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이트 특급열차 철도 네트워크 제국 2
필립 리브 지음, 서현정 옮김 / 가람어린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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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털 엔진'으로 SF 계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친 필립 리브가 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SF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철도 네트워크 제국 시리즈'이지요. 이번에 시리즈 2권이 나왔습니다. '블랙 라이트 특급열차'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용은 당연하게도 '레일 헤드'에서 이어집니다. '레일 헤드'는 레이븐이라 불리는 철도 네트워크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저항자가 그 제국을 비밀리에 다스리고 있는 가디언들이 금지한 새로운 'K -게이트'를 여는 것이었죠. 이야기는 그렇게 열려진 게이트로 뛰어들어 주인공 젠 스탈링과 인간과 유사한 로봇을 지칭하는 모토릭 노바가 미지의 차원으로 나아가며 시작됩니다. 거긴 아직 레일이 깔려있지 않은 곳.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입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세계에서 젠과 노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야기는 젠과 노바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권을 읽으셨다면 혹시 레이븐의 사주를 받아 젠을 황제가 타고 있는 열차에 태웠던 소녀, 챈드니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권의 후반에서 그는 그 일로 레일 포스에게 체포되어 냉동형(여기서는 형벌이 냉동 상태로 두는 것입니다. 100년이든, 200년이든)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왔었죠. 그 챈드니가 여왕이 된 트레노디에 의해 풀려나 시녀가 됩니다. 원래부터 철도 제국에 대한 반감이 컸고 독립심 또한 강했던 챈드니는 종속과 굴종의 의미밖에는 없는 시녀라는 위치를 달가워하지 않고 늘 달아나려 합니다만 모처럼 가지게 된 트레노디와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섣불리 실행에 옮기진 못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철도 제국 앞으로 엄청난 위기가 다가옵니다. 황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렐 가문이 1권에서 발생한 황제의 죽음으로 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 전면전을 펼쳐 온 것입니다. 황궁은 삽시간에 살육의 광장이 되고 트레노디는 챈드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합니다. 이들 역시 젠과 노바처럼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라 발견하게 된 것일까요?  실제로 철도 네트워크 제국에는 거대한 미지의 영역이 존재했습니다. 우주 곳곳에 철로를 깔아 마치 철도 네트워크 제국이 우주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거기에도 엄연한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곳이 바로 2권의 제목이기도 한 '블랙 라이트 영역'입니다. 이름에서 이미 미지의 공간이라는 게 한껏 드러나네요. 가디언들은 바로 이 블랙 라이트 공간 때문에 새로운 게이트를 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늘 폐쇄만 고집해 온 그들에게 블랙 라이트는 한 마디로 개방과 그 열림을 통한 변화의 부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자였던 그들은 아집에 빠져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그 자폐의 화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 트레노디와 챈드니 그리고 젠 스탈링과 노바와 같은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을 강력하게 공격합니다. 그가 바로 쌍둥이 가디언입니다. 과연 쌍둥이 가디언과 젠 스탈링 일행 중에 누가 승리를 거머쥘까요? 


 이들의 대결 속에서 철도 네트워크 제국이 은밀히 감춰두고 있었던 비밀을 서서히 드러나는 2권은 1권이 그랬듯 역시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유럽은 다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만 해도 철도라는 존재는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편이죠. 기차라는 어쩌면 벌써 향수의 존재일지도 모를 그것을 가져와 무대를 우주로 옮겨 흥미로우면서도 꽤 설득력 있는 설정으로 현실감까지 맛보게 하는 철도 네트워크 제국 시리즈는 '모털 엔진' 시리즈에서 느꼈던 필립 리브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듭니다. 제가 특히나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것은, 모험과 활극으로 가득한, 그러니까 50년대 SF가 잘 보여주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느낌이 많이나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던 기억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나더군요. 기차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여러모로 향수를 자극하는 이 이야기가 앞으로는 또 어떻게 펼쳐질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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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이브스 3 - 5천 년 후, 완결
닐 스티븐슨 지음, 송경아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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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종말과 재건이라는 거대한 스케일로 눈길을 끌었던 닐 스티븐슨의 '세븐이브스'의 마지막 3권이 드디어 나왔군요.

