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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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땐 바다로 간다. 끊어질 듯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갈라질 듯 마른 입술을 앙다물고. 그리고는 무한히 넘실대는 바다의 잔을 온 몸으로 들이키며, 벌건 육즙이 뚝뚝 듣는 일출까지 기다렸다가 게걸스레 삼켜버린다. 아침이 되면 바다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태양은 날쌔게 하늘 위로 솟아 있는데 어째서 포만감은 이리도 충만한 것일까! 모래 사장에 남겨진 빈 소주 한 병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다.

 

허기진 인생에 대해 바다는 늘 이런 식으로 채워주곤 했다. 그래서 바다는 마르지 않는 신비의 충전소라 생각했으며, 고독의 순도를 높여 절망에 탁해지지 않는 법을 연마하는 훈련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변했더라. 이제는 나와 독대하지 말고 좀 더 윤택하게 허기를 다독이라고 말하더라. 바로 21세기형 자산어보라 부르는 이 책을 통해.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가 알려주는 일차적인 해법은 진정으로 먹는 것이다. 먹거리에는 숭어의 위(위장), 군소, 거북손, 노래미처럼 평소 뭍에서는 쉬 먹을 수 없는 해산물들도 있고, 삼치, 참돔, 홍합처럼 흔히 먹을 수 있는 해산물들도 있는데, 다들 어찌나 신선해 보이는지 생기의 광채가 유난히 밝다. 투명하고 먈먈한 살갗을 빛내며 가지런히 누워있는 회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찜통 뚜껑을 막 열었을 때의 '훅~'하는 바다내음이 나는 삶은 해산물과 얼큰하게 바글거리는 생선탕까지, 지지고, 볶고, 무치고, 구워도 생기는 끝내 가시지 않는다. 천 만번을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는 파도처럼 해산물의 생기는 그 어떤 양념과 조리법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타고 올라 더욱 생생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원초적인 바다내음을 품은 성게알을 밥에다가 썩썩 비벼먹고, 병어회에 구수한 된장을 구성지게 찍어 입 안으로 집어 넣는데, 니들이 고등어를 아느냐! 섬에서 먹는 고등어는 뭍것들과 격이 다르니라 하며 고등어가 의기양양하게 끼어든다. 뭍에서 겪었던 비릿한 시간들일랑 잊으라고, 그것은 너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오! 즐거운 날것들의 향연이여, 맛 뿐만 아니라 가르침마저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연이어 펼쳐지는 해산물 잔치는 단순히 미식기행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이 책은 <허기질 때 바다에 가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생'의 허기에 대한 본격적인 해법은 날 것과 맨 손과의 만남, 그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제 손으로 낚시줄과 그물을 드리워 기다리고 끌어 올려 생명의 꿈틀거림을 촉각으로 각인시키고 아가미의 마지막 한 호흡을 숨죽여 바라보며 상하지 않은 또렷한 눈동자를 맞받아 응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다의 생기를 나의 감각으로부터 삼키우고 '쌩(生)'의 의미로 마음을 떠먹이는 인생 허기해소법의 시작이다. 그런가하면 잡아 올린 날것들을 제 손으로 손질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게 배부른 명상이다. 유선형의 세계에 담긴 오묘한 생명의 지형도를 따라 경건한 손길로 비늘을 긁어내고, 배를 갈라 필요한 내장과 필요치 않은 내장을 가려내며, 가시와 살점을 구분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깨끗하게 도려내는 것. 이것은 뭍 세계의 시름을 잊고 오직 날 것이 내게 준 소우주에 몰입하는 경지를 지나게 한다. 이 책은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동의 과정을 생계형 낚시라는 저자만의 방식으로 몸소 보여주었는데, 숙련된 손놀림이며 해산물에 대한 지식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이 사람이 정말 소설가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허기에 대한 또 하나의 해법은 바다에서 눈을 돌려 마을로 향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시장에 나가 현장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여기서 한 마디 참견하며 떠들썩한 사투리의 정겨움에 자신의 정을 섞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여수시 삼선면 거문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낚시를, 아홉 살에 해녀들 틈에서 잠수하는 법을 배웠던 저자의 바다마을 살이를 슬며시 참고로 해본다. 돌담에 줄을 맞춰 김을 널고, 여름 갈치 시즌을 맞아 신나게 배를 띄우며, 할머니들께서 옹기종기 모여 홍합을 손질하시는, 고독이란게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삶에 충실히 몰두하는 그 모습들을 말이다.

