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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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항해

 

15세기는 돛을 세웠다. 돛을 세우고 바다로 나갔다. 더 먼 세상의 새로운 것들을 찾아 모험을 떠난 것이다. 1405년 어마어마했던 중국 정화(鄭和)의 항해 원정을 필두로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까지, 꿈에 부푼 돛들은 멈출 줄 몰랐고 세상은 문물교류의 파도 속에 출렁거렸다. 그러나 15세기의 우리들은 땅 위에 머물렀다. 땅을 움켜잡고 왕권 강화에 힘썼으며 땅을 부여잡고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몰두했다. 어째서 우리들은 대세에 합류하지 않고 다른 행보를 취한 것일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는 15세기의 목전에서 국가의 운명이 뒤집힌다. 475년간 통치해왔던 고려가 물러나고 새로운 왕조, 조선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외국과의 교역에 개방적이었던 고려와는 달리 폐쇄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돛도 크게 부풀지 못했다.

 

<15세기-조선의 때 이른 절정>은 항해 원정을 비롯, 활자와 포탄의 발명과 같은 15세기 세계 전반의 분위기를 개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동시대의 흐름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세계 속에서의 조선의 위치를 가늠해보게 하며 한 국가를 단독으로 바라볼 때보다 훨씬 폭넓은 관점을 갖게 해준다. 특히 문물의 발달 면에 많은 관심을 둔 이 책의 경우 세계의 발전상과 견주어 보기에 용이하므로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15세기 조선이 쏟아낸 수많은 업적들을 통해 다시 묻는다. 진정 우리에게 돛이란 없었던 것일까?

 

 

 

왕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종묘

 

조선왕조가 그 당시 사람들에겐 어떤 국가로 비춰졌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후대의 자손들(우리들)에겐 그리 칭송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일 대한민국에게 과거의 역사 중 어느 시절이 가장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번에 '조선시대'라고 대답할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은 당쟁, 유교사상, 쇄국정책이라는 오명을 가진 조선시대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는 조선시대의 장점을 미화시켜 역사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세히 알지 못했던 조선의 모습 속에서 근간이 되는 어떤 힘을 찾아보려는 의도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시선은 '전근대'의 마지막 시대였던, 근대를 갈구한 이들이 그토록 저주하고 경멸하던 조선 500년으로 향하고 있다. (중략) 근대를 우회하거나 추월할 '가지 않은 길'이 그 500년 어디엔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15세기-조선의 때이른 절정>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며 조심스러우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조선 500년의 첫 세기에 발을 디딘다. (p.4)

 

 

 

온일강리역대국지도(좌), 천상열차분야지도(우)


15세기는 폐쇄적이었지만 드넓은 바다와 하늘에 대한 탐구만큼은 열성적이었다. 태종때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의 경우 직접 측량하여 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의 지도들을 고찰한 수준높은 세계지도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한국사 최초로 만들어진 과학적 천문도였으며 새 왕조를 연지 불과 3년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열성의 배후에는 통치, 더 나아가서는 왕권의 강화라는 목적이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는 주변국을 아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제작되었으며 중국 지도를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실제보다 크게 그려 조선의 위용을 나타냈고,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천명을 받아 새 왕조를 열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조선왕조의 건설을 정당화했다. 또한 천명을 받은 왕이라면 완벽한 천문역법을 제정해 반포해야 했기에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유물들은 왕권강화라는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명을 바쳐 제작하였기에 서양보다 100년을 앞서 정확한 아프리카를 담은 지도, 독자적인 천문학 데이터를 활용한 천문도로 우리의 역사에 남아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정치를 위한 '명목상의 무엇'이 늘 명목으로만 그치는 오늘날보다 훨씬 본받을 것이 많은 것 같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에 세워진 무인석(좌), 왕(王)자가 상징하는 도끼(우)

 

조선 초기를 보면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이 컷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정권이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왕권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기 마련이지만 조선의 경우 유독 심하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태종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이씨가문의 집안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구석도 있다. 태종 이후 세종 정도를 제외하면 어린 왕, 이른 죽음, 형제, 친척간의 권력싸움 등으로 왕위의 계승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국이후 점차 안정을 찾아야 할 왕위는 늘 불안했고, 왕들은 지방 향리를 아우르며 중앙집권을 추구하려는 공격형 목표와 타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어형 목표를 양손에 쥐고 굳세게 '왕권 강화'를 다짐했던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왕(王)이란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상형한 글자'라는 구절과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누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진정 비장하고 비정한 15세기 조선의 왕위쟁탈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무보(舞譜)와 한글


15세기 조선에서 특이한 것은 정치적인 혼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문화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안정적으로 장기집권을 했던 세종 시대의 한글, 악기, 무보(춤동작을 그림으로 기록한 것), 다양한 과학기구들은 물론이고 그 전후로도 농업과 관련하여 많은 기계와 기구들이 발명, 제작되었다. 그래서 사실상 조선 초기의 문화와 과학분야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만큼 진보적이고 우수했고 중국과 일본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지 않았다 해도 세계의 발전 속도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화포처럼 국력신장에 도움이 되는 무기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농업에 몰두한 덕에 과학과 천문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좌), 세조의 초상(우)

