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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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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책이란게 손보다는 발로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옛날 책이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볼 때가 그랬고, 그 맥을 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에서도 그랬으며, 널리 알려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몇 십년을, 혹은 평생을 바쳐가며 발로 찾고, 경험하고, 채집해 온 이야기들에는 지력과 상상력으로만은 엮어낼 수 없는 특별한 힘이 있다. 고매한 것으로 치면 영-혼-육의 순으로 나열된다는데, 이런 책에서 만큼은 육의 지극함이 영의 위치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도 발을 통해 완성된 책이다. 저자는 지난 10여년간 우리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주저않고 발길을 재촉했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화들을 모아 무명화가들의 얼을 이 책에 담았다. 일반적으로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린 격조 낮은 속화라고 알려져 있고 대표적인 작품 몇 점 외에는 접할 기회가 흔치 않지만 실상 옛 시대에는 그림 수요의 90%를 담당할 만큼 제작이 빈번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도 예상 밖으로 다양하고 수량도 많았다. 이처럼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담당했던 민화가 다시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민화가 가진 상상력과 추상성의 힘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필적할 만큼 대담한 추상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치는 민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며, 해외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민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동안 '격식', '품위', '고급'이라는 잣대로 폄하되었던 무명화가들의 설움이 드디어 위안을 얻고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궁중화나 문인화에 비해 민화가 가진 특성은 소박하고,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민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민화가 갖는 특성이며, 우리 민화의 경우 보다 고요하고 내적인 충실성을 갖춘 것이 두드러진다. 같은 모란이라 할지라도 우리 민화 속의 모란은 단아하고 고요한 자태를 가지고 있으며 향기 없는 모란 곁에 나비 한 쌍을 하늘거리게 하는 상상력과 수석의 깔끔한 기하학적 패턴이 돗보인다. 반면 우리나라 궁중화 속의 모란은 만개의 절정에 달해있는 모습이고 수석도 패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윤곽을 묘사했다. 또한 가급적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여백없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상상의 나비를 불러 오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민화의 모란을 보면 민화로서의 순진함이나 상상력은 돗보이지만 우리 민화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며 강렬한 색채와 패턴에 보다 집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민화도 장식적이고 패턴에 집중된 작품들이 있지만 색채의 활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이 전달되 온다. 



민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면 책거리, 문자도, 까치와 호랑이, 용, 십장생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일반적으로 친근하고 익숙한 것은 책거리, 그리고 까치와 호랑이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너무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그동안 익숙하다 느꼈던 책거리, 까치와 호랑이라도 마냥 새롭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까치와 모든 호랑이를 모아놓은 듯 갖은 표정과 몸짓을 취하고 있는 까치와 호랑이도 인상깊었지만 가장 흥미롭고 변화의 폭이 넓었던 것은 책거리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양반들의 전유물인 책거리 그림이 어째서 민화일까?'라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는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질문의 실마리가 될 상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양반도 아닌 민화 화가들이 책이 잔뜩 쌓여있는 책거리를 그리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주문에 의해서였다. 사실 책거리는 궁중에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된 적도 있으며, 양반집에서는 기복(과거 급제, 건강 등)과 장식을 위해 선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책거리에 묘한 장난기가 섞이며 풍자와 해학이 가해져 책거리는 사랑받는 민화의 주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특히 책거리들 사이에 살포시 얹혀있는 여인의 옷은 얼핏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전후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상당히 과감하고 해학적인 그림임에 틀림이 없다(대체 선비는 먹을 갈다 말고 여인과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은근한 에로티시즘의 극치이다). 현재 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민화는 책과 장식물이 럭셔리하게 가득 채워진 책거리 민화라는데, 그들이 수집하고자 하는 품위있는 책거리보다는 이 묘하기 짝이 없는 상상적인 책거리가 훨씬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에 실린 민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혹시 민화는 당시 만화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에 독특한 점이 있다. 어떤 그림은 후세의 누군가가 민화에다 만화로 낙서해 놓은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물들의 형태나 눈맵시에서는 현대의 만화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감정이 돗보이고, 스르르 사라질 듯한 용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상상력이 넘쳐난다(앨리스의 체셔 고양이 같지 않은가!). 또한 호랑이 그림은 부숭부숭한 털만 가지런히 정리한다면 박수동의 고인돌 만화에 삽입해도 별로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처럼 그림의 단순화에 있어 파격적이고 예측불가했던 그림이 민화라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우리 민화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미술연구가들과 미술가들이 민화에 관한 찬사의 정의를 내려왔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 '자연의 꿈', '추상적 환상'. 어느 하나 우리 민화를 얘기하는데 손색없는 아름다운 표현들이다. 그런데 민화 전문가 김철순은 민화가 '누나의 자수'와 같다는 신선한 정의를 내리고 있어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민화는 현재, 현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꿈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꿈은 이룰 수 없는, 바랄 수 없는 것에 걸어보는 기대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누나의 자수를 들여다보듯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본 어른들의 꿈이 바로 한국 민화의 꿈이었다. 그들의 인생과 자연 자체가 큰 꿈이고 예술이 바로 꿈이라고 믿고 있어서 사람과 인생 자체를 아름다운 꿈으로 표현했다."(p.26)

