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 - 여성 홈리스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30
김진희 외 지음,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기획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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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애착은 아니 집착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제 와 환경 탓을 하고 싶지 않다. 탓으로 돌린다는 건 비교적 쉬운 회피 방법이면서 도피이기도 하니까. 내가 잘하는 것 중에 하나는 잊어버리기이다. 그래도 기억은 난다. 가방에 책과 교과서, 옷을 쑤셔 넣고 대문을 나서야 했던 밤이 있었다. 그 시절은 짐 싸기의 달인으로 살았다. 


다행히 집이 생겼고 집에 누워서 예쁘고 실용적이게 꾸며 놓은 집 소개 영상을 자주 본다. 어떤 유튜브 채널은 냉장고와 신발장, 수납장 안까지 보여준다. 남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증과 호기심을 채워 준다. 보면서 영감받아 책상의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주말은 흘러간다. 청소 잠깐하고 누워 있다가 정리하고 다시 눕는다.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이 2년간의 취재 끝에 쓴 여성 홈리스 이야기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의 첫 번째 챕터를 읽으며 놀랐다. 이 책을 읽던 시간은 오전이었다. 특이하게 이번 주는 여섯 시와 일곱 시 사이에 눈이 떠졌다. 그전에는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누워 있었다. 그러다 어두운 생각에 빠지는 게 루틴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일어나 책을 읽었다. 그렇게 출근하기 전까지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를 읽었다. 


놀라고 이럴 수가 있을까 싶었던 첫 번째 이야기는 공원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며 그 안에서 잠을 자는 1959년생, 주민등록이 말소된 자신을 이가혜라고 소개하는 여성의 사연이었다. 그녀는 2015년 봄부터 화장실에서 살았다. 화장실과 주변을 청소한다. 밤이 되면 문이 잠기지 않는 그곳에서 잠을 잔다. 누가 들어올지 몰라 깊은 잠은 잘 수 없다. 


가혜 님의 이야기 끝에 흑백사진이 한 장 작게 들어 있었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화장실 한편을 담은 사진이었다. 흑백이지만 그곳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산다니. 책을 읽어갈수록 화장실에서 지내는 건 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여성 홈리스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남성들의 노골적인 위협과 협박을 피해 화장실로 숨어든다고 했다. 


감히 나의 경험을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화장실로 도망친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집이 있든 없든 화장실은 그런 곳이었다. 위험을 피해서 들어가지만 도리어 위험해지고 마는 곳.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여성 홈리스들을 취재하며 주거는 곧 생명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린다.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했고 여자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학대를 받았다. 


처음부터 집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집이 집이 아니었다. 집에서 나와야 했고 집을 구해야 했지만 노동을 할수록 점점 가난해지기만 했다. 역사에서 공원에서 화장실에서 산다. 주거 지원이란 게 얇은 합판으로 덧댄 길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는 고시원과 쪽방으로의 이주가 전부였다. 정책은 어렵고 서류는 복잡하다. 그녀들이 단단한 벽과 방이 있는 곳에서 살수 있는 힘을 모으기 위해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는 쓰였다. 


