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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십대시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나를 가장 달뜨게 만들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거친 바다에서 펼쳐지는 초인적인 의지력의 극치라니! 열정으로 가득했던 십대에게 그것은 스릴과 모험담이 넘치는 인간승리의 이야기로 비춰졌으며, 제멋대로 ‘마초’ 노인과 ‘폭풍의’ 바다를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넘겨보니 그게 아니었다. 노인은 너무도 온화했고, 바다는 잔잔하고 망망했으며, 도대체 어떤 일도 영원히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조용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채 사분의 일도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물고기? 우습지만 물고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후 20년 가량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노인과 바다>를 펼쳤다. 그런데 처음부터 십 대 때와는 완연히 다른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간결한 문장들은 온화하지만 강인한 노인처럼 은밀한 장력(張力)을 발휘했고, 그 팽팽함 가운데 섬세하고도 치밀한 은유와 묘사들이 절로 호흡을 멈추게 했다. 누가 봐도 난해하지 않고, 가지런한 가운데 하나의 완성품으로 정육면체 같은 솔직함을 드러내는 이 작품을 그때는 어찌 몰라봤을까?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p.10)
아마도 그것은 표현형에만 현혹되곤 했던 어린 시절의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내게 이 이야기는 모두 ‘늙거나 낡은’ 것처럼 보였고, 그 안에 빛나고 있는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처럼 생기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늙거나 낡은’ 이야기 속에서, 노인의 배는 한없이 초라할 뿐이었고 텅 빈 채로 출항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치 물고기를 잡아 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생계형 어부’의 모습처럼. 그러나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눈’을 가진 형형한 기상의 노인은 ‘생계형 어부’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더 크고, 더 많고, 더 값비싼 물고기들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생존형 어부’라 구별해야 했다. ‘생존형 어부’의 배는 그의 온 삶이 실려있기에 물고기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만선으로 출항한다. 그리고 나는 바다처럼 파란 노인의 두 눈을 떠올리며 출항부터 가득한 그의 배를 만끽했다.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p.33)
노인의 배는 수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정확하게 드리워졌을 낚싯줄에 미끼를 다는 순간 성실함과 집중력으로 만선이 된다. 노인은 종종 운을 말하지만 줄을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운을 줄에 맡긴다는 자세이기에 팽팽하고 정확한 낚싯줄에선 엄숙함 마저 흐른다. 이후 아주 커다란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도 감동이지만 다른 어부들과는 다르게 정석을 고집하며 최상의 줄을 드리우는 모습 역시 끝까지 각인될 만큼 묵직한 감동이었다. 팽팽한 줄 하나가 이리도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여기에 노인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바로 그’ 물고기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대응하는 물고기의 생명력이 왕성하게 전달돼 오는 통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인은 혼신을 다 해 이 줄을 당김으로써 존재의 의미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버티는 시간은 곧 본연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한 노인의 거친 여정을 다루고 있지만 그가 탄 배에 항상 긴장감만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노인이 친구와도 같은 소년과 야구를 떠올릴 때면 배는 순수함으로 가득 찼고, 그가 바다 동물들의 본성과 맵시를 중얼거릴 때면 경험과 지혜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어찌보면 스스로에 대한 재 다짐인 듯, 배 위에 앉은 작은 새에게 말을 건넸을 땐 위로와 격려로 따뜻한 만선이 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p.57)
노인의 배는 이처럼 물고기 한 마리 싣지 않았어도 이미 풍요로움이 넘쳤다. 그의 배에서 온화한 풍요로움 마저 넘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기본적으로 바다를 여성인 ‘라 마르(la mar)’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타 생계형 어부들과는 달리 바다를 전투장인 남성으로 보지 않고 다정한 여성으로 생각한 그는 바다를 닮아 내면이 온화했고, 어부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부로서의 성장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이상(理想)에 몰입하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이 책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어부로서의 성장은 커다란 물고기를 기어이 획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건장한 어깨와 굵은 팔뚝을 지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어부로서의 삶이 스러져 갈 때, 그 모습마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진정 성장을 이룬 어부일 것이다.
…폐허가 될지라도, 기초와 1층만 덩그러니 남는다고 해도,
뭔가 이야기를 남길 정도로 에너지를 지닌 건축을,
나는, 지금도 만들고 싶다.
ㅡ 안도 다다오
커다란 물고기를 위해 사투를 벌였던 노인의 모습에서 폐허가 됐을지라도 위용을 잃지 않는 파르테논 신전이 떠오른다. 분명 노인이라면 ‘건축’ 대신 ‘고기잡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겼을 법하다. 그래서 폐허처럼 낡은 노구(老軀)지만 끝까지 물고기를 지키려 버텼던 어부와 그 정신의 현신인 듯 갈갈이 찢겨졌음에도 대어(大漁)의 기품을 잃지 않았던 물고기의 에너지는 이토록 뜨거운 이야기를 남겼고, 그 이야기는 폐허마저도 아름다운 생(生)을 살기 위해 팽팽한 줄을 놓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마음에 또다시 커다란 용기로 자리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