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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지게를 지고 출발하려는데 사내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궁리하던 용이는 우선 눈에 뜨이는 땅바닥의 돌멩이들을 여러 개 주운 뒤, 바위 뒤고 숲이고 사방으로 마구 던졌다. 깃털 화려한 장끼 한 마리가 진달래 숲에서푸드득!’나타나 멀리 날아가고 뒤이어어버버!’소리치면서 싸리나무 숲에서 사내가 기어 나왔다. 무서움이 여전한 표정으로 말이다.

뭘 그리 무서워해?”

사내는 용이가 하는 말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다면 아까 그들이 멀리서 말 타고 달려오던 소리는 어떻게 용이보다 먼저 들었는지, 영 앞뒤가 맞지 않는 벙어리 사내였다. 다시, 용이가 지게작대기를 짚으며 지게지고 일어서자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들을 붙잡아주었다. 조심조심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가는데 땀은 다시 나지만 주위는 서늘해졌다. 하늘 한복판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탓이다. 미시(未時)에서 신시(辛時) 사이쯤 되지 않을까. 늦가을 해는 짧아지는 해다. 정도사가 머지않았지만, 도착한 뒤 그릇 파는 일뿐만 아니라 스님이 힘들어 미뤘던 일들도 도와 드리려면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다 내려와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폭이 마흔 자는 될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고 밀삐에 어깨 살갗이 다 벗겨졌는지 몹시 쓰라렸다. 갈증 나는 목도 축여야 했다. 지게를 일단 냇가에 세워놓고 용이는 엎드린 자세로 흐르는 냇물을 훌쩍훌쩍 들이켰다. 오장육부가 시원해졌다. 그런 뒤 웃옷을 벗어, 벗겨진 어깨의 살갗 부분을 찬 냇물로 여러 번 씻었다. 이래놓아야 덧나는 걸 방지한다.

냇물이 얼마나 맑은지 바닥의 조약돌들이 남김없이 다 보였다. 그런데 흐르는 물살에 모난 데가 다 다듬어져 동글동글한 모양들뿐이다. 용이는 짚신들을 벗고 맨발로 물속의 조약돌들을 한 번 밟아보았다. 짐작대로 여간 매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냥 짚신을 신고서 간다면 조약돌에 미끄러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냇물을 건넌 뒤 물에 젖은 축축한 짚신으로 길을 걸을 걸 생각하니, 짚신은 짚신대로 쉬 망가져버리고 발이 짓물러질 게 뻔해서 영 내키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 짚신 한 켤레쯤 여분으로 챙겼더라면 좋았을 것을!’용이는 한탄했다.

게다가, 냇물이 어떤 데는 검푸르게 깊고 어떤 데는 연한 빛으로 얕아서 고른바닥도 못 됐다.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들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가 눈에 뜨이긴 하지만 사기그릇 가득 얹은 지게 지고 가기에는 위험천만이다. 천생, 고개를 내려올 때처럼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를 붙잡아주며 내를 건너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사내가 또 보이지 않았다.

이 비렁뱅이자식이 그 새 어디 갔어?”

다리를 저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 했을 것 같다. 용이는 근처 떡갈나무의 굵은 가지 하나를 꺾어들었다. 그것을 휘두르며 부근 숲을 뒤졌다. ‘후다닥!’소리가 난 곳을 봤더니 노루였다. 송아지만 한 노루가 기겁해서 겅중겅중 숲속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웃옷도 채 걸치지 못한 꼴로 숲을 뒤지느라 용이의 상반신은 나뭇가지나 풀잎에 여기저기 긁혔다. ‘이 자식을 놓쳤구나!’체념하며 숲을 나오려는데 가까운 바위 뒤에서 사내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겁먹은 얼굴로 나타났다.

상반신의 긁힌 상처들을 냇물에 여러 번 씻고 난 용이는,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대신 등태 속의 그 칼을 다시 빼들었다. 길이가 한 자밖에 안 되지만 날이 잘 서 있다. 백자를 열 점이나 대장장이한테 주고 장만한 거다. 사내가 듣거나 말거나 용이는 사나운 낯으로 말했다.

