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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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그건 작품을 수수께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의 독재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 ‘곡성 그러했듯무수한 의혹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두들 자신만이 찾은 단서를 바탕으로 의미의 숲을 만들어 가더라도 누구도 감히 그것이 틀렸다 단정할  없도록 하는 권위에 굴복시키지 않고지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너도   있어!’ 유혹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난무하는 해석의 전장 속으로 참여할  있게 하는 무대 중앙에서 오직 듣기만 하는 침묵의 관객 앞에서 설파하는 독백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사고로 단단히 무장한 고유한 목소리를 한껏   있는 대화의 광장이 되는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창백한 불꽃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일단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고 있다일정한 서사의 흐름이 없다찰스 킨보트가  머리말이 나오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시인  프랜시스 셰이드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창백한 불꽃이란 시가 뒤이어 이어진다그리고  시에 대해 가장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찰스 킨보트의거의 책의 3분의 2 차지하는  주석이 따라나온다우리는 그래도  책이 소설이긴 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석에서 주로 받는데그것 역시 평범하지 않아서 앞서 나온 시의 단어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락을 이루며 셰이드의 삶과 킨보트가 가지고 있는 셰이드와의 추억 그리고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카를 크사베리의 탈출기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야고프 그라두스의 이야기등 여러 방면으로 종횡무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야기의 결을 섬세하게 훑지 않으면 지금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내가 처음 읽을  그랬듯이, 멍하니 읽다보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그저 도통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려 나보코프는 도대체  이런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부터 들게 되는 것이다.

 

  재독은 필연이었고 목적은 당연히  이유를 찾아내는데 있었다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백한 불꽃 해석의 전장터라는  깨달았다셰이드가 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것과 킨보트가 주석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셰이드가 ‘창백한 불꽃 썼던 것은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부모 곁을 먼저 떠나간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그가 시에서 이렇게 썼던 대로 아이의 존재도인간의 삶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보여주는데 있었다

 

 마땅히 확신하건대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p. 91)


 그러나 킨보트에게  시는 자기 혼자만의 과거를 세계에 전하는 매개체였다현실에선 잃어버린 왕국을 시를 통해 되찾을  있는 그리고 문학이 가진 영원한 생명을 통해 비로소 회복한  성채를 영겁에 걸쳐 보존할  있는기회였다 마디로 그에게 ‘창백한 불꽃 헤이즐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동시에 많은 추모 평론이 셰이드의 자전적 경험으로 이뤄졌다고 해석했듯셰이드의 것도 아니었다. ‘창백한 불꽃 킨보트 자신의 것이었다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주석에서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나간다작가의 진짜 의도나 세간의 중론 따윈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진실은 왕처럼 하나일 수밖에 없고  진실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단언에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p. 36)


 ‘창백한 불꽃 이런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근원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면 투쟁은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 식의 하나의 의미로 고착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그러나 셰이드의 시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앞서 내가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 썼다고 말했지만 사실 셰이드가  이런 시를 썼는지는 셰이드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읽어보면 알겠지만 과연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로 파악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되는  난해한 시인 까닭이다어쩌면 시인조차  이유를 몰랐을 수도 있다왜냐하면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나의  저서(자유시)였다. ‘밤의 파도소리

 다음에 나왔고그후에 ‘헤베의 술잔 눅눅한 사육제의

  마지막 꽃수레가이제 나는

 전부 ‘시집이라 명명하고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명한 무언가는뭔가 달빛 방울 같은

제목이 필요하다도와주시오창백한 불꽃) (p. 90)



 대부분 제목을 자신의 작품을 파악했을 때 만든다는 점에서 시인 자신도 시가 가지는 진짜 의미에 가닿지 못하는 간극을 느낀 것이다거기서 도움을 호소하며 터져 나온 ‘창백한 불꽃 차라리 간구였으며 간극이 나타내는 시의 의미를 하나로 길어낼  없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또한 이는 딸이 죽음과 관련한 시구에서 보듯종결에 대한 거부도 있었다.

 

 하지만 킨보트는 전혀 다른 의미로 ‘창백한 불꽃 행한다.

 나는 나보코프가 ‘창백한 불꽃이란 제목을 감히 중의적 의미로 달았다고 생각한다하나는 앞서 말한,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는  거부하는 걸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킨보트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을 뜻한다. 후자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창백한 불꽃 이미지란 다름아닌소설의 마지막(그러니까 원래 시에는 없는 1000행의 주석 부분) 나오는 셰이드의 삶을 끝장낸 암살자 그라두스의 총탄이 발사된 총구이다바로 거기서 터져나온더이상 스스로 다른 빛과 표정을 짓지 못하는 ‘창백한’ 시신으로 만들어 여지없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해 버린 ‘불꽃’을 '창백한 불꽃'이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것으로 내가 셰이드와 킨보트를 완전히 대척점에 두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한 쪽에는 문학을 보다 다양한 의미로 널리 타오르게 하려는 불꽃이 있고 다른  쪽엔 자신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는 확신으로  하나의 의미만 허용하려는 불꽃이 있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대로 셰이드의 시를 구축하려는 킨보트의 몸짓은 그대로 암살자 그라두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나보코프가 그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라두스의 이야기를 기입했다고 생각한다권위와 지식에 기대어 자기가 파악한 의미를 진리의 권좌에 앉혀 모두가 순종하기를 바라는우리 또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를 성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말이다킨보트가 셰이드 시에대 하고 있는 것과 그라두스가 카를 크사베리의 목숨을 빼앗으려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노력하는 것의 동일성은 킨보트와 그라두스가 각각 셰이드와 암살 대상에게 다가가려   겪는 과정 상의 곤란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일면 드러난다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시를 쓰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복해서 실패하듯이 그와 발맞추어 카를 크사베리를 암살하려는 그라두스의 시도 또한 예기치 않게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런 과정의 닮음과 순서의 비슷한 배치로 그라두스가  다른 킨보트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그라두스에 대해 킨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물은 단순한 형태의 스프링과 코일로 내부가 작동하는 태엽장치 같은 인간이었다어쩌면 청교도라고 부를 만도 했다몸서리쳐질 정도로 단순한 어떤 근본적인 혐오감이 그의 둔감한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그가 혐오한 것은 불의와 기만이었다그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표현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모하게  정열을 다해 둘의 조합 -  둘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이지만 -  혐오했다 자의 어쩔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산물만 아니었다면그러한 혐오는 칭찬받아 마땅했다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만적이라고 단정했다그는 통념을 숭배했는데자못 현학적인 침착함을 발휘한 숭배였다.(p. 189)

 

 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그런 것은 아예 존재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오직 자신과 자신만이 아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타자는 있을 자리가 그의 왕국엔 없다. 그런데 킨보트가 원래 젬블라 왕국에서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왕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이러한 그라두스의 모습은 킨보트를 보다 단순화한 것이라 해석해도 별 무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우리는 킨보트와 그라두스를 자기 중심주의라는 범주에 같이 놓아둘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셰이드가 있다. 나보코프는 이 대립을 셰이드의 딸 헤이즐을 통하여 더욱 강조한다.

