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맨 - 인류 최초가 된 사람 : 닐 암스트롱의 위대한 여정
제임스 R. 핸슨 지음, 이선주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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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닐 암스트롱.

 그의 이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억되는 이름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에 인류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이니까.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아폴로 11호는 달에 무사히 착륙했고 인종과 성별,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어 숨죽이며 지켜 보는 가운데 닐 암스트롱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천천히 타고 내려와 드디어 자신의 발자국으로 인류의 흔적을 남겼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도약이다."


 달 착륙 5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된, 2005년에 발표된 우주 항공 역사를 주로 연구하는 제임스 R 핸슨의 '퍼스트 맨'은 저 말과 함께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된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한 닐 암스트롱의 일대기를 다룬다. 물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달에 착륙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사실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서도, 달 착륙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의혹 속에 빠지게 만드는 '달 착륙 음모설'에도 쉽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책을 통해 암스트롱의 삶과 달 착륙에 관련된 모든 과정을 다 알게 된 지금, 난 단언할 수 있다. 달 착륙 음모설은 헛소리라고. 이들이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위해 무려 천 시간이 넘는 모의 비행을 하고 몇 년에 걸쳐 목숨까지 걸면서 훈련한 것을 안다면 절대 음모라고 말할 수 없다. '퍼스트맨'은 그런 과정의 작은 나사 하나까지도 다 담고 있는, 그야말로 닐 암스트롱의 삶과 달 착륙 전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며 그것으로 달 착륙 음모설을 우주 저 멀리로 날려보내는 책이다.







 닐 암스트롱은 두 살  때 처음으로 비행기 장난감을 가진 뒤로 내내 삶의 중심에 비행기가 있었다. 그는 오직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했으며 청소년기의 어느 때인가엔 이런 꿈을 계속 꾸기도 했다.


 "꿈 속에서 숨을 참으면 공중에 떠서 빙빙 돌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꿈에서 나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지도, 당으로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그저 빙빙 돌기만 했어요. 어정쩡해서 좀 답답했죠. 꿈에는 어떤 결말도 없었어요.(p. 53 ~ 54)


누군가는 이 꿈이 예지몽은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이 꿈은 달 주위 궤도를 빙빙 도는 아폴로 우주선과 많이 닮았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운명은 달 착륙으로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닐 암스트롱이 어릴 때 과학 선생님은 언젠가 그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는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언젠가 저 달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시간당 9달러인 비행 훈련 비용을 모았고 주말마다 와파코네타에 있는 챔프 비행기 세 대 중 한 대를 타고 비행 훈련을 했다. 그는 수많은 비행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날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관심은 그를 저절로 항공 공학 쪽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흐름은 단순한 항공에서 이제 항공우주공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변화를 실감하면서 닐 암스트롱은 자연스럽게 비행사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게 되었다. 항공 엔지니어의 정체성으로. 그것이 평생 자신의 직업 정체성이 되었다. 그는 NASA에서 우주비행사로 활동할 때도 단 한번도 자신을 우주비행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로지 그는 항공 엔지니어일 뿐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몰랐던 것은 또 있다. 아폴로 11호에 닐 암스트롱과 함께 탔던 버즈 올드린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과묵하고 오직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닐 암스트롱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올드린과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건 아니다. 사실 그는 사이가 나빠졌는지 아닌지조차 몰랐다. 그런 쪽에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즈 올드린은 달랐다. 평범한 가정에서 엔지니어로 경력을 쌓아온 닐 암스트롱과는 다르게 아버지가 장성이고 대대로 높은 계급의 군인 집안 출신에다 현역 대령이었던 버즈 올드린은 명예욕이 강했다. 사실 뒤늦게 버즈 올드린을 닐 암스트롱 팀에 합류시키려 했을 때, 책임자가 닐에게 와서 다른 사람을 넣으라고 했다고 한다. 올드린 때문에 팀에 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했던 탓이다. 과연 올드린은 누가 달에 첫 발을 딛느냐를 두고 계속 신경쓰면서 그걸 자신이 하기를 바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누가 첫 발자국을 딛는지 빨리 결정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처음으로 달을 밟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인류가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그 날까지 기억하게 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닐은 그런 것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착륙선이 달에 무사히 착륙하는 것이 관건이지 누가 처음으로 달을 밟는가 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국 첫 발자국은 닐이 밟기로 결정났다. 이를 두고 공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공식적일 뿐, 사실 그걸 결정하는 책임자들이 올드린의 인성 때문에 날을 고른 것이었다. 이렇게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명예가 멀어지고, 전혀 바라지 않은 사람엔 그 쪽에서 찾아온다. 닐과 올드린의 이야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닐이 무심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달을 처음 받는 사람이 되어도 그건 자기 혼자 힘이 아니라 모두가 협력한 결과라는 걸 잘 알았다. 아폴로 11호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11호의 달 착륙을 성공시키기 위해 무수히 거듭해온 연구와 훈련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야할 영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기계 속 하나의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겸허가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이끌어 낸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퍼스트맨'은 참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닐 암스트롱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달에 착륙하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를 포함하여 삶의 어떤 혜안까지 넌지시 깨닫게 만드는 책이었다. 600 페이지가 넘는 좀 부담스런 분량이긴 하지만 제임스 R 랜슨이 잘 써서 그런 건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 닐 암스트롱과 달 착륙에 대하여 평소 궁금한 것이 있었다면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다. 만족감을 그득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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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12-17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작가가 달 착륙 음모설을 아직까지도 의심하고 있다가 김상욱 박사가 동공 지진으로 유시민 작가를 바라보며 차근차근 설명하던 장면이ㅜㅋㅜ...알쓸신잡 출현 안 했음 유시민 작가 언제까지 그랬을 건가 식은 땀이;;;

