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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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이사를 했다. 마침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는 시점과 맞물리는 바람에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머물 곳 하나 마련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작별'을 읽으면서 심히 공감하게 된 건 그런 내 사정이 단단히 한 몫했다. 여기엔 본상을 수상한 '작별'에 수상작 후보로 선정되었던 다른 여섯 편의 단편까지 더하여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물론 모두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른 지면으로 발표되었을테지만 어쩐지 내게는 마치 모든 작가가 미리 합의라도 하고 쓴 것 마냥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다들 한 목소리로 최근에 내가 뼈져리게 경험한, 정처할 곳을 찾지못한 이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사로 인해 너무 힘겨운 경험을 한 탓에 그렇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정이야 어쨌든 '작별'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어디에서도 쉽사리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로 나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정주(定住)의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유랑(流浪)이 천명(天命)이었던 원시 시대 때부터 인류 폐부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하필이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가지고 상상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으리라. 유토피아가 영구적으로 머무르고 싶은 곳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듯이, 내 한 몸 오래도록 편안히 뉘일 곳을 가지는 건은 고래(古來)로부터 많은 이들이 품어온 소망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 욕망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보다 오래 머무르고 싶어한다. 비단 그건 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직업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란 그걸 잘 허락하지 않는 게 추세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를 '액체 근대'라고 불렀듯,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우리가 안심하고 엉덩이를 단단히 붙이고 있을만한 견고한 것들은 점점 더 많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의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절반을 넘었고 장사 좀 될라치면 건물주에게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세들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느새 올라버린 집값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발로 밀어버린 새알처럼 우리는 느닷없이 자신의 둥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화 속에 자주 나왔던 장면과 흡사하다. 발판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문득 내려다 보니 어느새 발판은 사라져 있고 남은 건 다만 추락밖에 없었던 장면.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그와 다를까?


 그렇기에, '작별' 소설집의 단편들이 '별안간 찾아온 변화'를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별(한강)'의 주인공은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손(강화길)'의 주인공 역시 불현듯 들려온 '퍽'이란 소리에 일상이 흔들린다. 그녀의 아이 역시 갑자기 사라진다. '희박한 마음(권여선)'에서 곤경을 불러오는 계량기의 소음은 언제 터져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당하는 난처한 상황 또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간이 갑작스레 닥쳐온다. '동네 사람(김혜진)'에서 주인공 일행이 당했던 사고와 곤경 또한 아무런 예고 없이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소돔의 하룻밤(이승우)' 역시 어느 날 문득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나그네로 인해 사유의 다양한 결이 초래된다. '언니(정이현)'에서 인희 언니가 겪었던 부당한 일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의 타격이었으며 'Light from Anywhere(정지돈)'에서 양코와 태순마저 우연히 인간환경계획연구소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 인연은 그들 모두에게 걸었던 기대와 바랐던 미래에 대한 배반을 선사한다.


 모든 소설의 파국 혹은 변화가 이처럼 순간으로 이뤄지는 건, 출근하다가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언감생심인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작별'에 나오는 현수 씨처럼 하루 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것 뿐이다.


 버티는 요령이 있어요,라고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엔 하루에 한 끼씩 맨밥만 먹는다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가족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낮 시간은 줄곧 방에서 보내며 짧은 산책은 이른 새벽에만 한다고 했다.(p. 49)


