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연애소설. Essays in love라는 원제를 가졌는데, 나는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번역된 제목이 확실히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아주 정확하다. 얼핏 보기에 별다른 특징도 없고 재미도 없는 문장이지만, 소설의 목적을 아주 정확히 말하고 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철학 강사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철학적이다(물론 이 논리구조가 가질 수 있는 설득력은 굉장히 궁색하다. 안톤 체홉의 단편들이 의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소설에서 철학이라는 알맹이를 쏙 빼고 읽어도 그의 문장은 대단히 재미있다. 그만큼 그는 타고난 글쟁이이기도 하다.

  그가 유희한 모든 철학적 분석이 일반론이 될 수는 없다(주장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고, 유희라고 말한 것은, 그의 넘치는 재치와 장난기에 대한 예의이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무르팍을 치게 만든다는 거다. 드 보통의 농담기 흥건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구나 맞아 맞아, 나도 그랬어, 내가 느꼈던 게 그거였구나, 라는 말을 중얼중얼 거리게 된다(개인적으로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감탄사를 자주 내뱉는 취미가 있는데, 특히나 드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저 색히 또 저 지롤하네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보통의 책은 연애라는 아주 대중적인 소재를 취하면서,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비범하고 비일상적인 글로 풀어나간다. 보통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면, 아니 댓 장만 읽어보면 이러한 그의 특이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플롯이 없다. 사건과 사건의 아귀가 기막히게 들어맞아 돌아가는 다른 훌륭한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플롯이 없다면 스토리는 어떠한가. 이것 참 당황스럽지만 스토리도 뻔하다. 독자의 기대를 배신하기는커녕 너무나 단조롭다. 하지만 이점이, 이 플롯의 무재와 스토리의 단순함이라는 다른 소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특징 아닌 특징이, 그의 빛나는 통찰력과 철학적 사유, 극도의 논리력과 함께, 독자를 감탄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스토리가 소설적이지 않기에, 너무나도 우리의 일상 연애와 다르지 않기에, 독자는 드 보통의 책에서 감정이입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남자주인공에게서, 클로이에게서 ‘이거 완전 나랑 똑같잖아!’라는 감탄을 발견하게 된다. 또,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중 하나에게서 나와 함께 있던 지난 사랑을 찾아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읽기 좋게, 필름처럼 차라라락 펼쳐지지 않는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보지 않고 발견한다. 어떤 인터넷 서점에서 본 알랭 드 보통의 카피가 “일상의 별명가”였다. 발명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리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어휘선택의 부적절함을 물고 늘어지지 않고 그냥 카피라이터의 의도를 파악해본다면, 일상의 발명가는 꽤나 작가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다(일상의 발견가가 훨씬 적절하겠지만, 발견가라는 단어가 좀 어색한 게 사실이다. discoverer와 everyday affairs 정도의 영어로 쓰면 오히려 쓰면 자연스럽겠지만).

  누구나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연애의 장면들이 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겪게 될 법한 장면. 첫 만남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헤프지 않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던가, 고대하던 첫 섹스 후 상대에 대한 신비감을 다소 잃은 상태에서 아침을 같이 먹는다던가, 먼 곳으로 단 둘이 여행을 갔는데 샤워시설이 형편없어 짜증을 낸다거나(혹은 짜증내는 그/그녀를 본다던가), 꽤나 떨어져 있는 애인을 만나고 싶은 욕구와 그까지 이동하는 데 감수해야할 귀찮음을 저울질 한다던가, 그 귀찮음을 내가 떠맡을 것인가 애인에게 떠맡길 것인가를 줄다리기 한다던가 하는 가지가지의 연애 scene. 드 보통은 수많은 상황을 펼쳐놓고, 그 상황을 여러 그림과 그래프, 도표 등을 도모해 하나하나씩 분석한다. 그의 분석을 듣고 있노라면, 아주 훌륭한 참모에게서 상황보고를 듣는 장군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독자에게 친절하다.

  그의 분석은 전천후다. 어떤 상황도 그 앞에서는 발가벗고, 결국에는 그 깊숙이 숨겨놓았던 논리를 드러낸다. 그가 사랑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시공을 초월한다.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인 스팩트럼을 뿜어낸다. 예술, 철학, 사유, 논리, 과학, 종교 등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고풍적이면서도 최첨단을 달린다.

  물론 독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굉장한 논리를 가진 알랭 드 보통의 혀 때문에,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라고 설득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란, 특히나 사랑을 하는 사람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백 원짜리 팅팅볼 보다도 변화무쌍하다. 아무리 그의 통찰력이 극강의 센서를 장착했다 해도, 개념 미 탑재 이등병보다도 더 개성 넘치는 세상의 수십억 개 사랑을 일반론으로 포괄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이 작가의 책들은 세상의 모든 사랑을 재단하고 포괄해 기성복을 입히려는 것이 아니다. 드 보통의 의견에 굉장한 공감을 느껴서, 일상의 무시무시한 무게에 짓눌려 잃었던 사랑에 대한 감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이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사랑이 왜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한 건지 몰랐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드 보통의 논리에 설득당하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놀라움으로 다가가고, 나의 사랑은 이렇지 않은데 왜 이 작가는 이렇게 분석해놓았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에게조차도 이 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만한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최소한, 나는 다르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거야, 라는 정도의 회유는 얻게 될 테니.

  알랭 드 보통, 보통이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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