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차 이 선배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알게 됐다. 이 선배는 한 때 벽산그릅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 외에는 오로지 소설만 쓰는 생활이었다.

전업 작가.

극소수 인기작가 이외에는 절대로 생업이 될 수 없는 처지. 그래서일까 이 선배는 페북의 프로필에 이런 소개를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1969년 이후 극빈의 소설가

가족까지 거느린 가장으로서 얼마나 고달픈 삶일까. 숱하게 원고지 앞에서 고뇌하며 보냈을 불면의 밤. 이런 짐작은 내 지난 시절 아버지의 삶을 절절이 겪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결과 아버지는 내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 나는 학창시절의 유일한 낭만인 문학을 접고서 직장(교직)에 나갈 태세에 들어갔다.

 

7 2일에 서울 다녀온 뒤 한동안 이 선배와 나 사이에는 우리 아버지 얘기가 카톡으로 오갔다. 다음은 그 중 일부다.

 

 : 1992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에 종중관련 문제로 장남인 저의 도장을 받으려고 시골의 제 직장(○○고등학교)으로 서류를 우편으로 보냈었지요. 그런데 우편봉투의 발송인과 수신인을 잘못 적어 다시 고쳐 적었더라고요. 아버지가 영락한 처지이지만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인데 이럴 수가 있나?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그 즈음부터 뇌졸중의 기미가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이도행 선배 :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높은 도수의 알코올도 한 원인이라네.

 : 돌아가신 날이 제헌절 날인 717일입니다. 전 날 친구 분들과 막걸리 모임이 있었는데 그 날 거북한 속을 푸느라 그러셨는지 땡볕 아래 시내 거리를 열심히 걷다가 하필 ○○병원(할아버지가 납북되기 전의 집 터) 앞에서 쓰러지신 거죠. 평소에 혈압약을 드셨어요. 현재 저도 혈압약을 복용하는 신세라 술을 끊고 건강에 유의합니다.

이도행 선배 : 내 선친도 1970 717일 심근경색으로 운명하셨다네. 당시 난 임진강과 감악산에 주둔했던 25사단 71연대 근무중대 병기과 탄약계 사수였지. 연대장 인수인계 문제로 관보를 받고도 본인에게 통보하지 않다가 삼우재 전날에야 휴가증을 내주는 바람에 수류탄 연병장에 두 발 터뜨리고 열흘 휴가 뒤 귀대해서 입창 조치됐다고.

 : 그것도 참!

이도행 선배: 선친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 제가 결혼할 때, 가지고 계셨던 어느 화백의 한국화 한 점을 선물하셨지요. 그 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도행 선배: 나중에 만나면 듣고픈 얘기가 많네.

 

이 선배 내외분이 다시 춘천에 오기는 7 12일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선배는 춘고 100년사 편찬 일로 모교(春高)에 몇 달에 한 번씩은 다녀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7 12일은 하필 초복 날이었다. 나는 그 사실도 모를 정도로 장편소설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 2월 교직을 명퇴한 이유를 더 늦기 전에 소설 쓰고 싶어서라고 주위에 공언까지 한 만큼 일단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아내조차 말붙이지 못한다. 신경이 칼처럼 곤두서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이 선배가 그 날 오전 10시쯤 내게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했다.

방금 상춘했네. 그래, 어디서 만날까?”

그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제가 지금 장편 쓰느라 바쁘거든요! 나중에 만나면 안 될까요?”

 그러지.”

정말 돼먹지 못한 후배로 오해 받을 짓이었다. 하필 복날이었으니 마치 보신탕 한 그릇 대접하기 귀찮아 저지른 짓 같았다. 우리 선친과의 인연까지 더해져 절대 이 선배한테 그래서는 안 될 언동이었다.

이를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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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춘고동창회 사무실에서 나는, 전 날 이 선배가 당부한 대로 갖고 간 책 두 권(‘숨죽이는 갈대밭‘K의 고개’)을 증정했다. 임원 분들이 차를 대접하며 다음 번 재경동창회보에 실을, 춘천을 소재로 한 수필을 한 편 써 보내 달라부탁했다. 용무를 떠나 우리 모두는 春高 선후배 간이다. 동문은 고향보다 객지에서 더 정겹다. 30여 분 환담을 나누고는 이 선배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처럼 사람 많고 건물 많고 차들 많은 데가 또 어디 있던가. 나는 탁한 공기에 힘들었다. 어서 공기 맑은 춘천으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수시로 지하로 내려가 타야 하는 전철의 번잡함이란.

이 선배와 헤어져 청량리역으로 갔다. 여기서부터는 지상이다. 춘천 가는 전철에 올랐다.