자네 말이야, 내가 그만 따라와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나를 따라와야 해. 만일 또 제멋대로 달아났다가는 그 때는 이 칼로 죽여 버릴 거다.”

고개를 다 내려가면 전대의 볶은 콩들을 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얼버무려졌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강자가 하자는 대로 약자가 순종하며 돌아가기 마련 아닌가.

이 냇물을 건너고 나면, 정도사까지 오 리쯤 된다. 십 년 전 천도재를 지내려고, 단발령 고개 너머에서 가장 가까운 절을 찾다가 정도사를 만난 것이다. 사실상 오늘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그렇다면…… 이 냇물만 건너면 사내를 풀어주자. 남은 볶은 콩들도 그 때 주자. 벙어리가 다리를 절면서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꽤 고맙지 않나?

사실 말이 오 리지, 산길 오 리를 혼자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갈 걸 생각하면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용이는 다시 좋게 마음먹었다. 하긴 냇물이 거울처럼 맑고, 붉거나 노랗거나 한 단풍들이 지천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 마음을 모질게 먹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용이는 벗은 짚신 켤레를 새고자리에 매단 뒤 바지 대님을 풀었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는 지게를 지었다. 사내의 도움을 뒤로 받으며 냇물로 조심조심 들어섰다. 얼음장같이 찬 냇물에 발가락들이 다 얼어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참아가며, 매끄러운 조약돌들을 조심조심 밟으며 나아간다. 연한 물빛으로 얕은 데는 걷기가 괜찮지만 검푸른 물빛으로 깊은 데는 허리춤 가까이 냇물에 젖어, 사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생깨나 했을 게다.

내를 거의 다 건너는가 싶었는데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지게 뒤의 사내가 바닥의 매끄러운 큰 돌에 휘청미끄러지면서 지게가지에 얹힌 사기그릇 스무 점 가까이가 물에 떨어져 버렸다. 물 깊은 곳이었다면 충격이 덜해 덜 상했을 텐데 얕은 데라 바닥의 조약돌들에 세게 부딪치며 대부분 금이 가거나 깨져버렸다. 용이가 몸을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했다. 용이는 본능적인 동작으로 지게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몸을 돌려 지게가지에 남은 그릇들을 두 팔로 안았다.

냇물에 자빠지며 입은 저고리가 반 가까이가 벗겨진 사내가 처연한 낯으로 용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때 사내 가슴에 검게 문신된 한 글자이 용이의 눈에 뜨였다. 섬광처럼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내는 왜구였다. 용이는 두 팔로 안은 그릇들을 냇가에 내려놓고는 지게 등태에서 칼을 빼들었다.

이 개새끼!”

다스케테! 다스케테!”

두 손을 비비며 연실 외치는, 애걸하는 표정으로 봐살려 달라는 왜놈 말인 듯싶다.

이 개새끼야. 우리 아버님이 니네 칼에 돌아가셨어. 이 원수 놈의 개새끼!”

도우조 다스케테! 도우조 다스케테!”

어떻게 왜구 새끼가 풍악산 일대를 떠돌고 있었을까. 약탈하러 동해안에 왔다가 다리를 다치면서 낙오된 놈이 아닐까. 용이가 쳐든 칼 앞에서 이제는 삶을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서 합장 자세로 물속에 앉아 있는 사내였다. 그 때 잠자리 한 마리가 부근 하늘을 맴돌다가 용이의 높이 쳐든 칼끝에 무심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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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봉우리들 중 가장 높은 비로봉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오 리쯤 내려가면 마의태자 묘도 있다니, 정말일까? 용이가 이런저런 생각도 하며 눈앞의 선경을 즐기는데 문득 무슨 소리가 고개 아래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따그닥따그닥소리. 분명,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용이는 가슴이 섬뜩해져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은 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전란이 그쳤나 했는데 다시 시작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선, 길 복판의 지게를 다른 데로 옮겨놓고 피신하려는데 도와 줄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용이보다 먼저 말발굽 소리를 듣고 피신한 것 같다.

귀 먹은 자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말발굽 소리를 들었지?’

