼭 가보아야 할 명소는 다 찾아다녀야 한다. 산에서도 뛰어다니고, 여행지에서도 녹초가 될 때가지 걸어야 한다. 책을 읽어도 일 년에 50권 목표를 세운다. 등굣길에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하고, 차를 몰며 일어 회화를 들어야 하고, 청소를 하면서 고전읽기라도 켜 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제레미 벤담처럼 우리 역시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계산되어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나 과부하하가 걸린 기계가 정지하고, 무리하게 뛰는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것처럼 과잉활동의 결과는 완전한 소진과 고갈이다. 피로가 몰려온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증상이다.

 

왜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가 되었을까? 왜 자본은 더 이상 직접 착취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틀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자기착취의 원리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됨에 따라 착취의 방법도 발달했지만 노동자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규율과 통제에 의한 강제적 착취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 방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노동자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성에 목매달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졌다. 성과급이란 같은 시간을 일해도 그 실적에 따라 차등 대우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동료는 더 이상 나의 동지가 아니라 나의 경쟁자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내가 가져야 할 몫이 동료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면서, ‘만인(의 동료)에 대한 만인(의 동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피로사회』의 개요만 짚자면 대충 이렇다. 이런 정도는 한병철의 고유한 분석도 아니다. 차라리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져온 사회구조적 현상에 대한 많은 통찰들이 빠져있다. 아무리 자기착취를 해도 낙오할 수밖에 없는 승자독식 체제, 무한 경쟁 체제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목받았던 것은 20세기의 규율사회를 면역질환으로, 21세기의 성과사회를 신경증으로 해석해낸 그 독특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병철 스스로도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운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 밝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는 우리가 모두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시기다. 면역학에서 신경증으로의 변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이 모두 우리가 직접 겪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0세기는 면역학의 시대다. 면역반응이란 나와 이물질, 나와 타자의 투쟁이다. 면역학의 시대란 타자와의 대립의 시대다. 타자는 나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주인이 되지 못한 우리는 복종의 주체가 된다. “~해서는 안된다” 혹은 “~해야만 한다” 라는 금지와 강제에 따라야만 한다. 규율을 어기면 범죄자가 된다. 규율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광인이 된다.

 

면역치료는 나를 침입하는 이물질을 길들여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예방주사는 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우리 몸에 집어넣는 역발상이다. 약한 균을 미리 상대해 본 우리 몸은 자체의 방어력을 갖추게 되고, 진짜 실전이 벌어졌을 때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다. 헤겔식으로 하자면 부정의 부정이다. 한병철은 헤겔의 ‘부정성’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투명사회』도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대표되는 투명사회는 긍정성 과잉의 사회이다.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 한병철의 생각이다. 부정성의 회복,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가 그가 주장하는 해법이다. (『투명사회』리뷰)

 

21세기는 신경증의 시대다. 세계는 하나다. 우리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다. ‘살색’이란 말이 용납될 수 없는 사회가 된지 오래다. 다양성과 차이의 시대, 관용이 제 1의 덕목이 되었다. 그런데 타자와의 대립이 없는 동질성의 시대,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평화롭고 행복할까? 함정은 긍정성이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거부하고, 버리지 못한 것들이 모두 몸 안에서 쌓인다. 소화불량이 되거나, 비만이 된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더 이상 복종의 주체가 아니라 성과의 주체다. 무엇이든 “Yes, we can." 할 수 없으면 낙오자가 된다. 낙오에 대해서는 외부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오롯이 나의 탓이다. 젠장! 내가 못난 놈, 내가 쓸모없는 놈이다.

 

적이 사라지면 오히려 무기력에 빠진다. 맹렬한 적의는 분노를 불타게 하고 삶은 활력을 띤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적에게 돌려진다. 환상 속에 살 수 있다. 저 놈만 없으면, 저것만 없으면, 한순간에 유토피아가 열릴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장애물이 제거되면 사라지는 것은 환상이다. 문제는 그대로다. 현실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해결방법은 없다. 적은 상대하기 쉽다.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을 구조 짓고 있는 틀은 알아보기도 힘들거니와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그것은 자연처럼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적응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틀 속에서는 어떤 해답도 없다. 젠장! 울하다..

