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시오리쯤 가면 정라진이라는 항구가 나타난다’는 사람들의 말이 나는 믿기지 않았다. 왜냐면 삼척읍내가 고즈넉한 풍경인 게, 억센 뱃사람들이 오갈 항구가 가까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5월 어느 일요일 불현듯 ‘정라진에 한 번 가 보자’는 생각에 나는 그 길로 하숙집을 나섰다. 

동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자 얼마 되지 않아 철교(기차가 다니는 다리)가 나타났고 길은 그 아래로 이어졌다. 계속 걸어가자 노가리 말리는 집들이 나타나더니 정말 통통배들이 정박해 있는 정라진 항구가 눈앞에 영화(映畫)처럼 펼쳐지던 것이다. 통통배 주위로 끼욱끼욱 울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그 순간 ‘선창’이란 유행가가 절로 떠올랐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젖은 백일홍…’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향 춘천은 1000리 먼 곳에 있는데 나는 한 외진 항구에 와 있었다. 밀려드는 향수(鄕愁)에, 부는 비릿한 바닷바람에 머리칼들을 날리며 나는 마냥 서 있었다.

https://youtu.be/hWFGLZuIr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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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사회 시간에 배우지 않았을까?
‘삼척에는 죽서루라는,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몇백 년 된 누각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당저리 박학문 씨 댁의 하숙생활에 적응되자 그 ‘죽서루’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관광’ 같은 단어가 아직은 생경하던 1974년 3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하숙집을 나와 일단 버스 터미널까지 물어서 걸어갔다. 내 상식에 ‘죽서루 같은 유명한 곳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터미널은 삼척읍의 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여러 대의 버스 중 어느 버스도 ‘#죽서루’라는 행선지를 적은 게 없었다!
‘이게 어찌 된 건가?’
‘임원’ ‘근덕’ 북평‘ 등의 행선지나 밝히고 있는 버스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아하, 죽서루는 택시 타고 가야 하는 곳인가 보다는 판단을 내렸다. 빈 택시를 찾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행인한테 물어보았다.
“죽서루에 가려면 어디 가는 버스를 타야 합니까?”
행인이 어리둥절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더니 가까운 길의 어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길로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데….”
그의 말대로 길 어귀로 들어가 조금 걸어가자 세상에, 사진으로만 봤던 죽서루가 눈앞에 있는 게 아닌가. 죽서루는 먼 데 있지 않고 그냥 읍내 한복판에 있었다!
정말 반전(反轉)이었다.
그 후로 내게 ’삼척의 #죽서루‘는 ’전제되어오던 사실이 갑자기 뒤집히는 반전‘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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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춘천에서 자가용차로 두어 시간이면 삼척에 도착하지만 그즈음― 1974년 즈음에는 대중교통으로 하루 종일 걸려야 했다. 실제로는 1박 2일 걸렸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겠다. 

춘천에서 늦은 오후에 경춘선 기차를 타고 서울의 청량리역까지 가는 게 첫걸음이다. 그런 뒤 태백산맥을 넘어간다는 영동선 기차를, 기다렸다 타고서 밤새워 가야 한다. 완행열차인 비둘기호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날이 밝은 아침에 동해안의 북평역에 도착한다. 북평역 주위의 식당에서 아침밥을 사 먹고는 삼척읍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탐으로써 마침내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역(逆)으로 삼척읍에서 춘천으로 가는 것 또한 그런 1박 2일의 장거리 여행을 각오해야 했다. 

그렇기에 방학이나 돼야, 나는 고향 춘천에 갈 수 있었다. 

1000리 길 머나먼 객지의 하숙방에서 외로이 지내는 처지.

처음에는, 외로움뿐이다가 차차 객지 생활에 적응되자 이국정취(異國情趣)를 깨닫게 됐다. 

푸르른 동해바다가 가까이서 철썩이는 삼척읍에 내가 살고 있다는 깨달음!

산으로 둘러싸인 춘천에서만 살다가 온 나로서는 정말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하숙방에서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베갯머리 가에 파도가 와닿는다는 환상에 빠져서… 잠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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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그즈음, 삼척읍 당저리의 하숙집 주인어른 박학문 씨는 철도공무원 하다가 퇴직한 분이었다. 평소에는 별말씀이 없다가 소주라도 한잔 걸치면 하숙생들에게 건네는, 단골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내가 말이여, 젊었을 때에는 기운이 장사였거든. 그런데 장가가면서 깊은 못에 빠지니… 힘이 빠지면서 이 모양 이 꼴로 늙었지 뭐야.”

집안일을 하느라 분주한 아내(하숙집 아주머니)를 깊은 못으로 비유해 던지는 그 우스갯소리에 하숙생들은 킥킥킥 웃곤 했다.

아주머니는 그럴 때마다 동그란 얼굴이 온통 빨개지면서 얼른 부엌으로 숨듯이 들어가버렸다. 그 즈음 박학문 씨 연세가 60대 후반이었던 것 같고 아주머니는 갓 60대였나 보다. 어언 반세기 세월이 흘렀으니 두 분 다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아아 인생무정 세월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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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순으로 교사 발령을 낸 걸까?

내가 발령받은 곳은 고향 춘천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삼척군 관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삼척군 관내에서 삼척읍내의 삼척중학교로 2차 발령을 받은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외수 형과 숱한 밤을 소주 마시며 보낸 내가― 알콜중독자처럼 살던 내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교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1974년 그즈음에는 주소지가 바뀌면 반드시 새 주소지의 이장님을 찾아뵙고 ‘어느 집으로 전입했다’는 확인 도장부터 받아야 했다.

내 하숙집은 삼척읍 당저리에 있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물어물어 찾아간 당저리 이장님은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다. 아까시나무가 많이 들어선 주변 풍경을 보며 나는 이장님께 나를 소개했다.

“박학문 씨 댁에 하숙을 든 이병욱이라 합니다.”

그러자 이장님은 내 직업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긴 박학문 씨 댁은 주로 학교 선생들을 하숙 치는 집이었다.

“그럼, 선생질 하슈?”

하필 선생질이라니. 그냥 선생이라 해도 좋을 텐데.

나는 잠시 얼떨떨했지만 이내 이장님의 질문을 수긍했다.

내가 고향 춘천에서 천 리나 떨어진 삼척까지 짐 꾸려 온 건,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으로는 길바닥에 나앉을 판인 가족들(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고개 수그리며 응답했다,

“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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