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때 피란가지 못하고 춘천에 남아 있다가 중공군들까지 봤다는 장모님이다. 중공군 장교가 당시 한창 젊은 친정아버지를 수상하게 여겨 총살하려 하자, 열다섯 살 나이 장모님(현재 80대 중반인 장모님의 소녀 모습을 상상하려니 감이 안 잡힌다. 상상력 하나로는 알아주는 사위이지만 이럴 때는 한계를 느낀다.)이 그 장교 바지를 붙잡은 채 땅바닥에 뒹굴며 울었단다. 말은 안 통하지만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하는 몸부림의 뜻은 통했다. 중공군 장교가 마음이 흔들려 권총을 다시 갑에 넣고 친정아버지를 그대로 살려주는 기적이 일어났단다.

나는 그런 정도로 장모님의 지나온 삶을 대충 얘기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장모님은 일흔 나이를 지날 즈음부터 몹쓸 당뇨가 시작돼 여든 중반의 현재 병석에서 지내는 생활이다. 고생 많은 삶의 여정 속에서 학교 가기는 언감생심. 그저 한글을 가까스로 읽는 정도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따금 문학적인 표현을 해서, 글 쓰는 사위()를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끼는 큰딸(내 아내)이 남편()과 둘이서 척박한 골짜기 땅을 일구어 밭농사는 물론 화초들까지 키워 꽃밭 천지가 되자 이런 표현을 하던 것이다. 큰딸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내 평생소원을 이루었구나!”

좁은 마당이거나 답답한 아파트 내에서화초 키우기로 낙을 붙이고 살아온 당신 눈에 800평 밭 곳곳의 꽃들은 바로 평생소원의 광경이었던 거다. 문학 하는 내가 듣기에는 정말 뜻밖의 문학적인 표현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하긴, 문학과 상관없이 살아왔다고 해서 문학적인 표현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 어쩌다가 그런 표현이 나온 거다.’

 

그런데 어제 오후 늦게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아내가 무슨 전화를 받아 잠시 통화하더니 잠깐만하며 내게 전화를 넘겨줘 벌어진 사건이다. 바로 장모님의 전화였다. , 그 전에 빠트린 얘기가 있다. 빠트린 얘기부터 해야 한다. 내가 두 번째 작품집으로 ‘K의 고개를 내자 아내가 그 중 한 부를 친정집에 주었는데장모님이 병석에서 며칠째 그 책을 계속 보고 있다지 않은가. 당뇨 악화로 시력도 안 좋은 거로 아는데 노인네가 그러는 거 같아 나는 좀 걱정도 되고 도대체 이해도 되지 않았다.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고대소설을 읽는다면 이해됐을지 모른다. 사위의 ‘K의 고개라니. 나약한 현대 지식인의 어떤 표상을 다룬 작품집인데 그걸 노인네가 읽는다고?

하지만 전화 통화가 되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당뇨악화로 치아들이 부실해져 발음도 잘 안 되는데 사위인 내게 이러던 것이다.

책 내느라 고생 많았어. 내가 다 읽었는데 잘 썼더라고. 내가 말이야, 옛날에 책 읽는 걸 좋아했다니까? 이광수의 유정도 읽었고 김래성이가 쓴 탐정소설들도 읽었지. 뭐야, 닥터지바고도 읽었다니까.”

그 충격이라니. 솔직히 나는 닥터지바고 같은 경우, 영화로나 봤지 책은 못 읽었다. 장모님은 이런 말도 했다.

, 소설을 읽으면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지는 게 있잖아.”

세상에. 그건 내가 ‘K의 고개앞에 썼던 작가의 말에 등장했던 말과 똑같다! 작가의 말에서 나는 소설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소설 쓰기를 그만 둘 수 없는 건 책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펼쳐지는 세상맛을 못 잊어서라고 했다.

소설 쓰는 당신의 맏사위를 자랑스러워하는 말로써 장모님의 얘기가 끝났다. 통화가 끝났다. 뜻밖의 통화 내용에 놀란 내게 아내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가 예전에빙점이라고, 일본 사람이 쓴 소설도 보고 그랬어.”

빙점은 내 사춘기 적 감성에 적지 않게 영향을 준 장편소설이다. 아내가 또 말했다.

우리 엄마 무식하지 않아. 당신이 늘 무시하는 것 같은데그렇지 않다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2년여 전 첫 번째 작품집숨죽이는 갈대밭을 냈을 때도 장모님이 다 읽어봤다는 말인가?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으니 이상하다. 아내가 이런 내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당신이 지난번 첫 번째 책을 냈을 때에는 엄마가책을 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국어선생을 하다 퇴직한 사위였으니 말이지. 그러나 이번에 두 번째로 책을 내자 사위가 취미가 아닌 전업으로 소설 쓰는구나여긴 게 아니겠어? 그래서 눈도 안 좋은데 며칠 걸려서 다 읽은 거지. 왜정 때 여고를 다녔다는 시어머니보다 우리 엄마가 책도 더 많이 보고 더 똑똑한지도 몰라.”

잘 나가다가 이상하다. 내가 얼른 제동을 걸었다.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어쩌거나 장모님이 내 두 번째 소설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는 건사건이다. 그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우선은 이 정도로만 알고 있자. 또 다른,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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