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 예찬 -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담백한' 중국 문화와 사상의 매혹 산책자 에쎄 시리즈 5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최애리 옮김 / 산책자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굉장히 덤덤하지만, 사려깊은 한 친구가 책 한 권을 추천했었다. 무미예찬. 제목이 뭐 이렇지 하고 생각했지만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좀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꼭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경우에 한정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추천하는 사람의 수준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사람의 생각들과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까지 알게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에. 결과적으로는 이 책을 추천해 준 친구를 더 잘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책이 말하는 내용과 그 친구의 모습은 많이 닮았다.

 

무튼 이 무미예찬이라는 책은 서양에서 권위있는 중국(동양)연구학자가 쓴 글이다. 그가 말하는 이 책의 동기는 중국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을 알면 보다 자신과 서양의 생각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그가 중국과 동양의 문화를 연구하다가 아마 푹 빠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냈다. 무미예찬이라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어쩌면 동양인인 우리의 입장, 게다가 중국과 영향을 많이 주고받은 우리라면 이 책은 쓴 사람보다 더 쉽게 읽혀질 수도 있다. 16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다면 짧은 책이지만, 철학 책 특유의 어떤 말의 딱딱함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뿐 내용 자체는 이해하기가 나름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본격적인 이 책의 리뷰를 적기 전에 문득 떠올랐던 단상들을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무미함의 가치를 통해 이 단상들을 다시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짧은 생각 첫 번째.

에너지드링크가 한 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유행하는 것 같고. 하긴 2011년인지 2012년인지 뉴질랜드에 나갔을 때도 콜라를 팔지 않는 곳은 있어도 에너지드링크를 팔지 않는 곳은 없더라.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전 세계 유행에는 절대 뒤쳐지기 싫어하는 우리 대한민국인만큼,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젊은 20대를 주타겟으로 에너지드링크가 광풍을 일으키며 시장이 급 성장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긴 학기 중에는 수업일정으로, 방학 중에는 취업준비와 스펙을 쌓느라, 그리고 휴학 중에는 고시공부나 어학연수를, 운이 나빠서 경제적 여건이 부족하기라도 하면 그 시기의 과업들과 더불어 알바까지 병행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몸이 열두개라도 남아나질 않을 우리나라 20대들이니 에너지드링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작년 재미있는 신문 기사를 봤다.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에너지드링크 시장의 상승세가 주춤한데 이어 시장의 축소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주 요인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너도나도 마셔대던 에너지드링크 대신에 생수를 먹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란다.

  

 

짧은 생각 두 번째.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꼬꼬마 시절의 우리나라는 '시험점수 높은 놈이 아무래도 모든 분야에 대해서 지식도 많고, 똑똑한 놈이면 당연히 행동도 빠릿빠릿 잘 할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적 오류가 전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대학입시 점수가 그 사람의 상품등급표가 되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 

 

그러다가 두루두루 잘하기를 원하며 뽑았던 인재들이 둥글둥글 뭐든 그럭저럭만 해내는 수준의 인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한 분야라도 잘하면 된다는 식의 전문화, 특화 바람이 불면서 공부 중에서도 잘할 수 있는 것 한가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취지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게 딱 내가 교육받던 시기의 분위기인데, 정작 사회에서는 판단기준을 전문성을 따지지 않고 여전히 성적만으로 판단하고 있었기에 얼마나 사회적으로 이런 인재들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또 설사 그런 인재들을 적극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멍텅구리가 되어서 (적어도 우리나라 기업문화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 낭중지추로 튀어나온 부분은 사회생활을 통해 깎이고 깎여 결국은 예전의 둥글둥글 뭐든 그럭저럭 해내는 사람과 똑같은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런 교육 분위기마저 얼마 지속되지 않고 금방 바뀌어버렸으니 말 다했지. 실패였다.

 

그러다가 스티브잡스의 아이폰을 위시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한 명의 창의적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몇 만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사회가 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각하고 구현해낼 수 있는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을 훌륭한 인재라 여기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창의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방면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자신의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T자형 인재가 되어야한다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뭐가 중요하고, 어떻게 해야하고, 잘 아는데 우리나라의 창의력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이 만들어놓은 시장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따라가는 것에는 강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줄은 모르는 나라. 부지런히 일하지만 조립하고 하청하는 일이 대부분인 나라가 우리나라인 것이다. 우리도 창의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짧은 생각 세 번째.

흐리멍텅 둔하게 생겨먹은 얼굴. 길 지나가면 10분에 한번씩은 비슷한 얼굴을 마주할 것 같은 평범한 인상. 수더분한 패션감각에 멋쩍은 웃음. 하지만 나이드신 어른분들은 꼭 그런 사람에게 하는 극찬이 있다. "그 사람, 알고보면 진국이야!" 나이가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매력과 가치들이,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부터는 보이기 시작하는 것일까? 가끔은 평범하지만 매력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짧은 생각 네 번째.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군대는 뭔가 멋진 추억들로 미화가 되어있는 시간들이지만, 다시 가기는 절대 싫은 그런 곳이다. 군대가 짜증나는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경험해 본 바로는 융통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나를 힘들게 했었다. 물론 신속한 대처와 작전수행은 엄격한 규율과 규칙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융통성이 고려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힘이 안드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지 유두리 있고 유머러스한 고참이 인기가 많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상사든 부하든 같이 일하기 싫은 것은 물론이고, 사적인 관계이더라도 그닥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의견과 생각은 분명하더라도 근거와 논리가 있는 생각과 주장이라면 언제든 받아들이고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오픈 마인드의 사람들이 좋다.

