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 스완 댁 쪽으로, 특별한정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스완댁 쪽으로

 

 

마르셀 프루스트

1913~1927 (전 7권)

 

펭귄 클래식 2013

옮긴이 이 형식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약 15년간에 걸쳐, 총 7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참고로 1권이 700쪽이 넘습니다. 깁스를 한다거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거나 심심해서 죽어버릴 지경이 된다면, 우리는 과연 이 책을 읽어보게 될까요? SNS라는 강력한 매체가 우리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비유는 그 자체가 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아무튼 그만큼 읽기 힘든 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책이 ‘20세기 최고의 혁명적 소설’ 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끊임없이 인용되며 우리에게 호기심과 더불어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방송되었던 <내이름은 김삼순>에도 나왔었죠. 물론 삼순이 역시 프랑스 과자의 대명사라 할 마들렌이 나온다는 말에 파티시에로서 당당히 책을 펴들었다가 곧바로 던져버리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는 사실 책 이름만 잠깐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관점에 따라 그 드라마의 주제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그 마들렌과 콩브레가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들렌’ 하면 이 책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 프랑스에서도 그런다니 다만 우리의 논술지향 독서 교육이 가진 문제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엄두는 못 낸다고 해도, 적어도 마들렌과 꽁브레가 나오는 대목만은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독서회의 이번 주 선정 책인,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을 발제하면서 드디어 미루어만 두었던 것을 하게 되네요. 다행히 그 부분은 1권 앞쪽에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게까지 지루하거나 읽기 힘들지는 않습니다. 취향에 맞으면 한번 도전해 볼만합니다. 우리 회원들도 마들렌과 꽁브레과 나오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 옮겨 적습니다.

 

 

1부 꽁브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밤중에 깨어나 꽁브레를 회상할 때면, 나는 그것 중, 희미한 암흑 한가운데에서 오려낸 듯 두드러진 일종의 반짝이는 조각 하나밖에 보지 못하였고, 그 조각은, 다른 나머지 부분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건물 벽에 오색 꽃불의 섬광이나 전기 조명이 구획지어 놓은 조각들과 유사했다. 그 조각의 상당히 넓은 하단부에는, 작은 거실, 식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슬픔의 장본인이 되곤 하던 스완씨가 도착하던 오솔길의 초입, 올라가기에 그토록 가혹했고 그 자체로 불규칙한 피라미드의 몹시 좁은 동체를 구성하던 층계의 첫 계단을 향하여 내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던 현관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조각의 상단부에는, 엄마가 들어오시던, 유리 끼운 문이 있는 작은 복도와 나의 침실이 보였다. 한마디로, 항상 같은 시각에만 보이고, 그 주위에 있을 수 있었을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었으며, 스스로 분리되어 어둠 위에 홀로 떠 있는, 내가 잠자리에 드는 비극에만 필요한 최소한의 치장물이었다. 그리하여 꽁브레가 마치 가느다란 층계로 이어진 두 층으로 구성되었고, 그곳에는 오직 저녁 일곱 시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꽁브레가 그것 이외에도 다른 것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다른 시각에도 존재하였노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내가 꽁브레에 관해 뇌리에 떠올렸을 것은 오직 의식적 기억, 즉 지성의 기억에 의해 제공되었을 것인데, 의식적 기억이 과거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은 기실 과거의 그 무엇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지라, 나는 그 나머지 꽁브레에 대해 생각할 욕구를 영영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나에게는 죽은 것들이었다.

영영 죽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 p83~4 」

 

이 책의 화자는 불면증이 있습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면 자주 어린 시절에 살았던 꽁브레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화자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꽁브레는 늘 딱 하나뿐입니다. 혼자 보내야만 하는 침실에서 불안에 떨며 밤을 기다리는데, 단 하나의 위안이 엄마가 해주는 굿나잇 키스입니다. 화자는 오후부터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거나 만찬이 있는 날이면 엄마가 오시지를 않고 화자는 절망적인 밤을 보냅니다. 하루는 불안을 견디다 못한 화자가 밤늦게 손님을 배웅하고 자러 가는 엄마의 앞을 막아서서 굿나잇 키스를 요구합니다. 화자의 심신을 굳건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엄격함을 고집하던 엄마에게는 비난을 살 일이며, 굿나잇 키스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 날 일이지요. 그런데 그날 밤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자의 곁에서 자라고 하십니다. 아이가 몹시 슬퍼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요. 엄마는 화자의 옆에서 책을 읽어주시며 함께 밤을 보냅니다. 그런데 화자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내가 당연히 행복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고통스러웠을 최초의 양보를 엄마가 이제 막 나에게 하신 것 같았고, 나를 위하여 품으셨던 이상 앞에서 엄마가 보이신 최초의 체념 같았으며, 그리하여, 그토록 꿋꿋하신 엄마가 당신께서 꺾이셨음을 처음으로 시인하신 것처럼 여겨졌다.” “나의 유년시절에 일찍이 경험하지 못하였던 그 느닷없는 부드러움보다는 엄마의 노기가 나에게는 덜 슬펐을 것이다. 또한 그 순간 내가 불경스럽고 은밀한 손으로 엄마의 영혼에 최초의 주름을 그었고 그 속에 최초의 백발 한 가닥을 솟게 한 것 같았다.” 엄마가 자신에게 품었던 기대를 체념하게 만든 최초의 사건으로 이 기억은 화자에게 항상 따라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화자가 여태껏 꽁브레에 대해 가진 기억의 모든 것이었지요. 물론 다른 기억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의식적으로 기억해 내어야만 하는 것들이고, 그렇게 떠올려진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자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잠자리에 드는 비극’ 외에는 정말 꽁브레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불면의 밤에 늘 떠오르는 꽁브레의 추억과도 다르고, 아무 의미 없이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기억되는 과거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꽁브레가 출현합니다. 마들렌과자와 함께!

