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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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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쇼핑을 즐기거나 레스토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도시를 방황하는 사람들. 도시를 방황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 거리를 서성이며 시간을 때우는 사람들, 집을 나와 정처없이 걷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를 탐색하는 사람들.

도시를 탐색하는 사람들 가운데 안도 다다오가 보인다. 물론 대한민국 도시 한복판에서 그와 마주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만큼은 정신없이 도시속에 몰두해 있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래서 때로는 인생을, 때로는 예술을, 때로는 자연을 들려주는 다다오의 중심에는 언제나 도시와 도시 속의 건축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사색들은 건축으로 귀결되며 다시 건축으로부터 새로운 인생과 예술과 자연의 의미들이 돋아난다. 또한 청년 시절 방문했던 도시들을 건축가로서 다시 방문하고 또 방문하는 경우도 있어 한 도시에 관한 그의 관점과 생각들이 확장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다오가 부단함으로 세계 도시를 여행하게 된 것은 (과장을 조금 보태) 순전히 르 코르뷔지에 탓이다. 다다오는 그가 흠모하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책에서 '젊은 날의 여행은 깊은 의의를 갖는다'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글귀 하나로 무모한 도전을 선뜻 결심한 그가 외람되지만 엉뚱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하필이면 다소 건조하고 비판적인 그 책, 근대 건축의 이상을 역설한 그 책 <건축을 향하여>에서 '여행'이라는 단어를 짚어냈을까? 아마도 이것은 '건축'하면 서구의 건축을 의미했던 당시 관념과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건축적 열망이 합작해낸 위대한 결심이었을 것이다. 만일 이 책을 읽는 건축학도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의 여행벽에 전염되리만큼 다다오의 절박함은 강하게 전달되어 오며 동시에 열정을 공유하고픈 마음을 선동질한다.