 피부가 모조리 노출되어 바깥 자극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 그것을 막아줄 껍질을 바라듯, 이토록 내일을 쉽사리 기약할 수 없는,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원빈이 내뱉었던 대사처럼 오늘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에 더욱 정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우리만이 아니다. 세상 또한 그러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라. 다시금 여기저기서 편가르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제 이념의 힘이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인지 지금은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자를 기준으로 '여기 여기 붙어라!'가 횡행하며 무리가 지어지면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처럼 상대방을 혐오하고 적대를 공공연하게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종과 종교 그리고 이주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지고 있다.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결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종종 언급하듯이, 돈과 권력이 바탕이 된 새로운 중세적인 신분제와 종교 근본주의 그리고 인종적 우월성이 다시금 거세게 부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건 사실 근대의 계몽주의 이후 인류가 이성에 힘입어 철폐하거나 와해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을 향한 복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무리를 이루려 하는 이런 거대한 흐름 앞에서 그들과 다른 타자가 된다는 건 이제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 '작별' 단편집에 실린 모든 소설들은 그런 상황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같이 다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자리가 없는 존재들. 직장에서 이렇다할 인간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작별'의 주인공은 물론, 시골로 내려와 안면 없던 마을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손'의 주인공이나, 레즈비언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희박한 마음'의 할머니 데런, 최근 이사를 와 동네 사람들과 새롭게 교제를 시작해야 하는 '동네 사람'의 주인공들'소돔의 하룻밤'에서 소돔에 사는 롯, '언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 중문과에서 유일하게 전문대에서 편입한 인희 언니'Light from Anywhere'에서 변화의 바람을 찾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양코 모두 그렇다. '손'에 나온 말로 표현하자면 '튀기'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존재감은 점점 증식되는 무리 앞에서 아무래도 권여선의 단편 제목 처럼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작별'에서 눈사람이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적으로 그걸 나타내고 있다. 눈 내리는 밤의 눈사람은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다. 거기다 눈사람이 된 주인공의 육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부서져 간다. 한강은 재밌게도 눈사람이 된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다름아닌 모든 인간적인 감정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러니까 사랑, 자상함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감정들 말이다. 주인공은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차츰 부서져간다. 이는 무리 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자는 오직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지우고 사물이 될 때에만 지속이 가능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에 다름아니다. 이건 다만 문학적 연출은 아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자기보다 약한 이를 한낱 사물로 대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작별'의 현수가 당했던,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것도 그렇지만 요즘 여기저기서 흔하게 들려오는 이런저런 갑질 사태야말로 대표적인 '타인의 사물화'가 아니던가. 강화길의 '손' 마지막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주인공은 자신에게 감도는 이물의 내음을 없애려면 몽글몽글한 콩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콩이란 어떤 존재인가? 제삿상에 바치기 위해 걸죽하게 하나가 되도록 끓이고 빻아야 하는 존재다. 이는 곧 독립적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그렇고 그런 사물 중 하나가 되는 걸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손'이란 존재는 무리 중 하나가 되라는 강요에 대한 저항이며 그 무리를 파괴하고 고유한 개체성을 건져내는 존재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 손이 뭔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악귀다, 악귀.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 그 년이 없는 날 귀한 해콩을 삶는 거다."(p. 62)