헤르메스 2018-12-18 10:43   좋아요 0 | URL
저도 알쓸신잡을 보진 못했지만, 그렇다면 유시민 작가야말로 이 ‘퍼스트맨‘을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을 읽으시면 더 식은 땀을 흘리실듯^^
 
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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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노블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독특한 그래픽 노블 하나를 만났네요. 탈다 윈튼의 '아이 러브 디스 파트'란 작품입니다. 일단 작가의 나이가 너무 젊어서 눈길이 갔습니다. 96년생이었거든요. 2015년에 첫 책을 냈으니, 와! 몇 살 때 데뷔한 건가요? 작가의 나이보다 더 이 작품을 이채롭게 기억하게 된 건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10대 레즈비언의 이야기였거든요. 나중에 알았는데, 작가 역시 레즈비언이라고 해요. 자신의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로 풀어간 것이죠. 누군가 그러더군요. 자기 얘기를 할 때 가장 잘 말할 수 있다고. 아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일 겁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미국 사회가 아무리 성소주자의 사랑에 대해 관대해졌다고 해도 막상 밑바닥 현실로 들어가보면 아직 벽이 높은 것이 사실이죠. 처음 사랑을 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넘지 못할 현실의 벽 때문에 이런 사랑을 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이 슬금슬금 고개를 듭니다. 성인이 아니라 십대라면 더 하겠죠. 그런 과정을 이 그래픽 노블은 담아내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고 장면의 연출로 느끼도록 하면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잔함과 더불어 나의 첫사랑은 어떠했던가 추억까지 하게 되니 작가의 실력이 꽤 좋다고 해야겠죠. 만화 부문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작품에 주는 이그나츠 어워드 신인상을 탈만 합니다.





 책의 표지입니다. 처음에 전 옆의 흑인 아이를 남자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흑인과 백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뤘구나 여겼죠. 하지만 이내 곧 흑인 아이도 여자 아이란 게 밝혀지더군요. 그러므로 이 둘은 두 가지나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랑을 하는 셈입니다. 하나는 인종 간, 다른 하나는 동성 간. 부모와 또래 그룹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10대이니만큼 이들의 사랑 행로가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임은 명약관화죠.


 미래야 어찌되었든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사랑을 쌓아가던 무렵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도 사랑을 하셨다면 이들의 마음을 잘 알겠지요. 우리도 그러지 않았나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마냥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존재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었죠. 다음과 같은 장면은 바로 그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큰 존재가 되어, 세상에 오직 단 둘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때를.





 이건 마치 제목처럼 음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반복해서 듣는 것과 같죠. 가장 환하게 사랑이 밝았던 시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음악의 가장 좋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언제 떠올려도 먼저 흐뭇함으로 다가오는 사랑의 기억이...





 하지만 음악은 가장 좋은 부분만 계속해서 들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언젠가 끝이 납니다. 사랑과 현실 또한 그러합니다. 사랑에 마냥 취했던 시간이 시나브로 지나가면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며 자신의 사랑을 위협하는 차디 찬 현실의 냉기를 느끼게 됩니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겠죠. 작품은 그런 과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공간이나 풍경의 단편적인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괴로움, 부모에 대한 두려움과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 등 현실 앞에서 약해져만 가는 사랑을 고요하게 소묘합니다. 너무나 거대했던 그들의 존재가 서늘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작아져가는 과정을...

 결국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하고 이렇게 거대한 현실 안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지고 맙니다.