 

<15세기-조선의 때 이른 절정>에서 '때 이른 절정'이란 세종대를 의미한다.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다지만 만일 인품과 지혜가 뛰어났던 문종이 좀 더 오랫동안 집권했더라면(그는 2년간 집권하고 붕어했다), 만일 한명회에게 홀린 카리스마 수양대군(세조) 대신 당대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이 집권했더라면 조선초기의 절정은 좀 더 지속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를 제치고 왕이 되었건,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았건, 조선 초기의 왕들은 국가의 기초를 다지고 제도와 관직을 정비하며 여러가지 업적들을 남겼고 조선을 건국하며 가졌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안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하며 형식적으로만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제후국에 맞게 형식적인 격을 낮추면서도 왕의 영향력이 지방에까지 미치는 실질적인 힘을 키웠고 이는 중국의 황제도 실현하기 힘든 정치적 이상이었다. 어쩌면 세종이라는 왕의 능력이 특출했고 집권시기도 상당히 길었기에 우리는 '때 이른 절정'을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가지 국내외 정세를 비교해 보건대 조선초기는 점진적인 발전의 가도를 달렸고, 해외에도 뒤쳐지지 않았으며, 신생국에서 안정된 국가로 어엿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왕위 쟁탈전과 정치적 상황, 그리고 중국, 일본, 여진 등을 포함한 주변국들과의 대외적인 관계, 제도의 정비와 문화, 과학 기술의 발전 등 조선초기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보았을 때 우리에게도 부풀어오른 '돛'은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비록 바다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실을 다지고 이땅에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보이지 않는 돛이었다.  유교적 이상과 농본주의를 선택한 것이 역사적으로 탁월한 결정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적어도 조선초기에는 우리 고유의 사고방식과 유교적인 사고방식이 조화를 이뤘고, 농업과 관계된 다양한 학문들이 발전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전도유망한 이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15세기 조선은 폐쇄적인 상황속에서도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키며 나름대로의 돛을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던 시기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 덧붙임 : <15세기-조선의 때 이른 절정>은 조선 초기의 역사를 한껏 아우르면서도 단순한 서술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몇 가지 설(說)이 있는 것은 정리해서 밝혀두고, 좀 더 집요하게 파고들 부분들은 상세한 설명을 보탠다.  책에 실린 사진들도 '어른들을 위한 역사 학습서'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과 도해들은 15세기 조선과 세계의 주요점에 이해를 더하고 설명을 깊게하기 위해서이며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과전법에 대한 여론조사와 이에 대한 찬반의 역학관계, 사림파와 훈구파의 실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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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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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열대야를 견뎌보고자 TV를 틀었다가 매우 섬뜩한 장면을 발견했다. 그건 스마트폰 광고였는데, 평온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세상의 아름답고 행복한 장면들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었고, 그 매끄러운 사각 프레임 속에는 경이로운 자연으로부터 이국적인 여행지, 생활 속의 크고 작은 기쁨의 순간들까지 행복이란 행복이 야무지게 한 가득 챙겨졌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만일 이 광고를 10년 전쯤 보았다면 전자기기와 인간적인 삶의 조화를 잘 표현했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 전쯤이었다면(비록 스마트폰은 없었겠지만) 침묵 속의 진한 감동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며 극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에 본 이 광고는 말 그대로 '섬뜩'이었다. 거기엔 스마트폰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전자기기에 매몰돼 자아를 상실한 몽유병 환자의 모습만이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한참 동안 동영상을 보다가 내리면서 문득 뒤돌아볼 때 남아있는 사람들의 태반이 스마트폰에 몰두해 있는 상황을 목격한다. 내가 빠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거기서 깨어나 보니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도 저렇게 넋을 놓고 자그마한 사각 프레임에 푹 빠져 있었을까? 광고는 그와 같은 각성효과가 있었다.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느새 일부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일깨워주는 효과. 여기서 스마트폰 운운하며 우리의 매몰된 모습을 언급한 것은 스마트폰 애용가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바우만식으로 표현하면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사각 프레임 앞에 방치된 우리들에게 더 없이 좋은 각성제가 되어줄 거라 덧붙이겠다.

 

스마트폰과 불평등. 언뜻 보기엔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바우만을 통해 이 책의 메시지를 읽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불평등 사회에서 피라미드의 상위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궈놓은 것이 소비사회라고 말한다. 소비를 통해 어떤 '사물'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실망을 회피하고 자기 맘대로 처분하고 다룰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경쟁을 통해 얻지 못한 지위나 부에 대한 좌절을 소비로써 무마시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물들을 통해 경쟁에서 얻는 것에 대한 만족을 대체한다. 즉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고 경쟁하여 얻을수 없는 것들을 소비로 대리만족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소비사회에서 상당히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사물이므로 이에 몰입된다는 것은 구입이건(사물의 소유) 사용이건(사물과의 관계) 불평등을 감수하는 우리 모습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피라미드의 두터운 하층을 차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에 집중하는 동안 소비를 부추키고 그를 통해 이윤을 얻는 상층 사람들은 더욱 더 큰 부를 얻는다. 너무도 쉽게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능력있고 수완좋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게 되면 모든(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에 승복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고 최상의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한 개인의 능력과 재능은 그 사람이 노력하여 얻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남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같은 노력을 해도 훨씬 우월한 결과를 창출하며 때로는 남들이 10배의 노력을 해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선천적인 능력이 탁월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은 애초부터 불공평하게 시작되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피라미드 속의 위치가 있는 듯하다. 마치 아주 오래전 주어진 신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바우만은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더이상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작금의 경제적 계급사회의 문제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날이 온다고 믿는다.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음에 눈뜨는 우리들의 각성과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용기, 그것이다.