 

바다에서 태어났으나 뭍 세상에서 떠돌다 뼛속까지 굶주렸던 저자는 바다에 올 때마다 그 허기를 채우고 다시 힘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헛헛한 삶에 마침표를 찍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데, 바다가 주는 포만감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비록 이 책이 그의 소설작품은 아니지만 곳곳에 배어있는 바다와 생명에 대한 사색이 뭉클할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쩐지 '두터웠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바다에 대한 저자의 우정이 글 속에 내재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생선 손질을 할 때 지느러미를 잘라내지 않는다.[...]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이를테면 분향소의 흰 국화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 위에 올렸단다. 따로 올릴 것이 없는 나는 본 모습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p.108-109)

 

나는 잡은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거쳐온 이력을 알고 싶은 것이다.(p.281)


 

고독과 이상의 상징이었던 바다는 여전히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 가르침을 하사하는 스승으로서의 바다라 할지라도 인생의 허기를 채워줄 만한 충만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맛깔스런 음식과 날것의 촉감, 사람살이의 정을 통해 차오르는 포만감에는 수평적인 우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인생을 두텁게 감싸준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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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비상시대 -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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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커다란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미래의 세상을 떠올렸다. 제아무리 인간의 의지가 스위치를 올린다 할지라도 얼마 후면 기계화된 세상을 움직여 줄 석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석유가 없다면 원시적인 톱니바퀴부터 최첨단의 정교한 부품들까지 단 한 바퀴도 굴러가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상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기계들이 아닌지라 고철덩어리가 자유의지로 움직여주길 기대할 수는 없다. 남은 것은 그저 멈춰서서 부식되고 녹슬 날을 기다리는 것 뿐. 앞으로 100년도 아니고, 50년도 아닌, 37년 후...지구상엔 단 한 방울의 석유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석유종말의 위기가 드러나고 비상 시스템을 가동할 시점까지 고려해 본다면 석유를 마음놓고 쓸 수 있는 날은 37년보다 훨씬 적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것이 석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어떻게 수송되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나 옷을 입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동안 석유를 떠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처럼 생활과 밀접한 석유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무심한 것일까? 클레이 셰키가 인터넷 시대를 맞은 대중들의 잉여 시간을 '많아지면 달라진다'는 논리로 풀어갔다면 석유에 대해서는 '멀어지면 달라진다'라는 논리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대량소비에 부합할 만한 산유국은 전 세계 국가 중 몇 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우리나라와 같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는 생산과 관리의 측면에서 한 발치 멀어진다. 풍성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산유국이라 할지라도 석유는 국가와 기업차원에서 관리되며 일반인이 제 집 앞마당에서 우물을 퍼올리 듯 마음대로 시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석유의 실태에 관해 멀어진다. 뿐만아니라 석유를 통해 생산되는 플라스틱, 섬유 등과 같은 제품들은 주변에 넘쳐나지만 화학공학의 공정과정을 거친 이후라 우리에게 석유로서 인식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형태의 석유는 이렇게 눈속임을 하며 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석유의 보유, 생산, 관리, 제조, 응용 면에서 모두 멀어진 대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대로 여겨질 만큼 쉬지않고 공급되는 석유를 '소비'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맘 편히 석유를 소비하는 동안 석유를 가진 자들과 이에 관여된 자들만이 진실을 공유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에릭 데이비스라는 학자는 '합의된 최면상태'라고 불렀는데, 위에서 언급한 '멀어지면 달라지는' 결과를 매우 정확히 말해 주는 듯하다. 석유 매장량에 대한 여러 학자들이나 기관의 수치 중 어떤 것이 진실일까? 석유를 대체할 만한 에너지는 미래를 보장할 만큼 그 연구성과가 긍정적일까? 각종 미디어를 통해 석유와 미래 에너지에 관한 낙관적인 견해와 회의적인 견해가 들려오지만 관련 직종의 종사자가 아닌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 집 앞의 우물과 저 먼 나라의 시추지와의 차이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낙관론과 회의론 중 그 어느 것도 확인할 길은 없으나 회의론의 입장인 <장기비상시대>의 주장 가운데는 몇 가지 주목할만 점들이 있다. 먼저 그동안 소비해 왔던 석유는 가장 얻어내기 쉽고 질이 좋은 액체 석유였지만 남은 석유는 얻어내기 어렵고 질 나쁜 액체 석유, 그리고 반고체 및 고체 상태인 석유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는 시추작업에 드는 에너지와 퍼 올릴 수 있는 석유를 비교해 볼 때 차라리 시추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상황도 벌어진다. 다음으로는 석유소비율과 인구증가율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 시너지 효과이다. 저자에 따르면 석유 소비가 정점을 지난 후(이미 70년대에 지났다) 남은 양은 매년 2~6퍼센트 정도씩 고갈되어갈 것인데, 그 사이에도 세계의 인구는 한동안 늘어날 것이라 전망한다. 농업에 있어서도 지구온난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천연가스로 만든 비료나 석유로 만든 농약, 탄화수소를 동력으로 한 관계 덕분에 곡물 생산량을 250퍼센트나 증가시켰던 것을 생각해 보면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조력 없이 현상을 유지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기비상 시대에는 석유와 늘어난 인구 문제도 모자라 식량난까지 겪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또한 저자의 시나리오처럼 석유 보유량에 따라 세계의 패권이 재배치되고 심지어 약탈전쟁까지 일어나게 된다면 미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척 암담하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라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하고 그에 관련된 시스템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대체 에너지의 미래 역시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재생 가능 에너지는 석유나 가스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석유나 가스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그런데 우리 시대의 많은 '환경주의자'나 '녹색 운동가'는 투입되는 에너지를 바꾸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석유나 가스로 생산한 전기를 이용하는 미국 휴스턴의 그 많은 에어컨을 전부 풍력이나 태양광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중략)...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거대한 시스템을 거대한 규모로 운영하고 싶다는 염원이야 말로 우리가 태양광이나 풍력이나 수력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의 본질이다.(p.166)