 

 

다시 돌아와서 리뷰를 써나가볼까. 

 

문두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당신이 만약 동양인이라면 이해하기가 쉬울것이라 한 것은,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철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늙어서는 동쪽의 군자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 군자의 나라 백성인 우리는 아마도 자연스럽게 체득이 된 철학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측컨데 그 것은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성격을 모두 가진 우리의 고유 철학인 풍류도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어찌되었던 이 책의 요지인 무미의 가치. 그러니까 무無맛인 것이 맛있음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아, 이 물 맛 좋다." 라는 소리를 듣고 살고 있으니까. 늘 보이는 확신한 증거대로 구분짓고 정의하는 문화에 익숙한, 그래서 큰 개념은 작은 개념으로 세분화하는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작은 것을 포괄하는 보다 큰 개념을 추구하는 이 문화가 얼마나 낯설고 충격적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무미함이란 담淡과 같은 의미이다. 이 담이라는 문자의 뜻을 찾아보면, 맑다. 엷다. 싱겁다. 담백하다. 어렴풋하다... 뭐 대체적으로 이런 뜻인데, 사전적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과 동양의 철학과 생활(색, 맛, 성격, 그림, 음악)에는 모두 공통적인 무미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림으로 치면 여백의 미, 음악으로 치면 음과 음 사이의 여음, 맛으로 치면 담백함 그런 것.

 

이 것들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우리는 단순히 이성으로 대표되는 시각적 가치(눈)로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설마 보이지 않는 것에도 가치를 부여하고 상상하고 채워넣고 탐구하는, 즉 자신의 영역대로 해석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비평하는 최신 방법에 '대치주의'라는 것(쉽게 말해서 텍스트의 가치는 작가의 의도 반, 독자의 해석 반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여백을 통해서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 과정 자체를 하나의 새로운 가치로 여긴 조상들은 참 똑똑하다 할 수 있겠다.

 

철학적인 담론을 계속 이어나가면 얉은 내 지식이 금방 탄로날 것 같은 마음에 구체적인 내용은 각설하고, 짧은 생각들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얻은 관점으로 이야기 하는 것으로 대신해볼까 한다. 먼저 첫 번째 에너지드링크 감소 현상. 사실 물리적으로 피로감을 없애주는 것, 그래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너지드링크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너지드링크에서 생수로 유턴하는 소비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장기적인 건강을 생각해서도 크겠지만, 금방 질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담백함과 무미를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질리지 않고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창의력 부족현상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안타깝다. 심지어 우리나라와 중국이 지재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복제나 이용을 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가장 창의적인 국가가 우리나라나 중국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무미의 핵심은 없는 것이 아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을 규정지어 사고의 확장을 하지못하게 막아버리는 서구의 문화에 오히려 우리가 더 과도하게 익숙해진 것이 창의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요즘 '융합'의 의미를 묻는 광고가 많이 나오곤 하는데, 사실 이 융합이야말로 창의적이 되는 출발점이다. 즉 기존의 것에서 상상력을 조금만 부여해서 가치를 더하면 새로움이 되는 것이지, 완전한 새로움을 처음부터 만들 필요가 없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무조건 정답을 정해두고 다른 생각들을 묵살하는 분위기를 버리고, 틀린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이라는 것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자가 그랬다고 하지 않았나, 군자의 핵심은 조화와 균형이라고. 그러한 조화와 균형은 다양성의 인정에서부터 나올 수 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그런 열린 마음을 포괄하는 '중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중용이라는게 '적당히'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하는데, 사실 어느쪽에도 치우침 없이 적당한 정도를 찾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공자가 추구한 중용이라는 것은, 어느 것에도 치우침 없이 왔다리 갔다리 유연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 것이 아닐까?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항상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치우치지 않게 끊임없이 정진하는 태도야 말로 유교가 말하는 것이니까. 그런 열린 마음과 유연한 사고, 태도를 가지고 사는 이의 궤적은 결국 하나의 진국을 만든다. 그만큼 아우라 같은 것이 풍겨져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다혈질 기질이 다분한 나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은 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시절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고, 그게 잘난 것인 줄 알고 살아온 시간이 꽤 되었으니까. 다행히 긴 연애를 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연습은 꽤 해오고 있는 편이긴 한데, 마음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철학적인 내용이라 쓰는 리뷰도 좀 어렵긴 하지만, 아주 두꺼워서 못 읽을 책은 아니니 우리의 가치를 발견하고 싶으신 분들은 읽으셔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이 독선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특유의 이분법적 사고를 즐겨하시는 분에게도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입에서 나가면 도는 싱겁고 맛이 없어진다 - 노자