 여름의 햇살만큼 눈부셨지만 짧았던 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이젠 추억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의 장면들은 그걸 묘사합니다. 음악이 끝나고 난 뒤 선율의 여운이 기억되듯이 사랑도 그렇게 남는다는 걸 말이죠. 이토록 잔잔하게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묻고 있죠. 이들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 하고? 왜 이들은 당신과 닮은 사랑을 했는데, 당신은 할 필요가 없었던 걱정과 두려움을 가져야 했냐고. 사랑은 햇살입니다.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두루 환한 빛 속에 있게 만들죠.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처럼 굴고 있는 걸까요? 사랑이 마치 입장권처럼 자격이 되는 이에게만 부여되는 것으로 여기는 걸까요? 음악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처럼, 인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가장 좋은 부분인 사랑을 영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이별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 없는 세상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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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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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무나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이 들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의문은 가져보지 않았다. 왜 소년만 야망을 가져야 하는 거지? 노년은 야망을 가지면 안 되나? 왜 이런 의문이 들었는가 하면,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혁명을 꿈꾸는 할머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노년이 야망을 품으면 노욕(老慾)이라고. 늙어서 그러는 건 너무 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정반대로 말한다. 꿈이든 야망이든 사랑이든 그런 건 모두 나이와 전혀 상관 없다고. 혁명도 얼마든지 꿈꾸어도 좋다고. 그 할머니의 이름은 메르타 안데르손. 그녀는 다이아몬드 요양원에서 보호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온갖 금지 속에 갇혀 있다. 예전에 그녀는 농부였다. 억센 두 손으로 가축도 기르고 작물도 생산했다. 자기 스스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러지 못한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한다. 잠자는 시간조차 정해져 있다. 그야말로 다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가 끌기 보다는 남에게 끌려가기만 하는 생활. 당연하게도 이런 자신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다.


 여기, 노인 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버렸을까? 국민들이 자기 나라 정부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도 혁명을 일으켜야 할지 모른다. 메르타는 <거의 언제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메르타는 이 믿음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p. 15)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믿음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메르타처럼 꿈을 이루기가 요원한 장소에 있는 경우엔 더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감을 따고자 한다면 직접 장대를 사용해 가지를 흔들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이 행위로 완성되듯이 오로지 적극적인 실천만이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메르타에겐 과감한 실천력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쥐구멍을 찾아내는, 아니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을 모으고 함께 금지를 위반해, 거기서 오는 자유와 쾌감을 통해 반기의 즐거움을 동료들에게 전염시킨다. 그렇게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장차 다이아몬드 요양원만이 아니라 스웨덴 전국의 노인 요양원 전체를 뒤바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갖고 올 그룹이.


 애초엔 감옥에 가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을 전혀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요양원의 처사에 반발해서였다. 감옥의 간수는 적어도 죄수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진 않으니까. 다시 말해 메르타와 그녀의 동료들은 어린아이로 길들이려는 요양원의 행태에 지쳤던 것이다. 


 메르타가 바르브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젊은 것은 노는 게 뭔지 도통 몰라! 어린아이들도 잔치를 하면 밤새 놀고 그러잖아! 우리에겐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거야."

 천재가 입을 열었다. "규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야."(p. 525)


 그건 그들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원 출신 갈퀴는 각종 꽃과 허브를 길렀다. '천재'라 불리는 오스카르 크루프는 온갖 물건들을 발명했다. 사서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여성 모자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었던 스티나는 회화에 몰두했다. 평생 은행에서 일하다 은퇴한 안나그레타만이 다소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정해진 궤도만 따라 살던 사람에겐 위반이 더 큰 의미와 즐거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므로. 그리하여 그들 모두 메르타에 뜻에 동조, 감옥에 가기 위하여 범죄를 지으려 했다.


 감옥, 그 곳은 평범했던 그들의 인생에서 무진장 멀리 있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스스로 간다고 하는 것은 구획된 삶에서 탈주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 탈주를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행위라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화단에 심어 놓은 꽃처럼 사회가 정한 위치에서 그가 부여한 정체성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이 형성하는 사회적 정체성의 중력으로 어느새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모르게 된 우리들은 사회가 씌어준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여기며 벗어날 줄 모른다. 탈주란 그 예속의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한 자리에서 뿌리 내리려는 움직임이기에 주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탈주의 강조를 위하여 보통 사람들의 비정상의 장소로써 '감옥'을 가져왔을 것이지만 그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메르타 일행이 막상 감옥에 가보니 요양원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바르브로가 있다면 감옥엔 리사가 있듯이, 어디서나 개인에게 주체의 역량을 빼앗고 명령을 잘 따르는 아이로 길들이려 하는 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으로 작가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작은 실천이라도 하다보면 탈주는 이뤄지는 것이며 장소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즉 메르타와 '노인 강도단' 동료들이 모여서 범죄를 모의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노인들이 돼보는 거야.(p. 54)


 정말 그들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서의 그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노쇠한 몸에게 어디서든 공격이 이뤄질 수 있는 감옥은 그야말로 공포의 장소다. 하지만 메르타 일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옥은 오히려 메르타는 더 원대한 꿈을 꾸고 천재는 다른 사람의 범죄 방법을 배우며 몸을 젊게 가꾸는 등, 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토양이 될 뿐이다.