 '희박한 마음'의 데런 역시 그런 사물화를 당했다. 이 단편에서 데런은 오락가락하는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그건 한 사건의 충격이 가져온 여파다. 먼 과거의 대학생 시절, 디엔과 함께 학생 식당 뒤편에서 담패를 피다 한 복학생이 여자가 담배를 핀다고 역정을 내면서 빨리 끄지 않은 디엔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그 느닷없고 어이없는 공격에 그러나 데런은 디엔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복학생의 손찌검은 데런과 디엔의 인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대로 그건 사물화였다. 그런데 이런 남성에 의한 갑작스런 사물화 공격은 할머니가 된 지금 또 찾아온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조금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칠 수 없는 계량기 소음으로 더욱 웅변된다. 이런 항구적인 흐름 속에서 데런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물이 된 것이다. 데런과 디엔이 서로의 꿈 속에서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존재로 나왔다는 게 이걸 증거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데런이 그 꿈에서 한 선배로부터 디엔이 죽었다는 걸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도 그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배의 요구는 사실 데런과 디엔이 사물이라는 걸 고백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물화'는 '작별'의 눈사람이 그러하듯이 아무 저항 말고 가만히 그대로 있으라는 압박에 다름아니다. 김혜진의 '동네 사람'에서 주인공들이 갓 이사 온 동네에서 한 할머니를 차로 부딪힌 것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에게서 받는 압박이 딱 이렇다. 여기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너'다. '나'는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들과 되도록 갈등을 피하고 두리뭉실하게 섞이는 걸 선호한다. 기꺼이 사물이 되려는 사람인 것이다. 반면 '너'는 독자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디서나 내며 섞이기 보다는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사건을 이용하여 주인공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건 '너' 때문이다. 평소 자신의 개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다녔던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왜 너는 사물로 있지 않느냐는 집단적 타박인 셈이다. 이는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에서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나그네에 대해 소돔 사람들이 몰려와 요구했던 것에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정이현의 '언니'의 인희 언니 역시 동일한 사물화를 당한다. 편입생이라 학교에서 존재 가치가 가장 엷은 그녀를 지도 교수가 그저 번역 기계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사물화는 강자인 무리에게 있어서는 자기 존재 지속의 폭력이요 약자인 타자에게 있어서는 생존 방법이다. 물론 그 생존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닌 그저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이런 사물화를 방치할 수 없다. '작별'이 잘 보여준 것처럼 사물이 된다는 건 죽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역사적으로도 타인을 사물로만 대했던 체제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기도 했지 않은가? 개체를 그저 집단 속 도구적 사물로만 보는 파시즘의 대표적 존재인 나치가 벌였던 유태인 학살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복고주의도 따지고 보면 파시즘의 그늘이 짙게 투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런 비극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사물화에 저항하여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센 움직임이 너무 늦기전에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증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니' 후반에 나오는 인희 언니의 투쟁이다. 그는 교수의 악행에 맞서 1인 침묵 시위를 벌이는데, 아무 말 않고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작별'에서 주인공이 된 눈사람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이렇게 겉모습이 비슷하다 보니 사물이 되었던 '작별'의 그녀와 인간을 증명하는 '언니'의 인희 언니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인희 언니는 사물화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많은 눈치와 반대를 받고 그리 많은 호응을 얻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희 언니는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하여 자신도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벙커였다. 벙커는 세상의 모든 위험에게서 지켜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장 확고한 정주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런데 그런 벙커는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기생하지 않으려는 태도, 귀찮고 힘들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돌파해 나가려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형성된다는 걸, '언니'는 선명하게 그려낸다. 다름아닌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의 능동적인 증명이 한없이 가변적인 현실 속에서 홀로라 더욱 불안한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벙커인 것이다. 정주의 욕망은 발견이 아니라 형성을 통해 성취된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애오라지 자신에게만 기대어 삶을 경작해 나아갈 때,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마지막에서 푸념처럼 나왔던 미래 또한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이렇듯, '작별'이란 단편집은 서로 다른 작가가 서로 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시간에 발표했어도 비슷한 주제라는 하나의 선율로 노래하는 합창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얘기에 무리한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유를 차곡차곡 진전시키는 것이 가능한, 서툴게나마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쇄된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이런 내 말이 믿기지 않더라도 부디 '작별' 한 편만 읽지 말고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을 차례 대로 다 만나보길 원한다. 오늘의 사회란 누구나 손쉽게 눈사람과 같은 타자가 될 수 있다.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코 나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일상의 현실성을 잘 살린 강화길과 김혜진의 단편은 아주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당신 또한 알게 모르게 사물화의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강요 속에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생계가 걸리고, 가족이 걸리고, 미래가 걸린 문제라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감히 문학이 해답을 줄 것이라고 말하진 않으련다. 그러나 자신의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런 저런 화두를 던져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건 고민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고민일수록 순식간에 해답으로 데려가는 엘리베이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건 다만 천천히 하나하나 올라가야 하는 계단 뿐. 그렇게 자신의 기존 생각에 도전해 오는 화두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곰곰이 따져 보면서 사유와 경험의 진폭을 차츰 확장시켜 나갈 때 어느 순간 해답이 도래하리라 생각한다. 단편집 '작별'은 그런 계단이 되어 줄 것이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진정한 미래를 가져다 주는. 이것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쓴 글에 동의한다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믿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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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티드 캔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1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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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 활약한 영국의 추리 소설가 에드거 월리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킹콩의 원안이 되는 극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트위스티드 캔들'은 1905년, '네 명의 의인'을 데뷔한 그가 13년 뒤인, 191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3. 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트위스티드 캔들'은 탐정 역할을 하는 티엑스도 등장하고 밀실 살인 사건이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추리 소설 보다는 피카레스크에 속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무시무시한 악의를 내뿜는 '카라'라는 악당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존 렉스맨이라는 성공한 미스터리 소설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카라의 흉계로 인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차지하고 있다. 알바니아 출신의 카라는 엄청나게 부유한데다 명망있는 귀족이라 누구도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통해 돈도, 명예도 더이상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그가 악당이라고 의심한다. 그가 바로 경시청 최고의 형사, 티엑스다. 소설은 마치 소나타 형식처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두 번째 부분은 카라의 가련한 희생자가 된 렉스맨을 구하기 위한 티엑스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카라와 대결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은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수수께끼의 밀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해명되는 부분이 차지하고 있다. 전개가 고전 범죄 소설의 형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아서 조금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줄리언 시먼스의 작가에 대한 평가 그대로 여러가지 사건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비행기를 이용한 탈출이라는 꽤나 대담한 연출까지 선보이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사건 전개와 탐정과 범인 사이의 선명한 선악 구도에 더하여 빠른 전개로 흡인력 있는 작품을 더 인상 깊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영국에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무구한 렉스맨을 그토록 잔인하게 괴롭힌 카라의 동기가 흥미로운데, 그건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누구나 할 것없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렉스맨과 그 아내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로서는 꽤 이례적인 것으로 이로써 에드거 월리스는 현대에 일어날 범죄는 과거와 꽤 다를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티엑스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이지 불쌍한 눈 먼 맹수가 따로 없군." 티엑스는 답답하다는 듯 맨서스를 쳐다 보았다.

