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김복희 지음 / 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그래요. 정말 정말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씁니다. 쓰다가 의문이 생기지요. 이것도 시인가. 시가 되는 글일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책상에 앉아 시를 쓰다가도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겨우 몇 글자를 쓰고 창을 닫아 버립니다. 시의 창.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의 창. 창문을 닫고 이제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체념을 남겨놓습니다. 시를 쓰는 날은 부끄럽게도 얼마 되지 않아요. 대부분 밤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내버립니다. 


책의 제목이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라서 네 시를 쓰고 싶습니다는 답을 하기 위해 읽었습니다. 요즘의 내 몸과 정신의 형편을 알고 있는 듯한 제목이잖아요. 읽지 않을 수 없죠. 책을 읽으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를 쓰게 될 것 같기도 하니까요. 좋은 책은 책을 읽고 난 뒤 무엇이든 쓰게 만들잖아요. 야 너두 할 수 있어. 툭툭 어깨를 쳐주잖아요. 


모험가님, 이 시인, 탐정의 이름을 걸고 말합니다. 

글쓰기는 자신의 안에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써야 쓰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김복희,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中에서)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써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해주는군요. 암 그렇지요. 써야 쓸 수 있지요. 쓰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지요. 쓰겠다->쓴다로 가는 경로로 움직여야 하지요. 쓰겠다는 길목에 서 있기만 하면 도착지로 갈 수 없어요. 무얼 쓰면 시가 될까. 이것도 시인가. 잘 쓰겠다. 쓰다 보니 장애물이 생기네요. 하루를 지내다 보면 시의 영감이 불쑥불쑥 찾아오기도 해요. 그럴 때 어떻게 하시나요? 


휴대전화 메모장이라도 열어서 쓰면 될 텐데. 지나가게 놔둡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요. 집에 돌아와 한글문서를 엽니다. 아까의 영감을 쓰겠어. 지나간 버스 같네요. 영감은. 한 번 떠난 영감은 돌아오질 않죠. 깜박이는 커서를 보다가 오늘 화나고 어처구니없었던 일을 시가 아닌 일기로 쓰고 삭제합니다. 동네 친구도 아닌데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라. 한 번에 한 가지씩 일을 시켜라.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을 살살 불러일으켜 줍니다. 시적인 소재는 정해진 게 없으니 일상에서 무엇이든 찾아 써도 된다고 알려주기도 하죠. 시인의 산문은 시입니다. 무엇을 쓰든 시가 됩니다. 깨닫게 해줍니다. 써 볼게요. 시


가을 사과


내 시는 일기 같다고 했다

시 창작 시간에 말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은행잎을 주웠다

일기 같은 시를 쓴 공책에 넣었다


사과를 사서 먹으라고 

제일 크고 좋은 걸로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에는 사과


돈을 보내주면 그제서야 잘 받았다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싶어서 돈을 보내준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람이 떠나면 사랑이 남습니다. 사랑의 순간에 시가 찾아옵니다. 우리 모두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세지옥 - 91년생 청년의 전세 사기 일지
최지수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달 특정 일이 되면 주인집 문을 두드렸다. 봉투에 월세와 공과금을 넣어서. 그때는 은행 앱이 없어서 인터넷도 깔려 있지 않아서 계좌이체를 하려면 ATM기나 은행을 가야 했다. 돈을 뽑아서. 그래 그러고 보니 돈을 뽑으러 갈 때 계좌이체를 했으면 되는 거였네. 그런 생각은 못 하고 직접 돈을 줘야 안심이 되었나 보다. 이번 달 월세입니다. 봉투를 건넸다. 나는 꽤 성실하고 정확한 세입자였다. 단 한 번도 월세를 밀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월세를 깎아주기까지 했다. 그때의 바람은 월세를 내지 않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 


고정 급여가 나오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생활비를 뺀 나머지 돈을 모아갔다. 이 정도를 모으면 전세로 갈 수 있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 그 돈을 모았을 땐 전세 가격도 올라 있었다. 다시 모아야 했다. 대출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서류나 절차를 무서워했다. 문학적인 글이 아니면 이해를 하지 못했다. 15년을 월셋집에서 살았다. 그 돈을 모았다면. 부질없는 망상의 끝에는 그 돈을 내지 않았다면 노숙을 하는 신세가 됐겠지. 그러니 괜찮아. 