 이처럼 요양원의 금지된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는 이미 자기 내부에 있다. 안주하지 않고 탈주를 감행할 때 열쇠 또한 이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소설 초반, 가장 먼저 능동적인 주체가 된 메르타가 하필이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훔치게 되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러한 탈주를 강조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미리 형성되어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성별, 인종별, 종교별 그리고 연령별. 저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데서 오지 않은, 누군가 주입한 이미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거기에 따라 판단한다. 우리는 이런 걸 선입관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메르타 일행이 고가의 명화 두 점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람들의 선입관 덕분이었다. 노인은 약하고 수동적이라 범죄 행위 같은 건 감히 꿈도 꿀 수 없다는, 이러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선입관이 경비원으로 하여금 메르타 일행을 범행 현장에서 뻔히 보고도 그냥 가게 한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의 선입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고 보면 메르타 일행이 하필이면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범죄 영화에서 노인들은 은행 같은 곳에서 범인들의 총구 앞에 덜덜 떠는 존재이거나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활약하게 만드는 계기였지 이렇게 범죄 행위의 주축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메르타 일행이 저지르는 것과 같은 강탈 행위에선 더욱 그랬다. 갑자기 횡단 보도 위로 넘어져 주인공의 활약을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작가가 허다한 범죄 중에서도 절도와 은행 강도 같은 강탈 행위를 가져온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걸로 영화가 노인에게 반복적으로 형성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통렬하게 깨뜨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메르타의 생각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p. 45)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도 사회가 씌어 놓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지만 타인을 볼 때도 가면인 줄 모르고 진짜 얼굴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어리석음 속에서 우리는 기성복처럼 양산된 가짜 얼굴에 안주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맨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사회가 이식(移植)한 자리를 마냥 있어야 할 내 자리로 알고 살아가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평생 누군가 씌워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또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소설로 그 가면을 벗기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진짜 얼굴이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탈주를 강조한다. 탈주란, 다름아닌 그 가면을 벗기는 행위이니까.

 스티나가 덧칠한 것을 벗겨내자 비로소 진짜 명화가 드러났던 것처럼.


 노인의 야망을 노욕이라 부르는 것도 선입관이다. 어떤 나이든간에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해선 안된다. 탈주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듯 나이 또한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 없이 사람은 다만 그 자체로 이해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겉모습이, 거기에 덧칠된 선입관이 점점 본질을 압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성별과 인종, 국적과 계층 그리고 세대에 있어 그런 것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오고가는 혐오와 적대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말들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거기 있는 단 한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입관에 물든 가면을 벗기고 그 사람만의 진실된 얼굴을 보려고 해야 한다. 메르타의 탈주는 그 직시(直視)를 위한 궤적이다. 그러므로 더욱 열렬히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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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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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무수한 시행착오의 집적이다사랑도   하나다.

 언제고  번은 부고장을 들고  있는 실연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나는 사랑에 능숙해서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허세이거나 진짜 사랑을  번도 못해  자다  번도 연인에게 자신의 진심을   적이 없는 사람만 그렇게 말할  있다사랑을 종종 심장에 비유하는  심장을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과 같은 불안과 공포 또한 의미하 때문이다그렇게 된다 수밖에 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가 유지태의 절규를 통해 잘 가르쳐주었듯이, 사랑은 변하기 때문이다연애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한낮이고 봄날일  없다어느 순간 밤이 되고 겨울이 온다적막하고 스산한 겨울의 해변에서   추억의 바다에서 떠밀려온 미역 줄기와 같은 사랑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서성이는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찾아오고야 만다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 또한 아주 아프게 깨닫지 않았던가사랑에는 엄연히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그 끝에서 사랑은 기억이 된다. 그렇다고 사랑이 끝나진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익사체다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꿈에서 깨고 나서야 꿈이란  깨닫는 것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있는 순간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사랑이 곁에 없을 때라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사랑은 그렇게 뒷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롭다부재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다니...

 없는 있다.

그렇기에 연애의 기억은 사막이나  위의 발자국이 되지 않는다그건 그대로 화석이 된다공룡의 화석이 그러하듯이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그것도 실패처럼 사랑의 전모를 기억의 실로 둘둘 감고서.


 자의든타의든 번은 발굴된다실패를 돌려 기억을 줄줄 풀고자 한다그렇게 밤과 겨울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사랑의 주검을 해부대 위에 올려 놓는다메스를 갖다 대는 최초의 동기는 혼란이다내겐  많은 질문이 남았는데 어느  하나 해답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야 했는지어쩌다  지경이 되었는지내가  잘못해서 이리  건지아니면 상대가 원래 나쁜 사람인 탓인지 등등 대답을 찾기 위해  부지런한 부검의 되어 꼼꼼이 살핀다봉인된 기억의 육체를 가르고 등뼈와 같은 연애의 연대기와 장기처럼 놓여져 있는 이런저런 사건들그리고  모두에 촘촘히 퍼져있는 신경과 같은 너와 나의 말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찝어 들고선 관찰한다소설 ‘연애의 기억 그와 같다




 그런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거기서 부검의는 케이시 이다진짜 직업은 변호사이지만어쨌든 우리와 마찬가지로 케이시 폴도 기억의 실타래를 풀게   질문 때문이었다소설의 첫문장이 그것을 나타낸다.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겠는가아니면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겠는가? (p. 13)


 케이시  말한다우리 대부분은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 소설의 원제는 ‘THE ONLY STORY’이다.)삶에서 오직  가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있고  만한 가치 있는 이야기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바로 사랑이다그건 우리가 풀어야 삶이 가진 유일한 숙제다 밖에 다른 것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십자말 풀이에 불과하다.