 

이밖에도 합성연료, 중합체 해체(TDP), 바이오 매스, 영점 에너지(ZPE) 등과 같은 최신 기술의 연료 역시 성공적인 활용에 있어서는 불투명한 상태다. 대체에너지에 관한 주장에 저자의 동의하지 않는(혹은 동의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한창 휴대폰과 노트북의 시대를 예견하던 90년대 초반 무렵 물로 가는 자동차와 태양열 주택에 관한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현재 휴대폰과 노트북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재현된 반면 대체에너지의 활용은 재현은 커녕 크게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고, 대체 에너지에 대해 너무 낙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으며 <장기비상시대>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석유 없는 '장기비상시대'를 대처할 방안으로 저자는 '규모축소화(downscaling)'를 제안한다. 말 그대로 석유를 투입해 대규모로 운영하던 모든 것들을 소규모로, 지역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미국의 교외도시에 대한 비판이 적잖이 등장하는데, 석유를 다량으로 소비하는 자동차 기반의 출퇴근과 생활 물자 수송, 도로건설의 면에서 현재 교외도시를 중심으로한 도시계획이 얼마나 미래에 부적합한 것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가 역설하는 소도시의 부활 또한 생태도시와 같은 맥락에서 깊이있게 고려해볼만한 견해이다. 현재 많은 도시에서 시도하고 있는 생태도시란 단지 환경오염이 적고 녹지가 많은 쾌적한 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태도시의 개념에는 지역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도시, 자생 가능한 도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이것이 소도시 규모로 추진될 경우 더욱 순조롭게 확산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장기비상시대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다면 말이다.

 

