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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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꽤 좋다는 입소문을 많이 들었던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 첫 권인 '다섯 번째 계절'이 마침내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것이다. 



 SF 판타지에 속한다고 봐야 할 이 소설은 아마도 지구의 아주 먼 미래가 아닐까 생각되는 '고요' 대지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삶을 담는다. 이 '고요' 대지는 원래는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던 대륙들이 지각 변동 때문에 어느덧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변동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현재 고요 대지는 늘 불안정한 지각 상태로 거주민들에게 불안을 계속 안겨주고 있는 참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보다 땅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 그들이 쓰는 많은 언어들이 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땅의 움직임을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조산술'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술이 존재한다. 물론 이 기술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진'이라는 불리는, 그런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이들만 '조산술'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산술을 이롭게 다루려면 높은 수준의 정신 통제력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자제력이 많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린 오로진들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요' 대지의 각 마을(소설에선 '향'이라 불린다.)에선 오로진 아이가 발견되면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없애거나 추방한다. 부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서 자신의 자식이 오로진인 걸 알게 되면 아이를 매매하는 자에게 넘기기 일쑤다. '고요'대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 '유메네스'엔 이런 아이들을 모아 조산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펄크럼 오로진'으로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그런 일(어린 오르진들을 유메네스로 데려가는 일)을 도맡아 하는 자들은 '수호자'로 불린다.



 이러한 설정을 깔고 있는 '다섯 번째 계절'은 종말의 태동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와 스톤 이터('천사' 같은 존재로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수호 천사 같은 이미지니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솟아나는데, 역시 모든 게 대지가 중심인 '고요' 대지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돌을 먹으며 땅속을 공기 속처럼 마음대로 활보한다. 그리고 소설 처음에 등장한 스톤 이터가 그러하듯이 대지를 커다랗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남자의 정체는 마지막에 가서 밝혀진다.)가 유메네스를 붕괴시킨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에쑨, 다마야, 시엔이란 이름의 세 여성의 삶을 번갈아 보게 된다. 에쑨은 어머니로 최근 자기 아들이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그 사실을 안 그녀의 남편 지자가 아이를 죽인 비극을 겪었다. '오로진'이라면 무조건 적대와 배척만 일삼는 마을 사람들에게 거센 증오를 느끼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죽음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오로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남편 지자가 이번엔 자신의 딸 나쑨을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 것이다. 에쑨은 딸을 구하기 위해 지자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다 또 하나의 스톤 이터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호야'를 만난다. 뒤이어 등장하는 다마야 또한 집을 떠나게 된다.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마을에 더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동매매자가 자기를 데려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자신을 찾아온 것은 유메네스로 데려가려는 '수호자', 샤파였다. 다마야는 유메네스로 가서 펄크럼 오로진이 되는 교육을 받는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건 시엔이다. 그녀는 펄크럼 오로지이지만 아직 반지가 없는 하급자다.(펄크럼 오로진은 반지의 개수로 상급자와 하급자로 나뉜다.) 그녀는 열 개의 반지를 지닌 상급자 오로진 남자를 찾아간다. 최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아직 능숙하게 조산술을 쓸 수 없는 그녀에게 한 남자 감독관을 붙여준 탓이다. 그녀는 그 남자 오리진, '알라베스터와 함께 유메네스를 떠난다.




 이것으로 이제 이 세 여성의 공통점이 드러난 것 같다. 

 모두가 오로진이라는 것 그리고 다들 길을 떠난다는 것.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진은 이종적 존재다. 작가 제미신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이종성은 그대로 그녀가 가진 흑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오로진이 평생 겪는 배척과 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어느 정도 존중을 받으려면 그들이 부여한 교육을 거쳐야만 하는 것도 그대로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이 겪는 경로와 일치한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여성으로 우리 사회의 흑인 여성이 그러하듯이 인종과 성별에 따른 이중 차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여성이 가지는 열악한 상황은 에쑨이 남편이 아들을 무참히 죽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나 펄크럼 오로진인 시엔이 오로지 번식을 위해 사랑도 없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요의 대지는 그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차별과 억압이 들끓는 곳이었던 거다. 그 고요 대지에 군림하는 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어떻게 하면 고요의 대지를 이름대로 고요하게 만드는가다. 땅 아래에 존재하는 저항과 변화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것. 이건 그대로 그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받는 차별에 순종하도록 그들의 입을 막고 자유를 위한 몸짓을 결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정한 자리에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자신들이 정한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설정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그저 흔한 SF 판타지로 보지 않게 한다. 여기엔 인종과 성별에 대한 이중 차별이 횡행하는 지금 사회에 대한 뭉근한 비판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인, '길 위에 존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다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물론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길을 떠난다는 건 거의 보편적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 여정의 의미가 '다섯 번째 계절'에서 더욱 두드려져 보이는 건, 설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땅, 대지라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땅하면 얼른 떠오르는 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고정적인 이미지다. 이렇게 모든 게 제자리에 들러붙은 그 곳에서 세 여성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떠남이 더욱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지란 또 어떤 곳인가? 바로 가이아 여신을 뜻하는 곳으로 여성의 영역이자 여성의 상징이었다. 스톤이터란 천사와 비슷한 존재조차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오듯, 하늘이 아니라 땅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이 소설이 흔히 말하는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굳이 여성주의에 국한해 이 소설을 볼 필요는 없다. 사실 그것을 넘어 차별을 받는, 모든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원래 그런 여성의 영토였던 것이 지금은 남성들에게 지배되어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고요의 대지를 그리 불안에 떨게 만드는 '흔들'(소설에서 지진을 가리키는 말이다.)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사실 세 여성의 여정 또한 이런 '흔들'을 너무 닮았다. 그 떠남으로 인해 그녀들 모두 새로운 사람과 경험으로써 유메네스가 부여한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확고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가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끌어나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 온다. 그런만큼 설정이나 구성 상의 빈틈은 없으며 모든 게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는 반전 또한 놀라운 것이다.(사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 전에 먼저 알아차렸겠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주로 이 작품이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이야기가 여간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무척 재밌는 작품이다. 역시 입소문 대로 오랜만에 아주 기대가 되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반전과 함께 또 다른 떡밥 하나가 던져졌는데, 그것 역시 오랫동안 여성의 상징인 존재라 그것과 관련된 뒷 얘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이어 다시 한 번 휴고상을 수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오벨리스크 관문'이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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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eau 2019-05-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 여성. 공통점. 이런 어휘들을 선택하신 까닭은 스포일하지 않으려는 의도이신 것이지요?