집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타인의 불행을 보고 나의 현실에 안도하는 용도의 책이 아니다. 가방에 들어가는 것과 방에 들어가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방에 들어가지 못해 가방에 들어가 사는 현실이 존재한다. 저 무수하고도 헉 소리 나는 금액의 아파트들은 누굴 위해 서 있는가. 홈리스이지만 활동가로서도 살아가는 서가숙의 외침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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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3
김의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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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부터 슬프다. 토요일에는 정신없이 누워 있다. 정신을 차리면 일요일 오전이다. 청소랑 이불 빨래 해놓고 다시 눕는다. 내일 월요일이구나 그러면서. 누워 있다 보면 잠이 온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자 책, 영어책, 세무 자격증 책을 샀다. 사기만 했다는 슬픈 이야기. 책장 한편에는 그런 책들로 빼곡하고 원래의 정신으로 소설책과 시집을 사 모으고 있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에서 만든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는 모든 자기 계발을 포기한 한심한 눕순이가 산 최근의 책이다. 동인의 이름이 맘에 든다. 월급사실주의라니. 월급이라니. 말만 들어도 개 설레는 단어. 월급. 월급에 진심인 소설가들이 소설을 썼다니. 으아. 정말 좋구나.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애호하는 나로서는 사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오늘. 그러니까 월급날은 10일인데 10일이 공휴일이면 다음날 주는 곳이라 11일인 오늘 월급을 받았더랬다. 왜. 왜. 왜. 원래 월급은 일찍 주는 게 국룰 아닌가요? 뭐 대표 방침이 그러하니까 어쩔 수 없다만  빨리는 바라지도 않고 제날짜에 라도 받고 싶다. 알라딘에서 마침 기막히게 내 월급 날인 줄 알고 쿠폰을 주길래 책 샀다. 알라딘은 진짜 책 빨리 배송해 준다. 너 정말 고맙다. 


잊지 않고 정신 차리고(주말에는 없는 정신이 월요일부터는 돌아온다는 외거노비의 비루한 운명. 정신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급여명세서도 보냈다. 수고하셨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예스러운 문구를 적어볼까나.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도 읽었으니 말이다. 원래 이 말은 급여명세서나 누런 월급봉투에 쓰인 말이니까. 주말 내내 누워서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를 읽었다. 한 편만 읽어야지 했다가 누운 자리에서 열한 편을 다 읽어버렸다라나 뭐라나. 그렇게 월급에 진심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라져가는 일요일을 애도했다. 


삼각김밥 공장에 일하러 간 청년 노동자의 분투기 「순간접착제」를 시작으로 학습지 교사의 어느 여름을 그린 「밤의 벤치」, 점심 식대를 올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담긴 「광합성 런치」,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걱정에 걱정으로 지새우는 시간의 「숨바꼭질」 등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의 세계는 먹고사니즘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때론 기쁘지만 항상 지치는 기본값의 감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전화를 걸 일이 많다. 이쪽에서는 밝게 말해도 대체로 상대방은 힘이 없다. 말을 하지만 잘 들리지 않아 사오정처럼 되묻는다. 이해한다. 암 이해하고 말고. 밝고 명랑하고 상냥한 게 이상한 일이다. 검증되지 않은 통계지만 목요일 오후에 사람들은 더 힘이 없다. 이제 목요일이라니 하는 감정이 전화를 타고 건너온다. 이서수의 소설 「광합성 런치」를 읽으며 웃고 울었다. 


재무팀장. 불혹의 나이. 차진혜는 좋아하는 박이재를 위해 식대 인상에 앞장선다. 목표는 식대 만 원. 7천 원으로는 회사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동해 식당의 대구탕 밖에는 먹을 게 없다. 식대 때문에 박이재가 퇴사할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는 어떡하든 대표를 설득해야 한다. 이재가 휴게실에서 두유를 몰래 가져가려다 걸렸을 때 진혜는 더 가져가라고 말해준다. 엑셀을 못하는 인사팀 홍 차장이 비혼 축의금을 받기 위해 글을 써왔을 때는 농담을 건넨다.


특성화고의 현실을 담은 「섬광」, 코로나로 타격을 맞은 여행사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간장에 독」, 배달 일과 택배 상하차 일을 해서 번 돈을 여친과 유튜버에게 바치며 자신은 지하철에서 잠을 자는 스무 살의 하루는 「카스트 에이지」에 있다. 기획의 말에 장강명은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이 더 나와야 한다'라고 밝힌다. 책에 실릴 소설의 규칙 중 하나는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이다. 기계가 말을 하거나 타임워프를 해서 시공간을 떠돌고 지구에 자원이 없어 다른 행성으로 이주 해야 한다는 설정 따위는 없다. 