<장기비상시대>는 석유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석유 하나에 이렇게 많은 혜택과 문제점이 연관되어 있었는지 새삼 놀랄만큼,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항들까지 다뤄나간다. 장기비상시대에 관한 저자의 비관적인 미래 시나리오는 차치하고라도 석유를 둘러싼 패권 다툼과 석유에 관련된 산업들의 전망, 그밖에 기후, 의학, 인구 등에 관한 면밀한 분석은 석유를 태우며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세상을 실감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최면에 걸린 듯 무의식적으로 석유를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최면해제의 신호음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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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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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란 참 독특한 건물이다. 덩치는 크지만 내부는 대부분 텅 비어있고 모든 공간은 흐름을 전제로 존재한다. 이는 밀집과 머묾을 기본으로 하는 일상의 아파트, 학교, 사무용 빌딩과는 확연히 다른 유형의 공간이다. 오죽하면 어떤 건축가는 미술관을 가리켜 '텅 빈 상자의 연속'이라고 불렀을까! 그러나 미술관의 텅 빈 공간에도 엄연한 점유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빛이다. 빛은 미술관 곳곳으로 스며들어 주인장의 이름으로 잠들어 있는 신화를 깨우고, 역사에게 이야기를 재잘거리게 하며, 인물들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한다. 그리고 때론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내부로 흘러 들어와 미적체험의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순간이 물리적 흐름을 떠나 감상자로서 예술적 흐름으로 편입하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충격을 받아 전율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오랫동안 떠날 수 없는 극적인 경험들을 예술과 만나는 순간, 즉 예술의 흐름속에 빠지는 순간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심미안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될 뿐,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수의 범인들은 어떻게 미술을 감상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이 '지식'이다. 심미안은 선천적인 재능과도 같아서 노력한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식을 갖추고 사유하기에 힘쓴다면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식이 없다면 직관으로 얻은 감동을 하나의 탁월한 가치로 승화시키거나 재구성할 수 없다. 이렇게 미술감상에서의 지식의 역할과 심미안(직관)의 역할을 구분해 보는 것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출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직관을 실에, 지식을 구슬에 비유하고 있는데, <지식의 미술관>은 우리들에게 구슬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심미안을 갖게 해준다는 허황된 약속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식이 미적체험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지식을 통해 사유를 확장해 나가는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매우 솔직한 면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지식은 낱낱의 정보 한 톨로부터 시작된다. 개별적으로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이를 통해 대단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쌓이다 보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눈송이처럼 부지불식간에 모여 커다란 힘의 근원이 된다. 이 책에도 정보형 지식이 상당히 담겨있는데, 키아스쿠로, 데칼코마니아, 디 소토 인수와 같은 용어를 비롯해 인상파와 튜브물감, 위작, 스탕달 신드롬 처럼 흥미를 유발하는 곁다리 이야기들이 가미되어 소소한 정보와 함께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들은 그림에 얽힌 역사, 종교,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결코 가볍게 읽어 넘길 수 없다. 뿐만아니라 <지식의 미술관>에는 18세기 이전의 명화들이 상당수 소개되기에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힘 또한 기를 수 있다.예술가의 방, 혹은 경이의 방을 뜻하는 쿤스트카머는 유명화가의 걸작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역사적 지식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그림이다. 온갖 진귀한 것을 모아놓은 이 수집품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나타내는 척도였으며, 단순히 특산물이나 외국의 풍경, 진귀한 동물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아놓은 것 같아도 이면에는 경험주의 철학의 등장과 기득권자들의 특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흐르고 있다.

 

 

 

<지식의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알레고리'에 관한 작품들이다. 알레고리란 '다른 이야기'라는 뜻으로 겉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내포되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알레고리를 해독하는 재미가 16~18세기의 명화들을 감상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알레고리'하면 빈번히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부터 신앙의 알레고리, 바니타스 알레고리, 문법의 알레고리 등 상징을 통해 그림을 읽어나가는 방법과 이들을 통해 총체적으로 가치를 통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알레고리를 보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말한 '인생이란 초콜렛 상자와 같다'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초콜렛을 꺼내는 것처럼 그림속에 숨어있는 상징들을 발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렛을 다 꺼내 먹어야 한 상자가 어떤 맛의 컨셉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림도 모든 상징들을 다 발견해야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음미할 것은 한 병의 포도주와 같은 지식들이다. 포도주는 생포도를 원료로 하지만 알콜과 배합되고 숙성되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형(transform)된 음료인 것처럼 지식에서도 하위지식(정보)을 원료로 전혀 다른 경지의 맛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특별히 낱알같은 사소한 지식에서 한 묶음의 초콜렛 같은 지식, 그리고 차원을 달리하는 포도주같은 지식으로 확장되며 진행하는 책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새로운 시각을 접목시키고 숙성시켜 나간 흔적은 책 속에서 빈번히 접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창작법인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에서 비즈니스 세계의 데페이즈망을 연관시키기도 하고, 오감도(五感圖)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 누드화와의 관계를 찾아내기도 한다.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키스>는 남성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화해한다는 깊이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남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성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무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중략)...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p.129~130)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입문서라고 부르기엔 조금 특별한 책이었던 것 같다. 일단 시대나 사조별로 그림을 나누거나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식을 종횡무진 하며 사고를 확장해 가는 것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니라면 '빅토리안 페인팅과 영화', '반달리즘과 미술'같은 주제의 글을 만나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술의 중심 키워드라 여기기엔 조금 부족한 사냥감 그림, 트롱푀이유, 미술품 약탈(엘기니즘) 등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인데, 역시 다른 책에서는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이 책을 통해 읽어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뛰어난 심미안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감식안을 가지고 큐레이터나 비평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미술에 대한 지식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익한 감상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좋지만 어떤 그림에서든 자기만의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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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6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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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운전 좀 하나?"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면허는 예전에 따 놓았는데, 실제 운전한지는 꽤 오래 됐어요. 장농면허죠, 뭐."