참 신기한 일이다. 비록 민화를 그린 화가가 무명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남자였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째서 '누나의 자수'와 같은 여성적인 물건과 비교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장식용이었던 민화가 갖는 평면적 패턴을 들어 설명하는데, 민화 느낌은 형태의 단순화와 패턴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자수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김철순의 설명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바로 삶과 꿈과 예술이 잇닿는 아름다운 경지이다. 이것은 어떤 한계를 초월하여 그림에서 금시조가 날아오르는 득도(得道)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춤으로 치면 흥겨운 몸짓 하나가 악사들의 악기에 소리를 오르게 하고,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마침내는 커다란 무리가 공감하는 경지. 그 자유롭고도 강렬한 미의 본능이 바로 민화의 힘이자 민중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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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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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는 인간이 되어버린 천사, 다니엘의 이야기가 있다. 다니엘은 타락한 것도, 징계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한 여인을 사랑해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결심해버렸다. 그가 날개를 잃고 인간이 되던 첫 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색깔'이었다. 단조로운 흑백인줄만 알았던 세상이 난생 처음 보는 색깔들로 가득한 것이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면 천사로서의 영생이나 특권도 포기할만 했다. 이때 커다란 스크린에서도 흑백이 물러가고 아름다운 색깔들이 침범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가 처음 경험했던 색깔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 있으며 신기한 듯 세상을 둘러보는 다니엘의 맑은 눈동자를 통해 잠시나마 색깔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여기 또 다른 천사가 인간이 되었다. 그는 키도 작고 뚱뚱해 그다지 이상적인 천사의 형상은 아니지만 색깔을 향해 보내는 호기심 만큼은 다니엘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바로 이 책의 저자 미셸 파스투로이다. 보통 사람들은 너무 익숙해서 기억하지도 감동받지도 않는 색을 특별한 것인양 시시콜콜 수집해 늘어놓는 그는 분명 전생에라도 천사였다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가 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독자는 막연하고 사소했던 색깔의 추억을 조금씩 조금씩 회복한다.

저자는 1950년대부터 약 60년간 색에 관해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증언하고픈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 변천을 되새기고 다양한 방면으로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고 싶었다 고백한다. 그의 간절한 욕구를 실행하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프랑스 문단의 악동 조르주 페레크인데, 저자는 페레크의 <나는 기억한다>라는 작품처럼 '평범하고 모두에게 공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기억'(p.15)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문장이다. "나는 기억한다. 드 골 장군에게 앙드레라 불리던 형제가 있었던 것을. 그가 다갈색 머리를 가졌고 파리국제박람회의 부책임자였던 것을."(p.16)

사실 페레크의 책에 쓰여진 문장은 "나는 기억한다. 드 골에게 피에르라는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파리국제박람회를 이끌었다."이다. 여기에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름과 색깔과 직위에 변화를 주어 묘한 뉘앙스(그의 표현에 따르면 '통속극')를 자아냈다.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평범하고 모두에게 공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기억'에 상상과 은유를 보태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색깔 이야기를 만들어 간 것이다. 그렇기에 책 속의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의도를 위해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왜곡을 위한 왜곡이 아니라 색에 관한 기억을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한 기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문학적 상상과 학문적 사실의 중간지대에서 더 깊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다.