아파트 도색 작업이 한창 중이다. 누워 있다가 줄에 매달려 아파트 벽면을 세척 중인 사람의 흔들리는 몸을 보았다. 여기는 14층인데 사람을 만났다. 괴담이 아니다. 그 옛날 옛날의 공포 이야기. 밤에 공부하는데 창가에 할머니가 나타났다는. 여기는 이층인데 하는. 줄에 의지한 채 창과 창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을 두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노동은 신성하다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추기는 한국 사회는 병들었다. 포괄임금제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르겠고 식대를 주거나 점심을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 꿀 같은 주말에 김치볶음밥 만드는 시간도 아깝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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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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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최선을 다해왔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실패가 잦았고 성공은 흔치 않았다. 묵묵히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매일 했음에도 최선과 열심인 일에는 어떠한 말을 기다렸다. 김혼비와 황선우의 편지글이 담긴 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의 제목을 보고 깨달았다. 그동안의 나의 최선은 이상한 최선이었다는 것을. 


다들 살아있나. 죽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나. 정신은 죽고 몸만 남은 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죽었지만 다음 달 청구되는 지불 내역들을 갚기 위해 귀신이 된 채라도 일을 하고 있나. 세상의 중심은 나이므로. 내가 본 세계의 원리는 얄팍한 꼼수와 허수로 돌아갔다. 감히 이렇게 생각한다. 나보다 열심과 최선과 노력을 하지 않은 이들이 더 잘 살아가고 있다고. 나만 왜. 


맞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김혼비와 황선우가 주고받는 편지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일이 끝나면 한자를 쓴다거나(너무 열심히 쓰지 않는다. 그저 쓰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 목탁을 사서 두드리고 납득할 수 없는 죽음에는 끝까지 애도한다. 탁구를 하면서 재미 이상을 느끼고 번아웃으로 단어를 잘못 말해도 그것대로 웃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 엄마는 옆으로 누워서 천수경을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왜 저런 걸 들을까. 알 수 없었다. 이제야 이해와 마음이 간다. 몸이 허물어지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들에 바치는 성가였다. 출근을 하려고 눈을 떴다. 전날 읽은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의 내용이 떠올랐다. 유튜브에 목탁소리를 검색했다. 황선우의 방법이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목탁소리와 반야심경을 들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오늘의 깨달음은 화를 내기 전에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 보고 그대로 화가 난다면 화를 내면서 가라앉히자는 것. 화를 참으면 죽는다. 최선을 다하는 일은 화가 나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며 물미역 같은 시간으로 살아도 된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이야기한다. 편지란 눈치 보지 않고 방해받지 않으며 나의 이야기를 최선으로 할 수 있는 장르이다. 가만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은 줄곧 자기 즉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있었다. 편지를 쓰라고 혹은 일기를 쓰라고 말하고 싶다. 진짜 정말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들을 때 에너지가 훨씬 많이 소모된다. 추임새, 표정, 자세를 갖춰야 한다. 사회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글은 어떤 자세든 용인된다. 심지어 울어도 된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나의 최선을 생각하고 선택하게 하는 책이다. 나의 최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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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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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름이 있었다. 장마 끝난 뒤 무더운 날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연락은 드물기보다 아예 없었다. 길갓집이라 문을 열어 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문 앞에 바람이 불었다. 목욕탕 의자를 가져다 놓고 책을 읽었다. 중고 텔레비전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 삼십 분을 틀어 놓아야 화면이 보였다.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그때는 하지 않았다. 그저 여름이 하루빨리 지나가 문을 닫아 놓고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도 기억은 남았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던 유행가, 시보, 매미 소리, 동네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 소리와 함께 장면이 남는다. 꽁꽁 얼려둔 보리차가 서서히 녹고 나는 땀을 닦으며 책장을 넘긴다. 


이꽃님의 소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표지를 보며 그때의 여름이 소환되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상상의 장소가 그려져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회색 벽의 배경이 아닌 푸른 나무와 바람 안에서 앉아 있고 싶다는 그 어느 하루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다만 표지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있다. 