 킨보트의 주석을 통하여 드러나는 헤이즐은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며 기꺼이 유령과 소통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만큼 헤이즐은 현실의 지배 영역에서 탈주해 있으며 한껏 타자 친화 또는 지향적인 존재다.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은 그런 딸이 영원하길 바라는 시였다. 이는 곧 문학이 어떤 권위나 지식으로 내리누르는 규정에 굴종하지 않고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하더라도 보다 많은 타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열어주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헤이즐과 관련된 너무나 기이해 보이는 서사는 바로 이러한 셰이드가 딛고 서 있는 자리의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들어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건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킨보트의 해석이 아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셰이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하여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 같은 형체로 응고된 어둡고 창백한 반점 덩어리가 현관 불빛이 가까스로 미치는 정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p. 235)(강조는 필자)'


 여기에 들어간 '창백한'과 '불빛'은 제목의 '창백한 불빛'이 어쩌다 나오게 되었는지 또한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한다. 그런데 킨보트는 이걸 단순한 전기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석을 단다. 불가해한 타자의 출몰과 그걸 그대로 존중하려는 문학에 대하여 과학이라는 도구로 타자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킨보트가 과학을 언급하니 헤이즐이 죽은 연도가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죽은 1957년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 1호를 쏘아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미국인들이 이제 곧 공중에서 핵폭탄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압도적으로 느꼈던 해이기도 하다. 그 때 미국은 오직 과학에 사활을 걸었다.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문학이 설 자리는 그렇게 점점 더 사라져 갔던 것이다. 헤이즐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비록 셰이드는 사상과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문학을 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셰이드의 이런 말은 그가 문학을 많고도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타자 지향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내 생각에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비평가나 작자 모두 바보란    있어.” 킨보트 :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중국이나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없어 달랑  사진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p. 194)


 이제 오직 수수께기로 가득차 보였던 '창백한 불꽃'이 내밀하게 간직한 속뜻을 내게 조금 드러내는 것 같다. 문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건 타자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토록 문학이 윤리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자전적 경험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이 소설 전에 나온 '롤리타'가 오로지 소재로 오해를 받아 큰 논란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한 사람의 타자를 대한다는 것이 한 명의 스승을 대하듯 겸허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겪도록 하기 위해 '롤리타'도 그렇고, '창백한 불꽃'도 그렇고 이처럼 자신의 이해와 공감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겐 신선한 자극과 그 못지 않은 터득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암호를 작품마다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 나오는 얘기인데, 그 이유를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 있으며,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예지의 기호라는 '신화'를 수용한 자 앞에 비로소 텍스트는 열린다. 그것은 '스승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가 똑같은 하나의 지적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p. 44)


 '창백한 불꽃'이 주고자 하는 태도가 이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킨보트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 -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타자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승으로 군림하려 하는 한, 독선과 묵살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까지 보고나니 홀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보다 미미하지만 저마다 다른 색깔과 형상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절로 다짐하게 된다.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더위로 숨막히는 여름밤을 아주 낭만적인 풍경으로 뒤바꾸듯, 그 어디에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스승이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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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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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의미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채워야할  모를 때가  많다대부분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모방이다남이 원하는 것을 따라 원하고 다들 바라는 것이니 좋은 것이겠거니 정당화 한다거지는 남의 것을 통해 자기 존재를 지속하는 사람이다언제나 타인을 모방해 자신을 형성하는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거지나   다를  없다앨리스 먼로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거지 소녀 로즈란 여성을 중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기는 이유는 여기엔 모두 열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로즈 삶의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정 속에서 그녀가 자기 자아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방법 역시 모방이다.

 

 그녀는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서 뭔가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어릴 때는 새엄마 플로처럼 아버지(혹은 어른) 원하는 모습이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고(장엄한 매질) 학교에 들어가서는 프래니 맥길처럼 타고난  모습을 절대적 한계로 받아들이고 부조리한 세상의 공격에 그대로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코라처럼 사생아라는 사실과 변기 치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 환경이라는 한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를 당당하게 만들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다(특권). 자라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자기 마을에만 있었을 적엔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가난이 부유한 이들과 비교되어 눈에 들어왔으며(자몽  처음으로 홀로 기차를 타고 토론토로 갔을 때는 결백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가온 수치와 비루함 앞에서 용기있게 그것을 내치느냐 아니면 굳이 해가   없다고 여기고 순응하느냐 사이에서 번민해야했다(야생백조). 그런 상황과 그녀의 선택은 결혼을 앞두고도 달라지지 않아서 함께  시간이 길어질수록 느는  실망 뿐이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알면서도 패트릭의 청혼을 정말  존스의 그림인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거지 소녀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으며(거지 소녀) 이러한 수동성은 자신이 너무 부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 대한 선망으로 굴절되어  매력적으로 다가온 불륜의 유혹 앞에서도 마찬가지였고(장난질) 패트릭과 이혼  보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야 했을 때조차 불륜남 톰과 함께 자기 욕망을 실현하느냐 아니면  애나에게 엄마의 책임을 다하느냐 사이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졌다(섭리).  모든 순간에 로즈는   번도 자신이 상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적이 없었다언제나 상황의 압박 속에서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경계하면서 그들이 보기에 좋을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얻을  없었고 반복된 실연의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에서 벗어날  없었다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혼자만의 삶에 보다 뿌리를 내린 뒤에도 로즈는 여전히 세상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 고유한 자신의 존재를 용기있게 드러내는 ‘야생 백조 되지 못한다(사이먼의 행운). 