 2권을 읽고 뒷 얘기가 너무나 궁금했기에 허겁지겁 집어서 읽어보니, 3권은 2권의 시점에서 무려 5천년이나 지난 뒤로군요. 7명의 이브에서 시작된 인류는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행히 멸종되지 않고 약 30억 명의 인구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1권과 2권의 이야기는 갑자기 달이 폭발하고 그 파편이 지구 위로 마구 떨어지는 '하드레인'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 확실시 되어 소수의 인원을 우주에 보내어 인류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인구가 30억 명으로 늘었다는 얘기에 그렇다면 인류가 다시 지구 위에서 살게 된 게 아니야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인류는 아직 지구 적도 궤도 위에 고리를 이루어 거주지를 형성하고 바로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 5천 년이란 시간이 흐르다 보니, 소수의 인류도 어느덧 분화되어 자신의 모태가 되었던 일곱 명의 이브에 따라 하나의 종족을 이루게 되었죠. 2권에서 인류 재건을 위해 태아를 임신했던 7명의 여성이 진정 이브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차례 종말을 경험하고 겨우 재건 되었지만 인류가 가진 습성은 그리 변하지 않아, 5처년 동안 생겨난 일곱 개의 종족은 나뉘고 갈라져, 오늘날의 세계와 같이 많이 적대적인 모습은 아닙니다만 종교와 인종으로 갈라져 있는 오늘날 세계와 그리 다르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립이 또 없는 것은 아니어서, 지구 재건을 두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에 맞도록 지상을 바꾸는 '테라포밍'에 관하여 '빨리 해치우자'는 레드파와 '천천히 하자'는 블루파로 나뉘어, 마치 50년대의 냉전 시대처럼,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3권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멸종된 것으로만 알았던 지상의 인간들이 5천 년 동안 생존해 있었고 우주에 있던 인류가 그랬듯이, 그들 나름대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1권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거기서 로봇 전문가로 나왔던 다이나는 하드레인으로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그녀의 아버지와 마지막 통신을 하는데요, 그 장면에서 다이나의 아버지는 근처의 광산에 사람들이 대피소를 만들어 피해있으며 자신도 그 곳으로 갈 것이라는 말을 하죠. 그렇게 지하 깊숙한 곳으로 대피했던 자들이 놀랍게도 생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으로 피난하기도 했는데요. 그들 역시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디거'와 '핑거'로 불립니다. 3권은 '후생유전학'에 기반하여 늑대의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푸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DNA가 외부 환경 요인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 5천 년 동안 완전히 다른 자연 환경에서 진화해 온 디가와 핑거가 인간과 좀 다른 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어쨌든 이 두 종족의 발견이 레드와 블루의 '힘의 균형' 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상을 자신의 뜻대로 테라포밍 하기 위해서 지상 종족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 두 진영이 각자의 속내에 따라 그들에게 다가간 것이죠. 그런데 디거는 자신의 영토에 기지를 세운 블루 진영을 침락자로 간주하여 레드와 손을 잡습니다. 디거가 레드와 손을 잡음에 따라 균형이 레드 쪽으로 기울게 되자 블루는 핑거와 얼른 손을 잡습니다. 그렇게 이제는 일곱이 아닌 아홉이 모처럼 다시 부활의 숨을 쉬기 시작한 지구를 무대로 예전의 냉전시대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맙니다. 과연 이 사태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과연 인류는 1권과 2권의 사태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일까요? 정녕 분리와 대립이 인간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일까요? 그리하여 공존과 평화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의 해답은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죠?


