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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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내일이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내게 찾아오리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있던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아등바등의 형태로. 하나의 죽음을 목도하고 더 이상 삶은 유한하지 않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야 깨닫는다. 내일은 없다. 오늘만이 유효할 뿐. 오늘을 살아내자. 단순한 문장만을 곁에 두어야 한다는 것 역시. 


지나친 걱정의 끝에는 피로와 불안이 있을 따름이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은 오늘을 살아내는 일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소설이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지도 멀리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내가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자가 그토록 원하던 시간임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모든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쯤은 살아 있음에 안도를 느껴야 한다. 


소설은 작은 섬에 두 그루의 나무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태초에 나무가 있었고 시간을 견뎠고 뿌리를 나눠 가졌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무가 자라면 베어졌다. 남아 있는 나무는 인간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다음 장은 장미수와 신복일의 다섯 남매의 서사로 넘어간다. 일화, 월화, 금화, 목화와 목수. 나무의 시간처럼 다섯 남매는 서서히 자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쌍둥이 목화와 목수를 데리고 금화는 산으로 간다. 일요일이었고 언니 월화가 다른 데로 가서 놀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월화는 진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동생들은 일요일의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들은 깊은 곳으로 갔고 커다란 나무가 휘청거리면서 금화의 몸 위로 쓰러졌다. 목화는 어른들을 부르기 위해 산으로 내려갔다. 


울면서 어른들을 데려왔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깔린 사람은 금화였지만 금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목수가 있었다. 목수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금화는 사라졌다. 목화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난 건 열여섯 살의 봄이었다.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목화는 사람들이 죽지 말라고 기도했지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으라는 음성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목화는 사람을 구했다. 사람들이 아닌 사람을 구했다. 죽어가는 이들 중에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구해야 했다. 왜 단 한 사람인가. 목화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말하는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목화는 끔찍한 자신의 운명을 처음에는 비관했다가 나중에는 그 일을 중개라 부르며 단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 


어떤 운명의 신이 혹은 운명의 장난이 오늘 나를 살게 하는 것인가. 오늘 살아 있는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가 『단 한 사람』은 의문한다. 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인가의 물음.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자연재해나 인간의 힘에 의해 베어지지 않는 이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힘 때문이 아닐까. 나무의 명령을 받은 누군가들이 지켜낸 단 한 사람에 내가 있었다. 그러니 살아가야 한다. 소중한 단 한 사람의 운명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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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금은방 강도 사건부터 도깨비집 사건까지, 기이하고 괴상한 현대사
곽재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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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와 나 한문 공부 다시 시작해야겠네였다. 갑자기? 뜬금없이?는 아니고 대한민국의 기이한 사건을 신문 기사를 통해 정리해 주는 방식이라 인용된 신문 지면은 조사 빼고는 전부 한문이었다.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며 문맥에 맞춰 읽어가려 했지만 포기. 그렇다고 한 글자씩 찾는 정성은 부족해서 신문 기사는 얼렁뚱땅 읽었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은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에 기고된 대한민국에서 오래전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다룬 연재물 중에 열다섯 편을 추려 모은 책이다.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 사이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서 당시에는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건을 다룬다. 서문에서 곽재식은 실화이므로 사건을 호기심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겠다고 밝힌다. 


지금이야 언론, 방송, 유튜브 채널이 활성화되어 사건이 일어나면 전후사정이나 사건 정보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가령 「어린이를 죽인 괴물」편을 보면 마을에서 백주대낮에 어린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마을에서 연달아 세 명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두 명의 아이는 끔찍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한 아이는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CCTV. 현대 사회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확보해야 하는 물증 중에 하나이다.


당시에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마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호랑이가 잡아갔다더라. 소문이 퍼져 굿을 하기에 이른다. 끝내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은 종결된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실린 사건 중에는 범인이 밝혀진 사건 보다 미제로 끝난 사건이 더 많다. 범인이라고 확신했지만 범인이 아니었고 신문 기사의 자료만으로는 그 사건의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사건도 있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그러했다. 


가장 황당했던 사건은 「남대문 금은방 권총 강도와 영어 학원」편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없는 점 이해 부탁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다시 내려오기에 알 수 있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점차 잔혹하고 끔찍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의 동기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지점이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범인을 잡아 범행 동기를 물어보면 동기가 명확했다. 황당하지만 서글픈 동기라도. 바로 「남대문 금은방 권총 강도와 영어 학원」의 범인처럼. 