 

 페인트칠한 돔형 지붕과 기둥들이 그녀의 눈꺼풀 안쪽에 비친 장밋빛 하늘 위로 경이롭게 떠다니다 축포를 터트리듯 산산이 흩어졌다새떼가심지어 야생백조떼가커다란 돔형 지붕 밑에서 깨어나 지붕을 뚫고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같다고도   있었다.(‘야생 백조’, p. 121)


 그녀는  외롭고 사람들의 초대를 받길 바라며(p. 277) 배우라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섞여들어갈  있을(p. 278) 정도가 되었지만 바라는 행복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급기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을 항성처럼 지탱해주던 플로가 치매에 걸리고 자신을 매혹했던 그토록 독립적이며(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흑인을 검둥이로 불렀을 정도로(p. 335)) 강했던 존재감마저 이제 과거지사가 되어버린다(스펠링). 그와 똑같이 개인이 가진 고유한 개성을 정해 놓은 규격에 맞춰 몰개성으로 희석시켜 버리는 사회의 행위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있을만한 행진에서 항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가감없이 내보였던 밀턴 호머도자기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중심으로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려는 사람보다 자신의 생각을 - 그것이 설령 선입견이라  지라도 -  많이 관철시키려는 미스 해티 같은 이들이 많아지는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간다그것은 밀턴 호머를 따라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어린 시절 밀턴 호머의 신도라는 것을 남몰래 공유했던 친구이기도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으로도 드러난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편의 이야기에 나타난 일련의 모습을 보다보면 모방 외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 보인다. 후반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듯, 세상은 점점  고유한 개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주체들에게 가혹적으로 굴고 그런 존재들을 자기가 먼저 선택하지 못하고 마냥 코페투아왕의 간택을 기다려야만 하는 그림  거지 소녀로 만들려고 하는  같기 때문이다처음으로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내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밀턴 호머란 이름 자체도 그걸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게 아닐까 싶다사라진 낙원을 뜻하는 ‘실락원   밀턴과 자신의 진짜 고향을 상실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호머의 이름을 합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나온 1970년대 후반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급속도로 보수화가 되어가던 무렵이기도 했다. ‘장엄한 매질에서 아무  없는 베키의 아버지타이드 노인을 오직 풍문에 근거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해트 네틀턴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가 되어 마치 그런 일은 일절 없었던 것처럼 회고하는 것과도 같이 과거는 미화되었고 오로지  좋은 과거를 복원하기 위하여 기성의 권위에 존중할 것만 요구되었던 시절이었. 당연히 자신만이 가지는 개성 혹은 차이는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다. 60년대 꽃피웠던 히피즘은 말할 것도 없고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발했던 흑인과 여성 중심의 운동 역시 어느새 얼어붙고 말았다. 소설은 그런 분위기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협소한 범위로 획일화 되자 ‘거지 소녀에서 패트릭의 가족들이나 ‘장난질 나오는 산부인과 병동의 여성들처럼 사람들은 오직 타인에게 인정받을  있는 직업이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모방한 소비를 통하여 자신을 입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지 소녀  빈곤함의 채록이기도 하다.


  결과 무엇이 남았는가?

그건 ‘장난질에서 성공한 클리퍼드와 조슬린 부부가  보여주듯허망함이며 ‘거지 소녀에서  훗날 우연하게 재회한 패트릭이 로즈에게 선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적의 뿐이다오직 타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소진시켜  자들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운 까닭에 대해서도 더이상 자기 내부에서 찾아낼  없기 때문에 그저  비어있는 자신을 느끼거나  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아가 로즈가 조슬린 부부를 혐오하면서도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잇달아 실패를 안기는 삶을 타협과 포기로 계속 짊어지고 가는 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현재의 라는사실은 지속성의 잔재에 불과할 뿐인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때론 마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리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수동성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탓인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사회의 압박 강도가 심해지더라도 이제 어쩔 수 없다면서 쉽사리 두 손을 들 수 없다. 이런 삶의 궤적이 도달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또한 그런 삶이 가져오는 고민과 피로의 증폭을 소설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게 된 까닭이다. 다행히도 소설은 어느새 자신이 육중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들을 위해 탈출할 수 있는 단서 또한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놓아두고 있었다. 그건 물론 스스로 자신의 독립성을 쟁취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로즈가 '장난질'에서 클리퍼드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한없이 낯설고 홀로 배회하는 여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파월리버' 기꺼이 찾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파월리버는 어떠한 곳이었나?


 파월리버는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죄지은 여행자들이 잡혀서 형벌을 받는 악취나는 신기루다. 그녀는 정말로 놀라지도 않았다. 해서는 안되는 점프를 했고, 그래서 이곳에 착지하게 되었다.(p. 220)


 그러한 죄지은 땅으로 과감하게 뛰어든 로즈는 행진에서 조롱과 경멸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밀턴 호머와 많이 닮았다.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 사회가 규정한 것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매혹의 대상으로 삼고 실천까지 반복해서 감행한 것이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슬린 부부의 허망함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유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이 지녔던 적의와 거꾸로 더욱 타인의 곁에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힘이 되어 준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스펠링'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과거와 좀 달라진 로즈의 모습을 본다. 이전까지 로즈는 자기를 위해 남의 곁에 붙어 있으려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타인을 위해 타인 곁에 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일방적인 모방의 단계에서 서로가 대등한 대화의 관계로 진입한 것과도 같다. 거기서 로즈는 이제 자기만의 고유햔 주체성을 구축할 기억들을 쌓기 시작한다.


 로즈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이 간직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기뻤다. (...) 그녀는 랠리 길레스피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여태 사랑했던 남자들보다더 더 가까이에서 느꼈다는 것, 자신의 자리 바로 옆 칸에 존재한다고 느꼈다는 것 말고는(p. 369)


  이런 로즈의 변화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감행하라는 권유로 새기게 만든다. 플로의 경고로 대변되는 사회의 지속적인 위협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담하게 뛰어들라는.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지 소녀 자신 뿐이라고 말이다. 