건물과 차들 대신 짙푸른 녹음이 늘어가는, 춘천행 전철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김유정 문인비

1968년경 아버지는 예총 강원도도지부 사무국장이었다. 인구 10만의 지방도시 춘천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소설 동백꽃으로 유명한 30년대 작가 김유정을 떠올렸다. 향토 언론사 강원일보사의 협조를 얻어 김유정이 실레마을을 떠나 상경하기 전 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다는 강가(지금의 의암호 호숫가)’에 김유정 문인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에 따른, 춘천 홍보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문제는 비 건립에 드는 자금이었다. 강원일보사는 약속한 자금을 댔지만 예총 쪽은 잘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가 총대를 멨다. 거두리에 있는 야산 (625 전란 때 납북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헐값에 판 것이다. 그 돈으로 김유정 문인비 건립 기금을 충당함과 동시에 현대문학사 발간으로 김유정 전집까지 냈고 남은 돈 몇 푼으로는 집에 전화기 한 대를 놓았다.

60년대 말만 해도 춘천에 전화기 있는 집은 얼마 안 됐다.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예총 사무국장 집에 전화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걸까? 당시 남들은 ‘30평 단독주택에 전화까지 놓은 집이라며 우리 집을 부러워했지만 실상은 전세 든 집이었으며 매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예총 일은 무보수 봉사활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김유정 문인비는 세워졌다. 예총 사무국장으로서 아버지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문제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어려운 생활형편.

김유정 전집이 잘 팔리면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집은 팔리지 않았다. ‘선대가 남긴 소중한 야산까지 팔았는데도 집에 생활비 한 푼 가져오지 못하는 한심한 가장이 우리 아버지였다. 가족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면서, 통금 사이렌이 불 즈음에야 술에 취해 혼자 대문(그 낡은 철문이 한밤중에 내던 음산한 소리라니.)을 열고 귀가하던 아버지. 5남매나 되는 자식들과 어머니까지 6명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체 했다.

 

 

아버지는 되는 일도 없고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외로움을, 한참 후배(이도행 선배)와 막걸리를 마시며 달랬던 걸까? 1970년 여름에 내가 강대 1학년 생으로 동급생 박○○ 양과 조양인쇄소에서 교지 편집 일을 할 때, ‘이도행이란 독특한 이름을 들었는데도 금시초문이었던 까닭이 드러났다. 당시 아버지와 나(장남이다)는 부자지간이지만 몇 년째 일체 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나 김유정 추모제가 열리는 문학촌에서 처음 만난 사이일 수밖에.

 

https://blog.naver.com/ilovehills/221481803029

http://www.kimyouje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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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 선배한테 직접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선배님의 작품 중 무채도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거든요. 동기인 한수산 씨의 부초, 이외수 씨의 꿈꾸는 식물과 견줘도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빛을 보지 못했습니까?”

이 선배가 착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운이 없는 게지.”

 

모름지기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보이는 것이다. 만일 서로의 작품 수준이 실망스러웠다면 이 선배와 나 사이의 친분은 생겨나지 않았을 게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이 선배의 뛰어난 작품들이 제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이 선배 또한 같은 생각에서일까 내게 발표지면을 소개해 주고 싶은 후배로 여겼다.

그 결과 열흘쯤 지난 72, 우리는 서울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부근에서 정각 10시에 만났다. 지상으로 나와 부근에 있는 모 문예잡지사의 주간을 만나 뵈었고, 이어서 2차로 재경춘고동창회사무실로 가려고 다시 지하로 내려가 전철을 탔다. 재경춘고동창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쟁쟁한 동문들의 연락처나 다름없는 곳이다.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춘천의 김유정 문인비얘기에 이르렀는데 이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 비(), 내가 잘 알던 선배님이 세운 비이거든.”

그 말에 놀란 내가 대꾸했다.

그 비는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세웠는데?”

뭐라고? 그럼 자네 선친 함자가?”

내 입에서 선친 이름이 나오자 이 선배가 놀라서 내 손을 쥐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절그덕 절그덕전철 가는 소리만 존재했다. 이 선배가 이윽고 감회에 젖어 말했다.

자네가 그 선배님 아들이었다니!나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대견해하셨는지 몰라. 막걸리 집에서 많은 얘기를 하시곤 했지. 당시 춘천의 몇 안 되는 낭만파 예술인이셨다고. 1969년에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면서 춘천에 돌아왔지만 집안이 그 사이에 서울로 이사 간 바람에 따라가느라고 미처 못 뵙고 헤어진 건데그 후 세월이 흘러 선배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만 듣게 돼유족이라도 만났으면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듣겠네.”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이 이 선배와 나를 맞았다. 재경동창회 사무실을 찾아 앞서 걸어가는 이 선배를 뒤따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소설(픽션)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구나. 소설은 현실을 가공해서 나오는 거라고 말들 하는데이렇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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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춘천교대는 2년제로서 학비 대부분을 국가에서 지원해줬단다. 특히 남학생들은 군사훈련도 병행하여 군 복무가 면제되는 특전까지 있었다고. 아무리 그런 이점이 있었다 해도 훗날의 소설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입학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해 못 할 일은, 입학들은 했지만 정작 졸업한 사람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최종남만 졸업했을 뿐 그 외는 몇 년씩 다니다가 자퇴하거나 다른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 떠나거나 한 것이다. (나는 기회가 되면 그에 얽힌 사연들을 모아 작품으로 써 볼까 한다.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 같다.)

