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있어 문학동네 시인선 109
박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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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말이 없니?


-박상수


피부가 거칠어져서요, 모이스처 리무버로 입술을 닦다가 내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까 창문을 닫느라 그렇죠, 벙어리장갑을 목에 걸고 거스름돈이 부족해도 말을 안해요, 타이머가 돌아가면 오븐에서 재가 되는 말, 타이어를 맞추기에는 너무 작은 손, 힘이 없어요 당신이 나에게 실망하셨기를 바라요, 두 번 세 번 타자기로 정리해도 입을 열면 사라지네요, 있었다고 믿을 뿐인 나의 이야기, 가끔 내 말소리에 내가 놀라요 후추나무처럼, 수줍은 후추나무처럼, 철 지난 바닷가에서 우둘두툴 조개껍질을 손에 쥐고 난 이불을 덮죠 아무것도 빼앗기기 싫어서 입은 지운 채 앙금을 만들어요 팥앙금, 밤앙금, 허니머스터드와 말린 과일도 넣고(편리하지만 죽어가는 농담도) 졸이고 졸여 멋진 잼을 만들어요 그런 게 내게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기로 해요 미니 증기선을 타고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고기를 못 잡아요 산호 보석도 없어요 난 자주 흔들리지만, 살 수 있고, 이제는 너무나 많이 지워졌지만.


난 자주 흔들리지만, 살 수 있고. 난 자주 힘들지만 살 수 없고. 난 멍청하지만 살아가고. 난 잘난척하지만 지쳐가고. 무수히 많은 말을 지껄이다가도 입을 다무는 하루. 왜 그렇게 말이 없니라고 물어봐도 할 말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수줍어서 말 못 했다는 건 거짓말. 구라. 나의 지난 이야기를 하자면 술보다는 자주 고개 끄덕거림과 한숨이 필요한데. 지금은 너무 많은 말이 우리를 스쳐 간다.



소풍


-박상수



화관을 장식했던 꽃이 머리칼을 떠나고 나는 몇 방울 물방울이 될 때까지 웅크려보기로 했다 엄마는 영 입맛이 돌아오지 않는 밥상, 홀로 상보를 덮었다 들었다 하겠지만 나는 낯선 역을 지날 때마다 기나긴 저녁이 되어갔다 독서등을 켜고 책장 여백에 글자들을 적고 있으면 쌓인 나뭇단 사이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새의 지저귐, 열차가 바오바브나무의 거리를 가로 질러가는 동안 말 없는 눈동자 가득 뿌리내린 뱀풀들이 흔들려 손을 흔들려 주었다 나는 잠결인 듯 뒤채는 소리를 내었다 모종삽으로 잘 파묻어주세요, 무지갯빛 엽서를 꺼내 손바닥 도장을 찍었다


손전등 아래에서도 글을 쓸 수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도. 그냥 손만 잡고 살았다. 뼈마디를 만지는 나날들. 기차가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해가 저물자 돌아오는 거리에서도 손만 잡았다. 과자 몇 개와 음료수를 사서 가방 안에 넣었다. 가난한 유년을 가졌는데 어느새 서로를 미워하며 마음 끓이는 시간이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텨보기도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새가 날아오면 흔들려 주기로 하자 마음이 날아갔다.



왠지 궁금한 기분 1월


-박상수


입김, 보온병을 껴안고 침대에서 일어나, 어딘지도 모르고 왜인지도 몰라, 그런 아침, 전기가 들어오면 팔레트에 물감을 차고 입김을 녹여 태양을 그릴 텐데, 제자리 뛰기를 해도 심장은 움직일 줄 몰라, 손을 넣으면 열이 나는 장갑은 없을까 경축 아치 밑으로 걸어갔는데 내 수호 동물은 가죽만 걸려 있었어, 미안하며, 자꾸만 여기가 아니래, 입김, 모피를 두르고 썰매 안에 눕지만 제설차는 멈춰 있다 내내 돌아보지만, 빙빙 돌아오지만, 입김, 내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어디 간 걸까


그건 어디 간 걸까, 왜 물어보는 건데. 네가 모르면 나도 몰라. 뻔뻔하게 질문하지 마. 짜증 나. 어떤 창문 밑에서는 태양빛이 굉장해. 빛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녀. 등이 뜨거워. 팔이 아파. 잠이 오면 잠을 자. 먹고 싶으면 대충 아무거나 먹어. 참지 말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입술을 꽉 깨 물어. 제발 내 앞에서 울지 마. 고개 숙이지도 말고. 그냥 걸어. 앞만 보고.



왜일까. 왜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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