 

독일인들이 그렇게 쉽게 반유대주의에 빠져들었던 이유다. 삶의 피폐를 모두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유대인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을 몽땅 차지했다. 유대인만 사라지면 자본주의 경제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빈곤과 퇴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는 유대인 탓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속되도록 유대인이라는 적을 독일인의 분노 속에 던져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진정 피로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는 사회인가? 이제 좀 지나갔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멘토 열풍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악착같은 자기계발과 자기착취 속에 기진맥진하면서도, 힐링 주사를 맞아가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친다.

 

그러나 한편에는 더 이상의 자기착취를 거부한 인생들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란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1~10%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낙오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 이후 최근에는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이들 세대 스스로가 자신들의 사회학을 생산해 내고 있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 『잉여사회』, 그리고 약간 다른 각도의 분석이지만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이 내가 읽은 책들이다.

 

『잉여사회』에서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은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이다.(리뷰) 나는 25년 전쯤에 입사원서 딱 두 장을 쓰고 취직했다. 그러나 이런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수십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를 쓰고도, 겨우 계약직으로나 사무실 책상을 가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구조적으로 많은 임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나 골라 쓸 수 있는 예비 노동자들이 항시 대기 중인 한 아무 문제도 없다. 여전히 많은 청춘들이 성과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자기착취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잉여사회다. 취업준비생의 사회는 잉여사회, 그것도 탈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잉여사회다. 애써 외면하며 “노력이 나를 바꾼다.”고 써붙여 보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처지가 바뀌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 신물이 난 청년들은 스스로 잉여를 선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잉여다. 우리가 병맛이다. 개콘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잉여들, 자신을 희화하며 차라리 즐긴다. 그 극단에 일베가 있다.

 

물론 우리사회는 여전히 성과사회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자기착취가 한쪽에서는 자기 희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과사회인 동시에 잉여사회이고, 자기착취인 동시에 자기 희화이다.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성과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해법은 ‘부정성’ 이다. 헤겔의 부정성, 니체의 ‘아니오’ 이다.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을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동일시하여 비판한다. 생각 없는 활동의 연속은 천재 백치, 자폐적 성과 기계를 낳는다. 니체는 “활동적인 사람은 보통 고차적으로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고 했다. 멈추어 서는 부정성, 무위의 부정성이야말로 사색의 본질이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부정성의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한병철이 아렌트를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인상이다. 아렌트는, 잘 모르지만 몇 권 읽은 책으로는, 행위와 노동을 엄격하게 구분 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은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이지 행위가 아니다. 설마 아렌트가 돈 받고 하는 일은 노동, 자유롭게 하는 일은 행위 따위로 단순하게 구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다.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유이다. 아렌트는 노동이 아니라 사유와 행위를 주장했다. 한병철의 과잉활동은 그것 자체로 성과사회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과잉활동을 굳이 아렌트의 행위개념과 무리하게 연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하튼 과잉활동에 대한 무위의 부정성을 강조하면서 한병철이 가져오는 것은 ‘바틀비’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I would prefer not to ~" 로 유명세를 타면서,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한병철은 바틀비의 무위를 규율사회의 무감각과 동일시하며 기각한다. 사실 『필경사 바틀비』를 직접 읽어보면, 이게 뭐? 하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의 필경사인데, 맡겨진 일들을 하나씩 거부한다. 그는 항상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며, 긍정문을 써서 거부한다. 끝내는 모든 일을 거부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가라는 말도 거부하고, 감옥에 가서는 먹는 것도 거부하고, 죽는다. 그런데 짧고 어이없는 이 단편을 두고, 많은 철학자들은 찬사를 쏟았다. 들뢰즈는 “바틀비는 간장병과 위축증 환자이면서도, 실은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의 의사, 메디슨 맨, 새로운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형제다.” 라 했다. 내가 바틀비를 처음 접한 것은 지젝을 통해서다. 지젝 역시 한병철과 마찬가지로 무위의 부정성을 역설했다. 이것저것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 조용히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과는 달리 바틀비를 그 무위의 부정성으로 보았다. 여기서 지젝을 설명하는 것은 복잡한데, 단순히 말하자면 이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틀 자체를 건드릴 때, 바틀비의 무위는 어떤 행위보다 파괴적인 전복이 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이제부터 “우리는 삼성의 주식을 사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면, 삼성은 일시에 파산할 것이다. 삼성의 주가는 삼성의 생산력 자체와는 관계없이 움직인다. 삼성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주가이지,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따위가 아니다. 혹은 “우리는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라며, 한꺼번에 모두가 현금을 인출한다면 금융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은행은 가상의 돈으로 움직인다. 은행에는 실제로 모든 예금을 인출해 줄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삼성이 만들어 놓은 시장의 틀,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무너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단순한 거부나 무기력, 무력함이 아니다. 목숨을 건 투쟁이다. 바틀비는 결국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가 무시무시한 부정적 힘이 되는 것이다.