 하여폴은 실을 푼다대답을 찾아서그건  묶음으로 모인다소나타 형식처럼 소설이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파트의 제목은 하나’, ‘’, ‘으로 단순하다그런데 인칭이 파트마다 달라진다. ‘하나에선 ‘ 되고, ‘에선 ‘ 되며, ‘에선 ‘ 된다얼른 보면 인칭을 파트 제목에 맞춘 인상이다물론 이유가 그리 단순할 리는 없다. 연애의 기억에서 사랑은 현실과 대립되어 존재한다케이시 폴의 사랑 또한 그렇다그는 자기 또래의 자식을 두고 있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거기다 폴은  아홉 살로 미성년이런 사랑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아마도 반스가 이런 파격적인 사랑을 설정한 데는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하나는 현실 앞에 취약한 사랑의 형태를 통해 사랑과 현실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사랑이 독자 또한 이상하게 보일만큼 사랑의 모습이 너무 정형화되었다는  나타내려는 것이다소설에서 수전은 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탄성이 있어희석되는  아니야늘어나줄지 않아.’(p. 102). 그러나 때로아니 자주우리는 사랑에 전혀 탄성이 없다고 여긴다마치 특정 사람에게만 사랑이란  가능하다는 듯이.) 게다가 폴과 수전이 사는 ‘빌리지 아주 보수적인 마을로 수전의 유일한 친구 조운처럼 남과  다르게 살면 바로 배척당하는 곳이다현실은 이웃의 경멸과 폴의 부모 얼굴 또는 수전 남편 매클라우드의 폭력으로 번갈아가며 사랑을 위협해 온다.


 그러나  어떤 것도 폴의 사랑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그는 강한 성벽을 가진 군주처럼 자신의 사랑을 보호한다. ‘라는 1인칭은 그런 강한 사랑을 암시한다폴은 어떻게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이토록 강한 사랑을   있었을까하지만  대답을 찾아가노라면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란  알게 되는 까닭이다


 첫사랑은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어떻게 그러지 않을  있겠는가압도적 현재형으로다른 사람들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p. 137)


 그러나 사랑의 달콤함에만 취하는 자는 그걸 모른다타격이 통증을 통해 몸의 존재를 알리듯고통이 수반되어야 깨닫는다사랑의 상실이 사랑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현실의 공성전은 멈추지 않는다사랑을 위해 빌리지를 떠나 헨리 로드에서 드디어 둘이 함께 살게 되었지만 수전은 돌연 알콜 중독에 빠지고 폴에게 거짓말을 잇달아 하는가 하면 나중엔 폴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마저 걸린다.(수전이 이렇게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돌연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사랑이 이처럼 시험당하기 쉽다면 그만큼 연약한 것이니 이를 강조내기 위해 그렇게 했을 지도 모른다.) 폴은 점점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속에 아픈 가시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시를 품어야할지 도려내야할지 그는 알지 못한다첫사랑을   그는 능동적이었다현실그것의 총체인 삶은 오로지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폴은 점점  수동적이 된다삶이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된다수전은 폴에게 언젠가 이런 말을  적이 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운 거야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가운데 하나지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p. 74)


 폴은 그런 장소를 찾았다고 생각했다수전은함께 테니스를   끝까지 공을 따라가 완전하게 상대편 코트로 쳐냈던 것처럼삶도 차분하고 질서정연하며 신뢰할만 했기에 자기처럼 네트에  붙어 불안하고 충동적인 파트너에게 가능한 최선의 백코트 지원자(p. 70)였으니까헨리 로드  정점이라 여겼다


 우리의 사랑을 향한  태도는 독특하게 고지식했다.-사실 독특하게 고지식한 것이 모든 첫사랑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사랑의 확실성이 자리잡았으니이제 삶의 나머지가 그것을 둘러싸고 자기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것이라고 확신했다.(p. 66)



 하지만 수전의 삶이 폴의 생각과 전혀 달랐듯수전도 안전한 장소는 되지 못했다. 조운처럼 그도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했다어쩌면  때의 수전 역시 자신을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폴의 존재는 차츰 위축된다그것은 폴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타인에게   번도 수전의 애인이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무심코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이런 대사가 떠오를 정도로.


 “ 말을 못해 남자가  사람이다 남자가  애인이다 말을 못하냐구!”



