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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이 툭하면 연구과장을 교장실로 불러 십 분 가까이 야단을 친다. 야단치는 내용은 우리 학교 1학년 학생들의 이 달 모의고사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 ‘3학년뿐만 아니라 2학년도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연장시켜야 하지 않느냐!’ ‘보충수업 때 교재연구도 없이 그냥 교실에 들어가 대충 시간을 때우는 선생이 있다는데 연구과장은 알고 있는냐!’‘시내에 있는 학교들이 1교시 수업을 하기 전에 한 시간을 자습한다는데 우리 학교에서도 시도해볼 만하지 않냐!’ 등이다.

연구과 문서담당으로서 연구과장을 모시고 있는 김선생이 보기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교장선생의 행동이다. 해마다 주민들이 대도시로 이사 가는 바람에 이 학교의 학생들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어서 과연 십년 후에도 이 학교가 존속될까?’ 걱정 많은 교무실 분위기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재학생 수가 웬만해야 모의고사 성적 부진도 나무랄 수 있고 1,2학년 야간자습 시간도 더 늘릴 수 있고 0교시 자습도 추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재작년만 해도 학년 당 학습 수가 넷이었는데 올해는 셋으로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교사 정원도 감축돼 올봄 정기인사 때에는 여러 명이 본의 아니게 다른 지역 학교로 전근해야 했다.

이런 침울한 학교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단만 치는 교장선생도 딱하지만…… 김선생이 보기에는 그저 야단맞는 게 당신의 숙명인 듯 얼굴빛이 벌게진 채 침묵하며 지내는 연구과장이 더 딱했다.

그래서 김선생은 오늘 날을 잡았다. 오후 5 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연구과장 책상에 이런 쪽지를 남긴 것이다. ‘과장님. 제가 오늘 저녁식사를 내겠습니다. 보충수업 2교시가 끝나는 대로 학교 앞 중국집으로 오세요. 참석자는 저와 과장님, 단 둘입니다.’

김선생은 중국집에서 할 긴 말을 머릿속으로 준비해두었다. 이런 내용이다. ‘아니, 과장님. 교장선생님이 지금 어떤 처지입니까? 정년퇴직이 여섯 달밖에 안 남았잖아요? 사실상 힘이 다 빠진 교장선생님인데 왜 과장님이 괜한 야단을 맞고 계십니까? 한 번 대들어보세요. 지금 학교에 남은 학생들은 이 학교가 좋아서 남은 게 아니라 도시로 이사 가지 못하는 가정 형편 때문에 남은 겁니다. 그런 학생들 갖고 더 이상 뭘 어떡하란 말입니까? 하면서 말입니다. 제 생각에, 교장선생님이 생각지도 못한 과장님의 반발에 놀라서 그간의 일들을 사과하며 싹싹 빌 겁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안 그렇겠다고 약속까지 할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랬음에도 교장선생님이 야단을 계속 친다면 한 번 이래 보세요. , 오늘 날짜로 연구과장직을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고는 휭 하니 교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학교가 발칵 뒤집힐 텐데 문제는 지금 과장님 말고 연구과장을 할 사람이 딱히 없거든요. 그 동안 과장님이 교장선생한테 야단을 맞아도 중간에서 눈치만 보며 지내던 교감선생까지 기겁해서 난리일 겁니다.’

    

학교 앞 중국집의 한 작은 방에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해마다 학생 수가 줄어들어 교사들까지 줄어들어야 하는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의 연구과장 자리만큼 기운도 나지 않고 고달프기만 한 자리가 또 어디 있을까. 연구과장은 저녁식사 후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야간자습 시작을 지켜봐야 한다며, 김선생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그러니까, 요건만 말해 줘요. 비싼 탕수육을 시켰다니 고마운데 사실 내가 오늘도 바쁘거든.”

솔직히 김선생 눈에는 딱할 뿐만 아니라 모자라 보이는 상사였다. 마음 같아서는 됐습니다. 그냥 식사만 하고 나가죠.’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모처럼의 시간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과장님. 제가 긴 말을 준비했지만 바쁘시다니까 줄여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과장님. 왜 교장선생한테 쓸데없이 야단맞습니까? 한 번 대들어보세요. 정년이 반밖에 안 남은 교장선생이 뭐가 무섭습니까?”

그 말에 연구과장 얼굴빛이 벌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허허허웃더니, 마침 종업원이 탕수육 담긴 접시를 상 위에 갖다 놓자 고량주 한 병을 주문까지 한다. 의외의 상황에 놀란 김선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야 한 잔 마시고 퇴근하면 되지만 과장님은 다시 학교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고량주씩이나 마셔도 됩니까?”