용이는 지게를 질 새도 없이 그대로 질질 끌어다가 길가 숲속으로 옮겼다. 목발이 땅바닥의 튀어나온 돌에 걸려 하마터면 지게가 넘어갈 뻔했다. 말발굽 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더니 살벌한 창끝이 보이고 뒤이어 그 창대를 든 병사의 투구가 보였다. 누런 말 타고 나타난 그 병사 뒤로 검은색 복두를 쓴 사람이 잿빛 말을 탄 모습으로 따르고 있었다. 앞에서 창을 들고 가는 병사는 뒤의 복두를 쓴 사람을 호위하는 역할인 것 같았다. 이윽고 히이잉!’하는 말울음 소리들에 이어 두 사람의 모습이 온전하게 가까워졌다. 병사는 눈매가 사나웠고 복두 쓴 사람은 긴 수염을 날렸다. 길가 숲속에 숨은 용이는 제발 별 일 없기를 부처님께 빌었다.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옷자락들의 펄럭소리가 한껏 커지더니 다시 작아져갔다.

그들이 일으킨 뿌연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야 용이는 숲에서 조심스레 나왔다.‘따그닥 따그닥말 타고 고개를 올라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아무래도 개경으로 달려들 가는 것 같다.

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나?’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이성계 장군의 명을 받고 이듬해 봄, 비로봉에 봉헌할 불사리갖춤 일로 장안사(長安寺)에 다녀가던 중이었다. 이성계 장군이 누구이던가. 왜구와 홍건적을 잇달아 물리치며 온 백성의 구세주처럼 떠오른 대단한 장군이 아니던가. 대국 명나라를 치라는 무리한 명을 거부하며 벌어진 위화도 회군 성사 후, 나라의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 지 2년째 되는 해 늦가을이었다. 이성계 장군은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음을 불사리 봉헌이라는 최고의 제의를 통해 온 백성에게 선언하고 싶었다. 정도전 같은 성리학 선비들을 만나며 역성혁명을 준비한 장군의 마음 한 편에, 이천 년 전 석가모니께서 남긴 불경말씀이 여전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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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용이네 집안은 남해 바닷가 사기장이 마을에서 살았다. 사기장이 마을은, 도자기를 구워 나라에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기장들의 공동체다. 용이의 아버님은 마을에서 가장 지체 높은 지유(指諭)’자리를 맡았다. 도자기도 굽지만 다른 사기장들도 통솔하는 자리다. 물론 나라로부터 받는 녹봉도 마을에서 가장 많았다. 용이 아버님은 도자기 만드는 일을 마치면 언제나 물 빠진 갯벌에 나가 굴도 따고 낙지도 잡았다. 미천한 집 가장이 바랄 게 뭐가 있던가. 그저 식솔들 입에 거미줄 칠 일 없이 사는 것 하나 바랄 뿐이다. 행복한 용이네 집에 불행이 닥친 것은 어느 여름 날 배 타고 와 습격한 왜구들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웃옷만 걸친 기괴한 차림으로 긴 칼을 휘두르며 사기장 마을을 도륙 냈다.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도자기들까지 모조리 빼앗아 가 버렸다. 반항하는 양민은 그 자리에서 칼로 베 죽였는데 그 때 용이의 아버님도 참변을 당했다. 그 후로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마음 편히 도자기를 구울 수 있고 토질도 적합한, 다른 좋은 땅을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데가 바로 방산이다. 방산 땅에는 도자기 재료로 쓰는 흙 중 가장 좋은 백토가 곳곳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어렸던 탓에 도자기 일도 제대로 배우진 못한 용이었지만 아버님의 유업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 동안 용이는 마음씨 고운 옆집 처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아버님처럼 지유도 되었다. 하지만 지유가 된들 뭐하나. 녹봉도 끊기다시피 돼, 먹고 살 길이 아득한데…….

 

용이는 사내와 그쯤에서 헤어질 생각이었다. 헤어지고 말고도 없었다. 그냥 용이가 먼저 지게를 다시 지고 내금강 쪽으로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되었다. 그러면 사내는 반대방향인 두타연 쪽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고갯마루에 남아 있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한테 음식동냥을 하든지 할 게다.

막상, 지게 지고 일어나 고개 아래쪽으로 발길을 내디디려던 용이가 생각을 바꿨다.

어이, 나 좀 보시게.”