 늘 그랬듯이 이번 3권도 꽤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1권에서도 말했듯이 닐 스티븐슨의 소설은 역시 아주 현실적이고 정교한 SF 설정 때문에 읽는 것이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러한 스티븐슨의 재능은 빛을 발합니다. 인류가 우주 콜로니를 어떻게 만들고 유지하며 이동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눈에 그리듯이 서술하고 있어 소설을 읽으며 뭉게뭉게 떠오르는 상상에 쉽게 구체성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5천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긴 했지만 인류 재건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을 어떻게 매조지할까 많이 궁금했었고 또 스케일이 큰만큼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좀 되었는데 이 정도면 잘 끝맺음 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닐 스티븐슨 덕분에 모처럼 아주 거대한 스케일의 스토리 안에서 마음껏 상상력의 유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것에 한없이 매몰되어 바로 눈 앞의 것만 생각하며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다르지 않은 무료한 일상 속에서 이처럼 거대한 규모와 시간을 마음에 담아보는 것도 꽤 좋은 경험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확장이 또 소설을 읽는 맛이겠죠.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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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모노클 시리즈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민경욱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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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보았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인 '타락천사'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극중에서 청부살인업자로 나오는 여명이 아주 늦은 밤의 버스 안에서 어떤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다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여명은 할 수 없이 인사에 응하면서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가 요즘 무슨 일하냐고 묻자, 곤혹스러움은 더욱 짙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여명의 독백이 이렇게 지나간다.

 '청부살인업자에게도 고교 동창은 있다.'


 청부살인이라는, 사회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예외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한낱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니면 현재엔 비록 청부살인업자라는 괴물이 되었을 지 몰라도 과거의 한 때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어쨌든 청부살인업자, 그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 문화 속에 등장하는 청부살인업자는, 특히 주인공인 경우엔 대부분 같은 인간이라는 뜻에서 인간다움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그 인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의 청부살인은 주로 범죄자 같은 악인을 표적으로 삼는다. 살인의 정당성을 주어서 주인공이 저지르는 살인이 가지는 부정성(否定性)을 희석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공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주인공에 대한 공감이라는 연료가 없으면 멀리 갈 수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니까 말이다.


 청부살인업자가 나오는 영화 중에 가장 유명한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에 나왔던 주윤발 캐릭터를 생각해 보라. 언제나 마피아의 보스만 표적으로 삼고 거기에 휘말려 한 여가수가 불행하게 시력을 잃게되자 죄책감을 느끼고는 곁에서 끝까지 돌보는 것까지 하지 않던가? 보통은 이렇게 묘사한다. '청부살인업자'란 캐릭터는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살인자'란 단편에서 처음 등장시킨 뒤로, 하드보일드 장르에 단골로 등장했다. 그러나 주인공인 경우엔 그런 비정(非情)함이 잘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괴물을 더욱 괴물로 만들 뿐이니까 말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사무라이'에 나왔던, 알랭 드롱이 분했던 킬러가 대표적이다.('사무라이'는 '첩혈쌍웅'의 원본과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내내 대사 한 마디 없다. 언제나 굳은 침묵으로 무표정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살인을 거리낌 없이 저질러 사회의 예외적 존재가 되는 그는 그 외양으로 인해 더욱 그렇게 된다. 침묵과 무표정은 그를 불가해한 존재로 만든다. 그는 인간일까, 괴물일까? 우리는 궁금하다. 거기에 멜빌은 살인하는 그를 목격했지만 고발하지 않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알랭 드롱이 인간이라는 것을 슬쩍 드러낸다. 비록 지금은 괴물이지만 마음 한 편엔 인간다움이 있어, 언젠가 인간이 되려 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그의 죽음이 씁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독'이라고 제목을 붙였을만큼. 이처럼 비록 일말이나마 인간다움을 품고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독자는 그를 끝까지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온통 검게 칠해진 페이지만 있는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없듯이.



 이시모치 아사미의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제목에 나와 있듯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청부살인을 한다. 한 번 의뢰를 받아 청부살인을 하면 650만엔이 그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가 직접 의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의뢰를 받는 이는 따로 있다. 그 일은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이가 맡고 있는데, 그와 주인공이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중간에서 둘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존재가 또 하나 있다. 그는 현재 지방 공무원이다. 의뢰를 맡는 사람은 그 중간에 있는 전달자만 만나고, 주인공 역시 그 전달자만 만난다. 이렇게 하면 의뢰를 받는 자와 청부살인을 하는 자 중 누가 체포되더라도 나머지 한 사람은 보호받을 수 있다. 물론 중간 전달자가 체포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는 의뢰도, 청부살인도 하지 않고 단순히 의뢰 받은 것과 청부살인업자가 살인을 맡을 것인지 말 것인지만 전할 뿐이니 법망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무튼 주인공이 한 축을 맡고 있는 청부살인은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단편집이다. 주인공이 의뢰를 받아 청부살인을 하는 게 주된 줄거리인 단편이 모두 일곱 개 실려 있다. 맞다. 당신은 이 책에서 일곱 번의 청부살인을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마피아의 보스이거나 범죄자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은 냉정하게 살해한다. 오로지 돈을 위해서. 그리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을 보는 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렇다고 청부살인업자가 어떤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한층 더 불편하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독특한 컨셉의 소설을 가지고 있다. 청부살인업자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가 탐정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게 그렇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은 청부살인을 하기 위해 목표 대상을 스토킹 하는데(이런 식으로 보다 잘 죽이기 위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그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원활한 살인에 맞춰져 있다.) , 그 때마다 목표물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수수께끼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첫 단편에서 타겟인 여성이 밤마다 몰래 나와 검은 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 