 이제 말하는 바이지만 앞에서 내가 말한 로즈의 수동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인 수동성만은 아니다. '장엄한 매질'에서 로즈가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에게 취했던 연기처럼, 그리고 '야생 백조'에서 몰래 자신의 다리를 만지는 노인 목사에게 온전히 당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어느 정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게임이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며 보여주는 지독함과 과장을 로즈 역시 똑같이 보여주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폭력의 피해자 역할에 마음껏 몰입한다그로써 그녀가 불러일으키는혹은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하는 감정은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진저리치며 보여줄 경멸이다.(p. 38)


  작가가 로즈에게 배우란 직업을 준 것도 이와 연결되지 않을까 한다. 배우란 수동성과 능동성이 하나의 절충을 이루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그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그들의 구미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배우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도 뛰어난 연기를 통해 공감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대중의 생각과 취향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서해안 지역 사람들 모두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연약이었다그들은 오늘  연약해진 느낌이 든다거나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니에요로즈는 말했다 내가 오래된 말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분명하게 느껴져요초원의 바람과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고 거칠어졌다그녀는 말가죽이란 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주름진 갈색 목덜미를 찰싹 쳤다벌써부터 그녀는  연기하게  인물의 말투와 버릇을 조금씩 따르기 시작했다.(p. 311)

 소설은 로즈가 배우로 꽤 많은 유명세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렇게 연약한 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말가죽처럼 질기고 강한 면모를 보였어도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휘둘리지 않는 것. 내가 아무리 자의대로 할 수 없는 협소한 상황에 있더라도 마냥 수동적으로 끌려가기 보다 비록 조금이나마 내 주체성을 발휘해 보려 노력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과 이를 위한 모든 시도가 설령 바라는 것만큼 빨리 보상을 받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분명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주리라고 낙관하는 것도 그리 힘들 것 같지 않다.

 소설은 처음 로즈의 삶을 거울처럼 충실히 비춰 보여주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느새 그 거울 앞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삶의 의미를 채우기 위해 로즈가 취했던 방법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고 그로 인해 가졌던 패배와 아픔의 기억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채우고 있으며 만일 지금 내가 비루함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건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행여 나 또한 무분별한 모방 속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세상이란 얼마전에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 유토피아'라고 말했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과 권위에 집착하고 남들의 편견에 별 비판없이 동조하여 무리를 이루어 거기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은 배척하라는 선동과 가짜 뉴스가 날뛰는 판이니 더욱 이 질문을 예사롭지 않게 새기게 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강요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심리와 삶의 정경에 대한 섬세한 재현을 통해 독자를 차분하게 몰입시킨 가운데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는 이 소설은, 소설이 나왔을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이는 오늘날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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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 - 기시미 이치로의 사랑과 망설임의 철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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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책이  기다려지는 작가가 있다기시미 이치로도   하나다.

 그의 '미움받을 용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에 소심하고 서투른 나를 더이상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게 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가운데 보다 용기를 갖고 타인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 주었다. 그런 그 내게 무엇보다 시선을 바꾸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살면서 내가 느낀 피로와 가지게 된 염려와 공포가 사실은 내가 엉뚱한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하여 정말로 바라보아야 할 곳을 주시하도록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의 신작을 늘 기대하게 된다. 이번엔 또 어떤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줄까 하고.


  그러던 차에이번에 나온 그의 책인, ‘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 만났다.

 이번엔 내가 가장 많이 고민하기도 했던 사랑에 대한 것이라 더욱 반가웠는데 책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 또한 한결 같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많이 해서 이젠 너무나  안다고 여기고만 있었던 사랑에 대해 내가 사실은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으며 잘못된 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었다는  정말 깊이 느끼도록 했던 것이다.

 사랑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내게 사랑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 적지 않은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이 쉬웠던 적은   번도 없었다때로는 내가 준만큼 주지 않는 상대를 보며 그걸 느꼈고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없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하는 상대를 보면서도 그걸 느꼈아무리 많은 노력을 하고 세심하게 살펴도 싸움은 있었고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행복하기 위해서 사랑했는데 정작 가장 커다란 불행을 사랑이 가져다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사랑은  질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랑 자체에 대해 생각해  적은 없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내게 당연한 것이었고 오직 사랑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행복에 대해서만 의혹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해  책의 제목인 ‘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 질문은  또한 뇌리에 자주 떠올린 것이었다그러나 무수한 질문만 쌓일 뇌리를 눈부신 빛으로 채우고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대답은 찾지 못했다더러 사랑에 관한 책도 찾아봤지만 어떤   문제와 전혀 무관한 뜬구름만 잡고 있는  같았고  어떤 건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있는 잔재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시미 이치로의 책은 과연 달랐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가늠하게 했고 어떤 사랑을 해야 내가 그토록 바랐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도 깨닫게 했다. 다 읽고 난 뒤의 내 마음은 그야말로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장대비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현학적이거나 복잡한 설명 덕분이 아니다. 나는 그리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현명하지도 않으므로 만일 그랬다면 내 마음은 더 복잡하기만 했을 것이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문장과 차분한 어조로 나 또한 사랑을 하면서 많이 했던 친숙한 질문들을 통해 그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저 손만 잡아 끄는 인도는 아니었다. 그건 주로 사랑의 풍경에서 어디를 봐야할지 가리키고 짚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사랑을 하면서도, 잃어버린 사랑의 아픔과 미련을 곱씹으면서도 미처 응시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는 먼저 사랑이 힘들었던 내게 힘든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나는 사랑이 쉽지 않은 것이 내가 너무 부족한데다 사랑에 서툴러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내가 특별히 못나서도 아니고 한 개인의 문제도 아니라고 말한다. 연애든, 결혼이든, 쉽지 않은 것은 모두 마찬가지인데 그건 우리가 거기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걸 아들러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혼자서 달성할 수 있는 과제와 여럿이 함께 달성해야 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교육을 받아왔지만, 둘이서 수행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배워오지 않았습니다.(p. 26)


 여기서 '둘이서 수행한다는 말'과 '배운다'는 말이 중요하다. 이 책이 사랑에 대해 보여줄 가장 중요한 것들이 이 두 가지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사랑할 때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랑할 때,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만 생각할 때가 많다. 