사내는 소리를 못 듣는 탓인지 어리둥절한 낯이다. 하는 수 없이 용이는 등에 진 지게를 다시 땅에 내려놓은 뒤 강아지한테 하듯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사내가 다리를 절면서 다가왔다. 용이는 손짓발짓으로뒤에서 이 지게가지를 붙잡으며 고개 아래까지 따라와 달라. 그러면 전대에 든 볶은 콩을 다 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가 다시 지게를 지고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가는데 과연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를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사달이 났을 것 같다. 작은 지게에 사기그릇 오십 점이라니 욕심이 과했던 걸까. 비탈길 아래쪽으로 쏠리려는 그릇들 무게 중심 탓에 용이의 지겟작대기가 연실 후들거렸다. 고개는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용이는 고개의 사분지 일쯤 내려오다가 결국 다시 지게를 세웠다. 물건들이 높이 얹힌 지게를 비탈길에 세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뒤의 사내가 두 팔 벌려 지게가지에 얹힌 그릇들을 안아주었기에 가능했다.

목덜미고 겨드랑이고 용이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용이는 소매자루로 땀을 닦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도 따라 앉으며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하긴, 애당초 벙어리인 사내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적막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눈앞으로 그림같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가을 햇빛을 받아 하얀 백옥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솟아 있는 검푸른 소나무 잣나무 숲은, 마치 백옥 보석들을 떠받쳐주는 검푸른 색 비단 같다. 저 일만 이천 봉에 허연 운무라도 피어나면 신선들이 바둑 두며 천 년을 보낸다는 선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 고개의 전설이 용이한테 떠올랐다.

신라왕조 말기 때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천 년 사직을 왕건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했다. 이를 반대했던 마의태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측근들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이 고개에 이르러 일만 이천 봉의 황홀한 풍경을 보게 되자, 마의태자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던 마음이 덧없어졌다.‘신선세계에 들어왔으니 다시는 속세에 나가지 않겠다며 당신의 머리칼들을 다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이 고개를 단발령(斷髮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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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장은 나라에서 명하는 대로 도자기들만 잘 구워내 바치면 농사 지어먹을 만큼의 녹봉도 나오는 안정된 업이었다. 하지만 근년 들어 왜구들의 침략이 잇따르고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이라는 큰 사건까지 나자, 나라가 몹시 어지러워지면서 사기장의 생계마저 흔들려버렸다. 관청의 명대로 도자기들을 구워 바쳐도 녹봉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용이와 아들이 사기그릇 백 점을 반씩 나누어 지게들에 지고 아비는 풍악산 정도사로, 아들은 개경으로 각기 집을 떠난 건 그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는 길이 비교적 편한 개경은 용이가 가고, 높은 단발령 고개를 넘어야 하는 정도사에는 아들이 가는 것으로 계획했었다. 하지만 집 앞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길을 바꿨다. 정도사 주지 스님을 만나 뵙고 사기그릇들을 사 달라는 부탁을 하려면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안면도 있는 자신이 가는 게 더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부처님께 공양드릴 때 쓰이는 그릇들이야 귀한 놋그릇이지만 스님들이 먹고 마시는 데 쓰이는 그릇들은 목기가 고작일 터. 이번에 갖고 가는 사기그릇들이야말로 그런 스님들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주는 물건이 될 게다. 용이는 무거운 사기그릇들을 지게에 지고 이 높은 단발령 고갯마루를 향해 겨우겨우 올라오면서 그런 희망적인 생각들로 몸의 고통을 참았던 것이다.

 

사내가 볶은 콩 두 홉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더니, 자세를 가다듬고서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 한다. 비렁뱅이치고는 인사성이 발랐다. 고갯마루에서 받는 늦가을 햇살이 따갑다. 용이는 지게가 드리운 그늘에 혼자만 앉아 쉬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게가지 위에 높이 얹은 그릇들 덕에 긴 그 그늘이 최소한 두 사람은 수용할 듯싶다. 용이는 땡볕을 받고 있는 사내한테 말했다.

이 그늘로 들어오시게.”