 그는 타겟들이 그러는 이유를 죽여 놓고 난 뒤 추리 한다. 이처럼 소설은 주인공이 의뢰를 받고, 타겟을 따라다니다 수상한 행동을 목격한 뒤 처리하고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 추리한 것을 중간 전달자에게 말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미스터리가 소소한 것이기에 흔히 말하는 일상 미스터리 계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보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청부살인업자가 탐정인 일상 미스터리 계 소설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두 가지가 조합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시도는 매우 신선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리 성공적이진 않다. 오로지 돈을 위해 별로 죄도 없는 사람을 살해하고, 살인에 비하자면 하찮은 것에 불과한 수수께끼를 목숨보다 더 비중을 두고 생각한다라? 잘 납득되지 않는 설정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타겟에게 절대 감정이입 하지 않으려고 의뢰인의 신원도, 그 동기도 묻지 않는다. 그런데 사소한 행동에는 왜 의문을 품는 것일까? 그것을 헤아리려면 상대의 입장에 서야 하니, 그 또한 감정이입의 요소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모순으로 보인다. 그저 미스터리를 가져오기 위해 설정된 호기심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무리한 설정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런 걸 설정했다는 자체에서 난 작가의 윤리 의식 역시 조금 꼬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작가의 모습은 내게 마치 잠자리 날개를 뜯으면서 왜 잠자리에겐 날개가 네 개밖에 없고 이렇게 쉽게 뜯겨나갈까 궁금해하는 아이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주인공에게 애인이 있는데, 그 애인이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는 걸 알면서도 사귀고 있다는 점이다. 뭐, 이 넓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소설에 대놓고 나오니 상식적인 견지에서 얼른 납득이 안 된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평범한 제목처럼 소설의 주역들은 대부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나 뚜렷한 동기 없이 어쩌다 청부살인업계로 흘러든 사람들이다.(주인공이 과거를 술회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있더라 하는 느낌이다. 소설은 지속적으로 살인청부업계가 그리 먼 세상이 아님을 강조한다. 치과의사, 공무원, 중소기업 경영 컨설턴트, 만화가가 이들의 직업인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렇게 소설은 평범함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살인청부도 그런 평범한 세계 속에 속한다고 알린다. 주인공의 애인이 그러하듯, 우리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이들이 살인청부를 쉽게 용납하는 것처럼.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인가?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돈 때문에 이토록 쉽게 사라지는데도 모두들 그걸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란 과연 어떤 곳인가? 타인의 삶을 하찮게 바라보는 곳.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허다한 갑질 사태를 볼 때 드는 마음 그대로 바로 그런 곳이 지옥은 아닐까? 타인에 대하여 정작 궁금해하고 헤아려야 할 대상은 삶이라는 것이건만, 본질이 되는 삶은 홀연히 사라지고 삶에 견주자면 한없이 사소할 행동의 의미에만 천착하는 건 그저 내게 흥미 있는 것만 취하려는, 그렇게 타인을 피상적으로 소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소설은 바로 여기서 재미를 주려고 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남의 삶을 하찮게 만드는 것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니 이런 태도가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소설에도 어느 정도 윤리적 틀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윤리적 틀의 주된 축은 타자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한 청부살인업자 주인공들이 가졌던 인간다움도 근본엔 그것이 있었다. 타자의 삶이란 결코 나만을 위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장르 소설이라 하여도 그러하다. 이 소설은 2017년에 나왔다. 이런 소설의 등장이 당시 일본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공기와 어쩌면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 나오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런 것을 느꼈기에 나중에 한 번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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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희망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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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말의 희망'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의 이 시리즈 소설들은 지금까지 계속 반어적인 제목을 달았다. 1권의 제목은 '괜찮아'였는데 정작 소설을 읽어보면 전혀 괜찮지 않은, 아닌 괜찮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나쁜 소식'이었지만 그 소식의 주인공인 죽은 아버지와 주인공 패트릭 멜로즈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이번의 제목인 '일말의 희망' 역시 반어적이다. 소설은 단 한 번도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절망의 어둠만 더 깊어질 뿐이다.


