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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동안 별 일 없었니? 으응 별 일 없었다고? 나는 별 일이…… 있었는데. 그 별 일을 얘기해 줄까?

이 얘기는 너한테만 하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지 마. 절대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치고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는 게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믿어. 너는 내 유일한 절친이잖아. 그러니까…… 어제 새벽, 아니 오늘 새벽의 일이네. 이렇게 새벽까지 장사하다가 귀가하는 생맥주집 마담 생활이 칠 년이나 됐으면서도 그 날 새벽이 전 날 새벽처럼 여겨지는 착각은 뭔지, 나도 참.

그래그래, 오늘 새벽에 있었던 별 일을 얘기해 줄께. 그럼 어제 밤부터 소급해서 얘기해야겠네. 어제 밤 열한 시는 넘어서 그 자식이 어디서 일차로 술 한 잔을 걸치고 우리 가게에 왔거든. 건축업을 한다는 자식인데 아직 이름은 몰라. 열흘에 한 번 꼴로 우리 가게에 와서 혼자 소주 한 병 노가리 한 접시를 시켜놓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손님들이 없으면 내게 수작을 걸지. “저 여기, 술 한 잔 받지 않겠수?”하고 합석을 청하고는 쓴 소주 한 잔 건네며 쓸데없는 얘기들을 늘어놓는 거지. , 자기 젊었을 적에 특수부대에서 명사수로 활약했다는 얘기인데…… 내 보기에는 몸도 작고 약해 보이는 게 아무래도 동사무소 방위로 때운 자식 같아.

나야 손님들 접대하는 장사니까 어떤 손님이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할 처지가 아니잖아? 그래서, 그 자식이 뭐라 하든 고개를 끄덕이면서 얘기를 들어주다가 다른 손님이 들어오거나, 씨디 판이 다 돌아가서 음악이 끊기면 그것을 핑계로 자리를 뜨는 거지.

그런 핑계 말고도 갑자기 어디서 전화 온 듯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어 여보세요, 아 네네…….”하면서 급하게 통화할 모양으로 그 자리를 뜨기도 하지. 그냥 더 앉아서 안주라도 추가 주문하도록 부추길 수 있지만 그 자식한테는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니까. 얼굴도 못생긴데다가 매너도 꽝인 거야. 솔직히 바쁜 사람을 불러다 앉혔으면 마시고 싶은 술이나 안주라도 있어요? 내가 낼 테니까 말입니다.”하는 정도의 매너를 보여야 하는 게 아니겠니? 그런 매너 한 번 보이는 일 없이, 자기가 마시는 쓴 소주나 한 잔 건네며 말동무 하자는 그런 작자한테 내가 호감을 가질 일은 없잖아.

그런데 어제 밤은 이 자식이 이상하더라고. 거나하게 취해서 다 늦은 시간에 우리 가게로 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나를 불러서는 웬 일로 나는 소주면 되지만 댁은 무슨 술을 좋아하슈?”하고 묻더라니까? 전에 없는 매너라 미심쩍긴 했지만 모처럼의 매너를 물리칠 필요는 없잖니? 그래서 저는 복분자주를 좋아하는데요.” 해 버렸지. 그 술이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술이잖니. 내가 좋아하는 술이지. 그랬더니 그 자식이 그럼, 댁도 그거 한 병 드슈.”하는 거야. 그래서 그 자식의 애호 메뉴인 소주, 노가리와 복분자주를 준비해 갖고서 그 자식의 맞은편 자리에 합석해 마시기 시작했거든.

2차로 들른 게 분명한데다가 내게 비싼 술도 내는 것으로 봐서, 나는 속으로 이 양반이 오늘 낮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지. 달리 그 늑대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까. 다른 날보다 손님도 별로 들지 않고 해서 그 자식의 특등사수 얘기를 다시 들어주면서 복분자주를 한 병 다 마시고는, 눈치를 보았잖니? 그랬더니 그 자식이 한 병 더 마시지 그래? 소주도 한 병 더 갖고 오고 말이야.” 하더라고. 매상도 적은 날이니 이렇게 해서라도 보충해야겠다는 욕심이 들대. 그래서 고맙습니다, 사장님.” 하면서 추가로 복분자주와 소주를 갖다 놓고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니까.