다다오에게 있어 여행을 통해 홀로 건축을 배워나가는 습관은 청년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권투선수를 하다가 독학으로 건축을 터득한 그가 오늘날 세계 건축계의 거장이 된 이면에는 이처럼 지치치 않고 낯선 도시에 무수한 발자국을 찍는 성실함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독특하게 접혀있는 이 책의 표지가 궁금해 그것을 다 펼쳐보았는데, 그러다보니 반투명 마일라지(紙)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던 그의 이력을 또렷한 붉은 글씨로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건축 사무소를 설립한 것은 1969년. 그로부터 이렇다 할 경력으로 꼽힌 일본 건축학회상을 받은 것은 1979년.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묵묵하게 초라한 사무실을 지켜나갔던 10년의 시간이 역력히 읽혀지는 순간이었다. 뿐만아니라 이후 2005년까지 변함없이 주요한 업적을 남겨왔다는 점도 지치지 않는 그의 열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요즘들어 달인, 달인하며 개그맨 김병만의 성공 스토리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다다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달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가 건축을 결심하면서부터 쏟아부은 노력들, 여행을 통해 온 몸으로 느끼고, 종이에 그리고, 가슴으로 사유한 결과물들은 오롯이 콘크리트에 담겨 그와 함께 양생되고, 견고해지고, 공간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은 단순히 다다오의 건축 여행기라기 보다는 콘크리트에 사유를 담아갔던 한 달인의 숙련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헌책방에서 건축서적을 뒤지고, 불편한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 때론 한달 동안 발이 묶이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또 다른 여행을 위해 애써 모은 돈을 모두 투자했던 그의 청춘이 이 책에서 유독 빛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이 책은 다다오의 건축적 사유가 더 두드러지는 책이다. 폐허에서 느낀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해 롱샹성당에서 배운 르 코르뷔지에의 빛, 톰블리의 작품에서 떠올렸던 '과정의 건축', 폴락의 드리핑 페인팅을 보고 시작된 '건축의 앵포르멜'에 대한 사색, 일본 경제의 탐욕스런 소비문화에 대항하고자 했던 '나카노시마 프로젝트' 이야기 등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울림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적 사유들은 그의 인간적인 갈등과 방황의 흔적때문에 더욱 고귀하게 전달되오는 것 같다. 뿐만아니라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심심치 않게 해주는 요소가 된다. 흔히 건축가의 여행, 혹은 건축기행이라고 하면 해외의 건축 명물을 답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이 책만큼은 예술작품과 건축, 혹은 건축물 사이에서 만날 수 있는 사색을 통해 그의 건축관과 도시관을 더욱 많이 담아냈고 젊은 시절의 방황,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건축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그의 건축세계를 이해하는데 묘한 친밀감마저 전달되어 온다.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시에' 살지 않고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나'라는 주체를 '도시에' 방치하지 않고 '도시를' 목적어로 껴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로 안도 다다오처럼. 만일 물성 가득한 회색빛 도시에서 공간을 느끼고 내면의 예술적 사유를 불러내고픈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다다오에게서 영감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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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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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는 19세기 대표적 낭만주의 음악가로 대중적으로는 발레 음악에 의해 더욱 친숙하다. 특히 <백조의 호수>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는 너무도 유명해서 음악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따라 읊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발레에서는 이 멜로디가 명성에 걸맞는 주요 솔로나 빠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에 사용되지 않고 지극히 서술적인 장면(지그프리드 왕자와 사냥꾼 무리들이 호수를 둘러보는 장면)에서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백조의 호수>는 발레 음악이니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발레 공연과 함께 감상해야 겠다고 작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처럼 클래식 음악은 우리에게 친숙한 면이 있다고 해도 대체로 피상적이거나 협소한 범주에 머물 뿐 음악가 한 사람의 세계, 악곡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는 친숙함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감상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과 친해지기 위해 이런 저런 음악회에도 가보고 입문서를 읽어보기도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르지 않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그 세계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특히 대중을 위한 클래식 입문서들은 '어떻게 감상을 하는가' 보다 '이런 것들을 감상해 보라'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아 감상자들은 여전히 홀로 남겨진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은 조금 독특한 성격을 가진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의 7번째 책으로 차이콥스키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세계, 음악 해설 등까지 아우르고 있어 전기이면서도 평전의 성격이 느껴지며, 무엇보다도 차이콥스키의 초기 작품들과 음악적 성장 및 변화를 찬찬히 짚어갈 수 있어 더없이 소중한 체험이 된다. 또한 이 책은 두 가지의 이야기가 병행되는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큰 틀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음악 이야기를 자연스레 엮어가고 중간 중간 삽입된 '간주곡'에서는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가 차이코프스키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어 좀 더 깊이 그의 음악에 다가갈 수 있다. 뿐만아니라 실제 음악을 들어볼 수 있도록 제공된 2장의 CD에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차이콥스키의 곡들이 의외로 많이 담겨있었고, 그가 살던 19세기의 전반적 배경, 러시아의 문화적 배경, 관련 인물 설명, 각 악곡의 해설 및 비평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어 커다란 차이콥스키 선물세트를 받은 것처럼 풍성했다(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으로 접속하면 차이코프스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음악까지 들어볼 수 있다). 사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조금 촌스럽다 내지는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과연 '그 삶과 음악'이라 할만하다는데 한 표 던진다. 이쯤되면 클래식 음악의 초보도, 조금 익숙한 사람도 무난히 차이콥스키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름아닌 그의 내면의 세계이기에 더욱 신비롭다(악곡마다 그의 내면을 설명해주는 부분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차이콥스키의 생애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동성연애자였으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한 차례의 이혼을 겪었으며, 후원자를 자처했던 폰 메크 여사와의 묘연한 관계, 어린 시절부터 따라다녔던 각종 신경증세, 자살 의혹에 이르기까지 꽤나 고단한 인생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아이였으며, 상당히 감성 중심의 인물이었다. 사진 속의 그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냉철하고 근엄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수줍음을 많이 타고 온화했으며, (저자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라 밝혔지만)사람 만나기를 힘들어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사교성이 풍부했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정중하고 자기성찰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감이 지나친 탓인지 브람스, 바흐, 베토벤 같은 음악의 거장들에 대해 치기 어린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예술가 기질'이 농후한 다채로운 내면 세계의 인간이었다. 이러한 내면 세계는 동생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들, 자신이 적어 놓은 글들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며 그가 가진 고뇌이건 가식이건 열정이건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서신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았던 인물로는 고흐를 쉽게 떠올릴 수 있겠는데, 차이콥스키 역시 못지 않게 많은 글을 남겨 지금도 그의 가슴을 읽어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기도 하다.