 이 말을 시작으로 저자는 그간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많은 고정관념들을 바꾸도록 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넌지시 암시하듯이, 사랑은 어디까지나 내가 잘하고 못하고에 달린 지극히 혼자만의 문제라 흔히 생각하지만 실은 둘이 대등하게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작업이며 많은 이들이 결혼을 연애의 골인 지점이라 여기듯이 사랑을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며 어떤 지점에 이르면 완결되는 존재라 치부하고 있지만 그와 다르게 진실로 사랑엔 종착지 같은 것은 없으며 과정 속에서 늘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비로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감정의 영역으로 특별히 배울 필요도 없고 의지를 들여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웬걸, 사랑 역시도 그것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선 늘 의지를 들여야 하며 보다 나은 사랑을 원한다면 계속해서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했던 사랑의 의미와 면모들을 바로 내가 했었던 고민과 주위에서 쉽게 보게 되는 일들을 경유해 친절하게 짚어주니 사랑에 대해 그동안 내가 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1부의 연애와 2부의 결혼에 뒤이어 본격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3부가 참 많이 와닿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분 역시 그간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해와 착각을 많이 불식시켰는데, 무엇보다 사랑을 생각할 때 '사랑받는다'는 수동적인 측면말고 '사랑한다'는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게 그랬다. 우리는 워낙에 자기 중심적이라 타인을 위한다는 사랑을 하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는 내가 사랑받는 것에 더 많이 천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사랑함의 모자람보다 내 사랑받음의 모자람에 서운함이 들 때가 많은 것이다. 기시미 이치로는 무엇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사랑에서 이탈할 것을 권한다.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직시하고 이런저런 핑계나 구실을 대지말며 사랑이 가진 이상(理想)적인 정의대로 행하라고.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분히 고찰해가겠습니다.(...) 또한 설사 이상적인 사랑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이래야 한다는 그 이상을 알고 품고 있으면, 현실의 사랑에 대한 태도 역시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상이야말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준입니다.(p. 125)


 그리하여 그는 세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정신과 의사인 가미야 미에코의 말을 빌려와 사랑의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 '비인칭적인 사랑'이고, 


 비인칭적인 사랑이 개인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어야만 합니다. 개인적인 사랑이란 비인칭적인 사랑을 알고난 뒤에 비로소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내가 유일무이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싫지만 당신은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당신은 유일무이한 당신은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바뀌면 금세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p. 128)


 다른 하나는 마르틴 부버의 개념을 빌려와 사랑하는 상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바라볼 것을 말하는 '해후(邂逅)'이며, 마지막으로 그 관계 속에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에네르게이아(energeia)' 개념을 빌려서 말하는 '지금-여기'에 대한 중시이다.


 살아있다는 것을 에네르게이아로 파악하면 인생의 어디쯤에 있는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항상 완성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경험도 에네르게이아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과 끝이라는 식의 뭔가가 있는 게 아니고 사랑의 어떤 단계나 완전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무시간성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경험에 있어서는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느냐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p. 147)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이나 앞으로 생길 일을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지금 여기'를 둘이서 열심히 살 수 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어져 갈 것입니다.(p. 229)


 이러한 사랑의 보편성과 과정의 중시는 지금까지 내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불안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하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사랑을 하면서 그토록 불안하고 근심했던 것은 대부분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과 사랑의 완성된 형태를 가정하고 어서 빨리 거기에 이르고자 하는 조급함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그만큼 난 상대를 '가지냐 못 가지냐?'라는 식의 소유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었고 함께 한 대부분의 순간들을 도구적인 의미로만 간주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 사랑받는 나 자신을 더 중히 여긴 결과였으며 사랑이 실패로 끝났을 때 나는 언제나 날 버린 상대를 탓했지만 정작 책임을 묻고 제대로 따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 또한 절실히 깨달았다. 불안과 근심이 상대에게서 온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모두 나 스스로 일으킨 먼지구름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난 용기가 없었다.

 기시미 이치로의 '용기'란 다름아닌 관계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p. 33)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남을 모두 대등한 인격으로 존중하며 함께 만들어 나가는 매 순간의 경험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런 관계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다. 이건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해 나를 내려놓는 용기이며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용기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을 확고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파트너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안락하게 만드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 p. 173)


 맞다. 나는 사랑을 할 때 파트너보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안락하게 만드는 것을 더 많이 생각했다. 상대가 그렇게 되어야 사랑이 안정되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더 많이 생각했으니 사랑이 늘 불안과 근심의 존재가 된 것도 당연했다. 이런 식으로 기시미 이치로는 여러 번 사랑을 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않았고 묻지 않았던 사랑의 의미와 진정한 사랑의 태도를 응시하게 하면서 내 모습 또한 직시하게 했다.


 이 책 초반에서 그가 말했던 그대로 내 '라이프스타일'을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들러는 사랑을 '라이프스타일'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p. 49)고 말했단다. 상대가 바뀌어도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는 것은 연애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제 이 말은 내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가 되었다. 사랑의 실패에 대한 내 반응은 언제나 분노와 원망일 뿐, 나를 법정에 새워놓고 찬찬히 살피는 자성(自省)의 단계로는 단 한 번도 나아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지축(地軸)을 옮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자기 중심에서 타자 중심으로. 기시미 이치로의 말마따나 나를 온전히 내던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하다 실패하면 나만 진짜 바보되는 것 아냐?' 하면서 계산하지도 말고


 라이프스타일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이 본심입니다.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으로 대처하면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일입니다. 이를 두려워하여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다, 바꾸고 싶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이 당신의 연애를 불행하게 한다면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용기를 내야만 합니다.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p. 52)


 사랑과 관련하여 내 라이프스타일을 돌이켜보건대, 난 저자의 표현 그대로 '응석받이'였다. 아마도 첫째로 태어나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원하는 걸 쉽게 얻었던 내 '최초의 기억(p. 53)'이 날 그렇게 형성했을 것이다. 