헤르메스 2019-05-04 01:00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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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낯익은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철학책이든  번은  언급되기 마련이니까마치 밥상에  올라오는 김치와 같다고나 할까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하게 되었다도대체 어떤 철학을 펼쳤기에 이토록 빠짐없이 인용이 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그러나 그런 의문을 속시원하게 해결하긴 어려웠다칸트의 사상은 너무나 방대했고 그걸 체계적으로 쉽게 헤아리게 도와주는 길잡이를 만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내자의 도움따위 필요 없이  몸소 알아보리라!’ 하며 직접 칸트의 책을 읽는 호기도 부려보았지만 낯선 단어들의 난무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들의 연속 공격 속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서둘러 퇴각해야 했다그러나 칸트는   번의 싸움으로 쉬이 접어버릴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아니 보고 아니 듣는다면 그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칸트란 정녕 라면의 스프와 같은 존재철학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관통해야만 했기에 나는 반복해서 칸트의 철학과 난전(亂戰) 벌이지 않을  없었다물론  때마다 나는 번번이 자신의 무력함을 씁쓸하게 곱씹는 패장(敗將) 기분을 느껴야 했다그러다 깨달았다유비가 삼고초려까지  가면서 제갈공명을 자신의 사람으로 삼으려했던  바로 이래서였구나 하고그러나 더이상 유비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제갈공명 같은 책을 드디어 만나게  것이다그것이 바로 백종현 교수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책이다부제는 칸트 3 비판서 특강.

 

 하지만 처음  책을 보았을 조금 걱정이  것도 사실이었다책의 분량이 작았던 것이다모두 267페이지 정도론 3 비판서는 커녕 과연 ‘순수이성비판조차 제대로 설명할  있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칸트 전문가이자 칸트 공부만 50년을 했는는 학자의 책이니만큼 속는 셈치고 일단 읽었다이런! 부제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그야말로 3 비판서의 핵심이 고루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마치 필요 없는  모조리  가지치고  정수만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3 비판서를 쉽고 체계적으로 헤아리게 돕는 길잡이 역할부터 그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중점적으로 들려주려 했고 그것을 통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칸트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짚어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이보다 훨씬  두터운 책으로도 가늠할  없었던 칸트와 그의 철학을  얇은 책으로 이토록 선명하게 응시하게 되다니! 가히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고 내공 깊은 고수는 분량에 좌우되지 않는가 보다.



 

  책은 크게 서론 격이 되는칸트 철학으로 들어가기 3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  강씩 할애하여 설명한 3강으로 이뤄져 있다서론에선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던 칸트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활동한 시대는  어땠는지와 함께 오랫동안 칸트 철학을 연구하고 번역해왔던 그의 술회가 짙게 투영된 한국어로 칸트를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렇게 하여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힘을 기울여 풀어가야  철학의 화두로 삼았으며그런 그의 작업이 비록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타국에 살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와 결코 별개의 것이   없음을 헤아릴  있도록 말이다.

 

 칸트가 인간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의 시대를 거센 물줄기로 휩쓸었던 계몽주의 그에겐 다름아닌 ‘사람이 자기 탓인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남(p. 73)’이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미성숙이란 타자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이르는 말로 칸트는 사람들이 그렇게 미성숙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으로 보았다사실 그럴만 했다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종교혁명을 통해 계몽의 여명이 차츰 시대를 밝히고 있었지만   동안 지배했던 기독교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신의 권위에 짓눌려 자신의 이성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으니까 말이다그들에겐 자신의 이성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 사용할  있는 자유가 필요했고 칸트는 성숙을 향한 그들의 결단과 용기를 위해 그런 자유를 주려했다그러기 위해 그는 인간을 다시금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왜냐하면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오직 신의 눈을 통해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행동할  있으며 어디에서 흡족함을 느끼는지를 하나같이 신에 맞추어 생각했다칸트는 그런 사슬을 끊고자 했다인간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신이 세워놓았던 가림막을 치워 인간의 온전한 초상을 보도록 말이다그래서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으로 돌아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었을그래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금 제기한 것이다이제는 신이란 타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성으로 그것을 음미하도록.

 

 1) 나는 무엇을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도 좋은가?