 

운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때 운전하고픈 욕구와 의지가 있었으며, 이미 시험에 통과해 '쯩'까지 다 받아 놓았는데 어째서 과감하게 도로에 나아가 차를 몰지 않는 것일까? 물론 비용과 환경을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혹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운전이라면 치가 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한 사실은 운전대를 놓은 시간 동안 운전에 대한 감각은 뒤떨어지고 애써 마련해 놓은 면허증은 효용성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의 대화를 그대로 민주주의에 대입해보자. 그리고 묻는다. 민주주의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 인지하고 혹자는 한때 민주화의 의지로 불탓음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민주국가의 국민임을 증명하는 사진과 13자리 숫자가 또렷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어째서 과감하게 세상에 나아가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고 내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이었다. 장농속에 묵혀놓고 오랫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운전면허증과 대학교 교양강의를 마지막으로 단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내 마음 속의 민주주의가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둘 다, 청춘이 꽃필 무렵 내게로 왔다가, 둘 다, 현실에 부대끼는 가운데 멀어졌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책의 제목을 따라 이 질문에 답해보려 하였다. 먼저 생각난 것이 '국민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라는 구절,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우리나라 헌법 첫머리, 그밖에 다수결의 원칙, 투표, 주권, 민주화 항쟁과 같은 단편적인 단어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 정도의 상식적인 한 줄밖에 되지 않았다. 코스 연습을 하듯 학교라는 틀 안에서 주워삼킨 단편적인 지식들은 결국 세상에 나아가 민주주의를 외치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비록 안다고 해서 모든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지식이 부족하다고 행동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만한 누군가를 지지하려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 관념의 핵심을 비판하겠다는 저자는 '국민-주권-대표'라는 대표적인 형식을 근대 정치의 기본도식라 일컫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통념에만 기대어 민주주의를 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국민-주권-대표'라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깨어진 민주주의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어원부터 살펴보면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힘을 나타내는 크라토스(kratos)'를 합한 말이다. 이것은 근거와 근원을 뜻하는 '아르케(arche)'를 붙여 만든 '모나키(monarchy/군주정)'나 '올리가키(oligarchy/과두정)'와는 확연히 다른 정체(政體)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아르케는 '아르케 없음'이기 때문에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그리고 심지어는 수적 우세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민주화 투쟁이란 이런 근거들이 근거 없는 것들임을 폭로하는 과정, 근거에 의해 구분되고 소외된 민중들의 힘을 발휘하는 과정이다. 이에 대해 자끄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면 '말할 권리를 갖지 않는 자가 말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의미와 함께 탐색되는 것은 주권과 대의제이다. 우리는 흔히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 알고 있으며 현대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그 대표가 되는 사람을 선출해 국민의 주권을 대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재고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대의제의 기원을 보면 민주주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대의제는 군주제에서도 가능하며 그밖에 다른 정체에서도 실행할 수 있다.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야 말로 대의제의 하나로 등장했다고(p.71) 역으로 설명해야 옳은 것이다. 뿐만아니라 대의제는 이를 통해 지배권을 얻은 이들이 데모스, 즉 군중들이 직접 지배할수 없도록 취한 정치적 장치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대의제를 잘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귀속된 주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국민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양상들이 사이(inter)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처럼 통념상 알고 있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나면 민주주의의 목표가 어디에 있을지 사뭇 궁금해 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너무도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희미하나마 '정치'에 가려졌던 민주주의로부터 한줄기 빛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점점 늘어가는 NGO, 정치적 힘을 갖지 않는 고등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평범한 주부, 네티즌 등의 권리 주장이 바로 새로운 '이후' 민주주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80년대 시위의 주도자였던 대학생, 노동자, 시민과 비교해 보면 사뭇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도.