괜찮네. 그러잖아도 자네가, 내가 늘 야단맞고 지내는 걸 무척 속상해하는 것 같아서 한 번은 해명하려 했어. 정년퇴직이 눈앞에 다가온 교장선생님이 왜 나를 수시로 호출해 야단을 치시겠나? 그건 우리 학교 애들 상황을 잘 몰라서라기보다는 그분이 마음이 외롭고 쓸쓸해서야. 자네 생각 좀 해 보게. 사십 년 가까이 봉직한 곳을 얼마 안 돼 떠나는 처지라면 그 심정이 얼마나 스산할지! 더구나 교장실이라는 게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늘 혼자 지내는 곳이 아닌가. 그러니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교사들을 감독하느라 바쁜 교감 선생을 부를 수도 없고, 교무과장은 중요한 교무 일을 맡은 분이니 또 그렇고 …… 그래서 비교적 학교 업무에 큰 지장 없는 나를 부르시는 거라고. 모의고사 성적이 부진하다느니, 보충수업이 어떻다느니, 야간자습 시간을 늘리라느니 하는 말씀들은 그저 대화 나누기 위한 핑계거리인 거지. 이제 알겠나? 나는 그럴 때마다 야단 잘 맞는 부하직원으로서 얼굴만 벌게지면 되는 거야. 생각해 봐. 인생이 환갑 넘어 낙이 별로 없을 테네 얼마나 가여운 교장선생님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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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가 차 뒤쪽에서 났다. K가 실내 후시경을 보자, 웬 교통경찰차가 사이렌에 경광등까지 번쩍이며 차 뒤로 따라붙고 있었다. K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를 세웠다. 교통경찰차도 따라서더니 경찰관이 한 명 내렸다. K의 차 열린 운전석 창 가까이 와 말했다.

벌칙금을 내셔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서류에 뭘 적는다. K는 어이가 없었다. 결코 과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지 한 장 떼이면 몇 만 원인데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제가 뭘 어겼습니까?”

운전 중 전방주시태만입니다.”

아니, 조심해서 천천히 달렸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서 K는 생각했다.‘이건 어째 이상하다. 그렇다, 꿈을 꾸는 것 같은데 빨리 깨자.’하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자신이 이부자리에 누워있었다.

 

 

노인이 된 K는 새벽 4시경에 잠이 깬다. 그러면 컴퓨터를 켜서 하룻밤 새 뉴스도 보고 그러다가 6시경에 혼자 주방에서 아침밥을 먹는다. 곤하게 자는 아내를 깨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식후 30분에 혈압약과 통풍약을 먹는다. 전에, 약봉지를 달고 사는 노인들을 참 한심하게 여겼는데 K가 바로 그런 노인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K는 약 기운에다가 식곤증이 복합적으로 밀려오면서 다시 아침잠을 30여 분 잔다. 오늘은 그 순간에 교통경찰한테 혼나는 꿈을 꾸다 깬 것이다. 꿈이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참 어이없다는 생각도 든다. 꿈속에서이라는 걸 의식했으니 말이다. 어릴 적은 물론이고 한 10년 전만 해도 K가 자면서 꾸는 꿈은 조금도 의심 없는 완전한 꿈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꿈과 현실이 경계를 잃어가고 있다.

모처럼 꾸는 꿈조차 순수함을 잃다니!’

K는 실망감에 흰 눈 내리는 거실 창밖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삭막하던 동네 풍경이 동화마을처럼 아름답게 바뀐다는 생각도 못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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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강의실 밖에서 쉬다가, 시험지의 답들을 적지 않았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이름 석 자만 적고 휭 하니 나와 버린 것이다. 이걸 어쩌나? 시험지가 모르는 것 천지라도 성의를 보이는 차원에서 아무 거라도 답란에 적고 나왔어야 되지 않나? 이대로 있다가는 과락(科落)이 될 텐데, 다시 시험장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아아 이 절망감.

할 때 아무래도 현실 같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깼다. K는 자기 집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 주방에서 무슨 요리를 하는지 아내가 슬리퍼 끌며 바삐 오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K는 안도했다. 노후 특징 중 하나가 꼭두새벽에 잠깨는 일이다. 오늘도 새벽 네 시경에 잠이 깨서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켠 뒤 인터넷 하다가 다시 잠잤는데 그렇듯 시험악몽에 시달렸던 것이다.

시험.

K가 직장(교직)생활 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일 중 하나가 방학 때 대학교로 강습 가서 치르는 시험이었다. 담당 교수가책이나 노트를 펴 놓고 참조해가며 답을 적어도 좋습니다. 단지, 강습을 받았다는 증빙자료로써 답지를 걷는 것이니까요.’하는 부담 없는 시험도 있지만 대개는 승진점수와 결부되는 긴장된 시험이었다. 그럴 때 K승진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애써 편한 낯으로 시험을 치르지만 속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냐면 시험을 열심히 치르는 동료들이 주위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동료들이 훗날 K보다 교장 교감이 먼저 돼 평교사로 남은 K를 감독하고 관리할 듯싶었다. 그런 엿 같은 미래현실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K3학년 담임으로 있는 학교에서 정기고사를 치를 적마다 그 스트레스에 영양실조 걸린 것처럼 얼굴이 푸석푸석한 학생들이 많은데입장이 바뀌어 K 자신이 바로 그런 학생들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며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시험을 치렀던 거다! 순간 K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뇌까렸다.