월세 아니면 전세 아니면 자가. 내가 아는 주거 형태였다. 월세에서 단번에 자가로 갈 순 없으니 어떡하든 전세로 가자 했지만 매물이 없었다. 전세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다달이 나가는 주거비 없는 전세가 이제는 사기, 지옥이라는 단어와 함께 묶이게 되었다. '91년생 청년의 전세 사기 일지'라는 부제를 단 『전세지옥』은 읽어나가기에 몹시도 힘든 책이었다. 지옥이라는 말을 나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에서 인식한다. 그 유명한 문장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을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죽지도 않았는데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얼마나 지옥 같았으면 아니 지옥이었으면 책의 제목을  『전세지옥』이라고 붙였을까. 『전세지옥』은 조종사의 꿈을 가진 한 청년이 전세 사기를 당한 지옥의 시간을 서술한다. 조종사 훈련비를 벌기 위해 천안에 내려온 청년 최지수는 월세 30만 원을 아끼기 위해 청년버팀목전세자금대출을 받아 리첸스 1004호를 계약한다. 작가는 그때 내가 왜 꼼꼼히 알아보지 않았을까라는 후회와 자책을 한다. 


부동산 사장의 말을 믿었고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기숙사에서 얼른 나오고 싶었고 전세보증보험비 3만 원을 내지 않아 좋아했다. 그것뿐이었다. 누군가를 믿고 사람다운 집에서 살고 싶었고 단 얼마라도 돈을 아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너무 큰 소망이고 욕심인가. 해외 교육을 지원해 주는 GYC 면접을 보고 합격이라는 기대에 부푼 그날 문 앞에는 통지서가 붙어 있었다. '부동산 임의 (강제) 경매'라는 평소에는 전단지만 붙어 있는 문에 말이다. 


그날부터 지옥의 시간이 펼쳐진다. 면접에 합격해 해외에 나가면서도 집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부동산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출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카드론을 썼고 조종사 훈련비를 모으는 일은 요원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두 개의 알바를 하며 돈을 갚아 나갔다. 그동안 정부와 지차체, 관공서, 기관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전세는 재난이 되어 버렸다. 한 채도 갖기 힘든 집을 누군가는 몇 십, 몇 백 채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피해를 청년들이 받고 있다. 


지옥을 살기에 천국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대. 『전세지옥』은 집을 구하는 요령,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시 대처 같은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한 청년이 전세 사기를 당하고도 오늘을 포기하지 않은 성실한 기록서다. 820일간의 시간을 버텨냈고 살아냈다. 이삿날 트집을 잡으며 보증금을 주지 않으려 했던 주인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몇 시간의 실랑이 끝에 받을 수 있었으니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내 집이 넘어가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 그럼에도 쓰는 사람이 되어 피해 사실을 알리는 일에 뛰어든 한 사람의 집념을 마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나의 전세역전 - 전세 사기 100% 충격 실화, 압류부터 공매까지
홍인혜 지음, 정민경 감수 / 세미콜론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듯한 글씨체로 일상툰을 올리던 우리 루나가 전세 사기를 당해 그 경험을 책으로 출간했다는 소식은 책이 나왔다는 반가움보다 사안의 심각성 때문에 흑흑 슬펐다는. 슬프니까 돈을 쓰자. 『루나의 전세역전』을 사자. 어떤 치료도 다 소용 없더라. 금융 치료만이 답이더라. 어깨와 등이 뻐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는 것보다 애호하는 쇼핑몰에 들어가서 오늘의 특가 상품 중에 맞아 이건 필요했지 하는 물품을 사며 손가락 운동하는 것으로. 치료완. 


『루나의 전세역전』은 실제 경험담을 그린 책이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으니 주(宙)의 문제를 해결하면 이제 으른이다잉이 되니까 집을 얻어야 한다. 우리 꼼꼼쟁이 루나는 집 구하기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발품을 팔아가며 집을 얻는다. 등기부등본도 확인하고 근저당이 없는 집으로다가. 마침내 채광이 좋고 오랫동안의 로망이었던 소파를 둘 만한 거실이 있는 집을 계약한다. 이렇게 루나는 꿈을 이룬듯 했다. 


이사를 하고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요일에도 인터넷이 빵빵하게 터지는 회사로 그야말로 광인의 모습으로 달려간다. 나중에야 안다. 주말에는 행정 업무 처리가 안 되어 일요일에 해도 월요일에 접수되어 화요일부터 확정일자의 대항력이 생긴다는걸. 이럴 때 쓰는 어른들의 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그래도 대뿌듯. 이제 여기는 월세도 나가지 않는 소중한 보금자리.


이삿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날아온 통지서 한 장으로 루나의 생활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임차인 통지서' 말인즉슨 네가 살고 있는 집은 압류가 되었고 곧 경매로 넘어가니 대비하라.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내 돈 주고 집을 얻었는데 집주인이 갚지 못한 돈 때문에 전세금을 날리게 생겼단다. 피와 땀이 묻은 전세 자금을. 


