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우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선다.

강폭은 그들의 얼굴이 노란 콩알처럼 보일 만큼 넓다. 그래도 그들을 늘 보게 되자 특유의 동작이나 몸집이 눈에 익으면서 구별이 가능해졌다. 그 쪽에서 활 잘 쏘는 놈이 나서면 곧바로 우리 쪽에서도 그런 자가 나서서 응사할 수 있는 게 그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는 자기 편 강나루를 지킨다.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는 강나루는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다. 본래는 사절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졌다지만 유사시엔 피비린내 나는 첫 장소가 될 것이다. 삼십 년 전의 전란도 그들이 우리의 이 강나루를 야습하며 비롯되었다. 노략질하러 쳐들어온 그들을 다시 강 건너로 패퇴시키기까지 일 년이나 걸렸단다. 그 후론 정기적인 사절들의 왕래마저 단절되고, 증강된 병력으로 강나루를 지킨다.

우리는 밤낮으로 경계를 선다. 환한 낮은 물론, 밤에도 횃불들 밝혀놓고 강 건너 나루를 경계한다. 그들도 매한가지다. 밤마다, 우리와 거의 같은 수의 횃불이 시뻘건 눈초리들처럼 떠 있다.

날이 밝으면 그들이 먼저 요상한 피리를삐리삐리분다. 우리는 북을쿠당쿠당쳐서 대응한다. 그들이 화살을 쏘면 우리도 비슷한 수의 화살을 쏜다. 심지어, 우리가 엎어놓았던 배들을 바로 놓고 손질하면 그들도 덩달아 자기네 나룻배들을 갖고 법석 떤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지루하다.

당장이라도 배타고 건너가 창칼 한 번 부딪치고 싶다. 복무연한인 이 년 내내 적을 지켜보다 끝날 것만 같아서다. 그래도 쳐들어가라!’는 임금님의 명이 없는 한 어쩔 수 없다. 삼십 년 전, 일 년 간의 전란이 끝난 뒤 그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십 년 가까이 고생한 뒤로는 임금님은 이 강나루를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는 보루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이 지루한 경계가 쉬 해제될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삼십 년 전 도발한 전란의 보복이 반드시 있을 거라 판단했는지 강 건너 우리에게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자기네가 먼저 피리를 불고 활을 쏘고 욕을 퍼부음으로써 긴장을 조성해 간다. 그렇다고 강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전쟁의 사전 방지에 주안점을 둔 게 아닐까.

강물은 검푸르게 흐른다. 그 모습이, 엄청나게 큰 검푸른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가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 허연 물결이 이면, 마치 구렁이의 비늘들이 허옇게 서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강나루를 지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지만 겨울 들어 강이 얼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엄청나게 고생해야 한다. 물가라 별나게 춥기도 하고, 언 강 위로 그들이 쉽게 걸어서 쳐들어올 수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지난겨울만 해도, 수만 개의 표창들처럼 온몸을 찌르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털가죽 한 장씩 두르고 강 복판을 지켜보아야 했다. 강 복판이 국경선이라, 그곳을 그들이 넘어온다면 전쟁이 시작되는 신호인 거다. 천만다행으로, 양 강가에서부터 형성되던 얼음장이 복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양 강가에 얼어붙은 것들마저 다 녹아버렸다.

지난겨울 그리도 우리를 괴롭혔던 강이 지금 눈앞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고 유들유들 흐르고 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강물이 줄어들고 있다!

그 동안 안 보이던 물속 바위가 그 등을 보이는 것만 봐도 분명한 현상이다. 하긴, 지난겨울 눈 한 번 제대로 내리지 않고 춥기만 했다. 올봄 들어서도 비 내린 날이 몇 번 없었다. 이 여름 들어와선 빗방울 비슷한 것도 떨어지질 않는다. 가뭄이 시작되려는가?

그렇다면 국경은 어떻게 되는 건지, .

 

삐리삐리삐리

그들이 아침부터 요상한 피리를 분다. 두 놈이 나란히 서서 그런다. 우리도 질세라 둘이 나서서 북채를 잡았다.

둥당둥당둥당!”

강물이 더 줄어들었다. 등을 보이던 물속 바위가 이제는 허리까지 보이고 있다. 가뭄의 징조가 분명하다. 어제 군량을 타러 성에 다녀온 동료들의 소식에 의하면, 성내에서는 벌써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더란다. 오가며 본 많은 논밭도 금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더란다. 우울하다. 가뭄이 장기화되면 우리가 후방의 다른 이들과 교대하는 일이 무기한 연기될지도 모른다.