 "자넨 엄청난 범죄들이야말로 물질적인 욕망이나 구체적인 이익을 얻을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저속한 인간들은 말이지, 맨서스. 아내가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우리 영국인이 지니고 있는 민족성이네.(p. 100 ~ 101)


 제목의 '트위스티드 캔들'은 고문도구로 사용되는 양초를 뜻한다. 단순히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해 자행되는 고문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또한 세계 제1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으로 곳곳에서 이기주의로 인해 타인의 삶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약자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껏 유린하는 소위 제국이라 말하는 그 때의 강대국들은 거의 카라나 진배 없었다. 집요하고도 잔인학 악당 카라는 정말로 그런 나라를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로운 이 소설은 나처럼 고전 범죄 소설에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이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 같다. 여성에게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고 꼼짝 못하도록 협박하는 게 고작 키스라니, 사지 절단이 예사로 나오는 현대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겐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는 연출인데, 당시만 해도 엄청난 공격이었고 범죄였던 키스를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과도 같이 그만큼 우리가 타인을 침해하는 정도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도 든다.


  "두려움에 떨고 있군, 그래!" 카라가 홀랜드 양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선 소곤거리며 희롱했다. "이제야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지? 만약 소리를 지르면 다시 키스할 거야, 알겠나?"(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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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2-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정말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제가 잘 모르는 거고 갈수록 사람은 잔인해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소설을 보면 무엇을 얻으려는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자존심 때문이라니... 누구나 자신을 좋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다니, 그런 모습은 사이코패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소시오패스라고 해야 할지...