 

이도행 선배가 다시 춘천에 내려온 것은 산하가 온통 푸르른 6 22일이다. 아내 분과 함께 온 것이다. 거주지인 수원이 여기 춘천보다 몇 배로 큰 도시임에도 상춘(上春)했다는 표현을 하였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사용하는 상경(上京)’이란 말에 빗대 춘천에 온 것을 상춘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선배가 얼마나 춘천을 좋아하는지 짐작 되는 표현이다. 이 선배의 춘천 사랑은 그 날 내게 마침내(?) 선사한 책 두 권의 제목들에도 여실하다.

봄내춘천 그리움

봄내춘천 옛사랑

이 선배가 춘천에서 살았던 기간은 11(19581969)밖에 안 되지만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음에!

그 날 나는 선사받은 두 권의 책을 이 선배와 헤어진 뒤 집안에 틀어박혀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그리고 소감을 문자와 카톡으로 연실 전했다.

중편소설 무채도가 압권입니다. 추운 날 시신 태우는 화덕에서 잠을 자는 양중사. 선배님의 작품들 중 대표작이라 여깁니다. 연숙, 고모부, 말대가리 등 개성 강한 인물들. 한동안 제 뇌리 속에 살아서 숨 쉴 듯싶습니다. 두 권의 책을 완독함으로써 소설가 이도행의 세계를 깨닫게 됐습니다. 모름지기 예술가는 작품으로 존재합니다. 조폭이 칼 솜씨로 존재하듯이. 스님이 불심으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봄내춘천 옛사랑을 방금 다 읽었습니다. ‘달빛 소나타 풀꽃 목숨 하나가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달빛은 금실과 은실로 직조하듯 전개해나간 솜씨가 일품입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문장 가다듬기에 특별한 공을 들인 게 분명합니다. 왜냐면 다른 작품들 문장과 그 느낌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풀꽃은 연숙이란 여인의 비극적 생애가 한반도의 처절한 분단사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수준작이었습니다. 생모인 고모가 왜 굳이 불교식으로 고인의 넋을 달래려고 나섰는지 그 심정이 헤아려집니다. 억겁의 연과 한을 달래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이 정도만 언급하고 다음에 뵀을 때 이어서 하겠습니다.”

문자와 카톡으로 읽고 난 감흥을 전하고 나서 내게 의문이 생겨났다.

, 이런 좋은 작품들(특히 중편 무채도)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까?’

, 다른 동기 소설가들만큼 빛을 보지 못했을까?’

그 때까지만 해도 이 도행 선배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생전에 아끼는 후배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는 물론이고 이도행 선배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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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일은 얼마나 햇살이 따가운지!

후평동의 연당막국수는 따가운 햇살들을 피하려고 마련한 그늘 쉼터 같았다. 이도행 작가, 최종남 작가, ‘강복남 (이도행 작가의 지인)와 나, 이렇게 넷이서 막국수를 먹었다.

선배작가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소중한 자리다.

소주 한 병 시킬까요?”

최종남 작가는 차 운전을 해야 하므로 사양했고 이도행 작가는 술을 끊어서 사양했다. 강복남 씨는 훤한 낮에 마시긴 좀 그렇지하며 사양했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커피라도 마시고 헤어지자 2차로 간 데가 문화예술관 부근 산마루에 있는 클잎정 카페다.

이도행 작가가 내게 말했다.

내 정신이 예전 같지 않네. 책을 준다고 약속해놓고 그냥 왔다니까.”

, 천천히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건 아니지.”

하긴, 3월 김유정 추모제 때 인사를 나눈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첫 작품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수원의 아파트로 보내드렸으므로 미안해할 만도 했다. 강복남 씨(이름이 향토적이라 잊지 않는다.)까지 자리에 와 앉았는데 최종남 작가가 오지 않았다. 주차하느라 시간이 걸린다고 보기에는, 클잎정 카페 주위에 공터가 많아서 이상하게 여겨졌다. 얼마 후 최종남 작가가 숨을 힘들게 쉬어가면서 나타나 나는 속으로 놀랐다.

여기 카페가 높은 데 있으니까 올라오기가 힘들었지 뭐야.”

나중에 알게 됐는데 최종남 작가는 기흉이라는 호흡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 했다. 그래서일까, 안색까지 하얗게 돼 느릿느릿 빈자리에 앉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안스러워할 뿐이었다.

 

그 몇 달 뒤 최종남 작가가 세상을 뜰 줄이야. 전년도에 당신의 작품집 단둥역이 나왔을 때 출판기념회에 참석 못한 후배()를 잊지 않고서, 나중에 전화하여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그 작품집을 선사한 최종남 선배 작가. 고마움을 나는 늘 잊지 못한다.

주위 풍경이 눈 아래 있는, 산마루의 클잎정 카페. 밖에는 따가운 햇살들이 여전해서, 카페는 마치 범람하는 햇살 바다의 배 한 척 같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알게 됐다. 이도행 최종남 이외수 한수산 네 사람의 선배 소설가가 춘천교대 동기라는 걸. 대한민국에 이런 경우가 어디 또 있을까. 시인 최돈선까지 동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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