 3)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개의 질문은 그대로 3 비판서와 대응한다. ‘나는 무엇을   있는가?’ 대답이 ‘순수이성비판이며 ‘나는 무엇을 행해도 좋은가?’ 대답은 ‘실천이성비판이고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대답이 판단력비판 것이다여기서 비판이란 다름아닌 ‘무엇을   있고     없는지 분간함(p.83)’ 의미한다   없는 한계 범위를 밝히는 것이 ‘비판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있는가?’ 대한 비판은  ‘나는 어디까지   있는가?’이기도 하다그런 인간의 이성이   있는 범위바로 그것을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 하고자 하는 바다거기서 칸트는 인간의 지식이 무엇보다 감성 세계의 대상에 관해서만 가능하다(p.85) 여긴다오직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할  있는 것만이 지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칸트에겐 자연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이다실제 감각으로 확인할  없는 철학적 사변이나 종교적 담론 같은 것은 지식이 아닌 것이다그런 지식에 대해 칸트는 지식인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지식이 아닌 것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의 이성을 호도하면 안된다고 말이.


 그렇다고 칸트가 철학적 사변이나 종교 담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그런  또한 자연과학적 지식 이상으로 우리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인정한다다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념 문제인 것이다신을 예로들어 말하자면 감각할  없는 신을 섣불리 지식의 범위에 넣어 실재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다만 우리의 삶을 보다 바람직하게 만들 이념의 하나로  존재를 요청할  있을 뿐인 것이다이렇게 오직 감각할  있는 것만을 실재로 인정하기에 실재라는 개념이   분명해지고 이전까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감각할  있으려면 그것이 언제나 특정한 시공간 위에 놓여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시공간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일차적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그럴  없는 것은 존재하는  아니다신도천사도 마찬가지다이렇게 우리의 존재 인식은 시공간이라는 특정한 형식을 통해 이뤄진다칸트는 이를 두고 ‘초월적 감성 형식이라 부른다칸트에게 ‘초월적이란 말은 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모든 경험에 앞서는그러면서 경험 인식을 가능하게(같은 저자의 ‘칸트와 헤겔의 철학’ p.123)하는  뜻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성 형식을 통해 보고 있다는 말이다 형식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이런 면에서 보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든 형식에 따라 규정하는 대로 보고 있다고 말할  있다사실 칸트는 우리가 정말 그러고 있다고 말한다어떤 대상을 지각할  지각  자체만 하는  아니라 지각을 어떤 특정한 것에다 연결 혹은 종합하는 ‘통각 하며  통각은 범주라는 일정한 도식을 매개로 이뤄진다고 말이다그게 바로 관계양태로 대표되는 초월적 지성 형식이다우리는   형식을 사용해 바깥의 실재를 지각하며 오직 그것만이 실재가 된다 형식은 모두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사실은 우리의 주관이 객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칸트는 실재의 구성을 우리 주관 영역으로 끌어들였다이것은 보다  알기 위해 오직 바깥 대상에다 우리의 주관을 끼워 맞춰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겐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칸트에 따르면 자연 세계를 형성한 것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이었다그런 식으로 칸트는 신에게 얽매여 있던 사슬을 끊어냈다우리가   있는 것은 지식으로 삼을  있는 것은 오직 자연 과학적 세계밖에 없으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형성하는 것도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리면서 말이다.

 

 그럼 이제 다음의 문제, ‘나는 무엇을   있는가 의지의 문제에 답할 차례다.

 칸트에 따르면 의지는 오직 ‘‘선의지밖에 없다(p.155)’ 한다왜냐하면 의지 ‘좋은 것을 하려함으로 나쁘게 되는 것은  의지가 약해진 것이지 나쁜 의지란  있어서 그런  아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의지는 또한 자유의지이기도 하다좋은 것을 구속 받지 않고   있어야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있는 까닭이다그런데 선의지란 단순히 좋은 것을 하려는 의지를 뜻하지 않는다도덕적으로 올바른 의지를 뜻한다

 

 어떤 행위를 ‘옳다라고 하는 오로지  이유 때문에 행하려는 의지가  선의지다.(p. 160)

 

 칸트는 진정한 자유의지는 오직 선의지를 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여기서 도덕적이란저마다 가진 상호 인격을 존중해주는  뜻한다백종현 교수는 그걸 칸트가 ‘영원한 평화에서 어떤 경우도 섬멸전이나 징벌전은 있을  없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풀어간다그렇게  뜻대로 하지 않고 상대가 가진 고유의 영역을 지켜줄  있을 비로소 도덕적이라   있다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바로 ‘선의지.


 그런데 이런 선의지는 일상  우리가 그렇듯행하기가  어렵다사람에겐 누구나 자기 본위의 욕구가 있으니까 말이다이런 자신의 경향을 극복하고 선의지를 발휘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의무로 강제되지 않으면 안된다하여칸트는 도덕적이 되는 것을 정언명령으로  것이다정언명령그것은 아무런 핑계를   없는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그리하여 ‘너의 의지와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있도록그렇게 행위하라(p. 168)’ 도덕법칙  최상위 법칙인 정언명령이 만들어진다여기서 기존의 상식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무척이나 새로운 자유 개념 도래한다당시 사람들에겐 자유란  뜻대로 마음대로   있는  자유인데칸트에겐 거꾸로  뜻이 아니라 의무로 부과되는 당위를 따를 때가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일단 동물이다그런 이상 자연스럽게 식욕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4분의 3 동물적이다.(p. 183)

 

 

 나도  동감한다그런 욕구는 오로지 나만의 충족을 추구하므로 대부분 도덕적 관계를 쉽게 해칠  있는 것들이다그런 욕구를 따른다는 것은  자유를 누림이 아니라 사실 내게 있는 동물적 욕구에 노예처럼 순종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것에 저항하여  모든 동물적 욕구에 위배되는 의무로 부과된 정언명령을 따를 때야말로 진짜 자유라는 칸트에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이는 또한 자신을 그저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그치는 것이기도 하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다.