성탄절이네요 저는 그날이라고 다를 건 없지만... 오늘 하루 평화로우시길 바랍니다


희선

2018-12-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6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트위스티드 캔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1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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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 활약한 영국의 추리 소설가 에드거 월리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킹콩의 원안이 되는 극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트위스티드 캔들'은 1905년, '네 명의 의인'을 데뷔한 그가 13년 뒤인, 191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3. 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트위스티드 캔들'은 탐정 역할을 하는 티엑스도 등장하고 밀실 살인 사건이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추리 소설 보다는 피카레스크에 속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무시무시한 악의를 내뿜는 '카라'라는 악당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존 렉스맨이라는 성공한 미스터리 소설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카라의 흉계로 인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차지하고 있다. 알바니아 출신의 카라는 엄청나게 부유한데다 명망있는 귀족이라 누구도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통해 돈도, 명예도 더이상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그가 악당이라고 의심한다. 그가 바로 경시청 최고의 형사, 티엑스다. 소설은 마치 소나타 형식처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두 번째 부분은 카라의 가련한 희생자가 된 렉스맨을 구하기 위한 티엑스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카라와 대결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은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수수께끼의 밀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해명되는 부분이 차지하고 있다. 전개가 고전 범죄 소설의 형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아서 조금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줄리언 시먼스의 작가에 대한 평가 그대로 여러가지 사건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비행기를 이용한 탈출이라는 꽤나 대담한 연출까지 선보이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사건 전개와 탐정과 범인 사이의 선명한 선악 구도에 더하여 빠른 전개로 흡인력 있는 작품을 더 인상 깊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영국에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무구한 렉스맨을 그토록 잔인하게 괴롭힌 카라의 동기가 흥미로운데, 그건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누구나 할 것없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렉스맨과 그 아내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로서는 꽤 이례적인 것으로 이로써 에드거 월리스는 현대에 일어날 범죄는 과거와 꽤 다를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티엑스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이지 불쌍한 눈 먼 맹수가 따로 없군." 티엑스는 답답하다는 듯 맨서스를 쳐다 보았다.

 "자넨 엄청난 범죄들이야말로 물질적인 욕망이나 구체적인 이익을 얻을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저속한 인간들은 말이지, 맨서스. 아내가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우리 영국인이 지니고 있는 민족성이네.(p. 100 ~ 101)


 제목의 '트위스티드 캔들'은 고문도구로 사용되는 양초를 뜻한다. 단순히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해 자행되는 고문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또한 세계 제1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으로 곳곳에서 이기주의로 인해 타인의 삶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약자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껏 유린하는 소위 제국이라 말하는 그 때의 강대국들은 거의 카라나 진배 없었다. 집요하고도 잔인학 악당 카라는 정말로 그런 나라를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로운 이 소설은 나처럼 고전 범죄 소설에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이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 같다. 여성에게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고 꼼짝 못하도록 협박하는 게 고작 키스라니, 사지 절단이 예사로 나오는 현대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겐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는 연출인데, 당시만 해도 엄청난 공격이었고 범죄였던 키스를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과도 같이 그만큼 우리가 타인을 침해하는 정도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도 든다.


  "두려움에 떨고 있군, 그래!" 카라가 홀랜드 양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선 소곤거리며 희롱했다. "이제야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지? 만약 소리를 지르면 다시 키스할 거야, 알겠나?"(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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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영화
휘트니 크로더스 딜리 지음, 최지원 옮김 / 본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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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광들의 시대가 지나갔음인지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글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한 해에 천만 관객을 넘는 영화가 몇 편이나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긴 하지만, 소비의 대상일 뿐 진지한 연구나 성찰의 대상은 아니다. 인상 비평과 별점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게 거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본북스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이 특별히 반가웠다. 작가주의도 퇴조한 마당에 오직 한 감독에 대한 연구로 한 권의 책을 다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독이란, '웨스 앤더슨'과 '미카엘 하네케'다. 모두 영화쯤 본다는 사람에게는 아주 낯익은 이름일 것이다. 깊이 영화를 본다고 자부하는 이에겐 필견의 리스트에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대 영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작가주의에 어울리는 감독이기도 하다. 스튜디오의 고용 감독 길을 걸은 적도 없고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하며 그걸 자신의 작품 속에 내내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알기론, 적어도 우리나라에 출판된 책 중에 이 두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없었다. 웨스 앤더슨과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쓴 책은 이 두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그 책이 어떤 책이냐고?



 그건 바로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다. 이게 제목이다. 참 심플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서인데, 원래 제목도 그랬다. 작가주의 감독답게 감독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사여구 없이도 충분히 좋은 책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당당히 이 제목을 내걸었고 두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제목은 자신감의 표현이란 걸 알았다.


