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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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사쿠라 신지는 동급생 하나모리 유키에게서 사신(死神)’ 아르바이트를 제안받는다.

사신은 미련이 남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사자(死者)’와 교류하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미련을 해소하게 해준 뒤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일을 한다.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사쿠라는 사이비종교가 아닐까 의심을 품지만

당장 급한 목돈과 함께 근무기간을 채우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라든가 이사카 고타로의 사신 치바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시공간 또는 그것을 관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 덕에 원제가 시급 300엔의 사신인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풀어낼지,

사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남자와 그를 스카웃(?)한 여자는 어떤 존재일지 꽤 궁금했습니다.

 

사신인 사쿠라와 하나모리는 어딘가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받고 배정된 사자를 만납니다.

명분은 남은 미련을 해소할 수 있게 도와준 뒤 편안한 마음으로 저세상으로 보내준다지만,

그들이 맡은 사자들 대부분은 쉽게 해소되기 힘든 미련 또는 어두운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맡은 사신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쿠라와 하나모리는 때론 어두운 사연의 이면을 캐는 탐정 역할을 할 때도 있고,

때론 사자들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들의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쿠라는 사자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며 조금씩 성장해갑니다.

 

설정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사자들은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육체를 갖고 죽음 전의 일상을 멀쩡히(?) 유지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 고유의 평행세계 속에서 소위 추가시간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덧붙이면, 현실세계에서는 자신이 죽은 뒤의 일상이 흐르고 있지만,

자신만의 평행세계 속 추가시간 안에서는 죽음 이전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는데

문제는, 추가시간이 끝나고(미련이 해소되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나면

그 추가시간동안 벌어진 모든 일들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소멸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사자를 담당했던 사신들은 그 추가시간의 일들을 기억하고 물건 등의 흔적도 보관하지만

6개월의 아르바이트 기간이 끝나면 사신 본인 역시 그 일들을 모두 잊게 됩니다.

 

꽤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고등학생인 사쿠라와 하나모리의 좌충우돌 캐릭터 때문에

이야기는 (이 작가의 전공인) 라이트노블에 가까운 통통 튀는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물론 사자들의 사연 대부분이 가족으로 인한 안타깝거나 고통스런 기억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과의 교류라는 기본 설정 때문에 이야기가 늘 밝고 튀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너무 무겁지도, 너무 날아가지도 않는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고 할까요?

 

라이트노블을 좋아하거나 힐링이란 주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호평을 줄 작품인 건 맞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르나 주제에 대한 취향을 떠나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모호한 판타지 규칙주인공의 감정을 강요하는 작가의 태도인데,

이런 장르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교하고 공감을 사야 할 이 요소들이 다소 부족해보였습니다.

사신의 역할과 한계, 평행세계의 존재방식, 저세상으로의 소멸의 계기와 방식 등

판타지 규칙 대부분이 너무 모호해서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던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에 명확히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 주인공 사쿠라를 통해 작가는 속죄, 구원, 기적, 감사, 행복 등 여러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과정이 자연스럽다기보다 대체로 억지스러워 보이곤 했습니다.

주인공의 감정이란 스스로 말과 행동으로 설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독자나 시청자나 관객에게 전달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쿠라는 사자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자주 자신의 감정과 성장을 설명합니다.

사쿠라와 하나모리가 10대 고등학생이란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때로는 감동마저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사신이라는 소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새롭고 신선한 사신을 만난 건 매력적이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 때문에 완벽하게 호감을 갖긴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제 감정이 무척 메말랐거나 너무 엄격한 잣대로 판타지를 들여다본 탓일 수도 있으니

사신 이야기나 라이트노블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사쿠라와 하나모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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