오래전 신분사회가 곪아터져 모순과 폐단을 드러냈을 때 피라미드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향해 봉기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징후는 월가 점령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재능을 두루 갖추고 경쟁에서 정당하게 더 많은 것을 얻은 사람들에 대해 유독, 무척이나 관용적이고 심지어 선망해 마지않는 미국 사람들이 피라미드 꼭대기의 1%를 향해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는 것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여기서 경쟁의 정당함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이 책에서 밝히는 상위 1%, 혹은 10%의 가진자들과 하위층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상황을 비교한 수치를 보면 거의 경악을 할 정도이며 그것이 비록 정당한 경로를 통해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무언가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최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의 부의 종합은 최하위 5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p.18)

  

미국진보센터에 따르면, 앞서 말한 약 30년 동안 하위 50퍼센트의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6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은 229퍼센트 증가했다.(p.23)

 

우리 가운데 가장 어리숙한 사람들조차도 영국의 최고경영자들의 평균 보수가 지난 30년 동안 약 4000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이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들'의 수와 능력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p.94)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대 경제의 모순과 불평등에 대해 고발하고 그것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위에서 언급한 소비사회의 진실 뿐만아니라 더 많이 가진 자들에 의한 경제를 옹호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낙수효과')의 헛점, '경제성장'의 배신, 부의 배분방식에 침묵하는 GNP(국민총생산) 통계수치 등 새롭게 눈뜨고 각성해야 할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여년 전, 데이비드 헨리 소로우가 월든의 호숫가에 손수 집을 짓고 스스로 경작하며 새로운 경제생활을 도모했을 때 그것은 담대한 도전이었고,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그는 이미 1800년대 당시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깨달았고, 노동의 가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간파했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실한 관계가 결여되고 있음을 인지했다. 오늘날 바우만이 바라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소로우처럼 자발적 가난이나 자력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주류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모든 모순적인 체제와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인간의 참된 삶에 눈 뜨게 하려는 시도에서는 월든과 유사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로우의 오리지널 월든이 있고, 심리학자 스키너의 디스토피아적 월든2가 있으니 바우만이 꿈꾸는 평등과 인간가치 우위의 사회는 '월든3'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바우만이 불평등으로 가득한 현재의 경제상황에 맞서 꿈꾸는 사회는 탐욕이 사라지고 인간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가 회복되는 사회이다. 구체적으로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불평등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박하향처럼 싸한 각성제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말한 곤경은 결국 친절한 협력, 상화환계, 공유, 상호 신뢰, 인정, 존중 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탐욕에 이끌린 소수의 축재가 모두의 행복에 이르는 왕도라는 믿음에서 도출되는 존재양식)으로 대체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p.109)

 

탐욕에는 유익한 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탐욕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으며, 누구의 탐욕이건 유익하지 않다.(p.109)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 상호존중, 연대, 우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행동이라든가 실질적인 삶의 전략을 잘 살펴보라.(중략) 여러분은 이상과 현실, 말과 행위 간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p.110)


분명 인간적인 것을 갈망하면서도,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뚜렷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관념과 그로인해 유지되는 경제체제 속에서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비록 그것을 느낀다 할지라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저 모른척해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우만의 메시지를 읽었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더 각성해야하고 조금 더 달라져야 한다. 미래의 사회에 대해 너무도 걱정스런 마음으로, 혹여 파국을 맞이해야만 행동을 개시했던 수많은 전례들을 답습할까 두려워 진심에 진심으로 조언하는 노학자의 간절함과 그의 어렴풋한 희망에 작은 싹이나마 틔우려면 후대를 이어갈 우리들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룰 사회를 월든3라 부르던 그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지금부터 해야할 일은 소비사회에서 한발짝 멀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이 사실을 스마트폰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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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12-2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 책에는 이상하게도 손이 가질 않고 있어요.
오랜만입니다. ^^

탄하 2013-12-27 18:10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오랜만이예요. 거의 7~8개월은 된 것 같네요.
저도 바우만은 <액체근대>만 읽으려 했는데,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재미있을 것 같아 읽었다가 별 재미 못보고(하지만 후반부는 재밌어요) 있던 차에 이 책은 짧아서 한 번 읽어봤습니다. <고독을..>이 유려한 장문에 비틀어쓰기까지 곁들여져 읽기 어려웠다면 이 책은 더 명료하고 간결해서 수월했네요. 흐..그래도 아직 <액체근대>는 손도 못댄 상태라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