 웨스 앤더슨도 미카엘 하네케도 개인적인 추억담이 있어서, 어느 걸 먼저 리뷰로 쓸까 약간 고민했다. 뭐, 순서 같은 건 별 상관 없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게 웨스 앤더슨이니, 그 감독의 책부터 리뷰하기로 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얘기는 다 사설이었다는 거다. 책은 참 좋은데 이걸 다 설명하자니 분량이 너무 넘쳐나고 그렇다고 상세한 얘긴 생략하고 총평만 하자니 또 너무 부족하여 꼼수를 부려 이렇게 분량을 어거지로 채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색인까지 다 합해 426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모두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 파트는 총론 같은 것으로 감독에 대한 일반론적 해설이 있다. 그의 이력이라든지, 미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든지, 그런 총체적인 것을 두 편의 글을 통해 설명한다. 본격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는 그 뒤다. 두 번째 파트는 웨스 앤더슨이 지금까지 감독한 영화들을 모두 한 편씩 다루고 있다. 96년에 발표한 데뷔작 '바틀로켓'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단편 영화와 상업 광고까지 말이다. 한 마디로 그의 모든 영화에 대해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상세한 분석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인 것이다. 그러니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만나야 할 책이 아닌가 한다. 이쯤에서 개인적인 추억담 같은 걸 하나 덧붙인다면, 나는 그를 아직 유명해지기 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처음 만났다. 98년, 우리나라에 그의 데뷔작 '바틀로켓'이 비디오테이프로 나온 것이다. 96년에 나와 그렇게 커다란 흥행을 못했는데도 98년 나온 것을 보면,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이 그래도 영화광들에겐 꽤 풍요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틀로켓'은  지금은 물론 DVD 시절에도 나오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 때 처음 보고 너무나 독특한 이 작품에 매료되어 웨스 앤더슨이란 이름을 뇌리에 박아두게 되었고 그 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이후로 그의 팬이 되었다. 앤더슨의 영화를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이 '바틀로켓'과 '다즐링 주식회사'를 좋아하는데, 그건 첫 만남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가장 자유분방한 분위기라서 그렇기도 하다. 뭔가 좀 헐겁고, 뭔가 좀 방만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앤더슨의 세계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별 필요도 없는 얘길 해버렸는데, 오래전 그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가 갑자기 그리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터라 또 한 번의 꼼수를 부려 분량을 늘인 것이기도 하다. 글이 가볍고 별 내용이 없어 책도 그러하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모처럼 비평다운 비평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니. 책의 날개를 보니 영화 전문 서적을 꾸준히 발간할 모양이다. 루키노 비스콘티와 난니 모레티의 책이 무척 기대가 된다. 1인 출판사라고 하는데 부디 잘 되어서 계획한 책을 다 내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응원한다.(이런, 끝도 이상해져 버렸군.)


이 영화를 좋아해서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바틀로켓' 비디오 테이프 / 인증합니다.

오엔 윌슨과 루크 윌슨의 푸릇푸릇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비디오 표지에 '텍사스 소년들'이란 말이 세월의 간격을 느끼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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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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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정말 좋아한다. 이렇게 시리즈를 전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이유는 많다. 일단 캐릭터가 너무 좋고(그 중에서 앤지 제나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다.) 이야기가 다들 흥미로우며(시리즈의 마지막 '문라이트 마일'은 어쩔 수 없이 우울했지만) 마음에 훅 들어오는 문장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건 이 두 주인공들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는 고민을 하고 내가 그러는 것처럼 힘겹게 버텨가면서 그 고민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 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민이냐고?

 그건 당신이 최근 일어난 PC방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나 곧 결혼을 앞둔 어린이집 교사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 맘 카페 회원들에게 신상이 털리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끝내 자살해 버린 사건 아니면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 있는 세월호 참사를 보았을 때 드는 생각과 비슷하다. 이토록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세상이 온통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악의로 가득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켄지와 제나로는 늘 이 고민을 마주한다.


 대표적으로 '가라, 아이야 가라'가 그렇다. 한 아이가 실종된다. 무책임한 엄마에게서 자주 방치되고 학대 받는 아이였다. 아이가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아이의 외숙모만이 걱정하여 켄지와 제나로에게 찾아온다. 아이를 찾아달라고. 그런 부인에게 켄지는 말한다.