 앞서 칸트에게 계몽주의란 자신의 이성을  어떤 것에 주눅들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라 말한  있다얼마든지 결단하고 용기를   있는 이러한 자유가 칸트가 원한 것이었다면 ‘실천이성비판 통해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는 더욱 분명해지는  같다그건 바로 서로의 자유하고 대등하게 공존하는 세상말이다아무도 자신의 동물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수단 삼지 않으며 그가 타고난 존엄 그대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그곳이 바로 칸트가 꿈꾸는 세상이다그러기 위해서 칸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자유를  것을 주문한다실천 이성은 그런 자유에 헌신할  진정한 빛을 발한다는 것도.

 

 

 

 그러나 우리도 얼른 예감하듯이 이런 의무에 따른 삶이 결코 행복할리 없다.

 칸트는 자연 세게와 도덕 세계를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세계로 분리시켰다그러면서 자연 세계 또한 알고보면 우리 인간이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것임을 밝혀  지식이 아닌 이념의 도덕 세계 또한 우리가 마음먹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형성 가능하다는  믿게 했다그러나 종교 상의 성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우리들은 행복을 자연 세계에서 구한다대다수가 생각하는 행복의 형태란 감각적인 것일테니까 말이다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퍼도 가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맛있는 고기를 실컷 뜯어먹기 위하여 기꺼이 인간을 배신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선의지를 발휘해 정언명령을 따르더라도 언제든 사이퍼처럼 유혹에 빠질  있다칸트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이러한 배리(背理)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그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라든가그래서 신을 보상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해선 안되었다성실한 칸트는 거기에 대해 답할 의무가 있었다. 정언명령을 강조했던 그이기에 당연히 따라야  의무였다.


 그리하여 그는 판단력 비판 썼다.

 그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서로 대척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조화시키는 작업이었다앞서도 말했듯, ‘판단력 비판 감정에 대해 말한다이것을 낳았던 물음인 흡족함이야 말로 감정의 문제다보다 일반화 하면 쾌와 불쾌에 대한 문제라 말할  있다이런 반응 혹은 인식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오직 하나의 직접적인 반응만이 전부인가거기에 대해 칸트는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그리고 흡족함과 아름다움 같은 인식엔  하나의 차원이 있다는  알게 된다바로 합목적성말이다. ‘합목적성이란 목적에 합치한다는 뜻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답다  것이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자체에 이미 합목적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있다어떤 것에 대해 쾌나 불쾌를 느낄  우리는 단순히 그것만 보지 않고 마음에 있는 어떤 범주에 맞춰 쾌나 불쾌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같다이런 범주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공간이란 감성적 형식과 양과 질같은 지성적 형식이 만나 지식을 형성했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칸트는 미적 쾌감 역시 상상력(인식의 시공간처럼 대상의 미를 특정 순간에 합목적적으로 포착하게 만드는 감성적 형식이라   있다.) 지성의 형식이 합일하는 데서 생긴다(p.225)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이처럼 감정의 영역인 미적 쾌감 역시 지식 영역과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 칸트에겐 활로가 되었다대치될 것으로 보였던 지성과 감성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그렇게 ‘판단력비판’ 작업을 통해 칸트는 지성이 감성의 영역으로 또한 감성이 지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있다는  밝힌 것이다그렇다면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또한 못할 것이 없다합치될  있는 것이다다름아닌 판단력을 통해서 말이다백종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판단력 의의를 밝힌다.

 

 판단력에 의해서 지성의 법칙 수립과 이성의 법칙 수립이 연결된다다시 말하면지성에 의해서 자연법칙이 수립되고 이성에 의해서 자유법칙이 수립되는데이렇게 수립된 자연세계에 관한 것과 실천세계에 관한  법칙이 판단력 의해서 통일된다이로써 자연과 자유가 통일이 된다그런데 판단력은 무엇을 가지고   세계를 통일할  있는가그것은 다름 아니라앞에서 말했던  ‘실천이성비판 변증학에서 등장했던 ‘최고선 이념에 의거해서다.(p.234 ~ 235)

 

 그렇다면 어떻게 합치되어야  것인가여기에 의무론적 윤리에 걸었던 칸트의 이상 또한  수명이 결정될 것이다칸트에게 있어 합치란 어디까지나 서로 고유의 영역을 존중한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그렇다면 자연세계가 실천세계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반대의 경우엔 실천세계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이로써 의무론적 윤리를 따라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은 구제되었다물론 여전히 현실화가 요원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옳은 길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칸트의 대답 또한 완성되었다백종현 교수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쓴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학적으로 답한다요컨대인간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칸트의 이성 비판은 이로써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도덕적 완전성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낸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力行)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p. 237 ~ 238)