사내는 멍청한 표정으로 용이를 볼 뿐이다. ‘, 이 사내가 말소리를 듣지 못하는 탓에 벙어리가 된 거겠지.’뒤늦은 생각에 용이는 사내의 한 손을 잡아 지게 그늘 안으로 끌어들였다. 비로소 알았는데 사내는 왼쪽다리마저 절고 있었다. 까치집 같은 산발에 넝마 같은 차림에 다리마저 절다니, 어쩌다가 이런 딱한 꼴이 됐을까.

한동안, 왜구들에다가 홍건적들까지 쉴 새 없이 쳐들어와 약탈과 살상을 일삼다가 격퇴됐었다. 사내가 그 때 식구들을 모두 잃고 몸마저 상한 채 유랑민이 된 걸까? 용이는 자신보다 더 딱해 보이는 사내를 보며 왠지 서글퍼져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다에 살어리랏다.

나문재 굴 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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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금강산을 풍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이가 사내를 만난 곳은 풍악산 초입인 단발령 고갯마루다. 사기그릇들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간신히 세워놓고 그 그늘에 앉아 쉬려할 때 산발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사내가 용이보다 먼저 고갯마루에 와 있다가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용이는 지게 위 그릇들이 무겁고 조심스러워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올라왔으니까.

사내는 상투도 못 틀고 산발한 데다가, 길바닥에서 지내는지 옷차림도 걸레처럼 더러웠다. 짚신도 못 신은 맨발이었다. 지게 그늘에서 쉬려다가, 느닷없이 기괴한 꼴로 나타난 사내에 기겁한 용이. 하마터면 지겟작대기를 건드려 그릇들을 다 깨트릴 뻔했다.

그렇게 놀라게 했다면아이고 죄송합니다같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옳지 않을까.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말은커녕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어버버!”

이 사람, 뭐하자는 거야?”

용이는 본능적으로 지게 등태에 숨겨두었던 칼을 찾아 빼들었다. 세상이 흉흉한 탓에 먼 길을 다닐 때에는 이런 칼 하나는 비치해야 했다. 사내는 서슬 퍼런 칼에 놀라 무릎 꿇고 앉더니, 두 손을 비비며 다시어버버소리를 냈다. 그제야 용이는 상황을 알아챘다. 사내는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용이는 칼을 다시 지게 등태 속에 넣었다. 그러자 사내 표정이 밝아지더니 이번에는 웬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바친다. 용이가 그 보따리를 받아 풀어보았다. 머루 다래만 가득했다. ‘숲에 들어가면 지천인 게 머루 다래일 텐데, 이걸 바친다고?’하는 어이없다는 생각에 보따리를 되돌려주려 하자 사내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용이 지게가지 끝에 붙들어 매단 전대를 가리켰다. 전대에는, 용이가 오늘 새벽 방산에서 길을 나설 때 아내가 볶아준 콩 열두 홉이 들어 있다. 사내 행동이 짐작 갔다. 보따리의 머루 다래를 드릴 테니 그 전대에 들었을 식량 좀 받아먹고 싶다는 뜻이다. ‘바꿔먹자는 것 같지만 사실 구걸하는 거나 다름없다. 사내는 그 동안 산에서 머루 다래 같은 산열매나 따 먹으며 연명하느라 지친 것일까.

이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내금강이다. 내금강에는 절이 많다. 더러, 전란 중에 불타버린 절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절이 무사하며 특히 정도사(正道寺)가 예전처럼 불사를 정상적으로 유지한다기에 용이는 쌀을 얻어올 희망을 가졌다. 십 년 전, 어머님의 천도재를 정도사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마음 푸근한 주지 스님이 용이가 지게에 지고 가는 사기그릇 오십 점 정도는 흔쾌히 받으시며, 그 값으로 공양미로 쓰이는 쌀 한 가마니를 성큼 내주실 게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 용이는 애절히 구걸하는 사내한테 인심 한 번 쓰기로 했다. 전대를 풀어 볶은 콩 두 홉쯤 꺼내 건넨 것이다. 사내는 얼른 땅바닥에서 일어나면서 두 손으로 볶은 콩들을 받더니 이내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볶은 콩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애절했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용이는 어이없어 하다가 보따리에서 머루 서너 알을 꺼냈다. 하지만 쉰내에 먹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자신도 전대에서 볶은 콩을 한 홉쯤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사내처럼 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제 전대에 볶은 콩이 아홉 홉쯤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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