상상과 사실 간의 교묘한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저자는 절대 색깔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릴적 그토록 원했던 초록색 자전거도, 서구의 상징인 인디고 청바지도, 프랑스의 삼색 국기도 모두 하얀 종이 위에 글자로만 표현될 뿐 사진 한 장 삽입된 글이 없다. 또한 가급적 색이 가진 고유이름도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여 세분화된 색이름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하게 빨간색, 초록색, 회색 등이며 간혹 눈에 띈다고 해도 '인디고'나 '머룬' 정도이다. 이처럼 파랑이라도 네이비 블루, 로얄블루, 인디고 블루와 같이 구체화하지 않고 그냥 뭉뚱그려 '파랑'이라고 한 것도, 그것을 떠올리는 개인의 상상력에 커다란 자유를 부여하며 평범한 일상의 일부로 누구라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색에 관한 이야기가 저자의 유년시절을 매개로 펼쳐지는 것 또한 독자로 하여금 쉽게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하는 장치다. 그리고 색연구가로서 밝히는 사실적인 이야기에 상상과 함축의 여운을 남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장치때문이다. 프랑스인인 저자의 유년시절 이야기라 이국적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우리와 공통된 관념 또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빨강색이 가지고 있는 반항, 불온의 의미나 감색이 가지고 있는 무난함과 점잖음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들이 보라색의 포도주를 '적포도주'라고 하는 것, 즉 '색의 상징성'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테랑 베이지에 가서는 벽에 부딪힌다. 베이지는 베이지인데 '미테랑 베이지'라니? 그가 대체 어떤 베이지색의 옷을 입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색을 통한 저자의 정치적 견해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다양한 색을 묘사함에 있어 어떤 색에서는 고정관념을 풀어 자유를 주기도 하고, 어떤 색에서는 반발심을 표현하기도 하며 역사적인 서술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 또한 흥미롭게 반영해 내고 있다.

우리는 색이 갖는 다양한 상징성에 대해 사회적 관념이나 어떤 사건을 통해 습득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색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한다기 보다는 결국 사회인으로서 오랜 기억을 통해 각인된 색에 우리 사고를 지배당할 수 있다. 때로 이것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학자들을 비롯 많은 학자들이 이를 간과했다고 불평하며,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구분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조차 색이 빠져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대목을 보면 이 책은 단순히 색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힘으로서의 색을 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막 인간이 된) 천사의 눈으로 바라 본 색은 결국 (늘 인간이었던) 인간의 눈으로 바라 본 색과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눈이란 역사의 현장을 목격해 왔던 눈들이다. 여기에는 금기와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권력으로서의 색도 있고,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따스함을 일으키는 개인으로서의 색도 있으며,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기능을 수행하는 규범으로서의 색도 있다. 모두 너무나 익숙해져서 깨닫지 못했던 색깔들이며 어떤 면에서는 길들여져서 딱딱하게 굳어진 색깔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천사의 눈과 인간의 눈이 교차하는 시점, 상상과 사실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장에서 우리는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색들이 의미로 다가옴을 느낀다. 비로서 진정한 색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억 속의 색>은 진정한 색의 스펙트럼을 열어주는 지각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아마도 흰 종이와 검은 글씨라는 무채색의 효과가 커다란 힘을 발휘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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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토토 The Collection 1
조은영 글.그림 / 보림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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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른이지만 아직까지 경마장에 가본적은 없다. 일단 '경마장'하면 '도박'이 떠오르고,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마장엘 데려가라'라는 경고성 속설이 경계심을 가져왔던 까닭이다. 그래서 꼬마 소녀가 할아버지와 함께 경마장 나들이를 간다는 이 이야기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부정적인 이미지의 경마장을 이 책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 그리고 꼬마 소녀는 그 속에서 무엇을 바라볼까? 사뭇 진지해지고 긴장한 탓인지 책장을 넘기면서 침이 꼴깍 넘어간다.