그러다가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었어. 다른 테이블에서 생맥주잔들을 부비며 뭐라 열심히 속삭이던 남녀도 가 버리고, 나와 그 자식만 가게에 남게 됐지. 다른 날이면 손님이 한 팀 정도는 들어오기도 하는 시간대인데 전혀 그런 기미도 없는 거야. 그래서 슬슬 겁이 나더라니까. 그 자식이 소주를 세 병째 주문하면서 복분자주 한 병 더 하겠수?”하고 내 의사를 물었을 때 사양하고 일어날 수밖에. 아무래도 그 자식 하는 수작이, 내가 더 합석하고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어. 내 자리, 주방 자리야 항상 일거리가 있지 않니? 안주거리를 점검해야지, 가스기기 주변을 소제해 놓아야지, 술잔들을 물통에 담가서 하나하나 씻어 놓아야지…… 장사 준비할 게 늘 있잖니?

그러면서 그 자식의 눈치를 보는데 그 자식이 빈 술병들을 늘어놓은 채로 뭘 궁리하는 표정 같더라니까. 마음 같아서는 문 닫을 시간이니까 계산 부탁 합니다.’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세 시간 가까이 합석했는데 매정하게 그러기는 좀 뭣했지. 그래서 저 자식이 저러다가 졸리면 알아서 일어서겠지 하는 기대심으로 설거지를 하면서 기다렸지. 그러다가 두 시를 넘어서 세 시가 돼가는 거야. 내가 보통 가게 문을 닫고 귀가하는 시간인 거지.

그런데 그 자식이 게슴츠레해진 눈길을 내 쪽으로 던지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게, 아무래도 내가 문 닫고 갈 때 따라붙으려는 속셈 같더라고. 내가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해 본 줄 아니? 안 되겠더라고, 마침내 내가 한 마디 했지. “사장님, 지금 문 닫고 갈 건데요.”

그랬더니 그 자식이 뭐라고 한 줄 아니? 이러더라고. “여기 복분자주 한 병 하고…… 제일 비싼 안주 하나 더!”라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아니에요, 저는 술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했지. 그랬더니 이러더라니까. “내가 복분자주를 마시려는데 무슨 소리야?”

그래서 내가 아예 음악까지 끄고 나서 말했어. “복분자주 다 떨어졌어요. 이제 문 닫고 나갈 겁니다.” 했지. 음악도 끄니까 숨소리까지 들리는 판이 되었는데 그 자식이 부스럭거리며 지갑을 품에서 꺼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여봐, 목욕 값 넉넉히 줄 테니까 나하고 같이 나가면 안 되나?”하는 거지. 그렇게 그 놈의 새끼가 늑대본성을 드러내더라니까. 대꾸도 않고 가게 안의 전등들을 안쪽에서부터 끄기 시작했는데 그 자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오더라고. 기겁해서 그 자식을 피해서 후다닥 문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지. 112로 전화해서 경찰차를 부를 수도 있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냐? 조용한 새벽시간에 요란 벅적한 경찰차가 오는 것도 그렇고…… 경찰차가 들락거리기 시작하면 그 가게는 오래가지 못하거든.

밖으로 피하긴 했지만 가게 문을 닫지 못했으니 멀리 갈 수도 없고…… 그러니 우리 가게가 보이는 골목구석에 숨었는데 그 자식이 비틀거리며 나를 잡겠다고 가까운 골목언저리부터 뒤지는 거야. 그 자식이 우리 가게 오기 전부터 단단히 무슨 결심을 하고 온 게 분명했어. 모르긴 해도 우리 남편에 대한 조사까지 마치고는 남편이 산재병원에 십 년째 있는 여자라니, 까짓 거 생과부나 다름없구먼.’ 하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야. 내가 서러울 때가 이런 때지.

그 자식이 긴 골목의 구석구석, 전봇대 뒤라든가 슈퍼마켓 집 바깥의 하드상자 뒤편 같은 데를 하나하나 뒤지면서 오더라고. 하는 수 없이 숨었던 남의 집 대문 앞 후미진 데를 떠나서 골목을 한 바퀴 돌았는데…… 어쩜 좋니? 그 자식이 골목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내 뒤를 쫓는 거야. 가게 문도 못 채웠으니 골목을 벗어날 수도 없고 시간은 새벽 네 시로 되어가고…… 늦어도 그 시간에는 들어가야 우리 집 애들 아침상이라도 차려놓고 늦은 잠을 한잠 잘 수 있잖니? 애들이 다 컸어도 아직도 내가 아침상을 차려놓아야 밥 먹고 학교들 간다니까.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데…… 웬일이야, 그분이 큰길가에 서 있더라고! 그분이 누구냐고? 내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줄게. 아주 점잖은 분이란 것만 우선 말할게.