  아버지가 죽고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청년기는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 성숙의 흔적은 없었다. 슬픔과 탈진이 증오와 광기를 숨기는 경향을 성숙이라고 하지 않는 한은 그랬다.(p. 17)




 그 절망의 출처는 어디인가?
 바로 패트릭 멜로즈가 참석하게 된 파티에 있다. 패트릭 멜로즈의 소설들은 언제나 하루의 시간을 담는다. 이번 소설 역시 그 파티가 열렸던 하루를 담는다. 1권과 3권을 모두 읽은 분들이라면 두 소설이 어딘가 닮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1권은 멜로즈의 아버지가 주최했던 저녁 만찬이 중심이었다. 그 만찬은 남을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날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자기 삶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은 아버지가 중심인 세계가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가차없이 짓밟는, 아주 이기적인 우주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런데 3권의 파티 장면도 이와 별로 다를 바 없다. 일단 파티의 주최자 소니를 비롯하여 거기에 참석하는 니콜라이를 비롯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마거릿 공주가 보여주는 모습이 1권의 데이비드가 보여주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이다파티의 참석자들은 패트릭에게 "자네가 데이비드의 아들이군."하는 식으로 말을 걸어 패트릭에게 내내 8 전의 죽은 아버지를 상기시킨다이것은 또한  파티의 세계가 실은 아버지 데이비드가 만들었던 세계와 닮은 꼴이라는 것을 패트릭에게 주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파티에서 오고가는 말을 세세하게 담고 있는  소설은 소위 돈과 권력을 가진 영국의 상류층들이 아래 계층 사람들을 얼마나 하찮게 보고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각인시킨다  압권은 마거릿 공주다공주가 파리 대사에게  모욕은 그대로 1권에서 패트릭이 당한 고통을 어느 정도 상기시킨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파티를 가져왔는가?
 소니의 파티가 데이비드 저녁 만찬의 확장판임에 다름 아님을 떠올려볼  그것은 패트릭에게 고통을 안겼던  세계가 실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아닐까 싶다다시 말해 소설에서 오빈은 영국의 상류층이 가진 저열한 의식을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통해(소설에 묘사된 마거릿 공주의 모습은 실제 모습을 많이 가져왔다고 작가가 밝혔다고 한다.) 낱낱이 까발리려 했던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영국에 과연 일말의 희망 같은  있을까 자문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런데 패트릭은 쉽게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가지 않으려 했다가 결국은 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그는 소설 초반에 평생 두 곳에 동시에 있어야 할 필요 때문에 지쳤다(p.14)고 말한다. 아버지 세계를 증오하면서도 한 편으론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빗댄 것이 아닐까 한다. 희망의 부재는 그 어정쩡함에 있다. 패트릭이 소설의 마지막에 바라봤던 백조처럼 아버지 세계에 발을 들이밀고 있는 한 아무리 구원을 찾으려 노력을 해도 그것은 무용한 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일말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거꾸로 보여주는 셈이다. 아버지 세계와의 결연한 결별에 존재한다는 걸 말이다. 다음에 이어질 네 번째 작품의 제목은 '모유'다. 이것은 패트릭이 이제 아버지의 세계를 떠나 어머니의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뜻일까? 진실은 아마도 직접 책을 읽어봐야 알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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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0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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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선택한 남자 스토리콜렉터 66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이한이 옮김 / 북로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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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특이한 능력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 에이머스 데커.