<달려 토토!>는 말을 좋아하고 말 인형 토토를 극진히 아끼는 한 꼬마 소녀의 경마장 체험기이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 경마 경기가 끝날때 까지 소녀가 보고 겪고 생각한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는다. 경마장에 대한 소녀의 첫 인상은 '아!'하고 탄성을 지를만큼 거대한 구름떼였나보다. 우승할 말을 잘 골라 한 몫 챙겨볼까하는 욕심꾸러기 검은 구름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욕심, 거친 마음, 삶의 고단함을 나타내려는 듯 각 사람들은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뭍혀 꾹꾹 찍어 표현했다. 간혹 눈에 띄는 지문에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고유성이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겹쳐지고 또 겹쳐져 검은 흐름속에 사라지는 모습이 '군중'이라는 것의 의미를 잘 알려주는 듯하다. 북적이는 검은 구름떼를 헤치며 소녀의 시선이 이동한다. 줄 서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서 각 사람의 표정으로.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있고 험악하고 초조한 사람들의 모습은 소녀에겐 생소하기만 하다. 특히 뭔가를 적거나 쓰거나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생각되나보다. 소녀는 이렇게 경마장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거친 세상과 어른들의 모습을 엿본다.


경마장의 입구와는 달리 내부는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하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커다란 전광판, 말인형 토토와는 사뭇 다른 긴 다리의 늠름한 경주마, 그리고 소녀의 말대로 '땅콩'같고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기수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상기시킨다. 아마도 경마장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라면 소녀와 꼭 같은 마음으로 신이 나서 그림들을 둘러 볼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하고 화려한 경기에는 말에 대한 사랑이 없다. 오직 소녀만이 아무도 말에게 당근을 주거나 쓰다듬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챌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으로, 소녀는 사랑으로 우승말을 점쳐본다.


이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순간. 울긋불긋 화려한 치장을 한 말들이 울타리 너머 일렬로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과연 어떤 말이 1등을 할까? 토토를 닮은 소녀의 말은 우승마가 되어줄까? 그러나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길 여유는 없다. 울타리 문처럼 양쪽으로 여는 책장을 펼치는 순간 말들이 와락 달려들면서 금새 경기장의 열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감격스런 아이디어였으며 덕분에 말들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출발의 모습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빨을 꼭 깨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결승점을 향하는 말들과 사방으로 튀기는 흙. 힘찬 말발굽소리와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들릴 듯 경기장의 열기는 붉은 바탕으로 얼룩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운데 있는 회색말은 아이들 말대로 '부다다다다' 달리는 것 같아 빙그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열광의 도가니 끝에 드디어 기다리던 결승점이 있다. '아!' 여기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맹렬하게 달리던 말들이 힘껏 결승점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맨 위쪽으로 사뿐히 등장하는 하얀 말! 토토를 닮은 하얀 말이다. 이제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아니라 싱그러운 초원이며 소녀의 순수한 마음을 담은 하얀 말은 결승점을 너머 광활한 초원을 달리는 듯하다. 이것은 소녀의 사랑을 담뿍 받은 말인형 토토가 보여주는 마법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토토와 같은 작은 말을 품고 있다. 그것은 험한 세상과 경쟁과 돈에 흔들릴 수 없는 꿈이며 초원으로 향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력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순수한 꿈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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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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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계산업이 활발해지고 공장에선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던 모더니즘 시절, 미술계도 뒤질세라 공장만큼이나 수많은 유파들을 생산해 낸다. 얼마나 많은 미술 유파들이 속속들이 출현했던지 전문가들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형도까지 만들어야 했고, 입체주의 전시회를 위해 엘프레드 바가 만든 지형도는 오랫동안 신뢰받는 현대미술의 길잡이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진중권의 미술사> 모더니즘편은 기존의 지형도를 따르지 않고 보다 역설적이고 도발적인 분류법에 의해 현대미술사를 엮어나간다. 그동안 난해하고, 어렵고, 그래서 견고했던 현대미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한계점과 모순점을 습격해 보는 것이다.