 이 말은 책의 거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는데, 교수의 논지를 죽 따라가다 이 말을 만나고나면 왠지 뭉클해지는 걸 어찌할 수 없다. 한 인간이 평생 걸어서 비로소 도착한 종착지의 모습을 그대로 문자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아서일까? 여하튼 결코 자신이 사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난 적이 없고(그는 오직 책으로만 여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알프스 지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교우 관계도 그리 넓지 못하여 업무적인 관계를 떠나 만난 유명한 사람이라곤 모제스 멘델스존과 피히테, 헤르더 정도가 전부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누구보다 깊고도 확장된 안목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상식과 권위에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신선한 시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끝내 이렇게 찾아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칸트는 누구보다 자신이 정의한 계몽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타자에도 기대지 않고, 주눅들지도 않고 결단과 용기로써 이만한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칸트의 태도는 특히나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이념과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양산하는 가짜 뉴스와 근거 없는 풍문과 선동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지는 상황에 더욱 귀감이 될 것 같다. 어느 때인가부터 우리는 어떤 사안과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이성을 엄중히 사용하여 사태를 온전히 헤아리기 보다는 점점 더 타인의 말에 기생하여 내 판단과 행동을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쁘고 머리 쓰기 귀찮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이러한 포퓰리즘 심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오죽하면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재의 시대를 두고 '레트로토피아'라고 불렀을까. 모두들 칸트가 유념하고 직접 실천했던 계몽의 빛을 스스로 꺼버리곤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보다는 그저 언제든 대체가능한 무리 속의 하나로 남게 되는 중세의 어둠 속으로 회귀하여 왜 증오하는 지도 모른채,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그 쪽 방향으로 컹컹 짖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결코 칸트만이 되새겨야 할 질문이 아니며 그걸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한 사유의 여정 역시 그저 과거의 유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가 자신의 화두로 삼아 깊이 숙고해야할 의문이며 나만의 사유 여정을 위해 곁에 두고 자주 들춰봐야 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칸트는 자기가 하는 철학의 소임을 중세 때 흔히 썼던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 빗대어 이렇게 여겼다고 한다.


 시녀에는 두 부류가 있다. 왕비가 치맛단을 길게 늘어뜨려 끌고 갈 때 뒤에서 끌리지 않게 치맛단을 들고 가는 시녀가 있고, 왕비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또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앞장서서 등불을 들고가는 시녀가 있듯이, 철학은 신학뿐만 아니라 여타의 학문들이 헛길에 들지 않도록 앞장서 등불을 들고 가는 시녀이다.(p. 79)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들에게 등불을 든 시녀로 보인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과 팽배해지는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배려 보단 배척이, 존중 보단 갑질이 횡행하는 가운데 언제 어느 때 한낱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나 또한 타인을 수단으로만 여기는 괴물이 될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을 지켜나갈 길로 인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리 쉽게 친해질만한 안내자는 아니다. 하지만 전혀 낯선 상대도 고향이나 가족, 하는 일이나 취미를 묻다 보니 차츰 파악이 되어 그걸 발판삼아 수월하게 친해졌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이 처음 만나 친하게 만드는 일을 이 책,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분명 읽다보면 나처럼 오리무중이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하나하나 그 윤곽을 잡아나가는 걸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긴 글을 쓴 것처럼 말이다. 그런 길잡이를 만나지 못하여 칸트와 벗하는 일을 미뤄두고 있었다면 얼른 이 책의 초대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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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3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었더니 도리어 이 책까지 읽어야 하나 생각하게 되네요..... 대단하세요. 언제나 그러셨듯이요.

헤르메스 2019-01-31 22:48   좋아요 1 | URL
앗! syo님 이렇게나 반갑고도 기쁜 댓글을 남겨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언제 한 번 칸트를 제대로 헤아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이 책을 만나 이제 겨우 그 손가락을 입에서 뺄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혹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셨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19-02-02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3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수성역 1 - 노아즈 아크, Novel Engine POP
카지오 신지 지음, toi8 그림, 구자용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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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문학상 중엔 '성운상'이라는 게 있다. 한 해 동안 발표된 SF 소설 중에 가장 좋은 작품에다 주는 상이 바로 성운상이다. 1970년에 시작된 것으로 역사도 제법 오래되었다.

이 상을 수상한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으로는  고마츠 사쿄의 '일본 침몰'이나 칸바야시 쵸헤이의  '전투 요정 유키카게',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아리카와 히로의 '도서관 전쟁'등이 있다. 수상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꽤 권위있는 상이라 할 만하다. 갑작스럽게 성운상 얘기를 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성운상 수상작이 우리나라에 최근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카지오 신지의 '원수성역'이다. 수상한 해는 2016년.




 카지오 신지는 1947년 생으로, 1971년에 SF 단편으로 데뷔했으니 경력이 꽤나 오래된 작가다. 91년에 '셀러맨더 섬멸'로 일본 SF 대상까지 수상한 바 있어 꽤 명망 있는 SF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2005년 부터 시작하여 10년 넘게 써왔던 소설이 바로 '원수 성역'이다. 모두 3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그 중 첫 권인 '노아즈 아크'가 이번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다.


 여기서 '노아즈 아크'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뜻한다. 이런 제목이 나오게 된 연유가 있다. 소설에 나오는 지구 역시 성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수는 아니다. 원흉은 태양이다. 태양의 불꽃이 점점 커져 그 화염 속에 지구가 삼켜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라면 지구 전체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안 사회지도자 계층이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지구를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일상을 영위하는 동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재력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노아즈 아크'란 우주선을 만들어 170만 광년 거리에 있는,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진 '에덴'이란 별로 달아날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자신의 죽음마저 위장할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기에 많은 지구인들은 그들이 우주로 떠난 뒤에야 종말의 시계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었던 이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도. 하지만 절망하기는 이르다. 대통령의 딸을 사랑했던 공학도 이안에 의해 우주선 없이도 '에덴'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화  '스타트렉'에서 흔히 보았던 순간 이동 기술. 소설에선 '점프'라 부르는 그 기술은 사람을 그대로 순간 이동시켜 170만 광년 거리에 있는 별로 보낼 수 있다. 어떻게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선 자세히 따지지 말자. 이 소설은 닐 스티븐슨의 '세븐 이브스' 같은 하드 SF가 아니니까.