 그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 나왔군요. 제목은 '죽음을 선택한 남자'. 원래 제목은 'THE FIX'. 2017년에 발표되었으니 우리나라에 꽤 빨리 번역 출간된 셈입니다. 그런데 올해 9월 11일에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THE FALLEN'이 출간될 모양이더군요. 2015년에 시리즈 첫 작품이 나왔는데, 벌써 네 권째라니 거의 1년에 한 편씩 발표하는 것 같습니다.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의 방증일까요? 서양의 리뷰 사이트인 '굿리즈'를 보면 모두 4점 이상의 점수를 받고 있어 그런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이번 '죽음을 선택한 남자'는 시리즈 전작과 이채로운 점이 몇 가지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나는 'WHO DUNE IT?'이 아니라 'WHY DUNE IT?'에 천착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소설 초반부터 범인을 아예 밝혀두고 시작하기에 한층 더 도드라졌죠. 무엇보다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가 살인과 범인 모두를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하니까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전작의 활약으로 이제 FBI에 기자 알렉스와 함께 특채되어 미제 사건을 수사하게 된 에이머스 데커가 FBI 거점인 J 에드거 후버 빌딩으로 회의를 위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걸어가던 고급 정장을 잘 차려 입은 60대 남자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애니 버크셔를 갑자기 권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턱 아래에 총구를 대고 쏘아 자살하고 맙니다.(바로 죽지는 않고 병원으로 실려가 거기서 죽습니다만.) 여기서 제목의 '죽음을 선택한 남자'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게 되실 것 같네요. 네, 자신에게 총을 쏜 60대 남자, 월터 대브니인 것이죠. 그는 그의 외양이 증명하듯이,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리고 재정이나 가정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절대 그럴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대브니는 왜 버크셔를 살해하고 자살한 것일까요? 그건 혹시 피해자 때문일까요? 하지만 피해자 역시 대체교사로 시간이 나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책을 읽어주는 등 자원 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주위의 누구와도 갈등을 일으킨 적 없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대브니와 버크셔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습니다. 일면식을 전혀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더욱 대브니가 버크셔를 살해한 것이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뇌종양으로 곧 죽음을 앞둔 대브니가 자살을 마음 먹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무차별 살인이었을까요?


 이유 없는 살인은 없다고 믿는 에이머스 데커는 '왜?'라는 질문에 천착합니다. 그 실을 따라가 보니 이상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버크셔는 대체 교사 월급으로는 도저히 유지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몇 백만 달러짜리 호화 주택에다 연봉의 몇 배나 되는 자동차하며 아주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엔 조금도 생활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모델 하우스처럼 말이죠. 거기다 버크셔는 이중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학교에 낡은 포드 자동차를 몰고 출퇴근을 했고 학교에 기록된 주소는 그녀의 집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아주 허름한 집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피해자의 삶이 이상한 것 투성이다 보니 대브니는 어떤 이유로 살인했다는 심증이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미 국방정보국(DIA)에서 일하는 하퍼 브라운이란 여성이 데커를 찾아옵니다. 그는 데커에게 대브니가 실은 막내딸을 도와주기 위해 국가 안보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최고 기밀을 천만 달러를 받고 넘겼다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대브니는 평범한 사업가가 아니라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버크셔는 대브니의 이런 사실 때문에 살해되었던 것일까요? 그녀는 대브니의 반역 행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당사자들이 이미 모두 죽어버린 상황에서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진실만 쫓는 에이머스 데커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바람 부는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일이라 해도 말이죠. 설령 몇 번이나 자신에게 날아드는 총탄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더라도 그는 최후의 진실을 찾을 때까지 내처 걸어갑니다.