삐리삐리삐리

그들의 피리소리도 약해진 게, 전만 못 한 것 같다. 그들도 우리처럼 양이 준 식사를 공급받는 걸까.

하늘 한복판으로 옮겨간 해가 따가운 햇살들을 아래로 내리쏜다. 엄청 큰 구렁이 같던 강물이 이제는 가느다란 줄뱀 닮은 개울이 돼, 따가운 햇살 아래 겨우 흐른다.

휘익 탁! 휘익 탁!’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몇 발자국 앞 자갈밭에 떨어졌다. 대부분 저쯤에 떨어지지만 우리가 서 있는 데까지 날아오기도 한다. 몇 년에 한두 건씩 저런 화살에 맞아 몸을 다치거나 죽은 일이 생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는 아직 그런 일이 없는데, 그들이 피리로 호들갑을 떨다가 느닷없이 활을 쳐들고 나설 즈음에 이미 우리는 바위 뒤나 나무 뒤로 몸을 피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응사한다.

얼마 후, 그들 중 하나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강 쪽으로 나와 고래고래 욕한다. ‘을 담당하는 놈이다. 목소리가 제일 크기 때문에 그 놈이을 맡았을 게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목청 큰담당이 방패 들고 나서서 같이 욕한다.

그들의 욕은 대체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들의 말이 우리가 듣기에는 심한 사투리 같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에 그들과 우리의 시조가 한 형제였다는 전설이 있다.

한동안 오가던 욕설은 점심 먹는 때가 다가오면 그친다. 무언의 약속이다. 그 때부터 이상한 정적이 존재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식곤증에 창을 부여잡고 졸기 일쑤다.

날이 갈수록 강바닥이 더 드러나고 있다. 검푸르던 강물 대신 하얀 자갈밭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자갈밭에서 반사된 햇살들에 눈이 시다. 나무나 바위 뒤에 기대어 서서 꾸벅꾸벅 졸게 된다. 코골고 자는 놈도 있다. 그들의 화살이 이런 때 독사처럼 날아들기도 하더니 요즈음엔 사라졌다. 그들도 밥 먹고 나면 졸린 생리를 존중하게 된 걸까.

어두워지면 횃불을 밝힌다. 밤의 근무가 낮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따가운 햇살도 없을뿐더러 대개 낮잠들을 자 놔서 졸리지도 않다. 컴컴한 밤에도, 개울처럼 됐지만 어쨌든 강물이 흐른다.

그러더니, 계속된 메마른 날씨에 개울처럼 흐르던 것조차 멈춰버렸다. 국경이 증발해 버린 거다. 우리는 망연히, 말라버린 국경강 복판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을 담당하는 놈이 강기슭에서 멍하니 강 복판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런 가뭄은 오십 년만이라 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오십 년 전 큰가뭄 얘기. 나라 안 우물이 반 이상 말라붙고 작물들까지 다 시들어버리면서 온 백성이 나무껍질이라도 벗겨 먹겠다며 산과 들을 헤맸다 했다. 그 큰가뭄이 다시 돌아온 건가?

이젠 우리 나루의 샘에도 물이 고이지 않아, 십 리 떨어진 후방 마을의 물을 길어다 먹는 판국이다.

야아!”

우리 쪽 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 그러자 건너편 이 놀라서 후딱 방패를 쳐들고는 먼저 욕을 고래고래 퍼붓기 시작했다.

왜 그러니 썅놈아!”

 

강물이 흐를 때에는 밤마다 횃불도 밝히고 강물소리에도 귀 기울였다. 그들이 몰래 배 타고 오거나 헤엄쳐 오는 소리가 나지 않나 해서. 그런데 강물이 다 말라 버리자 이제는 발자국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다. 그들이 강바닥으로 쳐들어온다면 자갈들 밟는 소리를 안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바닥 자갈들에서 나는 소리가 간단치 않았다. 쥐 같은 작은 짐승들이 오가는 달가닥소리, 부는 바람에 작은 자갈들이 내는사그락소리, 그 외도 규명하기 힘든 갖가지 소리들.

낯선 강의 변화 탓에 밤 근무가 고되어졌다. 날이 새면 그 때부터는 눈 따가운 햇살들의 난무를 견뎌야 한다. 강바닥의 흰 자갈밭이 푸르스름해지다가 붉어지는 어지러움에 눈이 멀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온몸을 땀으로 젖게 하는 무더위, 그런 와중에 악을 쓰며 피리를 부는 그들, 우리의 북 소리, 화살들, 거친 욕들.