 

이 책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민주주의를 증오하고(사실상 민주주의는 초기에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 폄하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그 약점을 통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가 통념상 올바르다 생각하는 국민주권과 대의제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듯 우리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짚어보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였다. 마지막 장에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이라고 하여 우화형식의 단편적인 글들을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글들은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우화를 통해 스스로 깨우쳐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상들은 주로 인민(혹은 시민)의 역할(여기서는 역할이 곧 권리이기도 하다)을 각성케 하는 효과가 다분한 글들로, 그동안 정치 잘 할 사람을 뽑는데 혈안되어 갑론을박하고, 좌파우파하고, 보수진보했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누구를 대표로 뽑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데모스인 우리들이 그럴만한 힘이 있음을 깨닫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특히 '나꼼수'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지금,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해주고 얼마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이 커다란 관심을 모았었다. 책도 자그마하며 가격도 비슷한 두 권인데 하나는 무척 각광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그 힘에 눌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비슷한 현상이 한 번 더 있었다. 우리의 호프 김어준 총수께서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출간할 무렵, 자끄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역시 하나는 전례없는 판매고를 올렸고, 다른 하나는 정치철학계 구루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곰곰 생각해 보면, 먼저 현재 우리 현실이 '분노'가 먹히고 '씨바'가 먹히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누군가 꾹꾹 참고 있던 마음을 총대메고 폭발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진정성과 함께. 반면 민주주의는 현실에선 크게 매력이 없다. 지루한 철학자들의 언변 일색이며 각종 논리와 비판이 건조하게 이어진다. 또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논하는 학계와 실제적인 시민들의 삶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론으로만 가득찬 민주주의를 시민의 언어로 표출해 줄만한 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현재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선 민주주의 보다 선거에 더 관심이 모아진다. 그러나 여전히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되며 정치가 주목받는 시기이기에 오히려 민주주의를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꼼수'를 듣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나꼼수'에 공감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통치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MB도, 김어준도 아닌 '나꼼수'의 청취자가 데모스이며 크라토스임을 깨달을 수 있다(우리들이 힘을 가진 통치자다!). 하여, 청취자들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알 때 김어준의 방송이 더 빛을 발하고 의미가 깊어질 것이며 그것이 코스를 벗어나 제대로 된 도로를 달리는 민주주행에 기어를 넣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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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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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도서출판계는 부고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흉흉한(?) 세상이었다. 혹자는 시가 죽었다 했고, 혹자는 철학이 죽었다 했으며, 좀 더 광범위하게 문학이 죽었다, 인문학이 죽었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세간에 떠도는 부고들의 종결자가 나타났으니, 아예 '책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셔먼 영이다. 셔먼 영은 서구 여러나라들의 참담한 독서실태를 고발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의 요구에 맞춰 일종의 상품처럼 출간된 '안티 책'의 문제점도 지적하는데, <불온한 인문학> 역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국내 인문도서 현황을 분석하면서 우리 인문학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구전민요처럼 들어왔던 '인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2011년 현시점에서 볼 때 더이상 유효한 것 처럼 들리지 않는다. 올해 베스트 셀러 순위 100위 안의 도서들을 보면 인문학 도서가 9권이 들어있고, 200위 안에서는 21권 정도가 된다. 이는 외국어 교재 및 아동도서를 포함한 총 순위로 전체 10개 남짓한 도서분야의 숫자와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문학분야의 강세를 고려해 볼 때 그런대로 괜찮은 실적이다. 뿐만아니라 작년도 <정의란 무엇인가>와 올해 <닥치고 정치>의 히트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인문학이 부활했다'는 말이 신빙성있게 들릴 정도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성급히 축포를 터뜨릴 일은 아니다. 이른바 인문학 베스트셀러에 속해있는 도서들을 보면 진정한 인문학의 깊이를 추구한다기 보다는 마음을 달래주고 막막한 인생길에 조언을 보태주는 에세이 형식이 더 많다. 또한 쉽고 즐거운 입문서들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도서들이다. 물론 인문학이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이들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른바 '행복'이나 '위로' 혹은 '지식충전'을 표방하는 현재의 인문학은 자기계발화, 상업화, 고급문화화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인문학의 참다운 발전은 커녕 소비주의와 권력의 통제 속에 귀속되어 본질마저 혼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더해 각 기업에서 앞을 다퉈 홍보하는 '인문경영'의 실체는 학문을 통해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풍부한 창의력을 갖춘 인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스펙 갖추기 열풍에 일조할 뿐이다.