 사랑은 연약해진다현실의 차디찬 냉기 앞에서 육체의 온기를 서서히 빼앗기듯 마모되어 나간다그런데 그와 동시에  속에 굳게 또아리 틀고 있었던 자기중심주의 썰물처럼 빠져나간다사랑이 점차 실망과 위기불안과 피로의 대상이 되어가는  보면서 폴은 어느덧 ‘ 떠나 ‘ ‘ 자리에 있게 된다거듭되는 인칭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암시다사랑에 대한 정의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이 어디까지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타인의 자리에 서서 타인의 눈과 마음으로 그를 헤아리고 그를 위할  있을 때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있다는 그게 사랑이 욕망과 구별되고 스토킹이 사랑이   없는 이유다.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사랑을 사유라고 단적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폴이 ‘ ‘ 되어 자신의 사랑을 사유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  있지 않을까? 연애의 기억이라는 소설 자체가 그렇게 되었을  마치  과실처럼 비로소 나왔다는 것도 이걸 어느 정도 시사하는  같다.(소설 전체는 수전의 사후에 폴이 자신의 사랑을 회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문장에 대해 대답을   있을 듯하다그것에 대한 진짜 대답은  사랑이 어떤 것이냐에 달렸다는 것을. 앞서 내가 사랑은 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했던 것은 이 사랑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를 벗어나 너와 그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사랑. 그런 사랑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련다. 우리가 계속 사랑의 부검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랑이 변하기 쉽고 끝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이건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아무튼 모든 것엔 끝이 있다. 그런 끝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작가가 바로 줄리언 반스다. 그 환멸의 작가손에  해골을 보며 자신이 이토록 고뇌하고 갈등한 끝에 복수를 하더라도  또한 죽음에 삼켜져 결국엔 무의미하게  거라는  너무나  아는 햄릿의 후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사랑도, ‘시대의 소음처럼 예술도 결국엔 시지프스의 형벌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사랑과 예술이 끝이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을  있는가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이것을 쓰면서 반스는 과연 소설 속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때로 삶은 잔인한 아이러니를 선사한다.)부터 그는 내내 아주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시야로 그것을 따져왔다.(그것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가 보여주듯이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더 집요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제아무리 쇼스타코비치가 위대한 음악을 남기더라도 언젠가는 시대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시대의 소음’, p.257)누구도 무엇도 예정된 운명을 피할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나왔던  그대로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아니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문제는  닫힌 이다존재가 유한한 이상 우리는 패배의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아니 우리가 물어야  질문은 오직 하나다폴이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이야기만이 가능하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그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오직 하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패배에 그저 길들여질 것인가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너머를 꿈꾸며 희망을 찾아 다닐 것인가?'


 맞다 질문은 그대로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반스에게 환멸은 끝이 아니다. '망할'이라고 내뱉기 보다 '그래서?'라는 의문문을 제시한다. 그에게 환멸이란 새로운 시작을 여는 문인 것이다. 그는 탐험가가 되어 찾는유한의 숙명을 뛰어넘을  있는 무언가를계속  다른 문을 열어 젖히면서.


 이번엔   근원적인 지점에 이르렀다 전까지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가올 부재를 불길하게 예감하며 말을 했는데 이번엔 아예 부재 이후 그것을 관통한 지점에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수전의 죽음 이후라는 시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이후에도 뭔가가 존재할  있을까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일까?


 긴 답은 너무 시간을 잡아먹어 해 줄 수가 없었다. 짧은 답은 너무 고통스러워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심이 무엇인가, 마음이 과연 어떤 식으로 상처를 입는가, 그 다음에는 거기에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다.(p. 375)


  그래서 반스는  소설에 사랑을 데리고 왔다폴이 수전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게  것처럼사랑은 부재를 통해서 지속하는아니 그것을 통해  커다란 생명력을 얻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사랑의 가치란 언제나 상실한 뒤에 더 커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이토록 취약하고이토록 우왕좌왕 서투르며나날이 혼돈과 불안이 거듭되는 사랑임에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기억을 통해 나를 넘어 더 확장되고 멀리 뻗어나갔다. 수전의 남편에게 더이상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된 것처럼, 사랑은 또 다른 걸 낳았다. 


 이런 연속적인 흐름 가운데 어딘가에서 그는 매클라우드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매클라우드를 용서하지는 않았지만-그는 용서가 증오의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글거리는 반감과 밤 시간에 터져 나오는 분노가 어쩐 일인지 의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p. 307)

 

  보다 원숙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했고 부모를 비롯한 대립하던 이들과 화해하도록 했다. 그런 폴에게 끝은 있지만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

 있는데,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폴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은 더이상 비통의 순간이 아니다. 다만 고요한 작별이다. 끝의 허망함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정도로. 