 

 

「꽁브레 중 내 잠자리의 비극과 그 무대가 아니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난 어느 겨울날, 내가 집에서 돌아오자, 추위에 떠는 내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그것이 내 습관이 아니건만, 차를 조금 들어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처음 싫다고 하였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가리비 조개껍질처럼 가는 홈들이 패인 판에 찍어낸 듯한, 작은 마들렌느라고들 부르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가져오게 하셨다. 그리고 이내, 흘려보낸 음울한 하루와 서글픈 다음날에 짓눌린 채, 나는 마들렌느 부스러기 하나가 잠겨 풀어진 차 한 술을 기계적으로 나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마늘렌느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나의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내가 소스라치면서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잔뜩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였고 나를 고립시켰으나, 그 원인의 관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희열이, 마치 사랑의 작용처럼, 나를 귀한 진수로 가득 채우면서, 생의 영고성쇠가 나와 무관하고, 나의 생애 닥칠 온갖 재앙이 무해하며, 생의 덧없음이 환상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아니, 그 진수가 내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나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보잘것없고 우발적 산물이며 필멸의 존재라고 느끼기를 멈추었다. 그 강력한 희열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희열이 차와 과자의 맛에 연관되어 있으되 그것을 까마득히 능가하며, 그것들과 같은 본질일 수 없음을 막연히 감지하였다. 그 희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을 어디에서 포착하여 인지한단 말인가? p85~6」

 

 

 

마들렌도 아니고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에 화자는 경이로운 희열을 느낍니다. 그런데 충만으로 가득한 그 경이로운 희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화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차를 두 모금, 세 모금 째 마셔 보지만 알 수 없습니다. 분명 마들렌 부스러기 차와 연관이 있기는 한데, 그 희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언가 잡힐 듯, 떠오를 듯 하면서도 달아나 버립니다. 화자는 자신의 오성에게 좀 더 노력하여 도망치는 느낌을 붙잡아 오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 따위 일은 잊어버리고 오늘의 근심거리와 내일의 욕망에 대해서나 생각하면서 차를 마시라는 비겁한 목소리를 쫒아내며, 오성을 닦달합니다.

 

그러다 문득 추억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맛은, 꽁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숙모님의 침실로 아침 문안을 가면, 숙모님께서 홍차나 보리수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곤 하던 작은 마들렌느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8」

 

그리고, 숙모님께서 보리수 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의 맛을 내가 알아차리자마자 (그 추억이 나에게 왜 그토록 큰 행복감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또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은 훨씬 훗날로 미루었지만), 숙모님의 침실이 있던 그리고 길에 면해 있던 낡은 회색 건물이 즉시, 극장 무대의 배경처럼, 그 뒤 정원 쪽에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지은 작은 별채에 와서 잇대어졌다. (그때까지 유일하게 내가 다시 보곤 하던 그 오려낸 듯 한 조각이다.) 그리고 건물과 함께, 도시 전체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시각들, 모든 날씨, 점심 전에 가서 놀라고 어른들이 나를 보내시곤 하던 광장, 내가 심부름 하러 가던 길들, 날씨가 좋을 때면 우리가 따라 걷던 산책로 등도 그 작은 별채에 잇대어졌다. 또한 일본인들이, 서로 분별되지 않는 미세한 종이 부스러기들을 물 가득 채운 도자기 그릇에 담근 다음, 그것들이 즉시 기지개 켜듯 늘어나고, 형체를 이루고, 색채를 띠고, 분화되어, 꽃들과 건물들, 견실하여 식별할 수 있는 인물들로 변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그 놀이에서처럼, 우리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댁 정원의 꽃들, 비본느 시냇물의 수련들,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과 그들의 작은 집들, 교회당, 꽁브레 전체와 그 주변 등, 그 모든 것들이 형체와 견고함을 얻어, 즉 도시와 정원들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p89」

 