가뭄이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지쳐갔다. 어둠은 언제나 동녘 빛에 사라져갔고, 날씨는 무덥기만 하고, 한낮의 욕들이 오가면 멋쩍은 정적이 자리 잡았다. 모든 게 변함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다. 강물이 말라버린 것은 상황의 변화일 뿐 사건이 아니었다. 특별 경계는 평상근무로 환원되었다. 그들도 강물이 말라 버린 날부터 별스럽게 며칠 간 바락바락 악쓰더니 이젠 다시 예전처럼 적당히 그런다.

비상은 일상으로 환원되었다. 긴장했던 며칠 동안이 쑥스러워지면서 습관적인 신경전만이 무더운 날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다.

삐리삐리시작되던 그들의 피리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뒤따라 북을 치려던 우리는 긴장해, 강 건너편을 주시하였다.

흑갈색의 거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흑갈색 털의 큰 멧돼지였다. 그 놈이 산에서 강나루로 내려오다가 그들과 맞닥뜨린 것 같았다. 놈은 송곳니를 하얗게 빛내며 강바닥으로 달음질쳤다. 그들의 창이 날았으나 잽싼 놈을 맞추지 못했다.

놈이 강 복판을 지나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도 급히 창과 방패를 들고 나갔다. 두 아름은 될 포식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식량보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개구리까지 잡아다 먹는 판이다.

자갈들을타다닥!’튕기며 멈춰 선 놈은 양쪽에서 협공 당한 꼴이 됐다. 놈의 뒤로는 그들이 허겁지겁 창을 주우며 달려오고 있었고 앞쪽에서는 우리가 창을 치켜들고 던질 참이다. 놈은 째진 눈매로 휙 둘러본 뒤 상류 쪽으로 내달린다. 우리는 창도 던져 보지 못한 채 방패 들고 뒤를 쫓았다. 그들도 그 쪽에서 쫓아갔다.

강 한가운데로 달리는 놈의 뒤를 그들과 우리가 경주하듯 나란히 따라가는 셈이다. 소리치며 방패를 두드리며 자갈들에 넘어지기도 하며, 창을 꼬나 쥐고 달린다. 창들이 놈을 맞추지 못해, 자갈들 새에 꽂히거나 퉁겨지거나 촉이 부러져버리거나 한다.

달아나던 놈이 지쳤는지, 뾰족한 주둥이로 홱 돌아서서 칼 같은 송곳니로 달려든다.‘와악!’우리와 그들이 흩어진다. 놈이 휭 하니 그 틈으로 다시 내닫는다. 그 때 창들이 날아가서 그 중 하나가 놈의 엉덩이에 꽂혔다.

꽤애액!”

놈이 강바닥을 뒤흔들듯 비명 지르며 날뛰자 그 창이 떨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주춤대며 멈춘 놈의 째진 눈에 시퍼런 불길이 서렸다. 그들과 우리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방패에 몸을 가린 채 조심조심 물러났다. 놈은 앞쪽으로 나아갈 듯하다가 확 돌아 돌진한다. 그 쪽에 선 이들이 창도 못 던지고 방패를 떨어뜨리며 피하자, 놈은 송곳니로 방패 하나를 콱 찔러 마구 윽박지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창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꽤애액!”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창들에 고슴도치 꼴이 돼 숨을 가쁘게 쉬며 버드럭거렸다. 몸뚱이에 꽂힌 창들도 같이 흔들거렸다. 모두 조심조심 다가서다가, 놈이 다시꽤애액!’하자 곤두박질치듯 물러섰다. 놈은 마침내 신음마저 약해지며 죽어간다. 부근 자갈들에 물감처럼 붉은 피가 번졌다. 송곳니도 붉게 물들어갔다. 모두 땀에 젖어 놈의 주위를 에워싸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와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 두어 발씩 물러났다. 새삼스럽지만 적과 함께 앉아있었던 거다. 창들은 모두 멧돼지에 꽂혔거나 부러져버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댔으나 체력이 다한 상태였다. 힘겨운데다가 적개심을 되살리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 역시 칼자루에 손대고 있을 뿐 뽑지 못했다. 햇살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서로 상대편을 말없이 보았다. 멀리서 구별되던 그들이 생생한 얼굴로 코앞에 있었다. ‘담당의 비쩍 마른 얼굴생김도 구체적이었다.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우리도 따라 웃었다.