 사랑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엔 이해타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여부로 사랑을 선택하는 일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내게 있어서 유용한 사람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p.117)


 이런 '응석받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기시미 이치로는 거기에 대한 설명 역시 빠뜨리지 않는다. 3부까지가 사랑과 그 방법에 관한 총론적인 부분이라면 4부인 '행복해지기 위해 알아야 할 사랑의 기술'은 각론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불행한 러브스토리를 피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초래하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이다. 먼저 이 부분을 보고 제목만 읽는다면 사랑에 대해 말하는 책에서 흔히 들었던 말로 여기기 싶겠지만 나처럼 3부까지 전개된 기시미 이치로의 인도로 사랑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이라면 여기에 있는 그 어느 말도 쉽사리 흘려 듣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예를 들어 상대에 대한 관심만 봐도 그렇다. 자주 우리는 내가 관심 받는 것만큼 상대에게 관심을 주면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기시미 이치로는 사랑은 절대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설령 원하는만큼 관심 받지 못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상대방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p. 186)'이며 무엇보다 바로 그런 관심이 응석받이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킬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해 역시 그러하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이해하기 보다는 더 많이 이해받길 원한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구구절절 변명부터 나오며 남탓부터 먼저 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모두 나는 상대를 잘 이해하고 있는데 정작 상대는 나만큼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하지만 저자는 상대를 이해한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일단 잘 알 수 없다는 걸 전제하고 더 잘 알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라는 의미로 말이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타자를 내 쪽으로 끌어들이지 말고 먼저 타자 곁으로 가서 있어주기를 권한다. 힘겨루기를 멈추고 이해보다는 찬성부터 해주라는 등, 그 방법을 세세하게 알려주면서...


 물론 앞서도 언급했듯, 이 말들은 그리 새롭지 않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의미를 제대로 새기고 나면 전혀 다르게 들린다. 말이 마음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깃털처럼 가벼워진 것은 그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상투어처럼 남발한 탓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가 허다하게 듣고 보았던 사랑의 조언 또한 그렇지 않을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가르침 없이 암기하듯 무작정 들었고 또한 그 중심이 상대가 아니라 오롯이 내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 나아가 방법이 지니는 의미의 비중을 소홀이 했던 것이다. 달리 보면 같은 말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인다. 4부에 나와 있는 말들이 정녕 그러하다. 제대로 되새기고 조금씩이나마 항상 실천하다보면 그 모든 것이 진정한 사랑에 걸맞는 라이프스타일로 변화시키는 초석이 되어 줄 것이다.


 이만하면 왜 내가 이 책에서 진정 해갈되는 기분을 느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

 여하튼,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해 본 것 같다.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주인공 존 쿠삭처럼 과거의 사랑을 계속 떠올리면서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 사랑이 어쩌다 실패에 이르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가장 근원적인 차원이라 말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 시야 속에서 단 한 번도 소환하지 않았던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심판대에 올려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표현한만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음을. 내 사랑은 그저 나만 위하고 더 많이 가지려 애쓰는 제국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러므로 내 사랑 역시 타자를 식민지로 삼은 제국이 예외없이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러나 이런 진실을 확인했지만 예전처럼 앞으로의 사랑이 더이상 두렵지는 않다. 오히려 더 기대되고 가급적 얼른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사랑의 의미와 방식을 소상하게 알려준 기시미 이치로 덕분이다. 얻은 게 많아서 아무래도 단 한 번의 독서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줄기차게 이 책을 벗하게 될 듯하다. '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란 질문에 대해 당당하게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내 사랑을 위한 든든한 지원군 삼아서. 

 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서 부디 세상에 행복한 사랑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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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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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합리적 의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고진 변호사와 진구 시리즈는 아니다. 스탠드 얼론으로 이번엔 형사 사건 1심을 주관하는 부장판사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현민우.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을 선사했던 아내는 몇 년전 병사하고 지금은 아들 하나와 외로이 살고 있다. 이야기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직장에서의 아침을 보내던 현민우가 책상 위 신문에서 한 뺑소니 사건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 뺑소니 사건에서 희생된 여자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 맡은 형사 재판에서 열 살 어린 남자 친구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던 피고인이었으니까. '젤리 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건은 판결이 쉽지 않았다. 피해자는 먹은 젤리로 목이 막혀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숨졌는데, 시신이 이미 화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순 사고였던 이 사건은 나중에 살인으로 의심 받게 되었는데, 그건 그와 단 둘이 모텔에 들어갔고 그 모텔에서 남자 친구가 젤리에 목이 막혀 의식을 잃었을 때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녀가 남자 친구 앞으로 거액의 생명 보험을 이미 들여놓았고 보험료도 그녀가 납부했으며 생명 보험금 수익자 또한 가족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남자 친구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남자들을 사귀고 그들과 함께 보험금을 흥청망청 써버렸던 것이다. 정황상, 보험금을 노린 살인 사건이란 심증을 굳힌 검찰은 그녀를 살인죄로 법정에 세웠던 것이다. '젤리가 목에 걸려 죽은 게 아니라 그녀가 남자 친구의 숨을 틀어막아 죽였다(p.22~ 23)'고.



 재판은 쉽지 않았다. 확실한 물리학적 증거인 시신이 이미 화장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목격자들의 기억과 정황으로 사건을 판단해야 했다. 현민우는 재판을 하는 동안 피고인 김유선이 살해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판결을 선고하려면 좌우에 있는 배석판사도 여기에 동의해야 한다. 적어도 둘이 합의해야 판결을 선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을 때의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민지욱 판사가 무죄 의견을 내놓는다. 이제 막 판사가 되었으면서도 모두가 다 어려워하는 법원장이 자기가 주관하는 법정에 들어왔을 때, 재판에 방해된다고 바로 내쫓아 버린 패기까지 있어서 내심 뿌듯하게 여기던 그였는데 자신과 완전히 상반되는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나머지 한 사람, 정남희 판사는 심증으로는 살인자라고 생각하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어놔서 합리적 의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이럴 땐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도록 무죄를 선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믿었던 정남희 판사마저 그런 의견을 내놓자 김유선을 살인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현민우는 커다란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절차대로 따라 김유선을 무죄로 풀어 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판단을 밀고 갈 것인가?


