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성역 1 - 노아즈 아크, Novel Engine POP
카지오 신지 지음, toi8 그림, 구자용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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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문학상 중엔 '성운상'이라는 게 있다. 한 해 동안 발표된 SF 소설 중에 가장 좋은 작품에다 주는 상이 바로 성운상이다. 1970년에 시작된 것으로 역사도 제법 오래되었다.

이 상을 수상한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으로는  고마츠 사쿄의 '일본 침몰'이나 칸바야시 쵸헤이의  '전투 요정 유키카게',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아리카와 히로의 '도서관 전쟁'등이 있다. 수상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꽤 권위있는 상이라 할 만하다. 갑작스럽게 성운상 얘기를 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성운상 수상작이 우리나라에 최근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카지오 신지의 '원수성역'이다. 수상한 해는 2016년.




 카지오 신지는 1947년 생으로, 1971년에 SF 단편으로 데뷔했으니 경력이 꽤나 오래된 작가다. 91년에 '셀러맨더 섬멸'로 일본 SF 대상까지 수상한 바 있어 꽤 명망 있는 SF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2005년 부터 시작하여 10년 넘게 써왔던 소설이 바로 '원수 성역'이다. 모두 3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그 중 첫 권인 '노아즈 아크'가 이번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다.


 여기서 '노아즈 아크'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뜻한다. 이런 제목이 나오게 된 연유가 있다. 소설에 나오는 지구 역시 성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수는 아니다. 원흉은 태양이다. 태양의 불꽃이 점점 커져 그 화염 속에 지구가 삼켜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라면 지구 전체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안 사회지도자 계층이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지구를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일상을 영위하는 동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재력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노아즈 아크'란 우주선을 만들어 170만 광년 거리에 있는,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진 '에덴'이란 별로 달아날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자신의 죽음마저 위장할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기에 많은 지구인들은 그들이 우주로 떠난 뒤에야 종말의 시계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었던 이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도. 하지만 절망하기는 이르다. 대통령의 딸을 사랑했던 공학도 이안에 의해 우주선 없이도 '에덴'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화  '스타트렉'에서 흔히 보았던 순간 이동 기술. 소설에선 '점프'라 부르는 그 기술은 사람을 그대로 순간 이동시켜 170만 광년 거리에 있는 별로 보낼 수 있다. 어떻게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선 자세히 따지지 말자. 이 소설은 닐 스티븐슨의 '세븐 이브스' 같은 하드 SF가 아니니까.


 그러나 이 '점프'라는 기술은 그리 안전하지 않다. 보내긴 보내지만 어디로 떨어질 지 미리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하늘에 떨어져 추락사할 수 도 있고 바다에 떨어져 익사할 수도 있으며 아예 별에 도착하지 못하고 우주 공간에 내던져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무사히 별에 도착할 확률은 1700분의 1. 그래도 몇몇은 살아남아 '에덴'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마사히로 역시 그 중 하나. 그는 가족 모두와 함께 점프했으나 오직 자신만이 살아서 별에 도착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이 없다. 여기저기 사람을 잡아먹는 기묘한 생물이 많이 사는 그 별에서 생존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계획 없이 점프한 이들에 의해 '에덴' 여기저기에 부락이 만들어진다. 오직 생존만이 지상 목표였기에, 그 생존을 위해 부락민 전부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고 그로 인해 부락을 제외한 모든 바깥 영역을 위험과 적대의 곳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어 때로 점프한 이들이 만든 부락 서로도 상대방을 식인 괴물로 여기는 일도 존재한다. 이처럼 다 다르게 살아가는 그들이었지만 하나만은 같았는데, 그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몰래 우주로 달아나버린 '노아즈 아크'에 대한 분노다. 부락민들의 일치단결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벌어지는 종교 행사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노아즈 아크에 대해 저주를 내린다. 그 원한을 꼭 갚아야 한다면서.