 

한병철이 바틀비를 기각하는 데에는 성과사회에 대한 그의 대안이 다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부정성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성과사회가 한병철의 말대로 자기착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현상일 따름이다.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는 달리 외부의, 타자의 착취가 없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틀렸거나 제한적이다. 성과사회에서는 아니 잉여사회에서는 구조 자체가 착취를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승자독식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무한 경쟁을 유발하며, 자기착취에 빠져들게 한다. 수레를 훔친 도둑의 이야기와 같다. 수레를 샅샅이 뒤져도 무엇을 훔쳤는지 찾지를 못했는데, 사실 그 도둑이 훔친 것은 수레에 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수레 자체임이 밝혀졌다. 성과사회 안에서는 착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과사회라는 수레 그 자체가 착취이다.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는 잉여사회의 우리 젊은이들은 그 속임수를 벌써 알아챘다. 그 수레를 되찾기 위해, 그 틀을 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성과사회를 사는, 잉여사회를 사는 우리의 과제이다.

 

구조의 착취에 눈을 감은 한병철의 결론은 그러므로 모호하다. 결론에서 그는 난데없이 나쁜 피로와 좋은 피로를 구분한다. 피터 한트케를 가져와 ‘부정적 힘의 피로’를 주장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한병철이 원하는 사회는 ‘오순절-사회’와 같은 피로사회다.(신자가 아니므로 이 비유는 더욱 절망적이다.)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가 무장을 해제하여 막간의 휴식과 평화를 주는, 그런 피로 사회다. 그의 피로사회는 긍정성이자 또한 부정성인데, 그래서 그런 부정성의 피로가 말 그대로 ‘막간’의 휴식 외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카프카의 말처럼 피로사회의 끝에 치유가 저절로 올까?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한병철 역시 돌고 돌아 성과사회의 그 많은 ‘힐링’ 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뿐인가?

 

한병철은 재독 철학자다. 그는 독일사회와 한국사회가 본질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사회의 이 잉여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궁금하다. 처음에 나는 독일은 아직도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오히려 부러웠다. 독일이 상황이 좋은 것인지 한병철이 일면만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도 『투명사회』도 우리사회와는 어딘지 어긋나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하튼 저자 소개에 의하면 한병철은 『피로사회』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피로사회 잉여사회 부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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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9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좋은 리뷰를 본 적 없는데 이 리뷰는 책보다 좋군요....

말리 2014-07-09 19:34   좋아요 1 | URL
무슨 말씀을 ^^ ;; 감사합니다.

말리 2014-07-10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기: 어제 '너구리'가 몰고온 열기에 컴터 열기까지 더해, 끙끙거리며 리뷰를 쓰다 지쳐 버렸다. <우울사회> 편의 건강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기록해둘 가치가 있는데, 힘이 빠져서 그냥 끝내버렸다. 조금 덧붙여 둔다. P112~113의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관심사는 좋은 삶이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심을 뿐이다. 삶은 어떤 가치가 아니라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다.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건강이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왜 건강해야 하는지, 건강하게 오래살아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사라지고, 건강 자체가 목적이 된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아감벤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울사회의 우리는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이다. ... 요즘 우리사회의 건강 열풍에 딱 맞는 말이다. 건강하게 오래살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이 알려지고 너나할 것 없이 따라하기 바쁘지만, 정작 그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사고는 전혀 없다.

말리 2014-07-1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글을 읽다가.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은 적은 없는데, 어떤 글에서 보게되든 놀랍다. 한 편의 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회원들에게 소개해주려고 여기 옮겨 놓는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제가 누더기 옷을 벗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 옷을 힐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은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의 어깨나 벽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얼룩지니까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08 15:37   좋아요 1 | URL
자본주의는 좋은 삶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판타지를 제공합니다. 아메리카드림'이나 코리안드림처럼 말이죠.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열려 있지 않은 데 말입니다. 가짜 판타지를 작동시키고는 사람들이 그 목표를 향해 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뛰죠. 문제는 그게 다람쥐집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다람쥐집 통을 돌릴 때 나오는 에너지로 먹고 살죠. 결국 희생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