사실, 삼십 년 전 전란은 옛날 일이고 지금의 그들과 우리는 단 한 번도 창칼을 맞부딪친 적이 없었다. 관념으로만이었다. 노려보며 지내다가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다.

강 한복판 지점이라, 경계선의 검붉은 표식처럼 멧돼지가 쓰러져있었다. 꽂힌 양쪽 창의 수는 거의 같았다. ‘반으로 나누자고 우리 쪽에서 제의하였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기 한 사람씩 나서 칼로 멧돼지의 숨통을 끊고 창을 뽑으며 살코기를 나누었다.

그 후 그들과 우리 사이는 달라졌다. 그들의 화살이 엉뚱하게도 먹다 남은 멧돼지 뼈다귀를 매단 채 날아왔고, 우리는 응답으로 멧돼지 꼬리를 화살에 매달아 쏘았다. 그들의 피리 소리가 요상한 곡조 대신 흥겹게 바뀌는가 하면, 우리의 북은 반주가 돼 주었다. 그들의도 약해져서 아예 나타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멧돼지 고기를 나누어 먹은 뒤로 확실히 사이가 달라졌다.

강물이 말라버리면서 경계심과 적개심까지 말라버린 걸까. 이제는 경계하는 모양들만 유지할 뿐이다.

그런 어느 날이다.

자갈 밑의 새우라도 주우려고 강바닥에 나간 우리 편과 그들의 부식 담당자끼리 멧돼지 쓰러졌던 그 중간지점에서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부식거리를 바꿔 먹기로 합의가 되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늘 같은 부식에 질려 있었다. 다음 날부터퍼붓는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뜸해지던 이 결국 사라진 것이다.

해가 하늘 한복판에 이르면 그들이 먼저 피리를 불었다. 우리가 북을 쳐 응답하면 양쪽에서 한 사람이 바꿔먹을 부식거리를 들고 나갔다. 우리는 뒤쪽에 수목이 우거진 산이 있어 열매가, 그들은 바위투성이 산이라 새알이 주였다.

가뭄이 길어지고 있어서, 형편없는 식량 보급을 탓할 수도 없고 이제는 식량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인지 연실 강바닥을 뒤지고 산을 오르고 하는 모습이다. 우리처럼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경비를 서고 다른 한 패는 식량 구하기로 나선 듯했다.

지난 번 멧돼지 고기는 얼마나 맛있었나! 사흘이나 푸짐하게 먹은 얘기를 지금도 꺼낸다.

햇빛이 눈부신 강바닥을 지켜보다보면 뭔가 시커먼 게 강 복판에서 아른거린다. 멧돼지인가 놀라 눈 비비고 보면 그들과 우리 쪽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부식거리를 교환하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 위 아득히 높은 하늘에는, 그 죽어가던 멧돼지의 눈동자에 담겼던 샛노란 해가 발광하고 있었다.

 

 

***

 

 

오늘은 내 차례다.

삐리삐리소리가 들려오고, 우리 쪽 북이둥당둥당울리자 나는 칼을 풀어놓은 뒤 강바닥으로 나아갔다. 어제 합의대로 불쏘시개 관솔을 싸 들고 자갈밭 위를 걸어갔다. 그들 쪽에선 부싯돌을 가져올 것이다. 이처럼 바꿀 물건의 내용은 전날에 합의된다. 바꿔먹을 부식거리가 마땅치 않게 되면서 물물교환으로 발전된 거다. 어제는 우리의 질그릇과 그들의 모피가 바꿔졌다.

자그락자그락

자갈들이 내 발에 밟히며 나는 소리다. 건너편 쪽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며 가까워졌다. 그런데 상대는 지난번에도 만난 녀석이다. 녀석은 뚱뚱한 몸집으로 웃으며 내게 부싯돌을 건넨다. 나도 불쏘시개 관솔을 건네며 말했다.

내일 우리 쪽은 칡 끈을 한 뭉치 가져올 테니 너희는 장식용 새 깃들을 두 묶음 가져오는 게 어때?”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가 된 거다. 돌아서서 가려는데 어이!’하고 나를 불렀다. 뒤돌아섰더니 녀석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젓고는 자기가 돌아선다.

별 싱거운 녀석. 나는 목덜미의 땀을 소매로 닦으며 우리 강나루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강바닥의 자갈들이 매섭게 햇빛들을 반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조심 왔다.