그때부터 루나의 전세금 지키기가 시작된다. 반듯하고 귀여운 글씨체와 몽글몽글한 그림체로 전세 사기를 다루었지만 실제 그가 겪은 시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고통의 시간이었으리라. 경매가 진행되고 집이 낙찰되면 집에서 쫓겨 나기에 소파는커녕 휴지나 생수도 대용량으로 사지 못했다. 이런 일들을 누군가에 말하면 그럼 돈을 못 받는 거야 같은 암담한 말이 돌아오기에 루나는 혼자서 공부와 싸움을 한다. 


지금도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전세 사기는 전세라는 제도의 맹점을 이용하여 청년들의 하루와 내일을 박살 내고 있는 중이다. 부동산의 마음씨 좋아 보이는 공인중개사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루나의 집주인은 인상이 아주 좋아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 누구도 전세 사기를 칠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류애는 물론 인류라는 자체를 멸종 시켜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전세 사기에서 전세 역전이 되기까지의 루나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될까. 책의 뒷면에는 "당신이 연 지옥문, 이제 내가 닫는다."라는 말과 함께 외계인 눈을 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루나가 그려져 있다. 이게 힌트가 된다. 영화의 장르 중에 스릴러를 좋아한다. 쫓고 쫓기고 감시하고 협박하고 그러다 악인이 처벌을 받는. 현실에서는 그런 결말이 존재하지 않기에 대리 만족을 느낀다. 현실 스릴러의 결말은 다르다. 악인이 아닌 피해자가 쫓긴다. 악인은 아무 생각이 없이 잘 먹고 잘 산다. 


루나는 전세 사기를 당했지만 그 시간들을 고통과 허무와 슬픔으로 놔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상을 유지하는 단단한 힘을 보여준다. 『루나의 전세역전』은 한 개인이 겪은 고난을 개인사로 두지 않기 위해 암흑의 터널을 통과해 우리에게 도착한 책이다. 인생사 새옹지마. 좋은 날이 올 거야 같은 영혼 없는 말로 남의 고통을 위로하려는 일은 그만두어야지. 이런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런 날이 지난 뒤 너에게 찾아오는 불행 앞에서 가운뎃손가락 정도는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죽지 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설탐정사의 밤 - 곽재식 추리 연작소설집
곽재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3년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제일 좋았던 날이 있다면(이후에는 없을 듯하니 이쯤에서 정리하는 걸로) 추석 연휴의 6일이었다. 한동안 갓생 모드로 지내다 포기하고 누워 있거나 엎드려 있는 게 신간 편하다는 걸 깨달은 시간이었다. 계속 그렇게 물미역처럼 지낸 건 아니고 영상도 보고 책도 읽고 집도 정리했다. 어떤 기억은 날씨나 냄새로 떠오르기도 한다는 데 나는 대체로 책을 읽던 시간으로 기억이 추출된다. 


곽재식의 추리소설 『사설탐정사의 밤』은 추석 연휴에 틈틈이 읽었던 책이다. 제목에 밤이 들어갔으니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는 따라주는 게 도리인 듯하니 밤에 읽었다. 전구색 불을 밝히고(이것도 책의 배경인 1940년대의 후반의 감성을 살, 린건 아니고 나이가 드니 하얀 조명은 눈이 부셔서 쓰지를 못하고 있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떨구는) 한 편씩 읽어나갔다. 


추리소설을 읽는 추석 연휴의 밤이라니. 바쁘다 바쁜 현대사회를 사는 갓생포기인에게 내가 내게 주는 최고의 복지 아닐까. 그것도 한국의 1940년대 후반의 혼란스러운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니. 생각해 보니 광복이 된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명한(아, 물론 이 시대를 담은 소설과 영화와 각종 창작물이 있겠죠. 허나 교양부족인 저는 잘 모르죠) 추리소설을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러니 당장 읽어야지. 


『사설탐정사의 밤』은 그동안 SF 소설가로 알려진 곽재식이 야심 차게 준비한 추리물이다. 여섯 편의 단편으로 묶인 소설은 해방이 된 이후의 한국이 배경이다. 질서도 무질서도 함께 혼재했던 시절. 찾아오는 의뢰인이 흔치 않아 매일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탐정이 주인공이다. 창가에 서서 손님이 많은 탐정 사무소를 흘깃 거리는 게 주된 일과다. 평양에서 전기를 잘 공급해 주지 않는 탓에 밤이 되면 사무실은 어둠에 잠겨 있다. 