책을 읽기 전에 하는 의식. 후루룩 책 넘기기를 하자 또 한 번 탄성이 일었다. 표지 그림의 엽서가 있었다. 뒤 편에는 소설가 이꽃님의 손글씨 편지가 있었다. 자신에게도 고달팠던 여름의 기억이 있었다고. 그날들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른 이들의 마음 덕분이었다고. 각자의 여름을 보내고 있을 나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였다. 그림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한 두 아이가 앉아 있는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표지와 이야기는 지금의 여름을 푸르고 싱그럽게 기억되게 해줄 것 같은 예감이다. 


이꽃님의 이야기 세계를 좋아한다. 관계와 마음에 지쳤을 때 이꽃님의 소설을 펼치면 저항 없이 나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페이지 터너로서의 훌륭한 자격을 갖췄다. 어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가는 걸까. 죽이고 싶은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역시 만지는 것만으로도 어떤 한 시절의 여름이 내게로 찾아올 것 같은 책이었다. 


아침밥을 먹다가 전학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가 있다. 전학을 갈래도 아닌 전학 가서 잘할 수 있지라는 말을 듣는 그 아이의 이름은 하지오. 나이는 열일곱이고 유도를 한다. 그날 처음으로 아빠의 존재에 대해 듣는다. 아빠 없는 사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깨닫는다. 엄마는 아프다. 지오의 세계가 기울어진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다른 이의 속마음을 들어야 하는 아이가 있다. 지금은 파출소 경찰 남경사의 속마음을 듣고 있다. 유찬은 그런 아이다. 오 년 전의 사고 이후 타인의 속마음이 들린다. 엄마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렸다.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찬이를 기다려주었다. 남경사의 속마음을 듣는 동안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찬이 앞에 나타난다. 그날부터 기울어진 찬의 세계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지오와 찬이 만나는 순간 세계는 조금씩 변화한다.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유일무이한 나는 세계의 중심이다. 내가 사라지면 세계는 없다. 누군가의 마음을 듣는 아이와 누군가의 마음이 되는 아이는 여름을 지낸다. 오해하면서 여름을 걷고 이해하면서 여름을 살아낸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서로의 여름 안으로 들어가기. 


나의 여름 안에서만 살았다. 무덥고 외롭고 가난해서 닫아두었던 여름이었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읽으며 청량하고 활기차고 여유로운 기억으로 여름을 업데이트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들의 답으로 살아가지만 살아야 된다, 살아야 된다는 간절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로 오답 정리를 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이 여름에 읽은 시 한 편을 답장으로 보냅니다.


여름잠


-안미옥


아주 열린 문.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

나는  자꾸 녹이 슬고 뒤틀려 맞추려 해도 맞춰지지 않았던 내 방 문틀을 생각하게 돼. 아무리 닫아도 안이 훤히 보이는 방. 작은 조각의 침묵도 허락되지 않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주 사적인 시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네 문을 닫아보려고 했어. 가까이 가면 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비틀어진 틈으로 얼굴을 밀어넣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었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가진 것은 모두 문밖에 나와 있었고, 나는 그게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으려 했다.

춥고 서러울 때. 꿀 병에 담긴 벌집 조각을 입안에 넣었을 때. 달콤하고 따듯했어. 꿀이 다 녹고 벌집도 녹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 녹아도 더는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는 거야. 하얗고 끈끈한 껌 같은 것이. 그런 밀랍으로 만든 문. 네가 가진 문은 그런 것 같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검은 돌. 네가 준 돌을 볼 때마다 단 것이 떠올라. 돌은 겹겹이 쌓인 문이고, 돌 안에 켜질 초를 생각한다. 내내 초를 켜려는 사람이 있었다. 초를 켜면 문이 다 녹는데, 자꾸만 그것을 하려는 너에게. 나는 조언을 해. 그건 다 내게 하는 말이야. 모두 나 자신에게 하는 말들뿐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삶과 죽었다가 잠시 깨어나는 삶. 둘 중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죽었다가 잠시 깨어나 있는 것이면 좋겠다.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 없어서 자꾸 깨어나는 것 같아. 마지막 인사는 마지막에 하는 인사가 아니라 마지막이 올 때까지 하는 인사일까.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일들은 마음에 노래 남는다고 하더라.