  "맥크레디 부인, 돈 낭비가 될 겁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이렇게 대답한다.


 "조카를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죠."(1권, p. 21)


 미국에선 매일 2,300명의 아동이 실종된다(p. 15). 그 중에서 300명의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p.16).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걸 2권에서 아주 아프게 확인한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처참하게 희생되어버린 몰골로. 켄지와 제나로는 아이가 관련된 사건을 가급적 맡지 않으려 한다. 그 사건을 통해 또 얼마나 무섭고 어두운 세상의 악의를 보게 될 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의 때문에 절망하여 자신 또한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라, 아이야 가라'에선 너무나 많이 보아버린 세상의 어둠 때문에 인간과 괴물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켄지와 앤지가 큰 호감을 갖고 있는, 아동 유괴 범죄 담당의 브루사드 형사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맡은 업무로 인해 자주 이성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는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만나게 되는 브루사드는 어떻게든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것만이 온통 까만 밤과도 같은 이 세상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버텨 나가고 있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그런 의미에서  켄지와 제나로, 브루사드를 비롯하여 '가라, 아이야 가라'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우리의 도플갱어들이며 그들의 길은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를 대신하여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내 손을 강하게 잡고 있는 어둠을 놓아버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대역이 된 그들은 고민하고 갈등하며 버티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켄지는 붕괴된 질서를 방치하고 있는 신을 원망하고 앤지는 조금이라도 구원이 될 수 있는 걸 선택한다. 부바는 일단 눈 앞의 악부터 제거하고 본다. 길이 이렇게 다른 건, 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하여, 누군가 대신 답을 해 줄 수 없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대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 또한 그러하듯이, 어둠을 몰아낼 여명이 쉬이 찾아오지 않는 까닭이다. 아니, 가면 갈수록 더 큰 어둠을 목도하며 그 앞에서 우리가 참으로 연약하다는 걸 절감하는 탓이다.


 이 소설에서 켄지와 앤지의 길이 그러하다. 믿었던 인물은 자신을 배신하고, 아이를 위해 최선이라 여겼던 선택도 아이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구원을 찾으려 뭔가를 하면 할수록 더욱 흐려져 버린 흙탕물을 마주할 뿐이다.


 "올해 워싱턴에서 생면부지의 엄마에게 딸의 양육권을 넘긴 판결이 나왔죠. 단지 생모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생모는 태어난 지 6주 된 또 다른 딸을 죽인 죄목으로 복역했어요. 딸 아이가 울어대자 화가 나서 아이의 목을 졸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바비큐파티에 갔다는 겁니다. 이 여자한테는 남은 아이가 둘 있었어요. 하나는 친조부모가 키우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수양 부모에게 있었죠. 그녀는 딸을 살해한 죄로 2년 밖에 복역하지 않았고 지금은 양부모에게서 뺏은 딸을 키우고 있어요. 양부모가 법원에 양육권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이건 실화예요. 찾아보세요."

 "말도 안 돼요."

 앤지가 말했다.

 "아니, 말 돼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미국이니까요. 모든 성인은 자기 아이를 산 채로 씹어먹을 전적이고도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2권, p. 215)


 어둠은 갈수록 강하고 우리는 늘 차라리 거기에 먹히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괴물이 되는 길과 사람으로 남는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 그로 인한 고통을 너무나 잘 아는 데니스 루헤인은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받아들여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스스로 생각토록 한다. 진정한 강함은 누군가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한 자발적인 각성 속에서 비로소 도래하기 때문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독자에게 바로 그런 것을 주려고 한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마치 스릴러 판, 단테의 '신곡'과도 같이 희망 없는 지옥의 순례이며 그 지옥 속에서 인간의 위엄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베르길리우스라 할 수 있다. 물론 눈 앞에 펼쳐진 광막한 악의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남는 길을 선택할 때의 얘기지만.


 만일 당신도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면 당장 켄지와 앤지를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나처럼 그들의 신도가 되라고.

 걸으면 걸을수록 더 커다란 어둠을 마주하는 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굳건히 유지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희망이 되어 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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