 

열흘이 지났다.

다시 내 차례다. 오늘은 가죽부대를 메고 가 그들의 우물물을 받아오는 일이다. 대신 그들한테는 과일을 몇 알이나마 건네기로 돼 있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조금씩이나마 공급받고 우리는 십 리나 되는 마을의 물을 길어다 마시는 고역이 사라진 셈이다. 그들한테서 식수까지 공급받다니, 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면 예전에 흐르던 강물은 든든한 국경도 됐지만, 이처럼 서로 도와가며 편히 살 수 있는 걸 가로막은 장애물도 됐던 게 아닐까?

따가운 자갈들에, 나는 발바닥의 통증을 참아가며 강 복판에 다다랐다. 그랬더니, 열흘 전 그 녀석이 나를 맞는 게 아닌가. 그들이나 우리나 바꾸러 나서는 인원이 한정돼 있어 생길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래도 녀석을 또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녀석도 같은 기분인지 멀겋게 웃는다. 과일을 건넨 뒤 녀석이 가져온 가죽부대의 물을 우리 가죽부대에 받아 채우고서 돌아섰다.

어어이.”

녀석이 나를 불렀다. 돌아서니, 먼젓번처럼 어색하게 서서 머리를 긁적거린다. 주변의 반사된 햇빛들에, 뚱뚱한 그의 몸이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무거워진 가죽부대를 멘 채 서 있었다. ‘왜 자꾸 그래?’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몸도 주변의 어지러운 햇빛들에 사라질 것 같아 땀만 흘렸다. 녀석이 마침내 말했다.

오늘 밤에 놀러오지 않을래? 우리 후방 마을에서 기우제가 있거든. 볼 만해. 여기서 상류 쪽으로 오 리쯤 올라가면 집채만 한 큰 바위가 강 복판에 있는데, 거기서 내가 기다릴게.”

놀란 내 표정이 녀석의 눈동자에 비쳐있었다. 나는 가타부타 말 못하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녀석의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세 달째로 접어든 가뭄에 녀석의 정신이 이상하게 된 건 아닐까. 아니, 진심일 수도 있지. 이젠 친해지고 싶은 게지. 모르지. 어떤 음모일 수도 있어.

여하튼, 적한테서 놀러 오란 제의를 받은 이 믿기지 않는 일을 우리 편 그 누구에게도 나는 얘기할 수 없었다. 오늘밤은 마침 내가 경비를 쉬는 차례였다. 나는 갈등하던 끝에 한번, 녀석이 기다린다는 데까지 일단 가 보기로 결심했다. 갔다가 분위기가 이상하면 되돌아올 생각이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비수 하나를 품속에 숨겼다.

경비 맡은 패가 횃불들을 지피느라 부산한 틈을 타, 벼랑 밑으로 몸을 근접시킨 채 상류 방향으로 갔다. 양쪽의 강가가 험한 산벼랑으로 길게 이어진 지형이라, 강나루 부근만 경비가 엄하다.

오 리쯤 가자, 녀석 말대로 집채만 한 바위가 강 복판에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초승달빛이라, 바위 빼고는 다른 사물들은 흐릿하다. 침침한 어느 곳에 그들이 숨어서 나를 잡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뒤돌아서 달아나기엔 이미 늦었다. 하는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품속의 비수로 자결하는 수밖에.

하하하……

웃음소리가 나면서 녀석이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내게 옷 뭉치를 안겨주며 갈아입으라 했다. 그들의 복장이었다. 녀석이 앞장서 걸어갔다. 강 복판 건너 그들의 강바닥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마을에 다다랐다. 기우제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시조신을 모신 사당에 노루 한 마리를 바치며비를 내려주십사수십 명이 엎드려 기원하고 있었다. 나도 녀석을 따라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뒤 함께 절하고 주문도 외웠다. 나눠 주는 음식도 받아먹었다. 기우제가 절정에 다다랐다. 제관이 노루의 목을 칼로 베어 쳐들며 뭐라 외치자 옆에 선 자들이 시조신의 화상 앞에 피운 불에 나뭇가지들을 얹었다. 불길이 하늘로 올라가는 용처럼 치솟으며 훨훨 타올랐다. 순간 나는 그들 시조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았다. 불빛에 훤히 드러난 그 모습은 우리 시조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며, 거친 턱수염에 장대한 기골이 그랬다. 우리 쪽이 칼을 쥔 데 반해 활을 들었다는 것, 머리에 쓴 관과 옷의 모양이 다른 것 외에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전설은 사실이었다. 아득한 옛날, 우리 시조와 그들의 시조가 한 형제였는데 무술이 용호상박으로 맞서면서 결국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서야 했고……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기우제가 끝나고 녀석과 나는 다시, 강나루를 피해 산의 벼랑으로 해서 조심조심 강바닥으로 내려왔다. 밤이라 강바닥의 자갈들이 식어 있었다. 이윽고 강 복판의 그 큰 바위에 다다랐다.

