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일은 여하튼 사건이다. 비 내리지 않았더라면 별 일 없었을 일상(日常)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편하게 이뤄지던 외출도 비 내리면 불편하게도 우산을 따로 들어야 한다. 물론 우산 없이 그냥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온몸이 빗물에 젖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모습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거나 비루먹은 강아지 꼴이 되거나.

비가 내리면 지붕 위나 마당에 놓고 말리던 고추들도 부리나케 집안으로 들여놓아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태양초 만드는 일을 망친다. 어디 그뿐인가. 하루 벌어먹고 사는 막노동 사람들은 일 나가지 못해 한숨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노래가 있다. “에헤이 에헤이이 에헤이 엥헤이 엥헤야 엥헤이 엥헤야 / 우리가 놀면 놀고 싶어 노나/ 비 쏟아지는 날이 공치는 날이다

광장이나 인근학교 운동장을 빌려 하려던 단체행사는 며칠 뒤로 미루거나 그도 아니면 대폭 축소해서 강당 같은 실내에서 해야 한다. 행사의 낯이 서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림 속 춘천에 비가 내린다. 당장 일상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그렇지만 새삼스레 되살아나는 두려운 기억이 있다. 오래 전 춘천은 수해가 잦았던 도시였다는 사실이다. 장마 비에 도시의 반 가까이가 수해를 입은 적도 있었다. 두 개의 강이 봉의산 근처에서 만나 도시를 감싸듯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춘천에 비가 내리면 알게 모르게 우리 가슴 한편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터.

서현종 화백의 이 그림에는 그런 불안감이 보인다. 춘천의 하늘도, 자랑거리인 봉의산도, 거리도 온통 무채색 빗줄기에 젖어 가는데이런 상황이 마냥 계속된다면 봉의산 정상에 삐죽이 솟은 송신시설에 벼락까지 치면서 도시는 결국 침몰할 것 같다. 이런 불안감을 견디게 하는 게 그림 좌측 하반부, 승용차의 붉은색 브레이크 불빛이다. 본디 붉은색은 뜨거운 정열이거나 불안감이나을 상징한다. 춤추는 여인의 붉은 옷차림은 정열을, 소방서 차의 붉은 외관은을 뜻한다. 하지만 서 화백의 이 그림에서 붉은색 브레이크 불빛은, 무채색의 어두운 세상에 대응하는 유일한 유채색으로써 전체 풍경의 좌우균형과 비 내리며 엄습한 불안감까지 잡아준다.

전체 풍경의 좌우균형이란 말은 이런 뜻이다. 그림 상반부 우측의 봉의산이 검게 넓은 면적을 차지했는데 그에 맞서듯 그림 하반부 좌측의 차가 하얀색으로서 넓은 면적을 차지했으며 그 때 차의 붉은 브레이크 불빛이 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 그림의 비는, 해 지기 전 오후에 갑자기 내린 비다. 그 까닭에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놀라 상가들은 전등들을 켰지만 도로 변 가로등들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원래 비 그림은 수채화가 제격이다. 물감으로 그리므로, 페인트로 그리는 유화와 달리 그림 대상인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 화백의 비 오는 춘천그림은 물감 아닌 재료(페인트? 크레파스?)로 거칠게 그려졌음에도 질감이 그에 못지않다. 못지않을 정도가 아니라 빗물이 캔버스 밖으로 넘쳐날 것 같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숨바꼭질 놀이를 해야 한다. 우선 봉의산 정상에 높이 꽂힌 송신시설이다. 그런 시설물들이 모조리 제거된 요즈음의 봉의산과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최소한 2019년에서 몇 년 전 춘천이 배경이다.

도로에서 마주 오는 차가 하이빔을 켰음을 놓쳐서도 안 된다. 차의 하이빔은 비가 급작스럽게 많이 내려서 운전하는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불안감과 긴장은 공포영화의 필수 요소다. 이 그림에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림에 배인 긴장과 불안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하얀 차 브레이크 등에 쓰인 붉은색이, 차 말고도 멀리 작게 한 점 찍혀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게 무엇일까? 내리는 비 때문에 시야가 분명치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다. 하긴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비 내리면 멀쩡했던 풍경에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고 그렇다면 그 정체를 몰라도 그만이다.

서현종의 비 오는 춘천그림은 일상에 잠복해 있다가 비가 내리면서 드러나는 도시민의 불안을 그렸다. , 굳이 무슨 내용을 그렸는지 알려고 골몰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그림을 보며 당신 가슴 한편이 불안해진다면 그것으로써 충분하다. 시험 문제를 푸는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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