화자는 자신의 오성을 강제하여 마구 닦달한 끝에 드디어, 엄마가 주신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에서 꽁브레에 살던 시절 레오니 숙모님이 일요일 아침마다 주던 마들렌과자의 맛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리고 숙모님의 마들렌 과자 맛으로부터 꽁브레 전체가 견고하게 살아납니다. 마치 일본인들의 종이놀이처럼, 엄마가 주신 찻잔 속에서 꽁브레가 활짝 피어납니다. 이렇게 되찾는 시절은 자발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자신의 오성을 강제하여 끌어낸 비자발적인 기억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오성을 강제하였던 것일까요? 마들렌 부스러기 차는 어떻게 화자의 오성을 닦달하여 꽁브레 전체를 기억에서 살려내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왜 화자는 차 한 모금에서 그토록 강력한 희열을 느꼈던 걸까요? 화자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을 훗날로 미루었습니다. 그 훗날의 이야기는 마지막권인 7권 <되찾은 시절>에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7권은 구경조차 못한 저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제목으로 보아,『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7권까지의 긴 여정 끝에, 화자는 마침내 그 시절을 되찾고 그 원인을 밝혀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아마도 이 고난에 찬 독서의 행군을 시작하여야겠지요. 물론 편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듣는 ‘유목, 탈주, 차이와 반복’ 따위의 개념들이 들뢰즈의 것입니다. 제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읽은 때가,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방송가가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여하튼 그 때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딱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삼식이가 옛 사랑 희진을 버리고 삼순이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책이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거지요. 그 때 드라마 감상문도 썼는데, 이제는 사라진 사이트여서 그 글이 공중으로 흩어졌는지 넷 상을 유령처럼 떠도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도 제가 뭐라고 아는 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읽으면 부끄럽겠지만 말입니다.

 

 

 

 

「본질 자체는 기호를 지니고 있는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기호를 체험하는 주체로도 환원될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은 애인으로도,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의 덧없는 상태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107> 」

 

이 문장에 꽂혔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요. 콩깍지가 씌었다느니, 벗겨졌다느니 하는 말들로 우리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대상인 애인으로도, 우리 자신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호’라는 말이 나오지요 : 기호를 지니고 있는 대상, 기호를 체험하는 주체. 기호란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기호’라고 합니다. 특히 7권에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은 없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혹은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 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을 늘어놓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건축되어 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23> 」

 

마들렌 부스러기 차는 화자에게 해석해야 할 기호를 방출했던 것입니다. 희진이나 삼순 역시 기호를 방출한 것이지요, 삼식을 매혹시킨 기호를 말입니다. 프루스트의 책은 수많은 대상들이 방출하는 여러 유형의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배움의 과정이지요. 이 배움을 통해 프루스트는 진리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본질적인 것은 기억과 시간이 아니라 기호와 진실이라고 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화자에게 소중한 인물들은 해독해야 할 기호를 방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물들에게서 더 이상 기호가 방출되지 않을 때, 그들은 잊히고 죽은 사람이 됩니다. 돌아온 희진에게 더 이상 삼식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렇습니다. 삼식이 해석해야 할 기호를 방출하는 대상은 이제 삼순입니다. 희진에게는 해독해야 할 기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과거의 희진와 돌아온 희진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의 희진은 삼식에게 강렬한 희열을 주는 기호를 방출했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는 아무것도 방출되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한 프루스트 특유의 통찰이 있다. 이 통찰은 우선 그것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가공되지 않은 물질도 아니고 자발적인 정신도 아니다. 물리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철학은 참을 원하는 정신의 소산인 직접적 언표, 명백한 의미를 전제한다. 물리학은 실재의 제약들에 순응하는, 애매성이 없는 객관적 물질을 전제한다. 사실들을 믿는 것은 잘못이다. 기호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진리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 해석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기호란 항상 불분명하고 함축적이며 내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어떤 꽃의 냄새와 어떤 살롱의 광경을 연결시키는 것, 마들렌의 맛과 사랑의 감정을 연결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기호이며, 배움이란 이 기호를 배우는 것이다. 기호로서의 꽃의 향기는 물질의 법칙들과 정신의 범주들을 동시에 뛰어 넘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137~8> 」

 

프루스트는 아무것도 해석할 필요가 없이 분명한 것들, 철학과 물리학은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기호들은 불분명하고 함축적입니다. 프루스트에게 기호는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해독해야 할 것입니다. 배움이란 이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들뢰즈는 기호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예술적 기호.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는 것은 예술입니다. 예술에서만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여, 본질이 표현되고 포착됩니다. 그러나 하위의 다른 기호들을 해독하는 과정이 헛되기만 한 시간은 아닙니다. 그 실패가 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가 그토록 지루하게 인물들을 관찰하고 소묘하고 온갖 잡다한 것들의 인상을 그려내는 것은, 그것들이 기호를 해석하는 소중한 단서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루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아마도 그 배움의 과정을 함께 밟아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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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3-2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주만에 <읽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권을 다 읽었다. 결론은 깁스를 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수십줄 혹은 몇 페이지에 걸친 묘사를 읽다보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잊어버리기 일수이지만, 사랑과 거짓말, 질투와 의심에 관한 그 섬세한 묘사는 어떤 소설에서도 보지 못했던 매력을 갖고 있다. 꽁브레와 마들렌 차가 문제가 아니라, 스완이 오데뜨에게 빠져 들어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퍼득이는 그 참혹한 심정에 관한 묘사가 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