한자가 없는 지금의 신문을 읽는다. 사건의 개요부터 종결 과정까지 한글로 자세히 나와있다. 방송에서도 한국말로 알려준다. 그런데도 과거 한자로 범벅된 신문 기사를 읽는 것만큼 이해가 쉽지 않다. 도대체 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설명이 되지 않는 동기들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의 사건은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다. 범인이 잡혀 형을 살고 있는 사건임에도 말이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실린 사건에 숨겨진 가슴 아픈 시대적 배경처럼 오늘날의 사건도 대한민국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노동소득으로는 집을 사지 못하고 아예 취업을 포기해버리는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끝내 생을 버리고 일터에서 갑질과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염원이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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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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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차에서 자다 깨 멀리서 본 하얀 형상이 전부이다. 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가고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멀리 하얀 물체가 아른거렸다. 꽤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아직도 궁금하다. 뭐였을까.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의 혼령이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렸고 자다 일어났고 그때까지 들었던 괴담의 영향이 정신에 미쳤을 거였다. 


그 후로는 없다. 가위눌림이 몇 번 있었지만 공부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뇌에 이상을 일으킨 거라 기이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 요즘엔 일하는 가위를 눌린다. 몸은 이곳에 있는데 정신이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짜증 나서 빨리 깨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다 다시 잔다. 피곤이 가위를 이긴다. 바위가 아니고.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다가노 가즈아키의 『건널목의 유령』은 제목 그대로 유령을 다룬다. 전작과는 다른 결이라 제목만 이러겠지 했는데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본격 유령 서스펜스 추리소설을 오랜만에 발표했다. 무려 11년 만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다. 과작을 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 아쉽게도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더 이상 못 읽는다.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건널목의 유령』은 시모기타자와역에서 찍힌 사진과 동영상의 실체를 추적한다. 인명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역에서 기차가 몇 번이나 급정거를 했다. 기관사는 건널목에서 철로로 들어오는 형체를 보기도 한다. 프리랜서 잡지 기자 마쓰다는 독자 제보로 들어온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의문과 호기심을 느낀다. 곧장 취재를 시작하고 자신도 이상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는데. 


사건의 진실을 알아갈수록 놀라움과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단순히 잘못 본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현상이 명확했다. 철로 주변을 확인하다가 한 여성의 형체와 마주하고 새벽 1시 3분에 여성의 신음 소리만이 들리는 전화를 받는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고 있는 탓에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건널목에 유령은 건널목의 사건이 된다.


추리소설과 유령이라니. 이 조합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사회가 어둡고 망가져 가는 때에 기담과 괴담이 성행한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다. 90년대 중후반에도 그랬다. 방송사마다 귀신을 소재로 다큐와 드라마를 내보냈다. 어린 나는 그걸 보면서 무서워했고. 문을 열었는데 검은 한복을 입은 여자 귀신은 역대급으로 무서웠다. 한동안 방문을 열지 못할 정도. 


그러고 보니 괴담의 주인공은 여성이 많다. 약하고 차별받는 주체였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건널목의 유령』 역시 고전적인 서사를 따라간다. 기차를 급정거하게 만드는 유령의 실체는 여성이었다. 마쓰다는 끈질긴 취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가닿는다.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서사는 서글펐다. 죽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세계로 무사히 가기 위해 살아 있는 자의 노력이 필요하다면 나타나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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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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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은 한 번에 단숨에 읽어가야 한다.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말이다. 중간에 일이 치고 들어와도 무심하게 넘기는 여유까지 있다면 더 좋다. 그러한 온전한 하루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에.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던져주고 싶다. 1권부터 9권까지. 주중에 하루씩 총 9주에 걸친 건조하고 생기 없는 스웨덴의 풍경 속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9권인 『경찰 살해자』는 초반부터 사건 안으로 독자를 밀고 들어간다. 등 뒤에서 떠민다. 1970년대의 스웨덴으로 시간 이동을 한 우리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사건을 조망한다. 팔짱을 낀 채 범행이 일어난 곳에서. 그 차를 타지 말아야 한다. 『경찰 살해자』의 처음과 함께하면 이 생각부터 든다. 하지만 여기는 소설의 세계.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의 세계. 


한 여자가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오기까지는 삼십분. 눈치 좋은 독자라면 여기에서 여자에게 차를 태워주겠다는 누군가 등장하겠지 생각할 것이다. 맞다. 여자 앞에 차가 선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차를 타지 않았겠지. 여자와 남자는 안면이 있다. 여자가 차에 오르고 여자의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는 움직인다.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그들은 간다. 여자가 마지막에 한 생각이란 나뭇더미에 눌린 뒤통수. 머리카락 걱정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사라진다. 여기서 마르틴 베크가 등장한다. 그는 동료 콜베리와 경찰 제복을 차려 입고 순찰차에서 잠복 중이다. 린드베리라는 도둑의 절도 증거를 찾기 위해서. 이 사건이 나중에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 독자는 궁금하다. 실종된 여자는 어쩌고. 워워워. 조금만 기다리시라. 린드베리는 덜미를 잡힐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 마르틴 베크는 사건이 일어난 곳에 서 있다. 