 이제 제목이 왜 '원수 성역'인지 아셨을 것 같다. 그렇게 노아즈 아크를 원수로 알고 분노와 적대를 표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드디어 노아즈 아크가 착륙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장기간 우주 항행에서 주로 가족 없이 홀로 탄 이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을 막기 위해서 인위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켰다. 그건 바로 지구가 이미 종말을 고했으며 전 우주에 인류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헛되이 목숨을 끊지말고 힘을 뭉치자고 말이다. 당연히 그런 믿음으로 에덴에 상륙한 '노아즈 아크'에게 에덴의 거주민들이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보일 리 없다. 결국 점프한 이들과 노아즈 아크는 제목처럼 보기만 하면 이빨부터 드러내는 사이가 된다. 과연 그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권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소개한 줄거리로 '원수 성역'이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뭔지 어쩌면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걸 말이다. 점프민들은 척박한 대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유포하고 '노아즈 아크' 역시 고급 인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적대 관계는 얼른 1950년대에 존재했던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정말로 바로 그것을 SF적 상상력에 인류학을 가미하여 풀어내고 있는 게 '원수 성역'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류학 운운 한 것은 소설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전개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는 하나의 시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아즈 아크'와 '에덴'과 관련된 사건을 다양한 시야로 보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이데올로기 같은 문제도 눈에 들어오지만 종말이 예정된 삶도 끝까지 지속할 의미가 있을까 같은 다소 형이상학적 질문도 문득 생겨난다. 하여, 얼른 생각나는 것은 카멜레온인데 이렇게 다채로운 색깔을 지녔기에 재미도 재미지만 성운상을 탄 게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여하튼 좋은 SF란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얼른 2권을 만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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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
로베르토 아기레사카사, 로버트 핵, 최필원 / 문학세계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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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오래된 팝송 중에 'SUGAR SUGAR'란 노래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노래였죠.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신 분이라면 분명 귀에 익은 멜로디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노래는 69년에 발표된 '아치'란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주제가였죠.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인 '아치'는 사실 '마블'처럼 미국의 만화 출판사입니다. 1939년에 설립되어 역사도 제법 오래되었죠. 물론 지금도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블처럼 슈퍼 히어로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미국의 평범한 십대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이런 아치 출판사의 대표 캐릭터가 바로 '십대 소녀 마녀 사브리나'죠.

 유명 캐릭터답게 이 뮤직 비디오에도 출연하고 있습니다. 키스로 개구리로 변신 시키는 사탕 가게 소녀가 바로 그녀랍니다.

 노래 가사의 '유아 마이 캔디 걸'이 바로 사브리나인 것이죠^^.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게 된 것도  사브리나 때문입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이 사브리나를 어두운 버전을 드라마로 만들어 공개했는데, 그게 시청률 랭킹 1위를 차지할만큼 히트를 쳤거든요.

  물론 오리지널 드라마는 아닙니다.


  엄연히 원작이 있죠. 사실 십대는 호러물의 주 소비층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십대를 주된 소비자로 하는 아치 출판사가 이걸 놓칠 수 없죠. 그래서 호러물을 주로 다루는 아치 호러를 만들었고 아치 코믹스의 유명 캐릭터들의 다크한 버전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뮤직 비디오에서 신나게 기타를 연주하는 이들이 아치 코믹스의 가장 대표 작품인 '아치와 그의 친구들'에 나오는 이들이죠.



  이들은 '리버데일'에 사는데, 원작과는 다르게 아주 어둡고 무시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킨 '리버데일'이란 작품이 아치 호러에서 나왔죠.

  물론 이 작품도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사브리나 역시 아치 호러에서 나온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죠.

  그렇지 않아도 그 원작 만화가 궁금했던 참인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이렇게 우리나라에 번역판이 나와주었네요.




  이 그래픽 노블은 정말로 원작 사브리나를 아는 이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스럽고 달달한 사브리나의 세계가 어쩌면 이렇게나 어둡고 잔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브리나의 연인 하비가 마녀에게 뼈가 다 보일만큼 살을 뜯어 먹혀 죽었을 때는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브리나 아버지의 이야기도 그렇고 사브리나를 아는 이에겐 너무나 친숙한 캐릭터인 힐다와 젤다(저는 감히 '야생의 숨결'로 이제는 더욱 유명해진 닌텐도 게임인 '젤다의 전설'의 그 젤다가 사브리나 고모의 이름에서 따왔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62년이었고 너무나 유명했으니까요.) 고모의 모습 또한 '헉!'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저는 아직 드라마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원작 만화를 보니 하도 충격을 받아서 드라마조차 보기가 두려워지네요. 사실 이 사브리나는 우리가 너무 잘하는 '요술공주 밍키' 같은 마법 소녀물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법 소녀들이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게 바로 이 사브리나의 설정이었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사랑스럽고 달달한 세계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불안과 고독 그리고 공포와 죽음만이 가득한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목은 오싹하다고 되어 있지만 그보다 더 한 표현을 써야했어야 되지 않나 싶네요.