그 놈의 시험!”

주방의 아내가 무엇을 썰다가, 남편의 외마디 소리에 놀라서 큰 소리로 물었다.

뭐라고요?”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렇게 답한 뒤 K는 이불을 천천히 개면서 모처럼 퇴직 후 행복감을 만끽했다. 비록 현직 때 받는 봉급의 절반밖에 안 되는 연금으로 살지만 그 놈의 시험을 치를 일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시험. 얼마나 성가신 것인지 모처럼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 대통령 트럼프마저 이렇게 외쳤을까.

북은 미국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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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1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은 미국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 빵 터지는 웃음에 깊은 의미가...꽁트의 묘미를 한껏 느꼈습니다.

무심 2017-11-27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험‘만큼 사람을 괴롭히는 게 있을까요? 얼마나 지겨운 것인지, 퇴직한 지 10년 넘은 무심이 얼마 전 잠자다가 그 꿈을 다 꾸고
놀라서 깼단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시험을 즐기는 사람도 드물게 있더라고요. 무심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
 

 

K의 우려가 들어맞았다. 아내가 살인진드기에 물린 것이다.

 

뭐에 집착하면 끝을 보는 아내의 성질머리가 자초한 일이다. K는 진작부터 아내한테살인진드기를 경고했다. TV에서살인진드기에 물려 사망한 농부뉴스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보. 이제 그만 풀 뽑아. 밭에 난 풀도 아니고 밭 가장자리에 난 풀을 뭐하러 뽑는 거야. 그러다가, 풀에 있는 살인진드기에 물리면 큰일 난다고!”

당신도 참. 이 풀들이 기승을 부려 밭의 작물들까지 넘보려하는데 어떻게 내버려 두냐고? 그리고 내가 긴소매남방 차림에 장화 신고 면장갑까지 꼈는데 무슨 진드기 걱정이야?”

아내는 그러면서 쉬지도 않고 밭 가장자리의 풀들을 뽑았다. 하는 수 없이, 그런 아내를 따라 함께 풀을 뽑아야 하지만 K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혈압 환자라 땡볕에 혈압이 오를까 겁나는 데다가, 아무래도 무성한 풀숲에 살인진드기가 틀림없이 있을 거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어정거리고 서 있는 남편의 처지를 아내가 파악하고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당신은 그냥 나무 그늘에서 쉬어요.”

얼마나 고마운 아내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한 마디가 K를 분노케 했다.

겁은 많아서.”

, 어쩌고 저째?!’K는 빽 소리 지르려다가 참았다. 노후로 접어들면서 아내 부아를 돋우었다가는 후유중이 만만치 않다는 걸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우선 밥상에 오르는 반찬들부터 한심한 상태가 된다. ‘참자.’마음먹으며 K는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풀 뽑는 아내를 다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랬는데 사흘 후 아내는 결국 살인진드기에 물리고 만 거다.

 

그 놈이 아내의 등 한복판에서 발견되기는, 밭에서 집으로 돌아온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K보다 먼저 땀에 젖은 몸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가 얼마 안 돼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와, 화장지로 잡은 무언가를 내보이며 이랬다.

여보, 이거 아무래도 진드기 같아. 당신이 확인해 줘.”

K는 떨리는 가슴으로 돋보기안경을 찾아 쓴 뒤, 아내가 건넨 화장지로 잡은 무엇을 살폈다. 둥글고 납작한 몸체에 좌우 네 개씩 도합 여덟 개의 작은 발들. 진드기가 맞았다. 좁쌀 두 배쯤 되는 크기로 납작하게 죽어 있었다. 아내가 샤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알몸으로 서서 말했다.

몸을 물에 씻는데 등 한가운데에 뭔가 붙어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손을 뒤로 해서 화장지로 그것을 훔쳤더니만

당신 등 좀 봐야겠다.”

과연 아내 등허리에 좁쌀만 한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그 놈이 피를 빨다가 만 자국이었다.

어때? 여기가 아프거나 가렵거나 해?”

잘 모르겠어.”

K는 즉시 스마트폰으로 살인진드기를 검색했다. 그 결과 몇 가지를 알았다.

첫째, ‘살인진드기란 중증 열성 혈소판 증후군(SFTS)이란 바이러스를 보유한 진드기다. 이런 진드기는 0.4%, 1000 마리 당 4 마리 정도이다.