그분한테 체면 불구하고 다가갔지. 컴컴한 골목에서 내가 나타나니까 그분이 펄쩍 놀라더라고. 슬리퍼를 신고 있다가 그만 한 쪽을 발에서 놓치더라니까.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어. “선생님, 저 아시죠?” 그랬더니 그분은 큰길의 가로등 빛을 이용해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그래서 부탁했지. “지금 나쁜 자식이 저를 어떻게 하려고 쫓아오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남편인 것처럼 제 옆에만 서 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자식이 그 때 다가왔어. 느닷없이 내 옆에 어떤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자식도 놀라, 대여섯 걸음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라고. 내가 말했어. “내가 늦으니까 우리 남편이 걱정돼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나를 바래다주지 않아도 됩니다. 계산이나 하고 가세요. 오만 육천 원입니다.”

그 자식이 지갑을 꺼내더니 기가 꺾인 소리로 묻더라고. “여기서 돈 드리나?”

나는 가까이도 가기 싫어서 그냥 문 안에 놓고 가세요.” 했지. 키도 작은 자식이 기가 꺾이니까 더 작아 보이더구나. 그런 꼴로 그 자식이 사라진 뒤 나는 그분을 모시고 가게로 다시 들어갔지. 그 자식이 문 안 바닥에 놓고 간 돈을 세어 보니까 오만원이더라고. 육천 원을 덜 낸 거야. 정말 나쁜 자식이지.

그분한테 앉으시라고 해 놓고 생맥주 한 잔을 만들어 드리려 했더니 이러시는 거야. “아니 마담, 새벽부터 무슨 술은?” 웃으면서 하는 말씀에 나는 당황해서 그럼 뭘 드릴까요?”했더니 그냥 냉수나 한 컵 주쇼.”하는 거였지. 그래서 냉수 한 컵을 갖다 드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왜 그리 쏟아지던지, 나도 모르게 잠시 흐느꼈단다. 얼마나 서러운 내 팔자냐 말이다.

그분이 내가 눈물을 훔치고 나니까 말씀하더라고. “늙어서 새벽잠이 짧아지는지라 오늘도 꼭두새벽에 깨어나는 바람에 다시 잘 수도 없고 해서 옷을 입고 집을 나와 마냥 걷다보니까 이 동네까지 온 거라고. 그러면서 어찌 됐건 자기가 곤경에 처한 마담한테 도움을 주었다면 기쁜 일이라 덧붙였지.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말씀을 길게 드릴 수도 없고 해서 선생님, 오늘 저녁에 한 번 들러주세요. 제가 아까 신세진 것을 갚고 싶거든요.”했지. 그랬더니 그분은 , 나는 그냥 마담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무슨 신세는…….”하면서 나가시더라고.

정말 좋은 분이지?

아무래도 어디 대학교 교수가 아닌가 싶어. 나이는 우리보다 서너 살쯤 위가 아닐까? 가끔씩 우리 가게에 들러서 말없이 생맥주 한 잔을 들으면서 음악을 듣다가 가곤 하시지. 생김새는 그냥 순하게 생겼어. 글쎄, 교수로써 좀 늙은 분 얼굴을 생각하면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 자식 이야기 하느라고 정작 그분 이야기를 조금밖에 못했는데…… 이상하게 내 가슴이 뛴다니까? 그분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인데도 말이야. 새벽에 내 옆에 남편인 척 서 계실 때에는 내 옆구리가 따듯하고……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 있지?

나도 미쳤나 봐, 멀쩡한 남편을 두고 이런 말을 하니 말이다. 뭐라고? 내가 연애한다 해도 뭐라 나무랄 사람 하나 없을 거란 말이지? 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는 그냥 솔직한 심정을 너한테만 말하고 싶었던 거야.

얘도 참…… 내가 다시 전화할 게. 오늘 저녁 때 그분이 오면 어떤 분인지 여쭈어 보고 다시 너한테 전화할게. 그럼 이만 끊어. 그래그래, 지금 오후 네 시이니까 부지런히 화장하고 가게 나갈 채비를 해야지.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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