 잔혹한이라든가 참혹한이라고...


 그런 세계를 만들어가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마도 사브리나의 가장 최대의 적이 될 '리리스'란 존재입니다. 리리스란 이름은 외경에 나오는, 이브 전에 있었던 아담의 첫 아내 이름이지요.

 그 이름처럼 리리스도 원래 사브리나의 아버지, 에드워드를 열렬히 사모했는데, 사브리나의 아버지가 자기 대신 사브리나 엄마인 다이애나를 선택하는 바람에 커다란 상처를 받고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에드워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자살자들이 가는 지옥인 게헤나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부활을 통해 가지게 된 엄청난 마법으로 그녀는 나무가 되는 저주를 받은 에드워드를 불태워버리는 등, 자기 상처에 대한 보복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갑니다. 에드워드와 다이애나를 거친 그녀의 복수는 마침내 사브리나에 이르게 되죠. 이런 스토리가 아주 스산하고 무거운 색조의 그림을 통해 펼쳐지니 그저 이게 내가 알던 사브리나 맞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그래픽노블입니다.



  그러나 아주 흥미로웠고, 원작에는 볼 수 없었던 십대 소녀의 불안한 심리를 이야기로 잘 살려내고 있어 좋았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원작이 궁금하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과 전개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색다른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시는 분도 꼭 한 번 만나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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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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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홍규. 그의 글은 처음 읽는다. 잘 마른 손수건이 되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사람.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위로를 건네는 건, 그가 강해서도 마음이 넉넉해서도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대학 시절'이란 글을 읽어보면 잘 알겠지만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으며 우리처럼 연약하다. 그런데도 위안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건, 그 아픔을 자신 역시 겪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에 힘없이 이마를 기대고 다친 마음으로 돌아오는 저녁이 물기 어린 눈에 어떤 풍경을 담아내는지를.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담긴 그의 글은 자신도 힘든 하루를 보냈으면서 그렇기에 자식이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잘 알아 곧 귀가할 자식을 위로하기 위해 집에 환한 등을 켜두고 맛있는 밥을 짓느라 여념이 없는 어머니의 등을 떠오르게 한다. 너무나 지치고 피로한 하루엔 창가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만 봐도 반가울 때가 있다. 요즘 내 상황이 그래서 나도 이 책이 그렇게 다가왔다.




 저녁이라고 하니 독일의 북쪽에 있는 도시, 함부르크에 처음 갔을 때의 저녁이 생각난다. 오후 일곱시 쯤, 거주하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려고 시내 중심 상가를 찾았다. 처음엔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생각했다. 시내 중심 상가의 분위기가 마치 새벽 두 세시 같았던 것이다. 식당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거리 바닥에 여럿 둘러 앉아서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거나 홀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거나 했다. 거리엔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하는 듯했다. 고요와 자유. 다른 도시의 텅 빈 모습은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데 그 곳만은 비었는데도 오히려 더 넉넉해 보였다. 거기에 취해 나조차 거리에 나온 원래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하릴없이 이런저런 거리를 무던히 소요했다. 그러면서 실감했다. 이것이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걸,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우리에겐 저녁이 없다. 저녁은 일상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과 함께 오늘은 어땠나 두런두런 말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저녁이란 말을 들으면 마음 한 켠에 왠지 따스한 그리움부터 스며드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오가는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진심 어린 애정이 영그는 시간이건만, 지금의 우리에겐 타인의 사연을 음미할 저녁의 여유가 한없이 부족하다. 돌아오면 침대 위로 시체처럼 쓰러지기 바쁘게 내일 또 아침 일찍 나가려면 시계 알람을 맞춰놓아야 한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니. 그저 기계를 너무 많이 가동해 고장이라도 날까 봐 잠시 식혀두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저녁. 그런 우리에게 바깥 세계나 타인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깃든 다양한 사연을 헤아린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렇게 세상도, 남도, 나도 빈곤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간다. 소설보다 보고서가 친숙해지고 명료하게 하나의 의미만 갖는 단어를 더 선호하게 된다. 소는 소일뿐, 소의 사연까지 헤아리는 건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빨리 판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우리의 속도를 빼앗기니까. 어느새 이익이 미덕이고 손해는 죄악이라는 걸 금과옥조로 여기게 된 우리들은 더하기만 허용할 뿐, 빼기는 용납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연을 듣고 헤아리는 건 뺄셈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사연을 전하는 일이다. 눈 앞의 소를 넘어, 그 소가 어떻게 오늘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숨은 내력 속으로 인도하는 여정이다. 사전 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밖에 가지지 못하는 단어들을 새롭게 살려내어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많고도 다양한 얼굴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업이다. 함부르크가 전혀 다른 저녁의 낯빛을 보여준 것처럼.


