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뫼르소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생각보다 우리 삶에서 자주 하는 일이다. 이는 사회적인 관습에따라 연출되는 일종의 '연극', 사회 생활의 필요에 의하여 하게되는 거짓말을 뜻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럴' 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다른 사람들이 YES할 때, NO라고 하지 못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나의 감정과 위배되어도 그것에 대해 표현하기를 꺼려한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인 이유도 크지만,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보다는 그것을 비난하며 얻는 유희가 더 크기 때문에 그 연극에 모두가 동참한다. 특히 뫼르소의 상황처럼 어떤 특정 상황에서 공통된 감정 표현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러한 '규정된 감정 표현'에 대해 벗어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그래서 뫼르소가 지금 현재 사회에 살았다 하더라도 그는 '사형'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으니까.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 여자를 만났고, 개그 영화를 보기도 했으니까.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중간고사 전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갑작스러운 일에 평소보다 감정이 더욱 억제되어 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건네는 위로와 인사들이 나에게는 몹시 불편했는데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동안 사실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래서 친척 어른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울지도 않고 독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글쎄, 정말 슬프지 않아서였는지 너무 슬퍼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할 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이 내게는 낯선 것이었고, 그 때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이방인으로 만든다.

때론 정말 친한 친구의 기쁜 일이 나에게 기쁘지 않았던 적도 있다. 대학 발표를 기다리던 시기에는 함께 공부하고 어울렸던 친구들이 친구이자 경쟁자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각자의 길이 다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 다르기 때문에 유치했던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나와 성적이 비슷했던 친구가 수시나 좋은 학교에 먼저 합격하고나면 질투가 많이 나거나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우리는 표현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회 통념상 규정된 감정과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 우리는 사실 감정적으로 '이방인'이 된다. 그러나 그 이방인이 되는 것이 두려워 감출 뿐이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이고 반성하지 않는다. 배심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연기'했다면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이러한 '연기'를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지 귀찮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피고는 자신인데, 자신은 빼놓고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이 연극 속에서 뫼르소는 삶의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이는 뫼르소는 사회적인 관습에따라 연출되는 일종의 '연극', 사회 생활의 필요에 의하여 하게되는 거짓말을 거부함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내가 가장 자주하는 말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인데, 이 작품에도 그러한 말이 꽤 자주 등장한다. 내가 그 말을 자주하게 된 까닭은 꽤나 허무하고 자조적인 이유가 있는데, 서른이 넘으면서 내가 가치있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 의미가 없게 느껴졌고, 내가 사소하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생에서 의미있는 것들이 아닐까라는 전복적 사고가 일어 나면서부터이다.

스무살의 나는 목표를 이루는 것, 무언가를 얻는 것, 가지는 것들이 꽤나 중요했고, 삶에 있어 소소한 취미 생활이나 만남들은 그렇게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목을 메는 것들은 대체로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뫼르소의 말처럼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 언젠가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뫼르소 뿐 아니라 지금껏 살아온 모두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기요틴 앞에 서왔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은 모두가 정신적으로는 공허한데, 규칙과 관습에 따라 '도덕적 기준'을 정하고 그에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손가락질 하는 것은 '이 시대의 놀이' 같은 것이다. 그러한 놀이가 지금은 없을까? 최근에만 해도 '아이돌 도박녀', '90년대 인기 갑질가수'라는 키워드로 수많은 네티즌들이 배심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기자에 내뱉는 구형에 공감하며 그들을 누군가를(누구여도 상관없다) 규칙에 따라 피고인석에 앉혔다. 그들이 잘했다 잘하지 못했다를 판단할 자격은 나에게 없다. (뫼르소도 사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나)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건, 무엇이건간에 우리는 그것을 '유희'로 느낀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연출되는 이 '연극'을 거부한다면 당신도 유죄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이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미국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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