 그러나 이 '점프'라는 기술은 그리 안전하지 않다. 보내긴 보내지만 어디로 떨어질 지 미리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하늘에 떨어져 추락사할 수 도 있고 바다에 떨어져 익사할 수도 있으며 아예 별에 도착하지 못하고 우주 공간에 내던져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무사히 별에 도착할 확률은 1700분의 1. 그래도 몇몇은 살아남아 '에덴'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마사히로 역시 그 중 하나. 그는 가족 모두와 함께 점프했으나 오직 자신만이 살아서 별에 도착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이 없다. 여기저기 사람을 잡아먹는 기묘한 생물이 많이 사는 그 별에서 생존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계획 없이 점프한 이들에 의해 '에덴' 여기저기에 부락이 만들어진다. 오직 생존만이 지상 목표였기에, 그 생존을 위해 부락민 전부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고 그로 인해 부락을 제외한 모든 바깥 영역을 위험과 적대의 곳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어 때로 점프한 이들이 만든 부락 서로도 상대방을 식인 괴물로 여기는 일도 존재한다. 이처럼 다 다르게 살아가는 그들이었지만 하나만은 같았는데, 그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몰래 우주로 달아나버린 '노아즈 아크'에 대한 분노다. 부락민들의 일치단결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벌어지는 종교 행사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노아즈 아크에 대해 저주를 내린다. 그 원한을 꼭 갚아야 한다면서.


 이제 제목이 왜 '원수 성역'인지 아셨을 것 같다. 그렇게 노아즈 아크를 원수로 알고 분노와 적대를 표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드디어 노아즈 아크가 착륙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장기간 우주 항행에서 주로 가족 없이 홀로 탄 이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을 막기 위해서 인위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켰다. 그건 바로 지구가 이미 종말을 고했으며 전 우주에 인류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헛되이 목숨을 끊지말고 힘을 뭉치자고 말이다. 당연히 그런 믿음으로 에덴에 상륙한 '노아즈 아크'에게 에덴의 거주민들이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보일 리 없다. 결국 점프한 이들과 노아즈 아크는 제목처럼 보기만 하면 이빨부터 드러내는 사이가 된다. 과연 그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권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소개한 줄거리로 '원수 성역'이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뭔지 어쩌면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걸 말이다. 점프민들은 척박한 대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유포하고 '노아즈 아크' 역시 고급 인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적대 관계는 얼른 1950년대에 존재했던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정말로 바로 그것을 SF적 상상력에 인류학을 가미하여 풀어내고 있는 게 '원수 성역'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류학 운운 한 것은 소설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전개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는 하나의 시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아즈 아크'와 '에덴'과 관련된 사건을 다양한 시야로 보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이데올로기 같은 문제도 눈에 들어오지만 종말이 예정된 삶도 끝까지 지속할 의미가 있을까 같은 다소 형이상학적 질문도 문득 생겨난다. 하여, 얼른 생각나는 것은 카멜레온인데 이렇게 다채로운 색깔을 지녔기에 재미도 재미지만 성운상을 탄 게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여하튼 좋은 SF란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얼른 2권을 만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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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
로베르토 아기레사카사, 로버트 핵, 최필원 / 문학세계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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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오래된 팝송 중에 'SUGAR SUGAR'란 노래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노래였죠.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신 분이라면 분명 귀에 익은 멜로디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노래는 69년에 발표된 '아치'란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주제가였죠.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인 '아치'는 사실 '마블'처럼 미국의 만화 출판사입니다. 1939년에 설립되어 역사도 제법 오래되었죠. 물론 지금도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블처럼 슈퍼 히어로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미국의 평범한 십대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이런 아치 출판사의 대표 캐릭터가 바로 '십대 소녀 마녀 사브리나'죠.

 유명 캐릭터답게 이 뮤직 비디오에도 출연하고 있습니다. 키스로 개구리로 변신 시키는 사탕 가게 소녀가 바로 그녀랍니다.

 노래 가사의 '유아 마이 캔디 걸'이 바로 사브리나인 것이죠^^.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게 된 것도  사브리나 때문입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이 사브리나를 어두운 버전을 드라마로 만들어 공개했는데, 그게 시청률 랭킹 1위를 차지할만큼 히트를 쳤거든요.

  물론 오리지널 드라마는 아닙니다.


  엄연히 원작이 있죠. 사실 십대는 호러물의 주 소비층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십대를 주된 소비자로 하는 아치 출판사가 이걸 놓칠 수 없죠. 그래서 호러물을 주로 다루는 아치 호러를 만들었고 아치 코믹스의 유명 캐릭터들의 다크한 버전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뮤직 비디오에서 신나게 기타를 연주하는 이들이 아치 코믹스의 가장 대표 작품인 '아치와 그의 친구들'에 나오는 이들이죠.



  이들은 '리버데일'에 사는데, 원작과는 다르게 아주 어둡고 무시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킨 '리버데일'이란 작품이 아치 호러에서 나왔죠.

  물론 이 작품도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사브리나 역시 아치 호러에서 나온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죠.

  그렇지 않아도 그 원작 만화가 궁금했던 참인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이렇게 우리나라에 번역판이 나와주었네요.