 비밀에 다가가는 과정은 낱말과 더불어 사연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내게 그건 곧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전을 믿어 본 적이 없다. (...)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 매정된 숱한 언어들은 사전이 아닌 삶에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이 아닌 소설에 등재되어야 한다. 소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사전이 된다.(p. 45)


 그렇기에 우리는 차츰 문학을 멀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출판계를 정리한 보도를 보니 사람들이 문학 보다 잡서를 더 많이 봤다고 한다. 특히나 위로를 보내는 에세이를. 내 상처도 제대로 헤아릴 겨를이 없어 어떤 상처가 되었든 일단 된장부터 바르고 보듯 이런 에세이로 응급 처방만 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틈이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문학은 바로 그 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만 보는 눈을 타인도 보라고 이끄는 손이라고. 그러나 그런 문학의 초대는 귀찮고 피곤하다. 문학이 설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문학의 사도를 자임했던 이들조차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하나 둘 떠나간다. 저자 역시 어느덧 환멸의 방문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p. 175)


 왜 이리 굳건한 것일까? 문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문득 보게 되니,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더이상 단순한 산문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4부에 걸쳐 모은 그의 글들이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문학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그 선택의 근원에는 저자의 초등학교 시절, 탈곡기를 돌리다 절단되어 버린 아버지의 집게 손가락이 있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 걸.(p. 79)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건, 그 손가락으로 인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언젠가 들렀던 경주 열암곡에서 본 석불좌상의 형상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 부처는 중생의 떠받듦이 지겨워서 스스로 엎드려버린 것만 같았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 내려가 그들과 더불어 오체투지를 하고 싶은 거였다.(p. 105)


 그도 그렇게 아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거였다. 그걸 매개한, 절단된 집게 손가락은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왔을 때 마주 잡아주었던 것처럼 사람과 사람을 진심으로 연결하는 존재였다. 그게 문학이 되었다. 삶과 삶을 이어주는 존재. 어느 때인가, 인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가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쉬다가 인도 여자 옆에 앉아서 그이와 타밀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말을 주고받으며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 쌓인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저자에게 "저이도 삶이 힘든가보더라"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온전히 겹칠 수 있도록. 서로 맞잡은 손은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의 이데아적 형상이다. 우리는 그걸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에 있는 '기억이 우리를 본다'와 '늙은 농민'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삶의 경험에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포개는 것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이러한 겹침의 순례이다.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며 내 삶의 결만큼 타인의 것 역시 깊고도 다양한 것을 헤아리려 드는 동등의 시선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p. 213~14)


 이는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맞잡고 저마다 간직한 사연을 통해 네 삶을 내 삶처럼 헤아리도록 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문학이라는 수레를 힘겹게 이끈다. 그가 이웃의 은빛미용실 보조미용사를, 술 한 잔 걸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취객을 겉모습이 아니라 살아온 이력의 총체로 읽었듯, 많은 이들도 그리하길 빈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p. 265)


 그러므로 그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외롭다고 칭얼대면 그럴수록 남에게 더 많이 다가가라 말하고 아프다고 호소하면 그렇기에 타인의 아픔을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동안 겹침을 손해로 여겨 온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겨우 골방밖에 가진 게 없는데 그조차 기꺼이 내줄 수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사연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글을 계속 접하다보니 점점 더 설득이 되어갔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그의 삶과 자꾸만 겹치다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던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휘몰아치고 있는 불안, 취미가 되어버린 좌절을 그동안 나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 모든 게 날 너무 유폐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환대하지 않는 사람 역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p. 257)