다양하면서도 강렬했던 차이콥스키의 내면 세계는 그를 항상 반듯하고 고매한 길로 인도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에서 만큼은 무척 정직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색채를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가 발레를 비롯 극음악에 뛰어났던 것도 그의 극도로 섬세한 감수성에 비춰보았을 때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서 차고도 넘치는 감정들은 극음악의 인물들을 통해 표출되어야만 진정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다른 음악에서도 극음악과 같은 느낌이 흐른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이것은 음악을 들어봐도 확실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좀 '풍만하다'는 느낌이라면 모를까 초보로서 선뜻 공감하란 쉽지 않다. 하지만 <피아노 로만스 바단조 Op.5>에서 나타나는 쇼팽 풍과 동양적인 느낌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고, 전반적으로 차이콥스키가 추구했던 러시아적 음악에 대해서도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악곡의 해설과 나의 느낌을 대조해 보며 다소 생소한 곡들(물론, 익숙한 곡들도 있다)을 감상해보는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특히 그의 10대, 20대 시절의 초기 곡들과 소품, 가곡 등 처럼 그의 음악 세계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곡들로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나는 발레를 참 좋아했기에 자연스레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다. 한때는 그의 3대 발레곡을 전막이 담긴 CD로 구해 들으며 그와 무척 친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이제서야 나는 이 책을 통해 차이콥스키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반갑게 손을 내밀며 앞으로 좀 더 친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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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그림책
데보라 언더우드 글, 레나타 리우스카 그림, 홍연미 옮김 / 미세기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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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용한 그림책>과 한 쌍이 되어 줄 <시끄러운 그림책>이다. 지난번엔 조용한 순간들을 느껴봤으니, 이번에는 시끄러운 순간들도 느껴봐야 감성에 균형이 잡히겠지? 그래서 <조용한 그림책>만큼이나 숨죽여 찬찬히 들여다 본다. 세상의 어떤 순간이든 놓치지 않고 음미해 보려는 노력으로. 아이들 만큼이나 천진한 감정을 회복해 보려는 욕심으로.

늘상 왁자지껄 쿵쾅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 소란 가운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의심이 가지만 아이들 본연의 느끼기 실력은 어른들의 상상을 훨씬 능가한다. 비록 '조용히 해!'라는 한 마디에 움찔할지언정 엄마 아빠를 화나게 하는 시끄러움과 그렇지 않은 시끄러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시끄럽다는 것이 단지 큰 소리가 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알며, 그것을 둘러싼 상황과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지까지 모두 알고 있다.

개구장이 동물들이 들려 주는 시끄러운 순간들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수 많은 시끄러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기에는 한바탕의 소동을 겪으며 느끼는 이른바 '표준형' 시끄러움이 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주변은 조용해도 마음만 소란해지는 '특수형' 시끄러움도 있다. 그리고 시끄러움 속에는 두려움이나 긴장감, 당황스러움같은 감정이 함께 숨어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금만 딴 곳으로 눈을 돌리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아이들에겐 '와장창형' 시끄러움이 종종 발생한다. 흥미로운 놀이에 열중하다 보니 주변을 살피지 않아 물건들을 쏟아뜨리는 까닭이다. 반면 오랜만에 맘 잡고 조용히 행동하려는 아이들에겐 '바스락형' 시끄러움이 영 귀찮게 한다. 특히 극장 안에서의 바스락 거림이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시끄러움인가보다.