  이 그래픽 노블은 정말로 원작 사브리나를 아는 이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스럽고 달달한 사브리나의 세계가 어쩌면 이렇게나 어둡고 잔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브리나의 연인 하비가 마녀에게 뼈가 다 보일만큼 살을 뜯어 먹혀 죽었을 때는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브리나 아버지의 이야기도 그렇고 사브리나를 아는 이에겐 너무나 친숙한 캐릭터인 힐다와 젤다(저는 감히 '야생의 숨결'로 이제는 더욱 유명해진 닌텐도 게임인 '젤다의 전설'의 그 젤다가 사브리나 고모의 이름에서 따왔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62년이었고 너무나 유명했으니까요.) 고모의 모습 또한 '헉!'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저는 아직 드라마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원작 만화를 보니 하도 충격을 받아서 드라마조차 보기가 두려워지네요. 사실 이 사브리나는 우리가 너무 잘하는 '요술공주 밍키' 같은 마법 소녀물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법 소녀들이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게 바로 이 사브리나의 설정이었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사랑스럽고 달달한 세계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불안과 고독 그리고 공포와 죽음만이 가득한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목은 오싹하다고 되어 있지만 그보다 더 한 표현을 써야했어야 되지 않나 싶네요.

 잔혹한이라든가 참혹한이라고...


 그런 세계를 만들어가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마도 사브리나의 가장 최대의 적이 될 '리리스'란 존재입니다. 리리스란 이름은 외경에 나오는, 이브 전에 있었던 아담의 첫 아내 이름이지요.

 그 이름처럼 리리스도 원래 사브리나의 아버지, 에드워드를 열렬히 사모했는데, 사브리나의 아버지가 자기 대신 사브리나 엄마인 다이애나를 선택하는 바람에 커다란 상처를 받고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에드워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자살자들이 가는 지옥인 게헤나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부활을 통해 가지게 된 엄청난 마법으로 그녀는 나무가 되는 저주를 받은 에드워드를 불태워버리는 등, 자기 상처에 대한 보복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갑니다. 에드워드와 다이애나를 거친 그녀의 복수는 마침내 사브리나에 이르게 되죠. 이런 스토리가 아주 스산하고 무거운 색조의 그림을 통해 펼쳐지니 그저 이게 내가 알던 사브리나 맞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그래픽노블입니다.



  그러나 아주 흥미로웠고, 원작에는 볼 수 없었던 십대 소녀의 불안한 심리를 이야기로 잘 살려내고 있어 좋았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원작이 궁금하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과 전개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색다른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시는 분도 꼭 한 번 만나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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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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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홍규. 그의 글은 처음 읽는다. 잘 마른 손수건이 되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사람.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위로를 건네는 건, 그가 강해서도 마음이 넉넉해서도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대학 시절'이란 글을 읽어보면 잘 알겠지만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으며 우리처럼 연약하다. 그런데도 위안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건, 그 아픔을 자신 역시 겪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에 힘없이 이마를 기대고 다친 마음으로 돌아오는 저녁이 물기 어린 눈에 어떤 풍경을 담아내는지를.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담긴 그의 글은 자신도 힘든 하루를 보냈으면서 그렇기에 자식이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잘 알아 곧 귀가할 자식을 위로하기 위해 집에 환한 등을 켜두고 맛있는 밥을 짓느라 여념이 없는 어머니의 등을 떠오르게 한다. 너무나 지치고 피로한 하루엔 창가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만 봐도 반가울 때가 있다. 요즘 내 상황이 그래서 나도 이 책이 그렇게 다가왔다.




 저녁이라고 하니 독일의 북쪽에 있는 도시, 함부르크에 처음 갔을 때의 저녁이 생각난다. 오후 일곱시 쯤, 거주하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려고 시내 중심 상가를 찾았다. 처음엔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생각했다. 시내 중심 상가의 분위기가 마치 새벽 두 세시 같았던 것이다. 식당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거리 바닥에 여럿 둘러 앉아서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거나 홀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거나 했다. 거리엔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하는 듯했다. 고요와 자유. 다른 도시의 텅 빈 모습은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데 그 곳만은 비었는데도 오히려 더 넉넉해 보였다. 거기에 취해 나조차 거리에 나온 원래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하릴없이 이런저런 거리를 무던히 소요했다. 그러면서 실감했다. 이것이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걸,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우리에겐 저녁이 없다. 저녁은 일상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과 함께 오늘은 어땠나 두런두런 말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저녁이란 말을 들으면 마음 한 켠에 왠지 따스한 그리움부터 스며드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오가는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진심 어린 애정이 영그는 시간이건만, 지금의 우리에겐 타인의 사연을 음미할 저녁의 여유가 한없이 부족하다. 돌아오면 침대 위로 시체처럼 쓰러지기 바쁘게 내일 또 아침 일찍 나가려면 시계 알람을 맞춰놓아야 한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니. 그저 기계를 너무 많이 가동해 고장이라도 날까 봐 잠시 식혀두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저녁. 그런 우리에게 바깥 세계나 타인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깃든 다양한 사연을 헤아린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렇게 세상도, 남도, 나도 빈곤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간다. 소설보다 보고서가 친숙해지고 명료하게 하나의 의미만 갖는 단어를 더 선호하게 된다. 소는 소일뿐, 소의 사연까지 헤아리는 건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빨리 판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우리의 속도를 빼앗기니까. 어느새 이익이 미덕이고 손해는 죄악이라는 걸 금과옥조로 여기게 된 우리들은 더하기만 허용할 뿐, 빼기는 용납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연을 듣고 헤아리는 건 뺄셈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사연을 전하는 일이다. 눈 앞의 소를 넘어, 그 소가 어떻게 오늘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숨은 내력 속으로 인도하는 여정이다. 사전 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밖에 가지지 못하는 단어들을 새롭게 살려내어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많고도 다양한 얼굴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업이다. 함부르크가 전혀 다른 저녁의 낯빛을 보여준 것처럼.