 목이 꽉 막혔다. 판사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사람들이 합리로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특정 상황에서 판사가 기대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으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세상 일이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만 착착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판사들은 종종 잊는다. 실수를 하고 바보짓도 하는 게 인간이다. 모두가 기계처럼 움직이고 계산한다면 애당초 이 사건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p. 125)


 아마도 소설 속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시감이 들었을 것이다. 유명했던 어떤 사건과 많이 닮았는데 하며...

 맞다.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바로 2010년에 일어났던, 일명 '산낙지 사망 사건'이다. 피해자와 범인의 성별이 바뀌고 산낙지가 젤리로 바뀌었을 뿐, 소설 속 사건은 실제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 1심과 2심의 판결 역시 다르지 않는데, 이건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겠다. 대법원에서도 판결이 내려졌다. 바로 여기, 2심과 3심의 결론을 가져온 것이 '합리적 의심'이었다. 여기에도 뭔가 덧붙이고 싶지만 역시 스포일러가 될까 봐 그만둔다. 보다 자세한 것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합리적 의심'은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합리', 2부는 '의심'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다. 1부의 이야기는 주인공 현민우가 1심 판결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고 2부의 이야기는 2심의 결과와 제도로써는 세우지 못했던 정의를 현민우 스스로 바로 잡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 도진기 작가가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쓴다는 점을 감안하여 일단 밝혀야 할 게 있다. 이 소설이 진실이 모호한 살인 사건을 전면적으로 다루긴 하지만 온전히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이 소설에 두 발이 있다면 서로 다른 쪽에 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살인 사건이 주가 되는 미스터리요 다른 하나는 주로 현민우의 고백으로 채워지는 현재 사법부란 존재의 실상이다. 특히 후자에 관해선 판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것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사법 현실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그 간극을 보다 메울 수 있는 길에 대한 모색이 담겨 있는 것이다.


 1부와 2부의 제목은 아무래도 그 간극을 염두에 둬야 왜 하필 '합리'와 '의심'이라고 붙였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소설 속 민지욱 판사가 오로지 합리를 기준으로 사건을 판단했다가 인간이 가진 이면을 전혀 보지 못한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여기서 '합리'란 세상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사법부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법리를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에만 매몰되어 거기까지 이르게 된 사람들의 사정이라든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든지, 그런 것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때로 국민 감정과 완전히 반대되는 판결이 내려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 판결을 이 소설의 '합리' 범주에 넣어도 좋을 듯하다.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판결을 비판하는가? 민심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판결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반대에 '의심'이 있다. 의심은 보이는 법리나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거기 깃든 깊은 내막이나 마음 혹은 현실적 상황 같은 것을 더 들여다 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이 사법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간극을 좀 더 줄이고자 하는 몸짓인 것이다. 작가는 그런 마음을 담아 '합리'와 '의심'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법부의 현실과 한계를 솔직히 드러내며 보다 바람직한 길은 어느 것인지 은연 중에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작금에 많은 국민들이 쏟아내는 사법부에 대한 비판에 성실히 답하려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소설의 말을 증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법원도 나름의 노력은 합니다. 근데 그게 갇힌 방 안에서 거울 보는 식이라 한계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뜻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판사들이 세상과 섞여서 인생 경험도 많이 하고 어떨 땐 피해도 당해보고, 뭐 그런 것들이 필요하죠. 근데, 또 판사가 너무 사람과 섞이면 불필요한 오해를 낳고 그 이유만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의를 일으킨 사람과 점심식사 한 번 했다는 이유로 법복을 벗기도 해요. 그래서 더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급니다.(...) 법원이란 곳은 변화를 주도하는 기관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변할 때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다가 뒤처리를 하고서야 자신도 모습을 바꾸죠. 당시만 해도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의식이 강했으니까...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죠. 성범죄 양형이 대폭 올라간 건 결국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판사는 그걸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해요.(p. 217 ~ 219)


 작가는 후기에서 법률가로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고 한다. 법학전서에 나오는 착한 말씀들 말고 이십 년을 법정에서 구르면서 흘러나온 육성을 들려드리기(p. 305)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마음은 소설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의 사법부가 왜 이 모양인지 너무나 궁금하여 그 내부를 꼭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면 '합리적 의심'은 그 목적에 충분히 부합해 줄 것이라 본다. 뭐,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이야기 자체로만 읽어도 괜찮다. 결말에 다소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판사 출신 작가라 그런지 법정 드라마가 아주 현실감 넘치는 데다 재미까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증인'을 비롯하여 이제 우리나라에도 법정물이 제법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만일 거기에 취향이 있으시다면 '합리적 의심'은 단연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아울러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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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 인류를 사로잡은 32가지 이즘, 개정증보판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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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같은 국제 경기에서 한국 팀이 일본 팀에게 지면 괜히 열이 받는다.

 작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선 우리나라에 귀화한 외국인 선수가 메달을 따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보면서 한국인이 메달 땄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에 분명 태극 마크가 있었지만 그냥 외국인이 딴 것만 같았다. 이러는 내가 잘못인 걸 안다. 경기의 승패나 메달을 따고 안 따고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그런 감정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새삼 놀라게 된다. 민족주의가 이토록 내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구나 하고.


 사람의 의식은 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는 사회화를 거친다. 가정에서 또 학교에서 나를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 속의 나의 위치와 처신을 어떻게 헤아리고 실천해야 하는지 교육이란 이름으로 주입받는 것이다. 그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사상이다. 사상은 단순한 말의 집합체나 관념의 더미가 아니다. 우리 현실의 대부분을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형성하고 있다. 그건 내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닌 세상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상은 내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 모두에게 암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을 안다는 건, 나아가 그 궤적을 살펴본다는 건, 그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그건 곧 나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의식이 그런 사상들의 영토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간다.


 너무 익숙하면 그렇게 된다.

 공기나 물이 왜 존재하고 있는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걸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고 불렀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자리 잡아 마치 내 신체처럼 뗄레야 뗄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의 몸이란 곧 그런 사상들의 아비투스다. 그래서 일본 팀에게 한국 팀이 졌을 때처럼 거의 반사신경처럼 감정적 반응이 자동으로 나오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나를 이루고 있는 사상들이 다 바람직한 것일까?'