조심해 가게.”

그래.”

응답하고 돌아서려다가 녀석을 불렀다.

이것 받아.”

품에 지녔던 비수를 건넸다. 녀석은 놀라서 말했다.

내가 가져도 돼?”

기우제를 보여줘서 감사하단 뜻이야.”

내가 우리 강나루로 돌아왔을 때는 꼭두새벽이었다. 경비를 선 패들이 횃불을 새로 가느라 분주한 틈에 슬그머니 들어왔다. 떠날 때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잠자리를 꾸며 놓았었는데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나는 잠자리에 눕자마자 이내 곤한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늦은 아침이었다. 강 건너에서 삐리삐리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우리 쪽에서 둥당둥당북을 쳤다. 잠시 후면 화살이 날아올 거며 한낮이 되면 강 복판에서 물물교환이 이뤄질 게다.

모든 게 변함없었다. 지난 밤 적국에 몰래 다녀온 일이 꿈같았다. 나는 품속의 비수를 정말 녀석에게 선물했는지 확인해 봤다. 비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일은 사실이었다. 아무한테도 어젯밤 일을 얘기해서는 안 되었다. 적의 안내로 적국에 들어가서 기우제까지 보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얘기를 그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이 여름에 우리는 그들을 매일 만나 물까지 받아 마시지만, 마시기 직전에 항상 은덩이로 그 물에 독이 있는지 검사한다. 이젠 장난처럼 화살이 오가지만 여하튼 항상 상대편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매일 만나지만 강 한복판 중간 지점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강물은 말라 버렸지만 경계는 여전했다.

아득한 옛날, 그들의 시조와 우리 시조 사이로 흐르기 시작한 경계의 강. 오랜 세월 깊게 파인 적개심의 강을 어떻게 내가 쉬 넘어갔다 왔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 이상야릇한 감정. 적을 친구로 두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여하튼 이런 감정과 모순은 절대 녀석과 나만 남몰래 간직해야 한다.

 

오늘도 그들과 우리의 물물교환은 순조로웠다. 피리소리와, 뒤이은 북소리, 그리고 우리 쪽에서 한 명이 과일 몇 알을 들고 강 복판의 지점에 가 그들의 물을 받아 왔다. 우리는 그런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부분 졸고 있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받아온 물에 은덩이를 담그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짝이던 은덩이가 시커먼 사색을 띤 것이다. 들쥐를 잡아 그 물 몇 방울을 찍어 먹이자 파르르 떨다 죽는다. 독을 탄 물이었다.

영문을 알 순 없지만 차가운 살의였다. 비상경계령이 내려져 모두 허겁지겁 무기를 찾아 들고 제 자리를 찾았다. 낮잠 자던 두엇은 호되게 맞고서 얼떨떨한 채로 경계에 임했다. 벌써 그들의 화살이 싸악허공을 날카롭게 찢으며 날아든다.

뒤이어, 건너편 강나루에서 누군가 방패로 몸을 막으며 강바닥으로 나섰다. 오랜만의담당이었다. 쌍욕을 냅다 퍼붓고 나서 말했다.

너희가 포섭해 놓은 첩자가 여기 있으니 데려가라!”

그런 뒤 그들 서넛이 누군가를 질질 끌어다가 강 복판에 내팽개쳤다. 우리는 무슨 짓거리를 벌이는 거야?’수군거리며 지켜보았다. 햇볕에 뜨거워진 자갈밭 위에 누군가 산발이 돼 피범벅 몸뚱이로 내팽개쳐 있었다. 순간 하늘이 시커메지는 전율이 나를 휩쌌다. 그것은 녀석이었다. 뚱뚱한 녀석의 몸이 갓 잡은 짐승처럼 핏덩이가 돼 꿈틀거렸다.

우리 편 욕 담당자도 앞으로 나서 쌍욕을 냅다 퍼붓고는 말했다.