 비밀에 다가가는 과정은 낱말과 더불어 사연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내게 그건 곧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전을 믿어 본 적이 없다. (...)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 매정된 숱한 언어들은 사전이 아닌 삶에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이 아닌 소설에 등재되어야 한다. 소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사전이 된다.(p. 45)


 그렇기에 우리는 차츰 문학을 멀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출판계를 정리한 보도를 보니 사람들이 문학 보다 잡서를 더 많이 봤다고 한다. 특히나 위로를 보내는 에세이를. 내 상처도 제대로 헤아릴 겨를이 없어 어떤 상처가 되었든 일단 된장부터 바르고 보듯 이런 에세이로 응급 처방만 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틈이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문학은 바로 그 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만 보는 눈을 타인도 보라고 이끄는 손이라고. 그러나 그런 문학의 초대는 귀찮고 피곤하다. 문학이 설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문학의 사도를 자임했던 이들조차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하나 둘 떠나간다. 저자 역시 어느덧 환멸의 방문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p. 175)


 왜 이리 굳건한 것일까? 문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문득 보게 되니,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더이상 단순한 산문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4부에 걸쳐 모은 그의 글들이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문학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그 선택의 근원에는 저자의 초등학교 시절, 탈곡기를 돌리다 절단되어 버린 아버지의 집게 손가락이 있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 걸.(p. 79)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건, 그 손가락으로 인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언젠가 들렀던 경주 열암곡에서 본 석불좌상의 형상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 부처는 중생의 떠받듦이 지겨워서 스스로 엎드려버린 것만 같았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 내려가 그들과 더불어 오체투지를 하고 싶은 거였다.(p. 105)


 그도 그렇게 아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거였다. 그걸 매개한, 절단된 집게 손가락은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왔을 때 마주 잡아주었던 것처럼 사람과 사람을 진심으로 연결하는 존재였다. 그게 문학이 되었다. 삶과 삶을 이어주는 존재. 어느 때인가, 인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가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쉬다가 인도 여자 옆에 앉아서 그이와 타밀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말을 주고받으며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 쌓인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저자에게 "저이도 삶이 힘든가보더라"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온전히 겹칠 수 있도록. 서로 맞잡은 손은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의 이데아적 형상이다. 우리는 그걸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에 있는 '기억이 우리를 본다'와 '늙은 농민'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삶의 경험에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포개는 것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이러한 겹침의 순례이다.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며 내 삶의 결만큼 타인의 것 역시 깊고도 다양한 것을 헤아리려 드는 동등의 시선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p. 213~14)


 이는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맞잡고 저마다 간직한 사연을 통해 네 삶을 내 삶처럼 헤아리도록 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문학이라는 수레를 힘겹게 이끈다. 그가 이웃의 은빛미용실 보조미용사를, 술 한 잔 걸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취객을 겉모습이 아니라 살아온 이력의 총체로 읽었듯, 많은 이들도 그리하길 빈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p. 265)


 그러므로 그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외롭다고 칭얼대면 그럴수록 남에게 더 많이 다가가라 말하고 아프다고 호소하면 그렇기에 타인의 아픔을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동안 겹침을 손해로 여겨 온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겨우 골방밖에 가진 게 없는데 그조차 기꺼이 내줄 수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사연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글을 계속 접하다보니 점점 더 설득이 되어갔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그의 삶과 자꾸만 겹치다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던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휘몰아치고 있는 불안, 취미가 되어버린 좌절을 그동안 나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 모든 게 날 너무 유폐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환대하지 않는 사람 역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p. 257)


 그러고 보니 타인의 삶에 허다하게 들어갔던 작가와 달리 난 남의 삶에 제대로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 사촌, 친구와 관련된 기억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잘도 꺼내는데, 나는 부모님에 대한 것조차 끄집어 내는 게 어려웠다. 누구의 말대로 추억이 재산이라면 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결과만 챙기는 삶을 살다보니 삶은 사실 과정의 총체이며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어느새 잊고 말았다. 사연을 중시하는 것은 망각 속에 매몰되기 쉬운 과정들을 건져내어 그 모든 것을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들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토록 빈곤한 삶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보니, 어쩌랴? 이제라도 그의 조언을 마음에 새길 수밖에. 앞으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면 얼른 자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고 저녁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려 한다. 삶과 사람 곳곳에 깃든 사연들을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 헤아려봐야겠다. 내 마음의 빈터가 풍성한 꽃밭으로 되는 날을 꿈꾸며...


 사람을 키우는 비와 바람과 햇살은 무엇일까를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폐허라고만 여겼던 그 공터에 비와 바람과 햇살이 다녀갔듯이 사람의 가슴에 다녀간 것들,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나를 다녀간 모든 이들,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이들이 순식간에 그리워졌다. 언젠가 저 공터는 무참히 갈아엎어져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자리에 얼마나 높은 건물이 들어서든 이 기억은 언제까지고 사람의 빈 가슴은 꽃밭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해야 할 일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p. 2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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