 미국의 SF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은 '과학 소설의 90%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도 쓰레기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모든 사상이 다 좋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 우리 몸에 아비투스로 자리잡은 사상들 또한 분명 알곡과 쭉정이가 있을 것이다. 사상들을 훑어 본다는 건, 단순히 나를 둘러싼 세계의 기축을 잘 헤아리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그건 동시에 내 내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일이자 어느 것이 좋고 안 좋은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감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상을 살펴보는 일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잘 몰랐던 그러나 확실히 내 생각과 판단, 행동 모두를 어느 정도 제약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내 진짜 초상에 확대경을 바짝 들이미는 일이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1세대 철학 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안광복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그러한 좋은 확대경이 되어주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사상을 모두 32가지로 정리해 담고 있다.

 '32가지'라는 말에 나도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읽기 전에 머리로 내가 아는 사상들을 이리 저리 떠올려 보았는데 맴도는 게 몇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처음을 여는 '공화주의'부터 마지막 '관료주의'까지, 당신이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주의'는 거의 다 나온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어떤 사상이 궁금하든, 여기서 해소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책의 형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사전처럼 죽 나열하지 않고 모두 다섯 개의 범주( '정치', '철학과 예술', '국가',' 경제' 그리고 '사회')로 구분해 그 범주 별로 사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래서 보다 체계적으로 사상들을 헤아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상은 아무래도 작가의 말마따나 속도보다 방향을 중시하는데, 대부분 무언가에 주안점을 두고 그 방향을 설정하기 마련이다. 책에서 구분한 범주는 바로 그런 주안점이 어디있는지 알게 한다. 거기에 맞춰 사상을 헤아리면 그 전모가 좀 더 쉽게 습득될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상은 기존 사상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그러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러하듯 말이다. 범주 별로 헤아리면 사상들의 이러한 관계가 드러나 좀 더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분명 제대로 음미해 볼 기회가 없었기에 막연한 가운데 서로 따로 놀기만 했던 사상들이 이 책으로 이리저리 제 짝과 친구들을 찾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선뜻 이 책을 들추지 못하게 만드는 염려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사상을 다루는 책이니까 어려우면 어쩌지 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너무 괘념치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일단 설명이 정말 쉽고 다양한 인용과 현실 사례들을 들어 이런 책을 처음 접하는 이라 할지라도 부담없이 소화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쉽다고 해서 설렁설렁 말하는구나 하고 넘겨짚으면 안된다.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은 평이하게 한 사상에 대해 숙지해야 할 것을 정확하게 짚어준다는 것이다. 그 명암까지 말이다. 어떤 사상이든 완벽하지 않다. 영화 '1987'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로 변질되어 독재의 기초를 놓았고 죄 없는 이들을 함부로 잡아다 고문까지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커다란 고통에 빠뜨렸다. 자본주의는 또 어떤가? 모든 관계를 상품으로 만들고 오로지 자본만 중시하는 바람에 배금주의를 낳았고 아동을 중노동으로 혹사시키는 비윤리적인 처사 또한 비일비재하게 만들었다.


 사상은 비유하자면, '마징가 Z'와 다를 바 없다.

 나가이 고가 그린 원작만화에서 주인공은 자기 할아버지에게 마징가 Z를 물려받는데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면서 넘겨준다.


 "신이 되어 인류를 구원할 수도, 악마가 돼서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사상도 다르지 않다. 잘 쓰면 사람을 지키지만 못되게 쓰면 남을 해치는 칼인 것이다. 사상이 가지고 있는 그런 어둠을 잘 인지해야만 사람을 이롭게 하는 진정한 사상이 될 수 있다. 덧붙여 그것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나 역시 보다 더 제대로 된 삶을 살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어둠을 헤아리지 못하여 지금도 맹목적인 신념에 차서 국정농단으로 국민에 의해 쫓겨난 이를 위하여 태극기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노인분들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면을 짚어줄 뿐만 아니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의문과 거기와 연관지어 살펴볼만한 책까지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사상을 안다는 게 사유의 종착지가 아니라 사유의 출발이라는 것을 잘 알려준다고 하겠다.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책에 소개된 32가지 사상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독자들이 매의 눈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의 지도를 스스로 그려 나가시길, 나아가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어 나가시길 간절히 바라 본다.(p. 8)


 이는 곧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모색이자 더 새롭고 나은 나의 모색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을 읽는 일은 나무를 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나무를 아무 땅에나 그냥 심지 않는다. 지금 심고자 하는 땅의 토질이 어떤지 구석구석, 면밀하게 살핀다. 나무를 울창한 숲이 되도록 자라나게 하려면 부지런히 더 좋은 토질을 가진 땅을 찾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나무란 바로 '더 나은 미래'다. 토질을 살피는 건, 나라는 지층을 이루고 있는 게 뭔지 아는 일이다. 그 앎을 바탕으로 더 좋은 미래가 자랄 수 있는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것도 어느 한 사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사상을 접하고 능동적인 사유를 통해 거기서 찾아낸 좋은 것을 포용해 나가면서.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바로 그런 일을 도와줄 것이다.


 안주라는 말을 했고, 제목에 '매혹'이란 말이 나와서 그런지 문득 세이렌의 유혹을 받는 오디세우스가 떠오른다.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누구든 듣기만 하면 그 노래에 취해 제정신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그 노래에 이끌려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자기 몸을 묶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매혹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매혹에 안주한다는 건 곧 죽음이란 걸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상 또한 그렇다. 어떤 사상이든 매혹 속에 안주하면 독선과 독재가 되었고 끝내 자신과 다른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안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파시즘이 되어버린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스탈린 체제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안주해선 안된다. 매혹이 멸망으로 이끄는 현혹이 아니라 보다 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기 위해선 나를 매혹시킨 것이 무엇인지 늘 살피고 거기서 어떻게 하면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살려낼 것인지 항상 생각해야 한다. 사상이 진정한 자양이 되는 것은 언제나 부단한 성찰에 있는 것이다. 중세의 어둠을 계몽주의가, 또 그 계몽주의의 어둠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찾아낸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 역시 안주하길 거부하여 키르케의 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오디세우스처럼 길을 떠나야 한다. 과거의 나라는 울타리 밖으로 박차고 나와 보다 더 새로운 나라는 '이타카'를 향하여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출발해야 할 것인지 알려주는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그 쉼 없는 걸음 속에서도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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