하지만 시끄러움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끄러움을 통해 느꼈던 두려움과 짜증과 당혹스러움을 모두 덮어버릴만한 통쾌하고 신나고 아름다운 시끄러움도 있다. 똑같이 시끄러운 것인데 어째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불꽃놀이의 화약 터지는 소리는 다르게 들릴까? 아이들은 그 까닭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될 것이며 시끄러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시끄러운 그림책>은 늘 조용히 하라는 강요 속에 맘껏 펼치지 못했던 개궂고 즐겁고 때론 아찔한 순간들을 불러내 아이들에게 되돌려주고 마음을 유쾌함과 활력으로 가득 차게 한다. 설사 당혹스럽고 놀라는 순간이 펼쳐진다 해도 아이들은 각자의 경험과 대조해 보며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니 유머가 매우 깜찍하다. 이것은 비록 시끄럽고 짜증나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가볍게 웃고 예쁘게 살아가자는 동물 친구들의 아름다운 메시지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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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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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대의 다양한 예술분야를 접하다 보면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용어와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그로테스크하다는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정도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도 막상 느낀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할라치면 조금 난감해지는 게 사실이다. 비록 사전은 '그로테스크'에 대해 '터무니 없는', '기괴한'이라 정의하고 있지만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감상한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정의 역시 충분치 못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갑게도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의 발생에서부터 현대적 의미로의 정착까지 수세기에 걸친 성장 과정을 미술과 문학 작품 속에서 추적하고,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가 내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착해 그 의미를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소 어렴풋하게나마 이어져 온 용어의 역사에 기대어 그로테스크가 과연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p.26)

그로테스크는 15세기말 이탈리아 곳곳에서 발굴된 고대 장식미술을 지칭하던 용어로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 동굴)'에서 유래했다. 당시 바사리(Vasari)를 위시한 여러 비평가들은 자연의 원리에 어긋난 이 장식물들에 대해 혹평을 했지만 예술가들의 새로움을 향한 의지를 제어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도 혹평과 예찬의 대결구조를 유지하면서 어엿한 예술 양식의 하나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로테스크의 기원에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아름답고 화려한 아라베스크와 뚜렷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모호하게 동일한 양식인 것처럼 간주되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독립된 양식으로 정착되었는데 이즈음 그로테스크를 미학의 범주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처럼 역사속에서의 그로테스크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으며 과격한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듬어졌다.

그로테스크가 미학적 대상으로 탐색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고급 예술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자연을 닮은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15~18세기 사람들, 이후 19세기 헤겔에게는 반인반수나 동물에서 식물로 변이되는 기이한 이미지들이 저급한 예술적 유희로 비춰졌을 법도 하다. 더욱이 그로테스크는 한때 섬뜩함 보다는 '우스꽝스러운'의 뉘앙스를 주는 의미로 사용된 적도 있으며 미학의 범주로 고려된 배경에도 캐리커처의 활성화에 힘입은 바 있어 호응도와 위상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그로테스크가 유럽 각국으로 전파되면서 발생한 미세한 사전적 의미와 연극(특히 질풍노도 드라마라 불리는 것)이나 기타 예술영역을 통해 대중과 친숙했던 그로테스크의 일면을 상세히 언급해 나간다. 뿐만아니라 여기서는 저자의 견해와 더불어 다른 학자들의 견해도 함께 들을 수 있어 그로테스크에 대한 지식의 기본을 갖추는데는 더없이 훌륭한 저술이다.

그로테스크는 미술분야의 라파엘로를 필두로 악마숭배주의의 보스, 보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브뤼헐 등의 화가들을 거쳐 현대의 데 키리코, 달리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고, 문학에서는 괴테, 위고, 포우, 호프만, 뷔히너, 카프카, 토마스 만 등 이른바 대 문호들을 통해 그 맥을 이어왔다. 이렇게 예술의 거장들이 그로테스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에는 인간의 힘(상상력)만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려는 욕망이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6세기 그로테스크를 지칭하던 또 다른 이름이 '화가의 꿈(sogni dei pitton)'인 것을 보면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기괴한 이종교배를 시도하고 꿈같은 비현실적 공간을 추구하는 주체가 '화가', 더 나아가서는 인간임이 뚜렷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자인 볼프강 카이저는 그로테스크의 창작이 "현세에 깃들어 있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불러내어 그것을 정복하는 일"(p.309)이라고 정의하고 그로테스크가 공포와 동시에 은밀한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악마적인 것을 극복하겠다는 용기는 가상하지만 인간의 창조가 삶의 공포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는 서글픈 측면도 발견된다.