싸우고 싶으니까 별 짓을 다 꾸며대는구나!”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저께 밤, 그들 땅에 다녀온 일이 잘못된 거다. 그 날 밤 나는 녀석을 따라다니며 우물이니 사냥터니, 그들의 숙소까지 몰래 구경했다. 그리고 돌아오다가 강가에서 녀석의 동료와 마주쳤다. 너무 뜻밖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횃불은 안 들었으나 달빛이 밝았다. 나는 둘러보는 양 고개를 돌리며 지나쳤지만 지나친 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는 듯했다. 나는 태연히 걸어가면서도 식은땀을 흘렸다. 상류의 그 바위 부근에서 녀석과 헤어질 때 내가 말했다.

아까 어떤 사람과 마주친 게 마음에 걸리네.”

걱정 마라. 자네는 신경과민이야.”

그런 뒤 어제, 오늘 한낮까지도 별 일이 없기에 나는 안심했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녀석은 첩자로 몰려 온갖 고문을 받았을 테고, 그들이 보복 차원에서 우리에 대한 독살 음모가 마련돼 오늘 한낮의 식수 공급 때까지 평화로운 상황을 위장한 것이다.

이 여름에 뭔가 달라지던 것들이 모조리 독살되었다. 메마른 강바닥엔 햇살이 범람한다. 어쩌다 불어오는 바람도 뜨겁다. 우리는 바위나 나무 뒤로 몸을 피한 채 건조해진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화살촉에 독즙을 발랐다. 다시 칼날을 갈고 창끝을 바로 잡았다.

하늘은 해의 큰 덩어리처럼 변해 그 뜨거운 열기에 지상의 모든 게 침묵 당했다.

눈가로 흘러드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나는 다시 강 복판을 지켜보았다. 화살을 쥔 손이 푸르르 떨렸다. 뜨거운 자갈 위에서 녀석은 언젠가 그 멧돼지처럼 피투성이로 꿈틀거린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피로 물들어 같이 흔들린다. 이따금 쳐들려다 다시 가슴으로 떨어뜨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쓰디쓴 신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뜨거운 하늘이 가루로 부서져 내리며, 녀석을 제외한 강바닥에 하얗게 쌓여갔다.

나는 화살의 오늬를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적막을 향해, 세 달째나 된 물기 없는 가뭄의 심장을 향해녀석의 시뻘건 고통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쏟아지는 햇살들을 가로지르며 비수처럼 날아갔다. 녀석의 몸뚱이가 순간 경직됐다가 크게 흔들리더니 서서히 고꾸라졌다. 핏빛 몸뚱이에 꽂힌 화살은 마치 가는 흰 뼈 하나가 삐죽이 솟은 것처럼 보였다.

 

까마귀들이 지난밤의 부서진 조각들처럼 점점이 날아들었다. 녀석의 몸뚱이 주위, 너더댓 발 떨어진 부근에서 가늘고 긴 부리들로 깍깍거렸다. 제각기 딴전을 부리다가 슬금슬금 시체 가까이로 간다. 그 중 한 놈이 날개를 까닥거리며 다가가 시체를 콕콕콕 쪼다 물러나더니 다시 접근한다. 맞은편 놈도 따라한다. 두 놈이 마침내 거침없이 시신을 쪼기 시작하자 다른 놈들도 달려들어 그 군집(群集)이 흉측하게 꿈틀거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악취가 풍겼다. 시신 썩는 냄새인지, 다른 곳에서 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나는 역해져서 입술을 깨물며 참다가 끝내는 질펀하게 눈물 흘리며 토했다. 긴 내장 같은 걸 길게 문 놈을 선두로 까마귀들이 다 날아가 버린 날, 하늘 한 편에서부터 그을음 같은 구름들이 소리 없이 몰려들면서 강바닥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며칠째 계속되는 긴장에다가, 무겁게 가라앉는 날씨에 탈진할 것 같았다.

그 날 밤, 별 하나 안 보이더니 후두두둑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위 밑에 앉은 채로 들이치는 찬비에 몸을 떨었다. 빗소리 자욱한 캄캄한 강 쪽을 바라보다가, 시커멓게 흐트러진 녀석의 머리칼들이 내 발에 닿은 것 같아 소스라쳐보면 비에 젖은 긴 풀잎들이었다.

동이 터도 빗줄기들은 그 무수한 햇살들처럼 쉬지 않고 쏟아졌다. 강 복판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귀 기울이면 자욱한 빗소리뿐. 폭우는 닷새나 쏟아졌다. 상류에서부터 누런 황토 빛으로 흘러내려오기 시작한 강물은 그 긴 혀로 녀석의 흔적을 핥아버리고, 흐릿하게 풍기던 악취까지 삼켜버리며 잔뜩 불어난 무서운 꼴로 변해버렸다.