쉽게 퇴근을 하지 못하는 탐정에게 의뢰인들이 한 명씩 찾아와 일을 맡긴다. 여섯 편의 소설에서 의뢰인들은 모두 여자이다. 이런저런 회사에서 경리나 주임을 맡고 있기도 망한 부자의 느낌을 내고 있기도 한 여성들은 희한한 소문의 실체를 밝혀 달라거나 정리해야 하는 집에 가달라는 의뢰를 한다. 사진 두어 장을 주고 이 사람들이 일을 벌이면 알려달라는 다소 개꿀 같은 의뢰를 맡기기도 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개꿀이 아닌 개같은 고생의 일이었다.


탐정은 되도록이면 수사 착수금을 주면 일을 맡는다. 그 과정에서 얻어 맞기도 하지만 슬픈 내색을 하지 않는다. 맞는 것도 일로 생각한다. 관찰력과 직관력이 좋은지 수사 자료를 흘깃 보거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 그런 탓에 탐정 사무실이 망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지만 이 탐정은 장황한 비유를 좋아한다. 한 여성의 눈빛에 대한(그 의뢰인에게 맘에 있었던 듯) 묘사는 꽤나 성실하다. 


이박사로 불리는 이가 대통령이 되었고 아직 일제의 잔재는 청산하지 않은 무질서를 질서로 불리던 혼돈의 1940년 후반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일상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땐 경찰보다는 허름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사설탐정을 찾아가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면서 내일이라는 낙관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사설탐정사의 밤』은 그런 밤의 상상으로 쓰였다. 


똑똑똑. 어두운 사무실을 두드리는 이에게. 문이 반쯤 열려 있어 끼이익 소리를 내며 그냥 들어오는 이에게. 사설탐정은 얼른 이야기를 해보시오라는 궁금한 표정을 지어 의뢰인의 슬픈 마음을 다독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 탈코르셋, 섹스, 이혼에 대하여
배윤민정 지음 / 왼쪽주머니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 호칭 개선 분투기를 다룬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를 읽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다행히도 다음 책이 있었다. 엄훠. 세상 사람들 부지런한 거 보소. 책을 살 거야 라는 마음의 준비는 온라인 서점에서 제공하는 미리보기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 책인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의 첫 목차는 외도였다. 시방 내가 무슨 글자를 본겨.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부끄러운 얘기인가?'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아닙니다. 일단 아니라고 답해준다.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 거라고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 긍정의 말을 하는 게 인지상정. 그다음 문단에서는 '이 글을 시작하는 지금으로부터 3일 전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우자인 준호가 얼마 전에 퇴사한 회사에서 직장동료와 깊은 관계였단걸.'


인간사가 이렇게 흘러간다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요.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에서 민정을 가족 안에서 평등하게 대해달라고 중재하고 노력했던 두현은 준호가 되어 직장 사람이랑 바람을 피웠다. 민정은 준호가 외도를 한다는 사실을 캐내지도 밝히지도 않았다. 그저 당사자들이 술술 불었다. 이건 마치 수사 의지가 없는 형사가 얼른 사건 종결을 해볼까 증거는 없지만 있다는 식으로 한 마디 툭 던졌는데 피의자가 증거까지 갖다 받치는 꼴이랄까. 


민정은 놀란다. 안 놀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첫 반응으로는 놀라야 맞지. 놀람 다음에 당혹, 배신, 울분으로 감정의 단계가 변한다. 고통의 마지막 감정인 체념의 전 단계까지는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에서 풀어낸다. 남편의 외도 이후에 나타난 자신의 다양한 감정들을. 어두운 방에서 혼자 삭히고 상상하는 식으로 하지 않고 책상에 앉는다. 앉아 쓴다. 


배우자가 외도를 하고 이혼을 하는 과정을 굳이 책으로 쓴다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커뮤니티에만 가도 이런 사연은 복사, 붙여넣기 한 듯 매일 올라오는데 말이야. 그렇지만 필요하다. 이혼의 과정-그 과정에서 느껴야 했던 서러움과 차별의 언어들-과 재산을 분할하는 중에 목격하는 인간들의 쩨쩨함 그리고 혼자 남겨진 이후의 감정을 글로써 목격하는 일이 말이다. 


생각해 볼까. 이런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전화나 만남을 통해 들어야 했다면 물론 알죠 당신의 고통을 하지만 저 역시 너무 힘들거든요 인류애가 바닥날 것이다.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는 한국 사회에서 아내에게 요구하는 틀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가족 내에 호칭을 달리 불러보자 제안했을 뿐인데 남편의 친구 모임에서 자신을 배제한 채 어떤 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참을 수 없다. 그러니 써야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의 여러 역할이 있다. 딸, 아내, 엄마, 며느리, 직장인. 뭐든 될 수 있고 뭐든 되지 않을 수 있다. 요구는 거절할 수 있다. 그냥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지금도 외모 평가를 하는 인간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데 이제는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그냥 사람이 되어간다.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라는 제목을 바꿔볼까. 여자라는 이상한 존재.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