 그러고 보니 타인의 삶에 허다하게 들어갔던 작가와 달리 난 남의 삶에 제대로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 사촌, 친구와 관련된 기억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잘도 꺼내는데, 나는 부모님에 대한 것조차 끄집어 내는 게 어려웠다. 누구의 말대로 추억이 재산이라면 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결과만 챙기는 삶을 살다보니 삶은 사실 과정의 총체이며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어느새 잊고 말았다. 사연을 중시하는 것은 망각 속에 매몰되기 쉬운 과정들을 건져내어 그 모든 것을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들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토록 빈곤한 삶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보니, 어쩌랴? 이제라도 그의 조언을 마음에 새길 수밖에. 앞으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면 얼른 자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고 저녁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려 한다. 삶과 사람 곳곳에 깃든 사연들을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 헤아려봐야겠다. 내 마음의 빈터가 풍성한 꽃밭으로 되는 날을 꿈꾸며...


 사람을 키우는 비와 바람과 햇살은 무엇일까를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폐허라고만 여겼던 그 공터에 비와 바람과 햇살이 다녀갔듯이 사람의 가슴에 다녀간 것들,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나를 다녀간 모든 이들,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이들이 순식간에 그리워졌다. 언젠가 저 공터는 무참히 갈아엎어져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자리에 얼마나 높은 건물이 들어서든 이 기억은 언제까지고 사람의 빈 가슴은 꽃밭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해야 할 일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p. 2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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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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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에 이사를 했다. 마침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는 시점과 맞물리는 바람에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머물 곳 하나 마련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작별'을 읽으면서 심히 공감하게 된 건 그런 내 사정이 단단히 한 몫했다. 여기엔 본상을 수상한 '작별'에 수상작 후보로 선정되었던 다른 여섯 편의 단편까지 더하여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물론 모두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른 지면으로 발표되었을테지만 어쩐지 내게는 마치 모든 작가가 미리 합의라도 하고 쓴 것 마냥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다들 한 목소리로 최근에 내가 뼈져리게 경험한, 정처할 곳을 찾지못한 이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사로 인해 너무 힘겨운 경험을 한 탓에 그렇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정이야 어쨌든 '작별'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어디에서도 쉽사리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로 나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정주(定住)의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유랑(流浪)이 천명(天命)이었던 원시 시대 때부터 인류 폐부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하필이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가지고 상상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으리라. 유토피아가 영구적으로 머무르고 싶은 곳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듯이, 내 한 몸 오래도록 편안히 뉘일 곳을 가지는 건은 고래(古來)로부터 많은 이들이 품어온 소망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 욕망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보다 오래 머무르고 싶어한다. 비단 그건 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직업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란 그걸 잘 허락하지 않는 게 추세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를 '액체 근대'라고 불렀듯,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우리가 안심하고 엉덩이를 단단히 붙이고 있을만한 견고한 것들은 점점 더 많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의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절반을 넘었고 장사 좀 될라치면 건물주에게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세들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느새 올라버린 집값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발로 밀어버린 새알처럼 우리는 느닷없이 자신의 둥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화 속에 자주 나왔던 장면과 흡사하다. 발판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문득 내려다 보니 어느새 발판은 사라져 있고 남은 건 다만 추락밖에 없었던 장면.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그와 다를까?


 그렇기에, '작별' 소설집의 단편들이 '별안간 찾아온 변화'를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별(한강)'의 주인공은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손(강화길)'의 주인공 역시 불현듯 들려온 '퍽'이란 소리에 일상이 흔들린다. 그녀의 아이 역시 갑자기 사라진다. '희박한 마음(권여선)'에서 곤경을 불러오는 계량기의 소음은 언제 터져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당하는 난처한 상황 또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간이 갑작스레 닥쳐온다. '동네 사람(김혜진)'에서 주인공 일행이 당했던 사고와 곤경 또한 아무런 예고 없이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소돔의 하룻밤(이승우)' 역시 어느 날 문득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나그네로 인해 사유의 다양한 결이 초래된다. '언니(정이현)'에서 인희 언니가 겪었던 부당한 일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의 타격이었으며 'Light from Anywhere(정지돈)'에서 양코와 태순마저 우연히 인간환경계획연구소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 인연은 그들 모두에게 걸었던 기대와 바랐던 미래에 대한 배반을 선사한다.