강물은 거대하게 다시 찾아들었다.

지쳐서, 지켜보는 우리와 그들 사이로 거대한 장벽같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무심이 이 소설을 쓴 시기는 1980년경이다. 이십 년쯤 지나 2000'공동경비구역 JSA’란 영화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영화와 작가의 이 소설이 줄거리가 흡사하다. 작가의 소설이 시기적으로 앞섰으므로 결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향을 받거나 표절한 게 아니다. 단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염려된다. 그 자세한 사연을 가뭄의 창작배경에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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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80년경에 썼다. 무심이 동해안의 모 고등학교 교사였을 때다. 망연히 흘러가는 남대천을 어느 날 지켜보다가, 문득 어떤 구상이 떠올라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 때 제목이이었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50 매쯤이었다. 지금도 동해안에 있는, 40년 넘는 설악문우회의 회지갈뫼지에 발표했다.

그 후 무심은 춘천의 모 고등학교로 전근온 뒤인 198311월경, 분량을 약 80매로 보완하는 한편 제목도사초(史草)’라고 바꾼 뒤 중앙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 때 이런 결심을 했던 기억이다.

만일 당선되면 그걸 핑계로 교직을 사표내고 나와 전업 작가로 사는 거다.”

돌이켜보면 만용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으나 사초라는 제목이 작품 내용에 걸맞지 않다는 심사위원의 평과 함께 탈락한 것이다. 낙망한 무심은결국 내 팔자는 교사로 살아야하는가 보다체념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세월이 흘러 2000년 경에 공동경비구역 JSA ’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무심은 우연히 그 예고편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소설 '사초'와 줄거리가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병사들이 국경 근처에서 벌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란성 쌍둥이 같았다. 기분이 나빠 그 후 무심은 지금까지 그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상연이란 분이 1996, ‘DMZ’란 소설을 세계의 문학이란 문학지에 발표했는데 이를 박찬욱 감독이 2000년에 각색하여 연출해 나온 영화라 했다.

 

무심은 2004년 봄에 교직을 명퇴했다. 더 늦기 전에 소설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역시 교직을 명퇴한 한 친구한테 1983년의사초원고를 한 번 보여주었다. 그 친구가 다 읽고 나서 말했다.

감동적인 소설이다! 그런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줄거리가 흡사하다.”

그 말에 무심은 다시 이 작품을 서재에 처박아두었다. 그러다가 요즈음 들어 생각을 바꿨다. ‘그 작품이 불쌍하다. 블로그에라도 올려 세상의 빛을 보게 하자.’

하여 이번에가뭄으로 이름을 바꿔 블로그에 올렸다. 다만 30여 년 전 작품이라 구식 문장들을 며칠 다듬어야 했다.

 

이 기회에 재차 밝히는 것은 이 작품이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최소한 십 년 이상 앞섰다는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도 있는데 1980년 경 발간된 설악문우회의갈뫼지가 그것이며 1983년 중앙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이 그것이다. 시간을 내어 찾고자 하면 나올 수 있는 근거들이다. 물론 무심에게도, 오래 되어 원고지들이 누렇게 빛바랜 사초원고도 있다.

 

제목을 이라 했다가 사초라 했다가 가뭄으로 자리 잡았듯이, 30여 년 흐르는 동안 다소 기구한 운명을 겪은 작품이다. 하지만 무심은 요 며칠 동안 이 작품을 다듬으면서 특히,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자신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자기 작품에 자기가 감명 받다니, 요즈음 말로 자뻑일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의 여러 한() 중 하나를 그나마 푼 듯하다.

 

이런 생각들을 해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이 1983년 신춘문예 투고 때 당선되었더라면, 그래서 교직을 사표 내고 전업작가로 나섰다면 내 삶의 행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작품이 1983년에 당선되지 못한 것은 제목 때문이 아니라, 당시 남북관계가 몹시 안 좋던 시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이라는, 박상연 작가의 ‘DMZ’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솔직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과 무심 작품이 흡사한 것은, 세대를 격했지만 분단된 땅에서 살고 있다는 동질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기구한 역정의 이 작품에 무심은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만 적기로 한다. 불원간 친구를 만나 막걸리 한 잔 나누는 것으로 뒤늦은 뒤풀이라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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