오늘날이나 모더니즘의 시대나 미술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워서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충격적이고 새로운 작품들에 감탄과 박수를 보낸다(와! 이것도 예술이야?). 하지만 이 대단한 현대미술에도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나보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미술을 향한 막연한 찬사에 한번쯤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충격적인 것을 표현하는 작품은 그것을 만든 예술적 능력에 감격의 소리밖에 낼 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그것에 화를 낼지라도 그 충격을 온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간파한다.(p.17)


현대미술의 목표가 '감성적 쾌감'이 아닌 '지성적 충격'에 있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이것이 갖는 논리적 모순을 잽싸게 간파해 낸다. 대표적인 예로 문화보수주의자 한스 제들마이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우리가 놀랍다고만 생각하는 현대미술에서 이것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한계성을 들추어 낸다. 이처럼 눈 앞에 보이는 현대미술은 정면에서는 경이롭고 도도하기 짝이 없지만 침착하게 그 뒷태를 응시하고 있으면 시대의 불안을 견뎌내려는 가련함과 무한한 형이상학의 경계를 넘지 못한 허무함이 어우러져 그렇게 넘지 못할 견고한 성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은 위에서 언급한 한스 제들마이어의 분류법과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구성이다. 한편으로는 진중권만의 분류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서운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현대미술의 한계점으로부터 출발해 그 이면의 세계를 탐색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제들마이어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순수성의 추구, 근원을 향한 열망, 광기에 대한 호기심, 기술적 구축의 의지'라는 4가지 근원적 충동으로 분류했다. 어느 시대보다 활발하게 생성되었던 다양한 사조들을 이렇게 간략히 구분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성찰력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어떤 사조도 미래의 미술을 향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순수성'을 지향는 절대주의의 경우 의미까지 배제하다가 단순한 비예술로 전락하며, '근원'을 찾는 표현주의의 경우 순결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가공의 순결을 만들어 더 큰 순결의 상실로 빠져들게 된다. 결국 그가 지적하는 것은 전통적 가치를 부정한 현대미술이 그들만의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며, 그 우상은 스스로 예술이기를 거부하기에 미적 허무주의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들마이어의 지적을 듣고 있으면 현대미술은 마치 세상을 향해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여겨진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걸맞게 시대적으로도 전쟁, 혁명, 기계의 출현과 같은 격변을 겪은 것이 그들, 현대 미술가들이 아니던가! 만일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었다면, 그리고 산업에서의 기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유파의 화가들은 인상주의 화풍을 답습하며 들판에 나가 풍경을 그리다가 미술계를 침체시켰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묵묵부답의 들판을 박차고 작업실로 들어가 자아를 찾아가는 내면 여행을 결심했다. 자연이 주는 구상을 등지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의 추상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반항의 대상이 된 것은 색채와 형태였다. 우리가 잘 아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들은 내면의 색채를 원시적인 영감에 근거해 안에서 밖으로 분출해 냈고, 원근법에 의한 3차원의 세계를 철저하게 깨부쉈다. 색채와 형태에 대한 실험뿐만 아니라 때마침 출현한 기계를 예찬하며 자연을 거부하는 시도들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모두들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는데 고군분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의미와 인간성을 상실한 현대미술의 끝은 그저 메마르고 건조할 뿐이었다.