 모든 소설의 파국 혹은 변화가 이처럼 순간으로 이뤄지는 건, 출근하다가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언감생심인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작별'에 나오는 현수 씨처럼 하루 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것 뿐이다.


 버티는 요령이 있어요,라고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엔 하루에 한 끼씩 맨밥만 먹는다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가족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낮 시간은 줄곧 방에서 보내며 짧은 산책은 이른 새벽에만 한다고 했다.(p. 49)


 피부가 모조리 노출되어 바깥 자극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 그것을 막아줄 껍질을 바라듯, 이토록 내일을 쉽사리 기약할 수 없는,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원빈이 내뱉었던 대사처럼 오늘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에 더욱 정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우리만이 아니다. 세상 또한 그러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라. 다시금 여기저기서 편가르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제 이념의 힘이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인지 지금은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자를 기준으로 '여기 여기 붙어라!'가 횡행하며 무리가 지어지면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처럼 상대방을 혐오하고 적대를 공공연하게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종과 종교 그리고 이주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지고 있다.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결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종종 언급하듯이, 돈과 권력이 바탕이 된 새로운 중세적인 신분제와 종교 근본주의 그리고 인종적 우월성이 다시금 거세게 부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건 사실 근대의 계몽주의 이후 인류가 이성에 힘입어 철폐하거나 와해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을 향한 복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무리를 이루려 하는 이런 거대한 흐름 앞에서 그들과 다른 타자가 된다는 건 이제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 '작별' 단편집에 실린 모든 소설들은 그런 상황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같이 다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자리가 없는 존재들. 직장에서 이렇다할 인간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작별'의 주인공은 물론, 시골로 내려와 안면 없던 마을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손'의 주인공이나, 레즈비언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희박한 마음'의 할머니 데런, 최근 이사를 와 동네 사람들과 새롭게 교제를 시작해야 하는 '동네 사람'의 주인공들'소돔의 하룻밤'에서 소돔에 사는 롯, '언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 중문과에서 유일하게 전문대에서 편입한 인희 언니'Light from Anywhere'에서 변화의 바람을 찾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양코 모두 그렇다. '손'에 나온 말로 표현하자면 '튀기'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존재감은 점점 증식되는 무리 앞에서 아무래도 권여선의 단편 제목 처럼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작별'에서 눈사람이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적으로 그걸 나타내고 있다. 눈 내리는 밤의 눈사람은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다. 거기다 눈사람이 된 주인공의 육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부서져 간다. 한강은 재밌게도 눈사람이 된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다름아닌 모든 인간적인 감정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러니까 사랑, 자상함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감정들 말이다. 주인공은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차츰 부서져간다. 이는 무리 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자는 오직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지우고 사물이 될 때에만 지속이 가능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에 다름아니다. 이건 다만 문학적 연출은 아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자기보다 약한 이를 한낱 사물로 대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작별'의 현수가 당했던,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것도 그렇지만 요즘 여기저기서 흔하게 들려오는 이런저런 갑질 사태야말로 대표적인 '타인의 사물화'가 아니던가. 강화길의 '손' 마지막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주인공은 자신에게 감도는 이물의 내음을 없애려면 몽글몽글한 콩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콩이란 어떤 존재인가? 제삿상에 바치기 위해 걸죽하게 하나가 되도록 끓이고 빻아야 하는 존재다. 이는 곧 독립적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그렇고 그런 사물 중 하나가 되는 걸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손'이란 존재는 무리 중 하나가 되라는 강요에 대한 저항이며 그 무리를 파괴하고 고유한 개체성을 건져내는 존재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 손이 뭔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악귀다, 악귀.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 그 년이 없는 날 귀한 해콩을 삶는 거다."(p. 62)


