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여행은 동행이 있을 때도 있고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도 있었지만 책만은 항상 옆에 있었다. 그 책을 통해서 현실과 정신의 두 가지 차원적 여행이 그려진다. 스페인에서는 메시와 돈키호테에 동시에 환호하고 미국에선 코비 브라이언트와 헤르만 헤세에 양다리를 걸치는 그 간극.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여행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벼운 듯 가볍지 않고 무거운 듯 무겁지 않은 여행, 그런 인생. 제목이 조금만 덜 상업적이고 표지가 조금만 덜 유행을 타는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쉽다. 저자가 언급한 몇몇 책은 나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 이로써 이 책은 나에게 값어치를 충분히 했다.
철학은 오로지 거기에 맞는 적합한 수단, 즉 철학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일세. 우리의 유희는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야. 하나의 독특한 훈련으로, 성격상 예술에 가장 가깝지. 특수한 예술이네.
하필 직전에 읽은 책이 박태원의 <천변풍경>이어서 더 그랬을까.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침략자인,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가로운 일상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변풍경>이 신문에 연재된 게 1936년. <세설>이 발표된 게 1944년. 같은 시기의 너무나 상반된 생활 모습이 유난히 거북살스러웠다. 당시 우리나라 중국 등에 침략과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난폭하고 극악무도한 외형적인 나라의 모습과 달리 내적으로는 너무나 평온하고 무관심한 일본인들을 그저 문학속의 모습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다른 작품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쓰여지긴 했으나 문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반면 이 책은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통속소설, 사교소설을 그대로 모방해 일본화한 것일 뿐이기에 더더욱 읽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며 책을 과감히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