 

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p.83)

 

<불온한 인문학>이 추구하는 인문학은 강박적인 소비에 끌려가지 않으며 휴머니즘이나 문화주의와 같은 목적론을 거부하는 반(反)인문학이다. 더이상 '정신문화' 창달과 같은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지원에 충실한 인문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다. 인문학이란 흔히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고 불려지며 영어의 표기를 보아도 'Human Science'나 'Humanities'에서 '인간'이라는 의미가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인문학에 내재된 휴머니즘(Humanism)도 바로 여기서 파생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인문학이 자리잡게 된 데에는 야코프 브르크하르트라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저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것이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면서 인문학은 결국 권력에 종속된다. 실상 인문학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르네상스의 '스투티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란 문법, 수사학, 역사학, 시학, 도덕철학 등과 같이 법학이나 신학을 제외한 과목들을 일컫는 교과개념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이처럼 인문학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이 권력에 의해 채택되고 '이용'되어온 사실을 낱낱이 밝히며 인문학 본연의 역할에 대해 재고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성을 도야하기 위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이것 역시 국민들을 규율로 '훈육'시키려는 권력자의 음모의 일환이다. 반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인문학이란, 그리고 인문학의 지향할 자세란 '횡단'의 성격를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진경의 글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은 이 책의 중요한 핵심을 담은 장이며 매우 치밀한 논리로 우리가 알고 있던 학제적 교류, 통섭, 소통 등에 대해 일격을 가한다. 그는 한때 화두였으며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는 통섭적 연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데, 통섭적 연구란 환원적인 방법론일 뿐이며 오히려 모든 학문을 자연과학적 방법 안에 포섭하려는 '통합'의 절차,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전략의 일환일 뿐이라 주장한다. 더불어 '횡단'이란 계급과 여성조직, 인간과 도롱뇽처럼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이 만나고 이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시야내로 들어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생생하게 역설하며, 인문학이 갖는 보다 강력한 정치적 의미와 만나게 한다.

 

인문학의 기원과 이를 둘러싼 권력과의 관계, '횡단'을 통해 권력에 도전하는 불온한 인문학의 잠재성, 그리고 불온한 인문학의 일환인 현장 인문학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새로운 인문학의 면모를 엿보게 하며, 매우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장애인, 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등이 인문학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하는 모습과 그들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유너머N 연구진들의 정성에는 진정성이 가득한 아름다운 '횡단'의 실체가 담겨있다.

 

우리가 장애인, 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외국인 노동자, 노숙인, 철거민과 함께 인문학을 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강팎한 영혼을 인문학으로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처지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말들기 때문이다. 법의 바깥, 국민의 바깥, 시민의 바깥, 정상인의 바깥, 합리적 개인의 바깥에 내쳐진 날것의 삶에서 어떤 탈-휴머니즘적 인간과 인간학이 생성하는지 사유하고 실험하고 발명하기 위해서다. 현장 인문학은 인문학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장'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p.187)

 

그러나 불온한 인문학을 성립시키는 정교한 논리와 현실에서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있다. 먼저, 인문학이 항상 불온해야하고 권력의 밖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 권력 내에서 순기능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견해이다. 또한 인문학을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으로만 연결시켜 인문학이 가지는 다양한 면모들을 축소시켜버렸고, 논리의 성립을 위해 인터내셔널이나 횡단과 같은 용어들을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마르크스의 '인터내셔널'에 독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 단어를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단으로 치부해 버렸고, 횡단의 경우 통섭과의 차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무수한 증명을 펼쳐보였으나 정작 통섭이 환원주의라는 것에 대한 사회생물학자들의 반론은 아예 반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자(들)의 주장은 권력자와 피지배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논리가 되고 말았으며 이는 인간과 도롱뇽처럼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조우시키기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모순이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인문학은 부유한 자를 위해서도, 가난한 자를 위해서도 존재하는 학문이다. 아니, 어쩌면 인문학을 통해 빈부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불온한 인문학을 통해 권력과 가진 자들의 음모와 통제를 꿰뚫어 보고 그것에 저항한다는 의도에는 공감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인문학 전반의 균형잡힌 모습과 우리 인문학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장이 되었다면 저자(들)의 철학적 사유의 정교함이 더 빛나고 유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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