 '희박한 마음'의 데런 역시 그런 사물화를 당했다. 이 단편에서 데런은 오락가락하는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그건 한 사건의 충격이 가져온 여파다. 먼 과거의 대학생 시절, 디엔과 함께 학생 식당 뒤편에서 담패를 피다 한 복학생이 여자가 담배를 핀다고 역정을 내면서 빨리 끄지 않은 디엔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그 느닷없고 어이없는 공격에 그러나 데런은 디엔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복학생의 손찌검은 데런과 디엔의 인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대로 그건 사물화였다. 그런데 이런 남성에 의한 갑작스런 사물화 공격은 할머니가 된 지금 또 찾아온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조금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칠 수 없는 계량기 소음으로 더욱 웅변된다. 이런 항구적인 흐름 속에서 데런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물이 된 것이다. 데런과 디엔이 서로의 꿈 속에서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존재로 나왔다는 게 이걸 증거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데런이 그 꿈에서 한 선배로부터 디엔이 죽었다는 걸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도 그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배의 요구는 사실 데런과 디엔이 사물이라는 걸 고백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물화'는 '작별'의 눈사람이 그러하듯이 아무 저항 말고 가만히 그대로 있으라는 압박에 다름아니다. 김혜진의 '동네 사람'에서 주인공들이 갓 이사 온 동네에서 한 할머니를 차로 부딪힌 것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에게서 받는 압박이 딱 이렇다. 여기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너'다. '나'는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들과 되도록 갈등을 피하고 두리뭉실하게 섞이는 걸 선호한다. 기꺼이 사물이 되려는 사람인 것이다. 반면 '너'는 독자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디서나 내며 섞이기 보다는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사건을 이용하여 주인공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건 '너' 때문이다. 평소 자신의 개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다녔던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왜 너는 사물로 있지 않느냐는 집단적 타박인 셈이다. 이는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에서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나그네에 대해 소돔 사람들이 몰려와 요구했던 것에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정이현의 '언니'의 인희 언니 역시 동일한 사물화를 당한다. 편입생이라 학교에서 존재 가치가 가장 엷은 그녀를 지도 교수가 그저 번역 기계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사물화는 강자인 무리에게 있어서는 자기 존재 지속의 폭력이요 약자인 타자에게 있어서는 생존 방법이다. 물론 그 생존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닌 그저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이런 사물화를 방치할 수 없다. '작별'이 잘 보여준 것처럼 사물이 된다는 건 죽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역사적으로도 타인을 사물로만 대했던 체제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기도 했지 않은가? 개체를 그저 집단 속 도구적 사물로만 보는 파시즘의 대표적 존재인 나치가 벌였던 유태인 학살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복고주의도 따지고 보면 파시즘의 그늘이 짙게 투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런 비극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사물화에 저항하여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센 움직임이 너무 늦기전에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증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니' 후반에 나오는 인희 언니의 투쟁이다. 그는 교수의 악행에 맞서 1인 침묵 시위를 벌이는데, 아무 말 않고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작별'에서 주인공이 된 눈사람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이렇게 겉모습이 비슷하다 보니 사물이 되었던 '작별'의 그녀와 인간을 증명하는 '언니'의 인희 언니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인희 언니는 사물화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많은 눈치와 반대를 받고 그리 많은 호응을 얻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희 언니는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하여 자신도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벙커였다. 벙커는 세상의 모든 위험에게서 지켜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장 확고한 정주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런데 그런 벙커는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기생하지 않으려는 태도, 귀찮고 힘들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돌파해 나가려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형성된다는 걸, '언니'는 선명하게 그려낸다. 다름아닌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의 능동적인 증명이 한없이 가변적인 현실 속에서 홀로라 더욱 불안한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벙커인 것이다. 정주의 욕망은 발견이 아니라 형성을 통해 성취된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애오라지 자신에게만 기대어 삶을 경작해 나아갈 때,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마지막에서 푸념처럼 나왔던 미래 또한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이렇듯, '작별'이란 단편집은 서로 다른 작가가 서로 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시간에 발표했어도 비슷한 주제라는 하나의 선율로 노래하는 합창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얘기에 무리한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유를 차곡차곡 진전시키는 것이 가능한, 서툴게나마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쇄된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이런 내 말이 믿기지 않더라도 부디 '작별' 한 편만 읽지 말고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을 차례 대로 다 만나보길 원한다. 오늘의 사회란 누구나 손쉽게 눈사람과 같은 타자가 될 수 있다.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코 나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일상의 현실성을 잘 살린 강화길과 김혜진의 단편은 아주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당신 또한 알게 모르게 사물화의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강요 속에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생계가 걸리고, 가족이 걸리고, 미래가 걸린 문제라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감히 문학이 해답을 줄 것이라고 말하진 않으련다. 그러나 자신의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런 저런 화두를 던져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건 고민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고민일수록 순식간에 해답으로 데려가는 엘리베이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건 다만 천천히 하나하나 올라가야 하는 계단 뿐. 그렇게 자신의 기존 생각에 도전해 오는 화두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곰곰이 따져 보면서 사유와 경험의 진폭을 차츰 확장시켜 나갈 때 어느 순간 해답이 도래하리라 생각한다. 단편집 '작별'은 그런 계단이 되어 줄 것이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진정한 미래를 가져다 주는. 이것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쓴 글에 동의한다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믿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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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티드 캔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1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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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 활약한 영국의 추리 소설가 에드거 월리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킹콩의 원안이 되는 극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트위스티드 캔들'은 1905년, '네 명의 의인'을 데뷔한 그가 13년 뒤인, 191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3. 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트위스티드 캔들'은 탐정 역할을 하는 티엑스도 등장하고 밀실 살인 사건이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추리 소설 보다는 피카레스크에 속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무시무시한 악의를 내뿜는 '카라'라는 악당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존 렉스맨이라는 성공한 미스터리 소설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카라의 흉계로 인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차지하고 있다. 알바니아 출신의 카라는 엄청나게 부유한데다 명망있는 귀족이라 누구도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통해 돈도, 명예도 더이상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그가 악당이라고 의심한다. 그가 바로 경시청 최고의 형사, 티엑스다. 소설은 마치 소나타 형식처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두 번째 부분은 카라의 가련한 희생자가 된 렉스맨을 구하기 위한 티엑스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카라와 대결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은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수수께끼의 밀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해명되는 부분이 차지하고 있다. 전개가 고전 범죄 소설의 형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아서 조금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줄리언 시먼스의 작가에 대한 평가 그대로 여러가지 사건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비행기를 이용한 탈출이라는 꽤나 대담한 연출까지 선보이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사건 전개와 탐정과 범인 사이의 선명한 선악 구도에 더하여 빠른 전개로 흡인력 있는 작품을 더 인상 깊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영국에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무구한 렉스맨을 그토록 잔인하게 괴롭힌 카라의 동기가 흥미로운데, 그건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누구나 할 것없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렉스맨과 그 아내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로서는 꽤 이례적인 것으로 이로써 에드거 월리스는 현대에 일어날 범죄는 과거와 꽤 다를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티엑스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이지 불쌍한 눈 먼 맹수가 따로 없군." 티엑스는 답답하다는 듯 맨서스를 쳐다 보았다.