공포로 가득한 인간 내면의 모습은 볼프강 카이저가 설명하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 미술분야는 그로테스크의 태동기와 개념의 확장 부분에 집중적으로 언급되며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낭만주의 시대부터는 문학 및 연극 작품들, 그리고 미학이론들을 위주로 하고 미술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저자가 문학비평가인 덕에 각 문학작품은 그로테스크의 측면에서 상세히 분석되어지는데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 개념의 구체화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담긴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해설을 들을 수 있어 유익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만한 작품은 모든 종류의 그로테스크를 작품세계에 담았다는 그로테스크의 대가, 호프만의 작품과 뷔히너의 <보이첵>이다. 특히 뷔히너의 <보이첵>은 그로테스크의 전성기인 낭만주의 시대의 작품으로 현대문학(희곡)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세련미와 비상함을 갖췄는데,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문학적으로 (외양)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 인물의 성격과 심리에 활용하고 있어 조금은 난해하겠지만(작품 '전체'를 읽으면 난해하다) 저자의 발췌부분만 읽는다면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로테스크 문학의 백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로테스크는 그 안에 내포된 다양한 요소들이 역사 속에서 축소 또는 확장되는 가운데 유동적으로 존재해 왔지만 이 용어를 하나의 단어로 귀결시키는 것은 합당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재 대중문화에까지 파고든 그로테스크의 위세를 보면 이것이 또 어떤 의미로 변형되어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로테스크의 근원과 본질을 이해하고 여기에 반영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다면 향후 미적 체험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끼리라 확신한다.

그로테스크에 관한 한 매우 밀도 있는 책이었고, 예술가들에게 지적 호기심과 영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 종교적 색채가 보이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천년왕국>, 창백하고 영혼이 마취된듯한 느낌이다(좌)
- 그로테스크가 장식미술로 태동할 시기의 작품, 성당의 벽화이다, 루카 시뇨렐리의 <엠페도 클레스>(중상좌)
- 장식미술에서 좀 더 발달한 일명 만곡 그로테스크(중상우)
- 인상파풍으로 그려진 제임스 앙소르의 <음모>, 색채는 밝고 화려하만 우스꽝스러움과 사악함이 결합해 묘연하다(중하)
- 마리오네뜨(꼭둑각시)를 연상시키는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불타는 기린>(우)

* 상기 이미지는 본 도서에서 전체 혹은 부분 발췌하여 재조합하였으므로 원본과는 구성과 사이즈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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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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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가슴뭉클 하면서도 불친절했다. 풍류에 취한 듯 일렁이는 서문은 어느 강팍한 마음에라도 시심(詩心)을 지필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책을 열기 전부터 궁금했던 '옛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득도한 수도승이 알쏭달쏭 선문답만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옛 생각'에 대해 운만 슬쩍 띄워놓고는 읽는 이로 하여금 '굽이굽이 옛 사람의 붓 농사'(p.7) 사이를 헤메게 하는 것이 꽤나 짓궂다.