 소설 처음부터 주인공이 살인 현장을 목격한다는 점과 단순한 살인인 줄 알았지만 그 뒤에서 드러나지 않는 더 커다란 흑막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작가의 데뷔작 '앱솔루트 파워'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뭐랄까요, '에이머스 데커'와 '앱솔루트 파워'가 믹스된 느낌? '죽음을 선택한 남자'가 전작보다 스케일이 훨씬 더 커져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앱솔루트 파워'도 개인이 체제와 싸우는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시간대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앱솔루트 파워'의 주인공인 대도 루터 휘트니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 한 번 등장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여하튼 이번 편은 첩보 장르를 취하여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무대가 넓혀졌는데, 주인공인 에이머스 데커에 한해선 초점이 더욱 좁혀진 것 같습니다. 그에게 가장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아내와 딸의 죽음이라는 과거에서 그가 벗어나 다시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는가 하는 초점이죠. 작가 데이비드 발다치가 이 소설에 스파이와 두 가족을 가져온 것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파이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경계의 존재죠. 그건 과거의 상처와 새로운 삶의 출발 사이에서 오고가는 에이머스 데커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대브니와 버크셔의 이중 생활 마찬가지 입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아예 이런 말까지 하죠. 얼마전까지만 버스정류장에서 골판지를 집 삼아 살던 자기가 이제는 번듯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데커가 살 집을 마련해 준 것은 버크셔가 가지고 있었던 두 개의 집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버크셔가 두 개의 삶 중 그 어느 것에서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할 수 없었듯이 데커 또한 그럴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구요. 하지만 주저하는 데커에게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외부 상황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두 가족의 등장이죠. 데커가 사는 집에 세입자로 있는 에이야마 부자와 대브니 가족이 그것입니다. 그 두 가족은 그 때 아내와 딸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의 삶이 아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묻는 에이머스 데커에게 설령 살아있다 하더라도 데커가 그토록 찾는 안식은 없었을 것이란 걸 보여줍니다. 위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며 때로는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밝혀져 커다란 배신의 상처를 입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두 가족의 모습은 데커에게 과거의 상처에 연연하지 말고 새출발 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치 그와 보조를 맞추듯, 작가는 데커와 재미슨을 룸메이트로 동거하게 만들고 '썸'을 자아내는 것과 동시에 데커의 가장 친한 친구인 멜빈 마스와 DIA 요원 호프 브라운도 '썸'을 타게 만들죠.


이것은 데커에게 작가가 어떤 충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데커는 자신이 삶에 떠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딸이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는 자신에게 다른 선택따윈 없었다고 재미슨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묻습니다. 과연 달리 선택할 수 없었을까 하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대브니의 삶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의 삶을 두고, 또 그에게 어떤 선택을 하도록 한 이들을 두고 데커의 일행들은 자주 말하죠. '그들은 달리 선택할 수 있었어'라고. 그건 그대로 작가가 데커에게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선택이 데커에게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재미슨과 마스 그리고 브라운이 새로운 관계를 엮어나가는 것이죠. 삶은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도해 나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과연, 데커가 작가의 충고를 받아들였던지 소설 마지막에서 데커는 이런 말을 하죠.

 나는 어둠을 받아들일 거야. (p. 566)


 이렇게 보자면 왜 이 소설의 원제가 'THE FIX'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아프고 절망적인 순간에 있다 하더라도 삶을 다시 재건할 기회는 있다는 것이죠. 삶이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의 목줄을 쥐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스케일이 커지긴 했습니다만 저는 '죽음을 선택한 남자'가 데커 개인의 드라마로 더 많이 보였습니다. 뭐, 어쨌든 이것은 '죽음을 선택한 남자'를 바라보는 저만의 관점일 뿐입니다. 그것을 제쳐두고 총평 같은 걸 해보자면, 이번의 작품 역시 전작이 그랬듯이 페이지 터너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초반엔 궁금증을 한껏 유발시키고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게 만들죠. 그리고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총격 장면도 나오고 말이죠. 로맨스와 유머까지 가미되어 있어 한 마디로 즐길 요소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599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인데도 쉽게 읽을 수 있더군요. 기존의 에미머스 데커를 재밌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번 작품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빨리 네 번째 작품을 만나고 싶네요. 거기서도 데커는 연쇄 살인을 수사하게 되는데 사건 발생 장소가 글쎄 알렉스 가족이 사는 곳이랍니다. 데커와 알렉스 재미슨이 함께 그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고 하네요. 가족을 만난다는 건 관계가 더 깊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과연 데커가 지금까지의 방황을 끝내고 정착하게 될 지 궁금하군요. 그런데 스릴러 소설에서 가족의 형성은 시리즈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잘 될런지... 하여간 4부가 얼른 나와 주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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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0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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