 "자넨 엄청난 범죄들이야말로 물질적인 욕망이나 구체적인 이익을 얻을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저속한 인간들은 말이지, 맨서스. 아내가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우리 영국인이 지니고 있는 민족성이네.(p. 100 ~ 101)


 제목의 '트위스티드 캔들'은 고문도구로 사용되는 양초를 뜻한다. 단순히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해 자행되는 고문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또한 세계 제1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으로 곳곳에서 이기주의로 인해 타인의 삶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약자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껏 유린하는 소위 제국이라 말하는 그 때의 강대국들은 거의 카라나 진배 없었다. 집요하고도 잔인학 악당 카라는 정말로 그런 나라를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로운 이 소설은 나처럼 고전 범죄 소설에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이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 같다. 여성에게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고 꼼짝 못하도록 협박하는 게 고작 키스라니, 사지 절단이 예사로 나오는 현대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겐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는 연출인데, 당시만 해도 엄청난 공격이었고 범죄였던 키스를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과도 같이 그만큼 우리가 타인을 침해하는 정도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도 든다.


  "두려움에 떨고 있군, 그래!" 카라가 홀랜드 양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선 소곤거리며 희롱했다. "이제야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지? 만약 소리를 지르면 다시 키스할 거야, 알겠나?"(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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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2-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정말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제가 잘 모르는 거고 갈수록 사람은 잔인해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소설을 보면 무엇을 얻으려는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자존심 때문이라니... 누구나 자신을 좋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다니, 그런 모습은 사이코패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소시오패스라고 해야 할지...

성탄절이네요 저는 그날이라고 다를 건 없지만... 오늘 하루 평화로우시길 바랍니다


희선

2018-12-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6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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