답답하고 느린 수사의 정수를 보여주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독특하게 그 점으로 긴장감을 선사한다. 여자는 죽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시체가 있다.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발적 실종인가. 사건에 관계된 건가. 마르틴 베크는 자신의 이름으로 농담을 건네는 경찰 뇌이드와 함께 사건을 조사해 나간다. 혹시 놓친 부분이 없을까. 마르틴 베크는 특유의 꼼꼼함과 직관력으로 증거를 찾아 나간다. 


추리 소설의 구성이 그러하듯 도둑 린드베리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뜬금없는 인물과 사건은 없다. 린드베리는 후에 사건을 풀어가는데 얼렁뚱땅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물건과 차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된 2인조가 등장한다. 총격 사건이 터지고 경찰관 한 명이 죽는다. 범인도 한 명 죽는다. 달아난 도둑은 경찰 살해자로 수배된다. 


세 개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해결된다. 직업적인 허무함과 인간성의 상실감 앞에서 인물은 방황하고 갈등한다. 범인을 잡는 이야기 안에 고독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단 하루의 날. 어떠한 일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경찰 살해자』를 읽어가기를 바란다. 쓸쓸하고 서글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사히 춥고 막막한 스웨덴에서 탈출구를 찾아 나오기를. 아직 시리즈 한 권 더 남았다.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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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2 세트 - 전2권 사계절 만화가 열전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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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사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쓰고 싶지만 안다. 정확히 언제부터 독서에 빠지게 되었는지. 동네의 한 작은 서점에서 첫 책을 구매한 시점부터이다. 엄마한테 돈을 받아 책을 샀다. 정확한 제목은 모르겠다. 귀신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앗. 쓰다 보니까 기억났다. 『한밤의 귀신축제』. 그 이후로도 공포와 괴담 책을 사서 모으기에 이른다. 아실랑가 몰라. 책을 사면 빨간색 입체 안경이 들어 있던 책도 있었다. 


『한밤의 귀신축제』 이후에는 위인전으로 갔다. 『유관순』을 읽고 울었다. 만세 운동을 하기 전 산에 올라 결의를 다지던 장면에서. 책을 많이 사주는 집안 분위기는 아니었고 자급자족해야 했기에 학급 문고나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학급 문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도서관. 그 시절 시리즈는 그렇게 끝도 없다. 책이란 좋은 거구나. 느꼈던 건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늘 혼자가 아니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방학 동안 혼자서 오후를 보낼 때 읽을 책이 있으면 슬프지 않았다.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 밤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을 책덕후라고 한다지. 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도 있구나. 이걸 누가 볼까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겨났겠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헛웃음과 그냥 웃음, 공감의 웃음들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나만 이상한 거 아니었지.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어떤 나라를 말하면 내가 아 거긴 이러이러해서 별로라는 식의 상대를 화나게 하는 화법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자꾸 별로라고 하니까 상대가 거기 가봤냐고 해서 당당히 아니요, 책에서 읽었지요 하고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책으로 여행을 배웠다. 한때 여행기만 읽었던 시절이 가져다준 지식이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독서 클럽 회원들이 자신들이 뽑은 세계의 근사한 도서관을 추천한다. 거기 가보셨냐는 질문에 얼어붙은 표정이 된다. 다 책에서 읽은 거라는 말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클럽에서 만난 독서 중독자들의 책의 애호를 병맛 코드로 그려낸다.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책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한 척 논의한다. 사자, 고슬링, 경찰, 예티, 슈, 선생, 로렌스는 모였다 하면 책부심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책의 저자와 목차를 보고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베스트셀러와 자기개발서는 간단히 무시해 주는 센스. 신입 회원을 받을 때에도 조금 까다롭게 군다. 


1권의 끝에서는 이야기가 난데없이 스파이 첩보 액션물로 튀지만 2권의 첫 페이지를 읽고 나서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 웃기고 위로받아서 뒤지는 줄.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니. 완전 내 이야기잖아. 책을 좋아한다는 건 화려한 취미의 세계에서는 발도 내밀 수 없고 어휘력은 풍부한 것 같은데 실무적인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 


그래 하자 없고 건강하고 예쁜 이들에게는 독서 취미가 없, 나. 없겠지. 없을 거야. 책을 읽지 않아도 그들에겐 세상이 꽃밭이고 꽃길이잖아. 매력 발산으로 추앙받으며 살아가겠지. 오로지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니. 누워서 앉아서 책만 읽어대는 휴일에 나는 피곤하고 병든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2권에서는 자신을 다크섹시라고 불러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귀여운 설인 인간도. 책이 있어 다행이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나면 안도한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어두움, 공포, 고독, 불안, 고통, 슬픔, 분노, 낭패, 허무들을 책이 감당해 주니까 말이야. 독서 클럽이라면 일방적이고도 지독한 책사랑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사람 만나는 에너지를 모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추천한다. 종이를 뚫고 나오는 이상한 망신스러움만 극복하면 되거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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