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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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나와 내 또래 '그 누구'의 삶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설레며 기대하는 '첫'발을 내딛는 20대에 우리는 수많은 결정들을 하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좌절을 하게 된다. 그 좌절,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도 다 지나왔던 길이다. '현실'이라는 커다란 벽에 처음으로 있는 힘껏 부딪힌 우리는 기대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해가며 이만큼 자라왔다.

우리도 알고 있다.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걸. 그렇지만 우린 대단한 걸 꿈꾼 게 아닌데. 우리가 바란 것 아주 작은 것,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내려 놓은 것은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때가 되면 손에 들어올 줄 알았던 것들. (「현기증」 중)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던, 교과서와 드라마에서 보여주던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도전',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와 삶의 방식들을 바랄 수록 불행해질 수 밖에 없었다.

대단한 걸 바라지 않는 지금 우리 세대, 결혼도 출산도, 대단한 것도 바라지 않고 이른바 '소확행'만을 바라는 우리 세대는 어디서부터 좌절되어 왔을까?

「가만한 나날」 작품 속 '경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를 한다. 경진은 입사한 블로그 마케팅 회사에서 가상의 인물(채털리 부인)로 블로그를 개설하고 운영하며 홍보 요청을 받은 업체의 상품들을 실제로 사용한 척 포스팅을 작성했다.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부터 현실에 맞게 취업 준비를 해온 경진은 이 업무가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만큼 함께 입사한 동기들에 비해 인정도 받아서 일을 잘한다는 말도 곧잘 들으며 안정적으로 사회 생활에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경진이 포스팅했던 가습기 살균제 '뽀송이'를 보고 구매한 한 피해자가 경진(채털리 부인)은 괜찮은지 물어 온다.

경진은 첫 직장에서 맡은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지만, 알고보면 이 업무는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 '나'가 아닌 인물로, 사용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한 것처럼 블로그를 써서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진에게 왜 스스로 자신의 일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 돌아보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을 판단하며 삶을 영위하기에는 먹고 살기가 급급하기 때문에, 나보다 더 삶의 경험이 많은 이로부터 '사회 생활의 스킬'을 배울 수는 있었으나, '삶에 대한 스킬'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도 돌이켜보면 무엇이 옳은건지 잘하는 건지 알지도 못하고 해나가며 잘하고 있다고 우월감에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무언가 서툴어도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 모르는, 그런 게 있을 것 같았다.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문장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까지 읽고 나면 마음에 묵직한 것이 내려 앉는다. 나도 첫 직장을 그만두고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들은 온대간대 사라지고, 흔히 말하는 눈치껏 시키는 일 잘하는 회사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나를 가르쳤던 '선배'들이었다. 어떤 부당한 일 앞에서도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면 되는 당연한 이기심(그러나 이해는 된다)이, 혈기왕성했던 나의 젊은 시절에는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 일'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이었는지, 이렇게 변해 버린 내가 진짜 나인지 고민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경진의 모습이 꼭 '나의 모습' 같았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작품 속 연승은 3, 4년 사회생활을 하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퇴사하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되려고 한다. 연승은 '진아'라는 대학생 시절에 만난 연인이 있었는데, 결혼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자신의 꿈에 도움을 줄 법한 대학 선배의 점심 초대를 받고, 진아에게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한다. 연승은 꿈을 이뤄가고 있는 선배에게 함께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연승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한, 맨땅에서 감독으로 커리어를 쌓아 가는 일에 관한 실제적인 충고를 기대했지만, 소중한의 입에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쪽 길을 택했으나 점점 자신의 선택을 세상에 원한을 품는 알리바이로 삼게 된 사람들에 대해.

                                       

"똑같은 시스템 안에 있어. 개인사업자로 등록되어 있고, 세금 신고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쉽진 않아. 똑같이 다른 사람들 돈을 받는 일이라고 해도, 내가 페이스북에 후원 요청하는 글을 올리면 사람들이 굉장히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지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왜 남한테 돈을 달래?

 

나도 문예창작과를 졸업하며 많은 동기들이 고민한 것처럼, 이 작품 속 연승이 고민했던 것처럼 계속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볼 것인가, 현실과 타협하고 적당히 사회에 자리를 잡을 것인가의 기로에 서 본 적이 있다. 그땐 가난해도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뭐든 될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 달리 나는 적당히 타협했고, 나름대로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하고 있다. 근데 나도 '끝까지 해볼걸'하는 후회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나도 연승처럼 다 포기하고 꿈을 쫒아갔다면, 많은 감독과 작가들의 인터뷰 내용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 성공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10년 전에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열심'만으로 안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도 끝까지 안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아니까.

 

「현기증」 속 ‘원희’와 ‘상률’은 각각 보증금과 월세를 나누어 내며 동거 중인 연인이다. 생활 패턴이 달랐던 상률은 오랜 원룸 생활을 끝내고 이사를 가자고 원희를 설득한다. 상률에게 이끌려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원희에게 커다란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신혼부부’가 될 수 없는 그들의 현실, 볼품없는 중고가전으로 채워야 하는 어두운 방, 그리고 아직까지 딸의 동거 사실을 모른채 시시각각 딸을 걱정하며 걸어오는 엄마의 전화.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때」에서는 신혼부부에게만 제공되는 저금리 대출을 받기 위해 혼인신고를 먼저 한 채 동거 중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혹시 오직 저금리 대출 때문에 했던 혼인 신고때문에 자신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 다니고, 성가시지만 행복한 고심 끝에 가구를 결정하리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웨딩숍의 샹들리에 조명 아래 흰 커튼이 열리는 장면.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환하게 빛을 발하는 얼굴. 그녀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이런 식은 아니었다. 돈도 없고 소속된 직장도 없는 처지에 이런 일을 치를 거라고는, 이렇게 참담한 심정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 그런 고물들을 집에 들이는 것 자체가 싫어."

"사람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누구는 새거 사는 게 좋은지 몰라서 이러고 있냐? 나도 돈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고 싶어. 근데 우리 상황이 그렇게 안 되잖아. 이게 지금 우리 한계인 걸 어쩌라고?"

 

 

이 작품 속에는 우리가 흔히 어른들이 말해오고, 드라마 속에 보여왔던 이미지의 가정은 없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첫 직장에서 좌절하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경진, 자신의 꿈을 위해 결혼과 직장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전했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오도가도 못하는 연승,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월세를 반씩 내고 중고가전으로 집을 채우는 원희와 상률, 저금리 대출때문에 결혼은 하지 못하고 혼인신고부터 한 부부까지. 모두가 현실이라는 벽 앞에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포기해가며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만족하고, 행복하지 못한 청년들의 삶. 그리고 그런 현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세대 사이에 우리는 끼어있다. 그런 평범하고 가만한 나날들에 우리의 슬픔이 베어가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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