 내 마음을 사랑과 상실에, 재미와 통탄에 묶어둘 수 없었다.(...) 나의 여생이, 비록 이 모양이지만, 그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지만, 나를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p. 380)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건 줄리언 반스의 결론이기도 하다. 실제 아내의 죽음과 픽션 속 수전의 죽음을 관통한 끝에 다다른 환멸의 종막. 거기엔 사랑을 통한, 아니, 기억으로 재생되는 '사랑의 사유'를 통한 초연이 있었다. 그 모든 불길한 예감과 성급한 낙담으로부터의 해방. 바로 그걸 사랑이 한 것이다. 그 사랑으로 패배에 길들여질 필요없이 죽음 너머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꿈꾸며 존재의 의미를 채우고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니 어떻게 나 또한 사랑의 부검의가 되라고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애의 기억'은 단순히 연애 소설만은 아니다. 유한한 우리가 언제나 묻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오직 하나의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소설이다. 죽음마저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금 이 순간, 문득 짐 자무시의 다음과 같은 영화 제목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운 것 보다는 더 하고 더 괴로워하는 게 낫다.

  '연애의 기억'은 사랑의 순전한 긍정이요, 끝에 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라는 줄리언 반스의 권유 혹은 유혹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 유혹에 굴복할 것을 바라고 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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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0-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잘 써서 똑같은 책을 읽은 사람에게 달콤한 열등감을 안겨 주시나요 ㅎㅎㅎㅎ 으하하하.....ㅠ

헤르메스 2018-10-25 21:43   좋아요 0 | URL
앗! syo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 과찬이세요. 사실 열등감은 늘 저의 몫이니까요. 하하하^^;

syo 2018-10-26 14:30   좋아요 0 | URL
무려 헤르메스님께 열등감을 안겨줄 수 있는 괴인(?)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미쳤어, 미친 세상이다....

헤르메스 2018-10-26 20:53   좋아요 0 | URL
그 괴인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가면라이더에 나오는 괴인 연합 같아요. 그 중의 총수급이 syo님이라면 믿으시려나요? ^^

syo 2018-10-28 10:31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읽고 리뷰를 써볼까 머리를 쥐어짰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썼나 검색했다가 헤르메스님 글을 보고 저는 리뷰를 포기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 제가 총수라니요.... 괴인연합 너무 날로 잡아드시려는 거 아니세요 헤르메스라이더님? ㅎㅎㅎ

헤르메스 2018-11-01 20:44   좋아요 0 | URL
그 때는 제가 원기옥 같은 걸 먹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더에게도 때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때가 있죠. 보통 땐 그저 바이크도 잘 다루지 못하는 초짜 라이더일 뿐 ㅠ ㅠ
 
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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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세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



