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백가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
조용헌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나는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집을 지으며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어떤 집을 만들까 고민하고 실용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모형 만들기에 스케치, 도면작업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쏟아부은 밤이 곧 집을 보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모든 작업의 관심사는 독창성에 쏠려있었고, 실무에서의 수익성과 저울질해가며 어느덧 참다운 집의 의미를 구하는 일에서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하면 부동산을 떠올리고 집이 부(富)의 상징이 된 것을 한탄할 때, 집에 부(富)를 더해 예(藝)까지 입히는 나의 경우 그 한탄도 두배로 늘어났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조용헌의 백가기행>은 ’집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가내구원’의 가르침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건축가들의 고민과 담론에서 벗어나 동양철학자에게 색다른 답을 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더욱이 그가 소개한 집들은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한옥이기에 왠지 옛 선현의 지혜가 발견될 것 같아 더욱 마음이 갔다.
 
작은 오두막부터 거부의 명가까지 모두 22채의 집을 순례하는 사색의 시간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맑음’이다. 저자 조용헌이 찬찬히 들려주는 집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집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가치관과 애정, 그리고 안목이 어찌나 올곧고 섬세한지 그동안 흐려졌던 집에 대한 의미들이 하나 둘씩 선명하게 살아나는 것 같다. 뿐만아니라 "한 집을 20년동안 살펴보며 한옥 보는 안목을 틔웠다"는 저자나 "사람이 자식도 만드는데 어찌 집 하나 못 짓겠소"라던 방외한옥 송일근씨의 말은 맑은 공기를 가로지르며 들려오는 풍경소리처럼 청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는 집짓는 사람으로서 되새겨야 할 교훈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조용헌의 백가기행>에는 집에 대한 가치관을 되돌아보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성찰적 요소들이 가득 담겨있으며, 공간과 사람, 땅과 볕과 바람이 어우러져 현대인들이 잊고 있던 평온의 정취를 회복시켜주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아름다운 집들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 저자가 감탄하며 꼽았던 장성 축령산 도공의 집이다. 단지 2만 8천원으로 손수 집을 지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인간과 자연을 살펴 그 규모에 담은 철학이 예사롭지 않다. 집주인은 산중의 넓디 넓은 터에 자신이 기거할 딱 그만큼만 차지하고 더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넓은 자연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어주고도 얻는 지혜...이러한 마음을 도시의 집에서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이 작은 집에 나있는 작고도 나즈막한 창(窓)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집주인이 도공인지라 자신이 아끼는 도자기에게 각별한 사랑을 표현한 창문 같기도 하고, 앉은 자세에서 빛을 받는데 가장 적합한 위치를 선택한듯도 한데,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든 모양새가 자연스럽고도 이색적이다.
 

 

 
축령산 도공의 집은 충격에 의한 충격이었지만 담담하고 소박한 진주 석가헌은 평범한 가운데 깃든 기품이 있어 다시 돌아보게 된다. 첫눈에는 이 집의 아름다움을 쉽게 알아볼 수 없지만 내부로 흘러드는 은은한 볕과 차(茶)를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밥처럼 질리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맛에 이 집에는 항상 차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좋은 집이란 역시 사람을 불러모으는 재주가 있나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주 효주 허만정 고택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전통적인 멋이 있다. 이 집은 돈이 모이는 풍수명당에 지어져 대대손손 부유했으며 동시에 의부(義富)집안으로 알려졌는데, 독립운동, 신분해방 운동, 장학금 등에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아 오늘날 집으로 부를 과시하는이들에게 진정한 부의 의미를 일깨운다.
 

  


이 책에는 전통 한옥뿐만 아니라 건축이나 실내디자인에 현대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집들도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땅 집’이라 불리는 건축가 조병수의 집인데, 이름처럼 땅을 파 집을 앉히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대지의 품에 안겨 산다. 내면으로 침잠하여 가내구원에 이르는 이 집은 고요함의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평선 아래에 거하면서도 햇살로 충만하고, 하늘이 땅인듯 땅이 하늘인 듯한 풍경을 누리는 것은 오히려 강한 시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집을 짓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서구 근대건축의 정신을 지상명령으로 강요받는다. 대량생산 가능성, 효율적인 공간계획, 간편한 시공...이에 따라 모든 것이 획일적으로 계획되는 가운데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마저 생기없고 단조롭게 변해가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가내구원은 현대인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소중한 우리의 개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값비싼 저택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편일률적으로 솟아나 있는 아파트라해서 이루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대대손손 명가든 소박한 한옥이든 인간에게 안식이 되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공간은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조용헌의 백가기행>을 통해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더 큰 혜안을 엿보며 집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새롭게 정비했다. 더불어 잘 알지 못했던 한옥의 깊은 멋과 자연을 공간에 어우러지게 하는 독특한 안목들도 인상깊게 눈여겨 보았다. 이젠 그들이 가르쳐 준 교훈을 바탕으로 집에서 부(富)와 예(藝)를 벗겨내고 사람살이로 가득 채우려 한다. 부(富)와 예(藝)를 입힌 집에는 항상 사람살이가 깃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살이로 가득 찬 집에서는 부(富)와 예(藝)가 절로 우러나옴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reamout 2012-08-3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헌. 이라서 전통적인 옛 한옥만 나오나 싶어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관심이 가네요.

탄하 2012-08-31 23:36   좋아요 0 | URL
전통적인 한옥도 있지만 한옥 내부를 현실에 맞게 레노베이션한 것들도 있고,
한옥의 정취를 살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들도 있고, 다양한 집들이 있답니다.
운치있는 실내공간을 좋아하신다면 맘에 드실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