안녕, 잘 지내. 여름을 잘 보내.


서로를 머뭇거리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가는 지오와 찬의 여름 이야기와 시 한 편이 말하고 싶은 건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름을 잘 보내달라는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문학은 그렇게 세계에 존재합니다. 사라지지도 망하지도 않은 채 말이지요. 보내주신 마음을 소중하게 담아 여름 안에 잘 넣어 놓을게요. 이로써 우리의 여름이 이제는 괜찮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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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 - 낯선 곳에서 나 혼자 쌓아올린 괜찮은 하루하루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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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스물여섯에 도쿄로 상경한 마스다 미리의 일상 이야기가 담긴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를 읽으며 어느 한 시절을 떠올렸다. 마스다 미리는 오사카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도쿄로 왔다. 되도록이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자립한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말이다. 살 곳을 구해야 한다. 직업이 마땅치 않아 집을 구하기 힘들었다. 가는 곳마다 거절을 당했다. 


빨리 집을 구해야 하는데. 낙담한 채 길을 걷다가 오래된 중개업소를 발견했다. 다행히 사람 좋아 보이는 사장님을 만나 역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낡았지만 햇빛이 잘 드는 곳이었다. 집을 구하러 다니다 보면 알게 된다. 나의 어제와 오늘이 얼마나 한심한지. 분명히 돈을 벌러 일을 다녔는데 왜 나의 잔고는 이 모양인지. 좀 더 분발해야겠다 와 이렇게 살아서 뭐해 사이에서 갈등. 그러다 그냥 이 집으로 할게요. 


마스다 미리는 집을 구하고 호기롭게 월세를 깎기도 한다. 한곳에서 사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엄마의 조언을 듣고 전자제품도 싸게 구입한다. 당장 일을 구할 수는 없어 저금한 돈을 가지고 생활한다. 밥은 해 먹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낮잠을 자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느긋한 생활을 한다.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그때만큼은 마음을 놓고 저금한 돈이 있는데 하는 생각으로 지냈다고 한다. 


모두들 그랬겠지만 코로나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얼레벌레 어찌어찌 살아도 좋았을 시간이었다. 걱정은 넣어두고 불안은 밀어두고서 말이다. 걱정과 불안과 슬픔의 함량을 빼면 시체라 그러질 못했다. 허둥지둥 부랴부랴 다음 직업을 갖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괜찮아, 몇 달은 넷플릭스 보면서 누워 있어라고 말해주면 정말 정말 좋을 텐데.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는 괜찮은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서 보여준다. 일을 하지 않아도 걱정은 없다. 일을 할 예정이니까. 본격적으로 일을 찾는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다. 나만의 필살기를 활용해 영업을 하면 되니까. 연고도 없는 도쿄에서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시작할 때 마스다 미리는 출판사에 찾아가 포트폴리오를 건넨다. 자신이 만든 필기도구와 함께. 


요즘에는 집꾸에 빠졌다. 집 꾸미기. 이사 온 지 5년째. 아직도 집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필요 제품이 아닌 불필요 제품이지만 소유하고 싶은 제품들이 많다.  분리수거장에서 괜찮은 물건이 있으면 가져오고 색깔과 분위기를 고려하지 못하고 단순히 갖고 싶다고 해서 사버린 가구들이 한가득이라 집은 임시 거처의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곳이 좋다. 매일 좋아지고 있다. 나의 집. 정말 정말 집에 가고 싶을 땐 찍어둔 나의 방 사진을 본다. 조금만 기다려. 곧 가서 누워 줄 테니까. 춘식이로 꾸민 나의 방아.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으면 세상은 평화로 가득 찼을 것이고 허둥지둥한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질 것 같으면 세계는 행복으로 충만해졌을 것이다.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는 걱정, 불안 없이 지금 여기 이곳이 좋아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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