한편 전쟁과 정치적 혁명의 영향을 받아 보다 암울하고 질곡 많은 여정을 걷게 된 유파들도 있다. 전쟁의 공포와 정신적 충격이 스며있는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오히려 전쟁에 열광하고 대중 선동에 기여하다가 종국에는 전쟁터로 가버린 미래주의, 전후의 상실감으로 질서에 회귀했지만 냉소적일 수 밖에 없었던 신즉물주의가 그들이다. 물론 그들의 수많은 사연과 변천사를 이렇게 간단히 요약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 어느 유파보다 현실에서, 내면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갈등이 심했던 것이 두드러진다. 특히 신즉물주의의 작품들은 현대미술의 이상(理想)이 좌절된 모습을 너무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혼란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시 사실적인 구상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었나보다. 비록 옛 시절의 그 아름다운 구상은 아닐지라도.


격변의 시대에 태동한 현대미술은 결국 제들마이어가 예견한 대로 한계에 부딪혔다. 공장의 제품 만큼이나 많이, 빠르게 출현했는가 싶더니 결국 소모되고 폐기되는 것에도 동일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현대미술의 자취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점을 긋고 역행하는 방식으로 짚어나가다 보니 그 허무한 발자취가 더욱 역력히 드러나는 듯 하다. 이처럼 난해해 보였던 현대 미술의 추상 세계를 뒷모습으로 바라니, 여기에는 역사의 시련을 헤쳐나가려는 의지와 진보를 향해 내딛는 열정을 가진 '인간'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한계에 부딪힌 것도 다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제들마이어의 예언(?)대로 이후의 미술은 '실재로 귀환'하고 '과거로 회귀'하지만 한 번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창조에 도전했던 현대미술가들의 시도는 다시 바로 그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2000년대에 70년대의 패션이 유행한다 해도 70년대 그때의 똑같은 패션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상처 가득한 현대미술의 뒷모습을 읽는다해도 여전히 새로운 미술에 대한 희망은 있다고 주장해도 좋지 않을까?

* 덧붙임 : 절대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등 모더니즘의 주요 미술사조를 살펴보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것은 상세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풍부한 도판도 한 몫한다. 그리고 그리드, 콜라주, 오브제, 엑소노메트리와 같은 주요 용어를 별도 페이지에 담아 심도있는 보충설명을 더해주고 있어 예기치 않은 지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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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은 변하지 않았다.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다. 사진이 거짓말을 했다면 사진을 다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진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사실로 받아들여달라고 한 적도 없다. '사실 그대로만 말한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p.34-35)


별다른 생각 없이 책을 읽어 나가다가 문득 이 한 장의 사진과 엮인 문장에서 덜컥 가슴이 멈췄다. 일종의 항변과도 같이 '사진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말하는 것에 새삼 감동이 와 닿았던 까닭이다. 왜 그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하이브리드적 기교와 변형으로 포화된 작품들에 익숙해져 사진의 '사실이 아님'을 너무 당연시 해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예술적 영감과 솜씨로 진행된 작업이었기에 카메라 자체에도 '변형'이라는 본연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지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낱 기계에 불과한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의 묘사요, 그것을 사실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암암리에 동의했었다.

이 부분에서 멈춰서며 혹시 지나온 글에도 내가 무심코 넘겨버린 글귀가 있을까 되돌려 보다가 책의 첫머리와 다시 만난다. 거기에는 어둠에 둘러싸인 낡은 마루바닥의 사진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고 한 귀퉁이에는 작은 글씨로 '당신의 눈이 카메라의 눈이 될 때'라고 적혀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는 말이었으며, 동시에 참으로 잊기 쉬운 말이기도 했다. 카메라의 눈이 된다는 것은 사진가가 나의 눈을 주장하지 않고 카메라의 눈을 존중한다는 겸허한 자세가 담겨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보면 어느새 (안 찍다보면 더더군다나) 내가 카메라를 부리는 양 착각에 빠질때가 있다. 익숙하다보면 기본적인 것들을 잊고 타성에 젖거나 자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철학의 풍경들>은 가장 기본적인 '카메라의 눈'을 '인식의 풍경'의 출발점으로 삼고 점차 독자와 한 대의 카메라가 혼연일체인듯 어둠 속에서 철학의 빛을 조금씩 흡수케 하며 종국에는 '사진이라는 것'에 대한 각자의 의미를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해 내게 한다.

