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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 - 문학 비평의 실험 ㅣ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22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일반적으로 어떤 작품이 좋고 나쁨은 소수의 평론가들에 좌우되곤 한다. 그들이 어떤 책을 ‘좋다’고 말하면 좋은 책이고, ‘나쁘다’고 말하면 나쁜 책이 되는 셈이다. 이 때 ‘좋은 책’을 읽는 사람은 ‘좋은 독자’가 되는 것이고, ‘나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수준이 낮은) 독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정한 책으로의 쏠림이 유행처럼 일어나게 된다. 특히 요즘 같으면 방송에 나와서 누가 ‘좋다’고 한 마디를 하면 단번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한다. 이왕이면 ‘좋은 책’을 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제로는 막상 읽어봐도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잘 와 닿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대체 그분들은 뭘 보고 어떤 책의 ‘좋음과 나쁨’을 평가하는 건가.
루이스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대표적인 부분은, 소위 평론가들의 비평 기준이라는 것이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이다. 특정한 양식을 잘 따랐는지, ‘현실성’을 갖추고 있는지, (혹은 그냥 자신과 친하든지) 하는 것들은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준이 적절치 못하니 어제는 혹평을 받았던 작가들이 내일은 호평을 받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일들도 쉽게 발견되곤 한다.
이에 루이스는 독자들이 작품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그 책이 좋은 책인지를 평가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한다. 어떤 책이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넓혀주는 경험을 유발시킨다면, 그 작품은 좋은 문학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존의 비평이 마치 삼각형의 산(△)처럼 소수의 비평가들의 평가가 일반 독자들을 지배하는 식이라면, 루이스가 제시하는 방식은 깔때기 모양(▽)처럼, 많은 독자들의 독서형태를 통해 좋은 책을 더듬어 가는 식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작품에 다가가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온전히 경험해 보기 전에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제대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유명인 한 명이 추천한다고 해서, 저명한 인사가 한 마디 더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출판사 입장에서는 아찔한 일일지도.) 루이스는 차라리 비평을 ‘십 년이나 이십 년 정도 끊어 볼 것’을 제안하기까지 한다(162).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은 좋은 비평을 제안하는 책이면서, 좋은 독서의 방식을 제시하는 책이기도 하다.
2. 감상평 。。。。。。。
전에 동문선에서 『문학비평에서의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책을, 홍성사에서 새로 번역해 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아마도 판권 시효가 다 되어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건 법적 절차가 그랬다는 것이고, 이미 나온 책을 다시 번역해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이유가(혹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럼, C. S. 루이스의 책 아닌가!)
번역을 새로 하면서 이해도도 확실히 높아졌다. 같은 문장도 이렇게 다르게 번역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같은 책에 관해 내가 앞서 남긴 감상평을 다시 읽어 보니,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에서부터 좀 많이 다르다. (물론 이건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는 내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 요약의 말미에도 남겼듯, 이 책은 비평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서법에 관한 책이기도 한 것 같다. 루이스는 반복해서 마음을 열고 어떤 작품을 받아들여야만 그것이 정말로 좋은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시대에도 전문적인 비평가들의 의견만 취하면서 정작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해 본 바가 전혀 없는 이들이 많았던 듯하다. 심지어 문학 전공자 안에서도 말이다.
왠지.. 대입을 준비한다고 온갖 명작 요약집을 손에 들고 사는(혹은 그런 핵심요약 강의를 수강하는)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오버랩 된다. 그렇게 나쁜 독서법에 익숙해지다 보면, 나중에는 좋은 책을 좋은 방식으로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어쩌면 우리나라 독서률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누군가의 추천, 전문가의 소개, 설명이 없이는 스스로 독서를 하지 못하는 상황은 분명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비단 독서만이 아니라 생활 속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결정권을 ‘전문가들’에게 넘겨버리는 게으름을 보이곤 한다. 다분히 조작된 이런 사고의 결과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권의 카르텔을 형성하게 둔 것 뿐.
얼마 전 핵발전소를 계속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평범한 일반인들을 모아 공론화위원회를 만들고 결정을 내렸던 적이 있다. 그 때 공론화위원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 선 이들이 입에 달고 다녔던 비난 중 하나가 ‘그런 일을 왜 전문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일반인들이 판단하느냐’는 것이었다.
학생 시절부터 무슨 교수니, 무슨 비평가니 하는 사람의 말만 달달 외우며 살아온 이들에게 인이 박힌 사고다. 모두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공업화시대에야 나름 기능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런 식으로 판단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버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비전이나 희망이 있긴 한 걸까. 하물며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이 즈음에 말이다.
책을 잘 읽는 것, 나아가 좋은 책을 좋은 방식으로 읽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가장 좋은 길인 것 같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좋은) 독서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 게다. 그건 단순히 지식을 뇌에 저장하는 작업 이상의 행위니까.
책은 많이 보지만, 그 안으로 좀처럼 깊이 들어가지도, 책이 열어주는 새로운 시야나 비전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 아니 그냥 책을 (제대로) 읽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먹은 사람에게도 이 책이 말하는 바는 아주 좋은 조언이 될 것 같다. (물론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루이스에게만 익숙한 독자에게는, 잠시 루이스와 함께 그의 강의실 나들이를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줄만한 책이다. 영문학자 루이스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