그러나 첫 그림 <매화초옥도>를 만나면 옹기종기 산세 사이로 점점이 흐드러진 매화에 반해 야속했던 마음은 이내 사라진다. 다음에는 낮술 자신 어르신의 발그스레한 볼과 주저앉은 품새가 애처러운 <꽃 아래 취해서>인데, 자세히 보니 홀로 앉아 꽃가지로 (몇 잔을 마셨는지) 셈을 하고 있어 그 애처러움이 더해지는 장면이다. 그런가하면 느닷없이 교태로운 양귀비와 나비가 등장한다. 비록 빛바랜 옛 그림 속의 꽃과 나비이지만 자태와 빛깔이 어찌나 곱고 고혹적인지 바랜 갈빛이 무색할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어느덧 책 속의 시간이 봄을 지나 여름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드디어 '옛 생각'의 정체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했다. 웅대한 자연을 묘사한 진경산수화나 명성을 자랑하는 한국화의 대표작들 보다는 유독 소소한 동식물과 인물, 근경을 위주로 한 그림들에서 보다 삶과 밀착된 소박한 정취, 그것에 대한 향수가 아련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밭갈이>, <빨래하는 여인>, <오이를 진 고슴도치>, <탁족>, <수박 파먹는 쥐>, <짖는 개>, <서생과 처녀>, <꿩잡는 매>,<차가운 강 낚시질>, <쏘가리> 등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십장생이나 사군자같은 고고한 동식물 보다는 생활 속의 친근한 동식물과 사물들이 등장하고 사람살이의 모습에서도 서민적이고 진솔한 모습들이 더 두드러진다.

하지만 모든 그림들이 일상의 소재와 생활상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인들의 사군자나 풍경화도 볼 수 있고, 고사나 싯구를 묘사한 그림도 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 역시 예사롭지 않은 독창성과 순박함를 갖추고 있으며 풍경에서도 한가로운 정취나 은둔자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 속세를 벗어난 듯 여유롭기 그지없다. 이에 더해 옛스런 정감이 물씬 풍기는 글들은 고어나 순 우리말이 아니더라도 읽는 이를 과거의 시간 속에 불러들일만큼 천연덕스럽고 감칠맛 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옛 단어들을 사용한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했는데, 물론 단어들에 대한 친절한 풀이가 각 장마다 실려있어 이해를 돕고 있었으나 이를 일일히 확인하고 다시 글 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감상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럴 때면 청산유수로 저만치 앞서가는 저자의 흥취가 다시 또 야속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계절을 따라 그림 속에 노닐며 옛 시간에 홀연히 빠져드는 묘미는 무척이나 쏠쏠하다. 그림을 화가별로 혹은 시대별로 보지 않고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아 놓으니 진정 과거의 시공에서 한 해를 보내는 듯 현실의 시간을 잊는다. 뿐만아니라 그 안에서 어우러지는 다양한 계절의 정취와 각 화가의 개성있는 필치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새로움을 더해준다.

마지막으로 각 계절에서 훔쳐온 그림 한 점씩을 자랑스레(?) 전리품처럼 내놓아 본다. 먼저 임희지가 그린 <난초>는 정형화된 봉안, 파봉안에 얽매이지 않고 유난히도 교태로운 긴 잎새를 낭창거리며 설레이는 여심(女心)처럼 봄을 노래한다. 언제나 선비정신이 서려있던 사군자에 이리도 파격적인 면모를 담을 수 있다니! 그 자유로운 발상이 무척이나 감탄스럽다. 또한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은 산수(山水)의 장관 뿐만 아니라 제 곁에서 울어대는 매미처럼 소박한 정취를 그리기도 했다. 매미 앞에서 내리 뻗던 나뭇가지를 슬쩍 멈춰세운 탓인지 매미가 더 살포시 나려앉은 듯 하고 투명한 매미의 날개와 푸른솔이 어우러져 무척 산뜻하다. 어쩌면 김두량의 <숲속의 달>은 '한국화'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느낌 중 하나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법이나 소재면에서 크게 튀는 것은 아니지만 스산한 가을의 정취가 생생하게 전달되기에 꼽아보았다. 김홍도의 <표피도>는 마치 오늘날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보는 것처럼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이다. 흔치 않은 소재(일상적이지만 한국화로 접할 기회가 드문 소재)들이 돋보이는게 이 책의 특징이었지만 가장 특이한 소재를 꼽으라면 이 그림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이처럼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는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개성이, 격식보다는 자유로움이, 관념보다는 소박한 일상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알지 못했던 옛 그림과 만나는 즐거움, 그리고 옛 시간의 향수 속으로 빠져드는 경이로움을 오롯이 담고 있다.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라더니, 그 말이 허세는 아닌 듯 하다. 다만 그 행복의 여운이 깊지 않았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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