카메라에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가 있다. 그러나 '카메라 루시다'가 최초 카메라의 원형임에도 '카메라 옵스큐라'를 택하고 발전시킨 것을 보면 사진은 본질적으로 어둠의 속성과 더 친밀한 듯 하다. 사진은 '지나간 시간의 상처', 사진은 '하찮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진은 '욕망의 음화들'이라고 말하는 글귀들과 수많은 철학자들이 사진에 관해 남겨 놓은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슬픔이 흐른다. 이성적이고 냉철할 것 같은 것이 철학적 사유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감성을 자극한다. 이에 더해 수록된 대다수의 사진들은 어둠이 강조된 흑백사진들이다. 간혹 컬러가 있다해도 어둠 가운데 깊이 잠겨있다. 모두 사라져갈 시간들이고 존재들이기에 어둠으로 애도하는 듯 흑백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히려 스러져가는 초라한 오브제에서 더 쉽게 발견될 수 있다. 하이데거가 그랬다. 그는 고흐의 <구두 한 컬레>를 보기 전까지 예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낡고 닳아빠진 구두 그림에서 존재의 시간을 바라보게 하는 진리를 발견하고는 그의 후기철학을 크게 변화시킬만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진을 통해 미의 진리에 다가서려는 사진가. 그런 사진가만이 삶을 지시하고 존재와 시간이 표명하는 예술의 근원 속에 자리할 수 있다. 고흐가 가시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내재적 성질(존재와 시간)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처럼. 평범하지만 진리로 이끄는 성질과 본래의 자리로 돌려주는 환원의 힘을 보았던 것처럼, 미적 대상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p.236)


하이데거로부터 예술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면 이번에는 예술의 선(善)을 이야기하는 수전 손택의 철학을 들어보자. 손택은 이미지 사냥꾼처럼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아헤메는 '사진의 폭력성'을 비난하며 이에 대한 사진가의 자세로 피사체를 향한 부단한 성찰과 반성,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위선을 벗겨내는 이성적 자각을 꼽았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이미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탐닉하고 유희하는 현실에서 사진이 선(善)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길도 답변해 준다.

일단 세상 저쪽을 볼 줄 아는 시선, 카메라에 찍힌 그 너머(은폐된 것)를 볼 줄 아는 시선이다. 또 삶의 안쪽을 볼 줄 아는 시선이고, 시간으로부터, 시간 속에서, 시간에 기대어 참을 인식하는 올곧은 시선이다.(p.305)

이밖에도 이 책에는 존 버거,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질 들뢰즈, 헤겔, 푸코, 칸트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사유를 발췌해 저자만의 새로운 고리로 연결시켜 나갔으므로 사진 이론의 느낌 보다는 (예술)철학 에세이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푼크툼, 미메시스, 판타스마고리아, 시뮬라크르와 같은 전문 용어들이 종종 등장하고 실재, 시간, 우연성, 오브제 등 빠질 수 없는 모호한 사진의 개념들이 이어지지만 '사진함(photographing)'에 있어 한번쯤 생각해 볼 것들을 표방하는 고로, 사진가 선배에게서 들을 수 있는 친근하고 섬세한 조언들 또한 곳곳에 스며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든, 혹은 영화를 하는 사람이든, 첫 출발을 할 때 기억했던 것들을 간혹 잊는 경우가 있다. 아니, 어쩌면 기본적인 것들을 꼼꼼히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앞으로만 내달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철학의 풍경들>은 사진함에 있어 기본이 되는 사유들과 마음의 자세를 챙겨보기에 무척 훌륭한 책이다. 이 어둡고 깜깜한 책 속에 들어가 인식, 사유, 표현, 감상, 마음이라는 5가지의 풍경을 마음 속에 각인시킨다면 보다 본질에 다가가는 사진을 만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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