 윌리엄 세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현대 유명 작가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재해석하여 자기만의 소설을 쓰는 '호가스 세익스피어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어떤 작가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지 명단을 미리 알렸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던 작가는 바로 '요 네스뵈'였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너무나도 아끼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요 네스뵈는 권력을 향한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맥베스'를 맡았다. 늘 사랑으로 아파하고 그로인해 고난을 자처하는 해리 홀레를 떠올린다면 리어왕이 좀 더 그와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울과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리 홀레를 생각한다면 맥베스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파멸의 궤적을 그리는 데 있어 능한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으니! 그러고 보면 '맥베스' 처음에 등장하는 맥베스가 극 중에서 첫 전투를 치르게 되는 이가 바로 노르웨이의 왕 '스위노'다. 혹시 이것 때문에 요 네스뵈가 맥베스를 맡게 된 건 아니겠지?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 작가라서. 안다. 말 도 안 되는 상상이란 걸.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흰 소리는 그만하고 어쨌든 드디어 수 년의 기다림 끝에 그 작품을 만났다. 그런데 이런! 제법 두툼하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은데, 어쩌다 이렇게 분량이 늘어났을까? 그 궁금증 때문에라도 나는 서둘러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요 네스뵈는 일단 맥베스의 골격을 그다지 바꾸진 않았다. 스위노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덩컨 왕에게 코도의 영주로 임명되고, 갑자기 나타난 세 마녀를 통해 자신이 장차 왕이 될 것이며 버남 숲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가 상대라면 절대 파멸하지 않을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되는 것도 그대로 나온다. 물론 자멸하는 것도. 인물들 역시 원래 희곡에서 맡은 역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네스뵈의 '맥베스'가 새로운 이야기로 읽히는 것은 그것을 아주 현대적인 이야기로 잘 옮겼기 때문이다. 희곡의 무대가 되었던 중세의 스코틀랜드는 70년대의 도시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도시란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전직 경찰청장 케네스 때문에 부패와 마약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희곡에선 스코틀랜드 왕으로 나왔던 덩컨은 그런 부패와 마약 조직을 일거에 소탕하여 깨끗한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신임 경찰청장이다. 소설의 맥베스는 희곡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마약 시장을 카테(희곡에선 세 마녀를 거느린 여신 같은 존재였는데, 소설에선 마약 조직의 수장이다.) 조직과 양분하고 있던 노스 라이더 조직 급습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그 와중에 노스 라이더 조직의 수장 스위노는 사살된다.) 덩컨에 의해, 희곡에서 코도의 영주가 되었던 것과 똑같이 조직범죄수사반장이 된다. 그러자 헤카테가 거느린 세 마녀와 같은 존재들(그들은 헤카테 아래에서 마약을 제조한다.)이 나타나 희곡과 같은 예언을 들려준다. 세 마녀는 헤카테에게 돌아가 맥베스 마음에 일단 씨앗은 심어 놓았지만 과연 맥베스가 헤카테 생각대로 움직일 것인지 의심한다. 그런 그들에게 헤카테는 맥베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레이디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레이디는 맥베스가 결혼한 여성으로 그녀는 인버네스 카지노의 사장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이름이 아니라 레이디로 나오는 이유는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도 그냥 '맥베스 부인'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줬어도 별 상관없었을테지만 이만큼 요 네스뵈는 원작의 골격을 유지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아무튼 맥베스는 그 예언을 레이디에게 들려주고 레이디는 맥베스에게 덩컨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요 네스뵈는 레이디를 맥베스만큼이나 권력 욕망에 물든 존재로 그린다. 그런데 여기엔 연유가 있다. 과거에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잘못된 선택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다 보니 권력의 집착에서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레이디의 잘못을 맥베스 역시 하게 된다. 처음엔 사소한 오판에 따른 선택이었던 것이 나중엔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의 올무가 된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한낱 낯선 이의 예언이 나중엔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신탁이 되어버렸던 맥베스처럼.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맥베스' 역시 욕망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욕망을 자신의 인간성과 맞바꾼 자의 이야기다. 그건 그가 원하는 자리에 가면 갈수록 자신의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드러난다. 다른 이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분노가 되지만, 맥베스의 죽음은 찰라로 묘사되며 누구에게도 잔영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마치 원래부터 없던 사림인 것처럼 된다. 요 네스뵈는 이것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맥베스가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살해하는 인물은 알고보면 그 때 가지고 있었던 맥베스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덩컨은 경찰로서 맥베스가 되고 싶은 바람직한 경찰의 상징같은 인물이고 뱅쿼(희곡에선 맥베스와 함께 세 마녀의 예언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진짜 아버지도 아니면서 진짜 아버지보다 더한 부성애로 약물에 중독되었던 맥베스를 파멸에서 건져내고 사람으로 만들어준,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기회를 가져다 준 사람으로 인간으로써의 맥베스가 가져야 할 사람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둘을 참혹하게 살해하여 원하는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는데, 이건 그대로 권력을 차지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경찰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는 괴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맥베스는 경찰청장이 되고 난 후, 더욱 약효가 강한 마약을 찾게 된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크기에 비례하여 더 중독성 강한 약을 찾는 것만 같다. 여기서 약은 이중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약의 중독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사소한 잘못된 선택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맥베스의 삶이 그랬듯이 처음엔 타의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면 이제 자의에 따라 괴물로 남는다는 것이다. 약은 명확하게 괴물의 상징이다. 사람의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을 억제하고 오로지 욕망의 충족만 추구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는 맥베스에게 잠을 박탈하는 것으로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그를 나타내었다. 소설에서의 마약 중독은 마약이 늘 각성 상태에 있게 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희곡에서 잠을 상실한 것을 빗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잠의 상실이 소설에서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더프가 맥베스를 죽이기 위해 찾아갔을 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게 뭐야?"

 "정의와 우리의 잠을 돌려 받는 것"(p. 430)



그런 마약이 팽배해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나 타인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모두 마약과 멀리 있다는 것도 이것을 방증한다. 한 쪽에는 괴물이 있고, 다른 한 쪽엔 사람이 있다. 맥베스의 반대편엔 더프(희곡에선 맥더프)가 있다. 희곡을 읽어 본 사람은 이 더프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연인 케이스네스(희곡에서 케이스네스는 그저 더프와 뜻을 같이 하는 스코틀랜드 귀족으로 나왔는데, 요 네스뵈는 재밌게도 소설에서 연인으로 만들어버렸다.)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욕망보다 사랑과 책임을 더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케이스네스를 향한 욕망 또한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사랑 때문에 과감하게 접을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쳤어. 내가 살 수 있도록 당신을 희생했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랬듯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내 천헝이라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걸 바치지는 못할망정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내 이기적인 욕심에 아이들에게서 가족을 빼앗겠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어머니의 무덤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어.(p. 313)


 올곧게 욕망의 길만 따랐던 맥베스와는 정반대의 남자. 하지만 아직 맥베스를 만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저 세익스피어가 맥베스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주제를 현대적으로 잘 리메이크 하고 생생한 현실과 심리 묘사로 잘 살을 붙여 더욱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만 말해두려 한다. 부피가 이토록 두터워진 연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등장 인물들을 리얼한 삶의 현장 위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그만한 부피로 핍진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성공했고 끝까지 몰입해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액션 장면도 많아 더욱 지루할 틈이 없다. 맥베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요 네스뵈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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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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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1 2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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