둘째, 살인진드기에 피가 빨리는 과정에서 SFTS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1주에서 2주의 잠복기를 거쳐 발열이나, 구토, 설사, 복통, 피로감, 림프샘 부기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주로 노약자가 당한다.

셋째, 치료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K는 인터넷 검색 결과를 요약해서 아내한테 전하며 말했다.

살인진드기일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데다가 주로 노약자가 당한다니까 큰 걱정은 안 되는데어떡할까?”

그 뜻은 이제라도 병원에 가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일과시간이 지났으므로 개인병원은 안 될 것 같고 종합병원의 응급실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치료제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응급실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응급실 담당은 경험이 일천한 인턴의사가 대부분이라는데 괜히 엉뚱한 응급조치를 할지도 모른다. 2차 의료사고라는 게 나는 거다. K는 짧은 순간이지만 머릿속으로 길고 복잡한 생각들에 휘말렸다. 그런데 아내가 다행히도 남편의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한 마디로 처리해주었다.

괜찮을 것 같아.”

하긴 환갑 나이가 된 아내이지만 건강에 관한 한 문제가 없는 탄탄한 신체의 소유자다. 소화불량이 잦은 데다 고혈압 환자인 남편보다 훨씬 건강하다. K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치료제도 아직 없다니 일단 지켜보자고. 물론 별일이야 없겠지만 말이야.”

무더운 날씨라 부부는 각방을 쓴다. 아내 혼자 안방에서 자고 K는 거실에서 잔다. 그 날 밤 K는 거실 이부자리에 누워만일 아내가 잘못되면이란 불길한 가정 아래 이 생각 저 생각에 엎치락뒤치락거렸다. ‘며느리가 손주를 낳으면 밭농사는 나한테 맡기고 자기는 손주 보는 일로 노후를 보내겠다 했는데’‘아들은 장가가 살지만,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딸애는 아직 시집가지 못했는데’‘그나저나 당장 빨래며 밥상 차리는 일은 어떡하지?’

그러다가 K는 황당해졌다. 아내가 자는 안방 쪽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드르렁 드르르렁, 드렁드렁 드르렁!”

 

한 달이 지났다.

뭔가에 집착하면 끝을 보는 아내의 성질머리라니. 500평 밭 가의 그 무성한 풀들을 모조리 뽑아놓고야 만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풀을 뽑아서 맨흙이 드러난 자리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화초들을 심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시사철 꽃들이 피는 아름다운 농장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실천이다.

여보!”

아내가 화초를 심다 말고 K를 불렀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던 K는 응답 대신 아내를 바라보았다. 따가운 땡볕 아래 아내가 오른손에는 호미를, 왼손에는 화초를 든 채 이어서 말했다. 정확히는 명령했다.

당신도 같이 화초를 심어야겠어. 오늘 중으로 심어야 화초가 살거든.”

K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고혈압 환자인 거 잊었어? 땡볕이라 안 돼!”

차 트렁크에 내 양산 하나 있어. 그거 쓰고 일해!”

K는 순간 속으로살인진드기들이 저런 악녀를 놔두고 뭐하는 거야?’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아니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아암 그렇고말고.’반성하며 주차돼 있는 밭 가장자리로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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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물들에 관심도 많다. 잠시도 쉬지 않고 둘러보는 모습인 거다. 그러다가 문득 숨 가쁘게 내달린다. 엄청난 거리를 단숨에 직선으로 내달리는 모습은 고속열차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놈을 나는 지켜보다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위 사물들에 관심도 많고 몸동작도 민첩한 놈을 방치했다가는 얼마 안 가 우리 집안에 갖가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벌써 나의 심상치 않은 눈길을 눈치 챘는지 하던 동작도 멈추고 숨죽이며 있는 놈.

놈과 나와의 거리는 1미터쯤. 괜히, 놈을 처치할 무기를 다른 데에서 찾으려다가는 그 순간 놓칠지 모른다. 아니, 놓칠 게 확실하다. 나는 손길 닿는 데 있는 슬리퍼 한 짝을 조용히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죽은 듯 연기하며 욕조 바닥에 있는 놈을 냅다 갈겼다.

단번에 놈이 피 터져 죽어버렸다.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지만 워낙 생명력이 강한 데다가 간교하기까지 한 놈이기에 다시 한 번 더 슬리퍼로 냅다 갈겼다. 확인사살이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에 해당되는 놈이었다. 주위 사물에 호기심이 많은 거며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체력이며……. 그런 놈이 무사히 자라나 성체가 되면 엄청난 번식력으로 수많은 후손들을 사방에 퍼뜨리며 우리 집안을 쓰레기장처럼 만들 것이다.

 

오늘 나는 욕조 바닥에서 한창 청춘인작은 바퀴벌레 새끼 한 마리를 때려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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