선인의 도는 싱겁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 - 중용

 

무미라는 것은 매우 간편한 모티프이다. (중략) 그것은 단지, 우리 판단력 가운데서, 또 다른 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어 보였던 것이 보다시피 가장 풍요로운 다양성을, 가장 원대한 전개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미는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항상 열려 있다. (중략) 무미함이란 은미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 p.12, 20, 21

 

화가는 평생동안 거의 같은 풍경만을 그렸다. 하지만 그것도 딱히 그런 모티프에 애착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 모든 모티프들에 대한, 모든 가능한 동기화들에 대한, 내적인 초연함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아무런 구속없는 세상, 끝없는 만남과 즐거움에 맡겨진 세상에서 살았다. 그가 그린 풍경의 무미함은 그러므로 단순히 심미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혜의 표현이니, 무미한 삶이야말로 그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 p.25, 28

 

모든 맛은 구미를 당기는 동시에 기만적이다. 그것은 지나는 이의 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를 "유혹" 하지만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자극에 불과하며, 마치 악기에서 울려나는 음률과도 같이 들리는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이런 피상적 자극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이제 "다함이 없는"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을 권유받는다. 결코 구체적인 발현으로 한정되지 않고 감각에 의해 완전히 파악되지도 않으며, 모든 특정한 현실화를 넘어 풍요로운 잠재성으로 남는다. - p.31

 

사물들 가운데서 체험되는 무미함에 대응하는 것이 내적인 초탈함의 기량이다. 중국어로는 담淡 이라는 동일한 단어가 주체와 객체의 구별 없이 그 두 가지를 모두 가리킨다는 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p.33

 

가령,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던 것을 상기해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따름이다(마테복음 5장 13절)" 신성한 양념으로서의 소금은 차별 또는 선명한 대립의 기호이다. '언약의 소금'이라든가 '소금의 언약'이라는 말도 그 썩지 않는다는 고귀한 성질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러나 담淡의 세계에서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어떤 소명이나 전언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무미함이야말로 자연스러움의 적극적이고 완전한 특징이다. - p.36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 그 기량 덕분에 세계는 계속하여 갱신되며 생명은 부단히 펼쳐진다. (중략) 유가의 선비들이 보기에, 자연이 순환을 계속하고 그 풍요로움을 고갈시키지 않고 전파하는 것이나 군자의 덕이 꾸준히 행사되어 만물에 부단히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하늘도 군자도 자신의 도정道程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 p.39

 

중용의 덕은 인간 행동이라는 경지에서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흔한 이상, 필남필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상이다. - p.41

 

'단순함'과 '평범함'은 진정성의 보장이다. 강하게 유혹하는 힘이 닳아 없어질 맛과는 반대로, 군자의 '담백함'은 결코 싫증이 나지 않는다. (중략) 만일 담백함이 도道의 맛, 유일하게 가능한 맛이라면, 그것은 체념이나 환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담백함이야말로 근본의 맛, 사물의 가장 진정한 '뿌리'의 맛이기 때문이다. - p.43

 

어느 가 나라 사람이 망해가는 자기 나라를 떠나면서, 천금 가치가 나가는 옥을 버리고 갓난아기를 업고 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옥은 이익으로 결합된 것이지만, 아기는 하늘로 맺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으로 결합된 사람들은 어려움과 곤란함을 당하면 서로 버리지만, 같은 불운 가운데서도 하늘로 맺어진 사람들은 한층 더 가까워진다. 왜냐하면 이해관계로 결합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결합을 깨뜨릴 이유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의 사귐은 물같이 담백하지만,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합니다. 군자의 담백함은 우의를 더하게 하고, 소인의 달콤함은 우의를 끊습니다" 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p.48

 

대체로 사람의 재질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그런데 성격이 균형 잡히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하고 담백하며 아무런 맛이 없어야 한다. 그런 성격은 다섯가지 기량을 어울려 어떤 경우에나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 - p.52

 

가장 아름다운 음악,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음악은 가장 강렬한 음악이 아니다. 강렬한 음이 우리의 감각을 완전히 장악하는 감각적 현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포만감을 주어 더 기대할 것이 없게 만든다. 따라서 최고의 음악은 여음에 가깝다. 여음과 마찬가지로 맛의 여운, 즉 유미는 다함이 없는 잠재적 가치를 환기하며, 실제로 맛볼 수 없는 만큼 한층 더 바람직한 어떤 것이 된다. - p.62, 63

 

일반적으로 중국 비평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분석적 인식이라는 경지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문학을 논하는 것은 가치라는 입장에서, 좀 더 잘 감상하기 위해, 양극성이나 친근성의 망에 비추어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 p.96

 

짙은 것은 다하여 메말라지나

담백한 것은 점점 더 깊어진다.

 

예스런 차이에서 나오는 정신은

담담하여 담을 수 없다.

 

꽃잎이 떨어진다 말 한마디 없이.

사람은 담담하고 초연하기가 국화꽃 같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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